쓴 뿌리와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

  • 4월 04, 2019

                                   쓴 뿌리 견고한 진에 대한 오역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우리는 간혹 성경적이라는 용어를 성경에 기록된 용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를 성경과 다른 뜻으로 짜맞추는 것을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들과 G12, 두날개와 같은 양육프로그램을 하는 곳에서 쓴 뿌리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신사도운동을 하는 단체에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인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가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1) 쓴 뿌리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두날개와 G12등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므로서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Soul-Tie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되, 성경과 일치한 올바른 해석을 적용하여야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쓴 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2 15-17절인데, 본문을 살펴보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 29:17-19)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3:14,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를 말한다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쨋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 에서의 경우를 인용하므로서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버림으로서 하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이나 혈통유전설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앞세워 내적치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여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주장은 이단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내적치유를 하여주는 곳이 있는데, 과연 그런 비성경적인 주장에 근거를 둔 행위로 치유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성경은 악의 뿌리를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스람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단지 기도를 하기 위한 선교라면 굳이 수백만원을 들여서 현지에 갈 필요없이 한국에서 기도를 하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뜻하며, 땅밟기나 귀신축사로 전도를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단기선교 여행경비를 현지선교사들에게 후원한다면 더 효과적인 선교비로 사용될 수 있다고 현지 전문선교가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더욱이 요즈음 인카운터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2011년 합신과 고신은 이미 신사도운동을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고, 2012년 예장통합 은 극단적신비주의를 도입및 참여금지로 공식규정하였으며,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금이빨 사건, 입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일일이 지적하였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예언에 관한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크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KJV]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carnal, but mighty through God to the pulling down of strong holds;)


[NIV]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 요새라는 뜻이다. ,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더욱이 견고한 진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이 위에 생각나는대로 적은 사람의 행위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물체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오역하여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으며, 쓴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선포기도와 대적기도가 예수 십자가 대속보다 더 권세가 있다는 뜻인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정통신학 자체는 구원이 아니지만, 성경을 요약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어느 신학교수는 정통신학은 구원을 가르치는 손가락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학교의 공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이제는 넘어지고 딩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솔직히 말하자면, 이단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성경을 오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건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서 용납되거나 묵인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파운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던 교단들이 알파운동보다 몇배나 더 위험하고 더 문제가 많은 G12와 두날개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선교단체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앞 다투어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경과 정통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숫적부흥만을 도모하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책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