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적삼위일체와 내재적삼위일체

  • 6월 16, 2016

                                                    경륜적삼위일체와 내재적삼위일체


                                                                                                                                                          이인규


 


모 교단에서 상습적이단옹호자로 제명된 어느 인사가는 필자가 경륜적삼위일체, 내재적삼위일체, 신비적삼위일체를 양태론이라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필자가 삼신론이라고 비난을 하였다. 통합에서 제명된 상습적이단옹호자의 신학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비판할 가치도 없겠지만, 무지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 카페와 몇 개의 신문사에 쓴 많은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컬럼을 그가 읽어보았다면 필자에게 삼신론이라는 무식한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하여서라도 어떻게든지 조작과 매도를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대라도 할 수 없겠지만, 혹시 다른 분들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설명하자면 필자는 경륜적삼위일체, 내재적삼위일체, 계승적삼위일체, 신비적삼위일체가 모두 양태론과 동의어라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단들이 주장하는 이 용어들이 결과적으로 양태론과 같다는 것이다. 양태론자들은 자신들의 신관이 정상적인 삼위일체라고 대외적으로 위장하고 숨긴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같지만, 그 의미는 우리와 전혀 다르다.


경륜적삼위일체는 경세적삼위일체 혹은 사역적삼위일체라고 한다. 이 삼위일체는 초대교회때에 있었던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견해였으나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많은 학자들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기능과 사역적인 축면만을 강조하는 경우는 양태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사벨리우스주의를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부른다. 혹은 문제의 기능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외부관계를 운영하시는 방식을 가르키므로, ‘경륜적삼위일체이라고 부른다.”(문자적으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말)”(윌리스턴 워커의 기독교회사, 101-102)


삼위일체의 경륜적 이해 : 히폴리투스나 터툴리안에게서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경륜적 견해가 발전되어온 것을 발견케 된다. 삼위의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풀어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고, 그보다는 삼위의 하나님이 창조와 구속사역에서 드러나게 되는 방식들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창조사역과 구속사역에서 성자와 성령님은 성부와는 다른 존재로 드러나고 있으나, 그들은 또한 성부의 영원한 본체에 있어서 그와 불가분적으로 일체이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과 같이 하나님의 이성 즉 말씀은 성부와 내재적으로 그리고 불가분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되었다. 터툴리안의 견해에 있어서는 한 하나님이 셋으로 현현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숫자적으로 구별되나, 그래서 그들이 세어질 수는 있다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의 불가분적인 능력의 현현들인 것이다. 그들 사이의 구별이나 배분은 있으나, 분할이나 분리를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 안에 있는 일체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터툴리안은 뿌리와 그 뿌리에서 나온 새싹, 수원과 강물, 그리고 태양과 햇빛 사이의 일체성을 예로 들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이며, 그 실체는 세가지 현현들로 확장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간단히 평가해 본다면, 이러한 방식의 삼위일체 이해에는 애매한 어떤 부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실망하게 될 것이다.(신론, 밀라드, J. 엘릭슨, 142-143)


이 경륜적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구조적이고 고정적인 생각 때문에 삼위를 구원론적인 기능과 사역으로만 이해를 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그나티우스로부터 시작하여 마르셀루스에 이르기까지 서방교회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들의 사고구조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그 한분 안에 세분의 신적 페르소나가 있다. 이 세 페르소나는 각기 맡은 분야가 있다. 아버지는 창조와 그 후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인류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었다. 그 구원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들이 성육신하였다. 그리고 성령은 아들이 수행한 구원을 결실하도록 했다. 이러한 구원의 구조에서 아버지는 절대자로서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아들은 제2의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제3의 위치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협조하여 구원을 완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이와 같은 구원을 위한 구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원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면서 삼위의 사역을 경세적(Economic, Dispensational)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구분해 보았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56)


만약 경륜적삼위일체, 경세적삼위일체를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단일신론적인 개념에서 그대로 수용한다면 하나의 인격이 단지 사역적, 기능적으로만 구분을 하는 것이 되므로 양태론이 될 수 밖에는 없으며, 반면에 하나님이 분리된 세 위격이라는 개념에서 경세적삼위일체를 수용한다면 삼신론적이며 종속적 삼위일체가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성부가 제1의 위치이며 성자가 제2의 위치이고, 성령이 제3의 하나님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경세적삼위일체)는 전체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는 경세론적삼위일체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 그 이유는 경세적삼위일체가 삼신론(Tritheism)과 종속주의(Subordinationism)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하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사실 경세적 측면에서 삼위를 이해한다면 거기에서는 분명한 등급이 있다. 1은 아버지요, 2는 그리스도요, 3이 성령이라고 하는 이해가 부각된다. 이러한 이해는 종속주의 또는 삼신론이라고 하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 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57)


이러한 문제 때문에 경세적삼위일체와 함께 내재적삼위일체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재적삼위일체만을 강조한다면 사변적인 단일신론으로 될 위험성이 있었다.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이 오리겐의 종속설을 피하기 위하여 소위 페리코레시스(상호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삼위의 인격간의 상호교류와 상호구별에 대해서는 아직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즉 이러한 문제들은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으로서 불완전한 이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동건교수의 경세적삼위일체와 내재적삼위일체에 대한 설명(국민일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공허해진다.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행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성경은 모호하게 삼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 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장점이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즉 경세적삼위일체를 존재론에 근거하지 않고 사역과 기능적인 의미를 별도의 개념으로 분리하여 강조하게 되면 양태론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이러한 용어들이 현대에 와서 다시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인 용어로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이러한 용어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에 대해서 양태론적인 오해와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신학자들이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측면이 있으면서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현대 신학자들이 경륜적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려운 점은 있다.


아들은 또한 경세적(Economic). 내재적(Immanent) 자아전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 개념은 초대교회부터 많이 논의되었으며, 어느 하나를 택한다면 그것이 이단적 견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 경세적 삼위일체를 강조하면 양태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말하면 사변적인 단일신론이 될 위험성이 있다. 삼위일론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경세적삼위일체론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두가지 위험성을 피하기 위하여 라너는 전통적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 아들이 자체 안에 경세적측면과 내재적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643)


몰트만은 라너의 삼위일체론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과 너무나 유사한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라너도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군주신론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적 군주신론에 빠진 것과 달리, 라너는 관념론적 군주신론에 빠졌다고 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641)


몰트만은 바르트와 라너의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라고 비판하였지만 라너는 경륜적삼위일체와 내재적삼위일체를 분리하지는 않는다.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만약 경세적삼위일체와 내재적삼위일체를 분리하며 주장하게 되면 양태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초대교회 때부터 현재까지 많은 학자들이 삼위일체를 두가지로 나누어서 논한다. 즉 경세적삼위일체(Economy Trinity)와 내재적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이다. 바르트도 이러한 분류를 따른다. 즉 하나님 자체 안에서의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다. 이 두가지 길을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완전한 자유자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경세적삼위일체만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양태론(Modalism)에 빠지게 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631)


내재적 삼위일체 역시 한 장소나 한 공간에서 삼중적으로 존재하는 삼위로 이해를 한다면 또 다른 양태론으로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다.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침투와 상호관통, 상호교류와 같은 동적인 개념도 수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상호내재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이 전제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명확하지 못하면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교부들도 실제로 양태론적인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는 경세적삼위일체론을 말하면서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대내적, 대자적 측면을 추구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캅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터너의 글에 의하면 그들은 가끔 지나치게 논리적이며, 때로는 아리우스 주의에 가깝다는 비판도 받았다고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1)


경세적삼위일체나 내재적삼위일체가 곧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한가지 측면만을 강조하였을 때에는 양태론적인 비판을 받아왔던 것은 사실이다. 분명히 삼위일체가 정립되기 이전의 그 용어들은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단들이 초대교회의 경륜적삼위일체를 전통적이며 올바른 삼위일체인 것처럼 설명해 왔으며, 물론 현대에 와서 다시 이러한 용어들이 신학자들에 의하여 등장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학자들조차 그 위험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아왔던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이종성박사는 내재적삼위일체에 대해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정리하면서 비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 초대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를 개관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그 내용의 문제점을 간추려 보려고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나타나신 형태로 보아 삼위일체같이 보이나 실지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양태론자와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둘째, 하나님을 삼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한 분만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의 영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사역했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군주신론자들의 주장이다. 셋째, 로고스 또는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것은 종속론자들의 주장이다. 넷째, 아들은 영원한 분이나 성령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아타나시우스 이전의 대다수의 교부들의 견해였다. 이들을 뉴마토마코이 또는 마케도니안주의라고 부른다. 다섯째, 삼위일체 안에 세 개별적인 주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곧 삼신론을 의미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1-261)


특히 양태론자들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들의 주장을 감추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특히 양태론자인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양태론적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경륜적(사역적)으로 하늘로 기도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실 때에, 그 절규의 소리를 내재적(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절규하셨는가? 과연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을 때에, 그것이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내재적과 경륜적 두가지 관점을 나누어 기도하셨단 말인인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


위트니스 리는 내재적인 관점에서 한 장소 안에서의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이 자신의 안에 있는 자신에게 기도하였다고 위트니스 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


왜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모순이 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동시존재하는 삼위가 어떻게 하늘과 땅에 분리되어질 수 있는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이 스스로 다른 주장을 경륜적삼위일체라는 변명을 하고 있다. 즉 그는 위장과 변명을 위한 논리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들으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경륜적과 본질적인 설명을 살펴보자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


그는 본질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결과적으로 한 인격, 한 실체)를 주장하지만, 경륜적(사역적)으로만 셋으로 구별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곧 양태론이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양태론적이란 이유로 신학적 중심에서 밀려나 잊혀진 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빌려와서 정통신학인 것처럼 용어만 사용하는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괴상망칙한 논리로 만들고 말았다. 더욱시 상호내재라는 용어를 또 빌려와 자신들의 주장을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시도는 지방교회의 주장을 스스로 해괴망칙한 모순과 오류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IVP 조직신학 신론(제럴드브레이)에서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경륜적삼위일체에서는 각각의 사역적인 구별은 있지만, 사실상 인격적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의 시대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르는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터툴리안이 설명했다시피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그리스도인의 사람 가운데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며, 현재의 성령의 역사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시작된 사역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졀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어떠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신론, 제럴드브레이, 153)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역시 경륜적삼위일체는 성자의 영원성을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일신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에 다시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아졌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그는 이 용어를 성부에 의해서 피조되었다는 말과 동의어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2세기의 정통 신학 즉 오리겐 이전 시대의 정통신학에 호소했다. 그 신학은 일반적으로 그의 성령을 발출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유형의 신학이 지금은 경륜적삼위일체이라 불린다. 이 신학은 삼위일체가 영원 내에서가 아닌 오직 시간 내에서만을 의미하는 섭리 방식에만 존재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두 여분의 위격은 창조의 시작에만 나타난 것으로 전제되었다. 그리고 그 위격들은 만물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즉 성자가 (그리고 함축적으로 성령도) 만물을 성부에게 돌려드리는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두 위격은 성부 안으로 재흡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륜적삼위일체론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자가 시간 밖에서 태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아리우스가 그랬듯이 그들에게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 주장은 만일 사실이라면 당장에 성자의 신성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와 같은 2세기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자들은 말씀과 성령은 시간 이전에는 성부의 존재 안에 잠재해 있다가 거기서부터 마침내 나타나게 되었다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로 앞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이신 성부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이성(logos)과 성령을 박탈당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이 주장의 불합리성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불합리성은 이 이론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아리우스는 말씀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영원히 잠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피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신론, 제럴드 브레이,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