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6월 16, 201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인규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약속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공로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결과가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21)

최근에 구원론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극단적인 주장이 두가지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첫째는 소위 구원파로 불리는 단체의 구원론으로서 소위 도덕폐기론적인 구원론으로 더 이상 죄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견해이며, 둘째는 행위구원론자의 구원론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두가지 구원론은 서로 극단적이며, 동시에 우리 정통교회에서 반드시 주의하여야만 하는 잘못된 두가지의 이단적인 구원론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가받는 의가 분명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쉬운 듯하면서 설명을 하라고 하면 상당히 어려운 말이 된다.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은 같은 의미일까? 본문에는 두개의 전치사, “에크 에이스가 언급되어 있다.
에크는 대개의 경우 출발(from)을 말하며, “에이스는 도착의 방향(to)을 가리키므로 본문은 믿음에서(from) 믿음으로(to)” 라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과연 출발이 되는 전자의 믿음은 무엇이며, 도착의 방향이 되는 후자의 믿음은 무엇일까?

이 성경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전자와 후자의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조적인 문학적인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은 영원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시종일관이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말은 강조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하지(Hodge) 이러한 표현은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이다라고 해석한다. 또 케제만(E. Ke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며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악에서 악으로’ ( 9:3), ‘죽음에서 죽음으로’(고후 2:16),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등에서 드러난다. 이 어법은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상 앞의 말들과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 같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NIV 영어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by faith from first to last)라고 번역하고 있다.어쨌든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3:9).

그리스도인들은 자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내면적이며 실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이며 신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이스만(A. Deissmann)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법정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석방이 바울의 이신칭의이다라고 말한다.

또 렌스키(R. C. H. Lenski) 그의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하나님의 관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칭의라는 용어가 헬라어로 사용된 것은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디카이오마(의로움, 심판)인데, 그 중에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는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무죄선언을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6-8).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고, 그 죄를 인정치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칭의란 죄가 없기 때문에 무죄선언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선언을 내려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칭의란 죄가 없는 자의 무죄석방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하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를 내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 피해자에게 모든 배상을 해주고 합의를 하여, 내가 석방되어 풀려났다는 것이 바로 무죄선언이다. 즉 죄책이 면제된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죄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이스만은 우리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서 현재적 소유의 의식과 미래의 충분한 소유의 기대 사이에 역동적 긴장을 본다라고 말하였는데, 의롭다는 무죄선언은 현재적이지만, 그 궁극적인 칭의에 대한 판정은 미래의 연장선에 놓여진다는 것이다.
마틴로이드존스는 거듭난 자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의 극단적인 견해를 모두 배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 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절을 읽고 훗날 그의 일기에서 나는 그 때에 나에게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마틴 루터는 무릎으로 성당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통하여서도 죄의식을 버리지 못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여도 아직도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을 통해서도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위 구원파라고 불리는 이단들은 마틴 루터와 마틴 로이드존스, 요한 웨슬레를 인용하며 그들 모두가 구원파와 동일한 깨달음을 느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마틴 루터나 웨슬레, 마틴 로이드존스가 죄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으니, 더이상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으며, 구원파는 극단적으로 치우친 구원론을 주장하며,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인 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올더 스케이트 집회에서 롬 1:17을 들으며 회심을 깨달았던 요한 웨슬레가 과연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남들보다 더욱 강조하던 사람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까? 성경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소위 구원파 교회들은 회개는 하지 않지만 자백은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것인가? 성경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말미암아(through)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by) 구원을 받는다(2:8).

우리는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최종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 자신의 주관적인 단정이 아니라 믿음의 객관적인 확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후 13:5).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지만,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have no part with me)이 결코 아니다( 13:8).

바울은 로마서117절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중복적인 표현으로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록된 바라는 말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구약의 하박국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하박국 구절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17절에 인용되어지며, 3:11과 히 10:38에도 인용되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하다.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바울은 과연 인간의 행함과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을까? 바울은 에베소서 2:8을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바울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와 함께 하였던 성령의 감동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셨던 그 감동이 바울의 영적지각을 통하여 로마서1 17절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레에게 뜨거운 회심과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 이름이 껴안다”(하박크)라는 뜻임이 결코 지나칠 우연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