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00은 무엇을 말하는가?

  • 6월 17, 2016

                                144,000 은 무엇을 말하는가?

 

                                                                                                                평이협 이인규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7:4-8)

과연 144,000 명이 유대인의 열두지파에서 인맞은 자들의 실제숫자일까?

(1) 열두지파란 구약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본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이스라엘의 실제 열두지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열두지파에서 단지파가 빠진다.

둘째, 원래 요셉지파에 무낫세와 에브라임이 포함되는데( 33:17),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요셉과 므낫세가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에브라임은 없다.

셋째, 33에는 시므온지파가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유다지파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19:1-9, 1:3) 그러나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시므온지파와 유다지파가 분리되어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열두지파와도 다르며, 구약의 성경기록과 동일하게 기록된 적이 없는 열두지파 명단이다.

또한 신약시대에서 열두지파는 유명무실하여 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회적이며 총체적이고 기본적인 단위를 의미할 때에 열두지파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라는 단어는 민족적인 단위를 상징한다. 마치 팔도강산이 대한민국전체를 상징하듯이 일종의 관용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12’ 라는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사회에 내재하는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실체를 가르킨다. 즉 민족적으로서 다양한 사회적 단위를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적 결속력이 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요소가 되어 왔던 것이다. 오늘날 ‘12’ 란 의미, 역시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양한 민족적, 사회적, 문화적인 단위를 말한다. 그래서 사도들도 열두명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12라는 숫자를 다시 12로 곱한다는 것은 구약의 열두 민족과 신약의 열두 사도들을 의미하는 어느 누구나라는 보편성을 말하며 또한 그 숫자에 1000이라는 많은 개념의 숫자를 곱한다는 의미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2) 신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영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계시록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와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모두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본문에 있는 이스라엘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6)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28-29)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0-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8)

(3) 만일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 열두지파만이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된다. 그러나 1318절의 666의 표를 받은 짐승의 숫자와 반대되는 개념이 된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가 666이며,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는 144,000 라고 할 때에, 이 숫자는 유대인만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증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들은 자가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그 안에서 너희는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13)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곧 소유를 의미한다. 즉 짐승의 표를 받으면 사단의 소유가 되며,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한다. 즉 유대인만이 하나님을 인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4) 12 X 12 X 1000이라는 해석은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계시록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세 구절(2:14, 7:4, 21:12)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열두지파와 열두사도가 함께 언급되는 구절이 있는데, 2112-17절이다. 이것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숫자에 대한 힌트가 담겨져 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 21:12-17)

21장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성을 사도요한이 환상에서 본 내용이다. 그 성곽의 열두문에 열두지파의 이름이 있다(21:12)는 것은 구약의 구원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곽의 열두기초석에 사도의 이름이 있다(21:14)는 것은 곧 신약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열두지파의 이름과 열두사도의 이름을 사도요한이 상징적으로 비유한 이유는 구약과 신약의 구원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열두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문은 네 방향(동서남북)으로 세 개의 문이 있다는 것이다. 4 X 3 = 12를 말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이라는 것은 구원을 받는 자가 사방에서 들어온다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또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이천(12,000) 스타디온이라는 것이다. 12,000 12 X 1000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주춧돌이 있는 성곽을 척량하니 일백사십사(144) 규빗이라는 것은 144 = 12 X 12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계시록에서 천국,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숫자로 언급한다는 자체가 우리에게 상징적인 멧세지를 주고 있다고 본다.


(5) 74절의 144000 79절의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에 일만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7:4-10)

74절의 144000명과 79절의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는 사도요한이 환상으로 본 다른 두 개의 구별되는 사건을 말할까? 각각 구별되는 두 개의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사도요한은 74절의 환상을 보았고, 이 사건 후에 다시 79절의 환상을 본 것이다.

구약 창세기에서 요셉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두번 꿈을 꾸는 것과 같다고 본다. 이것을 앞의 계시록 21(열두지파의 이름과 열두사도의 이름)과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도요한은 먼저 구약의 관점에서 구원의 상징적인 개념을 보았으며, 그리고 이 일 후에 신약의 관점에서 구원의 상징적인 개념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12-13)

(6) 그렇다면 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계시록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세구절이 나타난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2:1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 7:4)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21:12)

계시록 214절은 버가모교회에 보내는 성령의 멧세지로서, 버가모는 이방신의 제단들이 많던 곳이었다. 즉 이스라엘을 꾀었던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던 것을 니골라당으로 비유한 것이다. 또 앞서 본 것처럼 21:12의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구약의 구원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계시록에서 이스라엘이란 모두 상징적인 비유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7) 또 계시록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세 구절이 나온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3: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21:10)

계시록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던 성을 상징하고 비유하는 것이며, 실제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있던 성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즉 계시록의 예루살렘이라는 지명도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7장의 이스라엘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8) 계시록에는 많은 숫자가 나온다. 특히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타나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촛대등의 그러한 숫자는 누가 보아도 모두 상징적인 숫자이다.

유대인들에게 숫자적인 상징적 개념은 다음과 같다.

1은 나눌 수 없는 숫자, 2는 증인의 숫자, 3은 하늘을 말하는 숫자, 4는 동서남북의 사방 혹은 흙, , , 바람과 같이 땅을 말하기도 한다. 7 3(하늘) 4()를 합한 완전숫자이며, 12 3 4를 곱한 수로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예루살렘의 숫자등 구원의 숫자를 말하며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1000)과 만(10000)은 매우 많은 숫자(천천만만)를 상징한다.

그런데 계시록의 다른 숫자는 상징으로 보면서 오직 144,000는 실제숫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치우친 해석이다.

(9) 흰 옷을 입었다는 구절은 곧 주님의 죄사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7:9)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흰옷을 입었다는 자체가 곧 대속함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또한 족속과 지파가 다르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79절의 족속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휠레이다. 그런데 74절에서 지파라는 단어도 같은 휠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