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철대표의 하나님나라관 비판

  • 6월 16, 2016

                                 손기철 대표의 하나님나라 개념 비판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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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기철 대표의 하나님나라


손기철 대표의 집회에 참석하여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특징적인 점을 두가지 들어 본다면, 첫째 그는 자신의 집회에서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선포한다는 선포를 하고 있으며,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 기적과 이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며 하나님나라에서는 병든 사람이 없다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치유사역을 하나님나라가 임하신 사건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나라가 가깝다고 말한 사건의 배경이 치유사역이나 기적과 표적에 관련된 일이었을까?

일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을 자신이 현재 진행하는 사역과 동일시 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터콥의 최바울은 백투예루살렘이 천국운동이라고 그의 책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천박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모른다고 배타적이며 독단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최바울은 자신이 사역하는 운동의 현재적인 개념만을 지상에서 이루는 하나님나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감각없는 천박한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천국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지 5, 10년 됐어도 아직 천국의 비밀을 모르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 지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대부분 영적 전쟁에 관한 기초 지식도 없는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입니다.”(최바울, 왕의 대로, 21)


손기철 대표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로 임하였다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그의 책을 통하여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곧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마치 하나님나라의 비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손기철 대표에게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의 능력, 즉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말하며, 이러한 내용이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결국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후에 권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시고,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신 것도 바로 기름부으심이 임했기 때문입니다,”(손기철, 기름부으심, 19)


또한 성령세례는 한번만 받는 것인데, 기름부으심도 한번만 받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번 받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성령세례는 물세례와 마찬가지로 한번만 받지만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넓고 강력하게 나타내가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여러번 받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더 큰 기름부으심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의 기름부으심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상16:1-13). 그러나 그 후 두 번째 기름부으심을 받고 유다의 왕이 되었으며(삼하2:1-7), 세 번째 기름부으심을 받고 마침내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그분의 통치를 나타내기 위해 더 큰 기름부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기름부으심, 28-29)


손기철 대표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을 하나님나라의 임하심이라고 주장하며 기름부음으로 시작되었다는 독선적인 해석을 주장한다. 더욱이 하나님나라의 임하심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손기철 대표가 선포하여 시작되는 나라가 아니며, 손기찰 대표의 기름부음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을 주의 보혈로 덮노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선포하노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노라


“ ‘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선포하노라 이것은 내가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마다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기도문입니다. 이런 기도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듣도 보도 못한 기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왕의 기도를 드리는 기본 전제입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성경말씀대로 기도해 왔건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나 자신을 정죄하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무심하게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확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의 비밀을 알려 주시자마자 나는 곧바로 이 선포를 시작했습니다”(왕의 기도, 88)


손기철 대표는 자신의 책에서 여러번 반복하여 언급한 것과 같이, 기존 기독교가 말하는 거듭남과 즉 성령의 내주와 기름부음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름부음은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고, 성령께 소유되는 사건이며 혼과 육을 통치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손기철 대표는 그러한 잘못된 주장을 근거로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가 아닌가는 성령님의 존재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께 소유되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분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신의 행위와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이 그 사람의 신령 안에 내주하시지만 그 사람의 육과 혼을 통치하지 못하고 그의 자아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왕의 기도, 108)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따르느냐 성령의 소욕을 따르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나라가 될 수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의 유무는 성령의 존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소유권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소유하느냐, 성령이 나를 소유하느냐 바로 그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께 붙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성령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의 기도, 109)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했듯이, 손기철 대표의 하나님나라는 이원론적이며 소위 번영신학이라고 하는 기복신앙에 근거를 둔다. 그는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보며, 영과 육의 대결구도로 보며, 모든 세상의 가난, 저주, 불행, 사고, 질병, 범죄를 어두움 세력인 악령의 영향으로 보며, 하나님은 영적축복과 함께 현재 세상에서 삶의 풍성한 축복과 행복을 주시는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신사도운동의 번영신학과 같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침노해 들어와 사탄의 나라가 허물어 지는 것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견본을 이 땅에서 증거해 나가는 일에 그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왕의 기도, 104)


하늘의 축복을 누리고 묶임을 끊는 왕의 기도 개요 :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축복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축복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의 어두움을 제하고 가난을 파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망령된 행동, 우상숭배, 사교적인 행위, 부모에 대한 저주, 잘못된 맹세, 도둑질, 잘못된 사업, 다른 사람에 대한 학대, 비난과 험담,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등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결과로 생겨난 모든 악영향의 고리를 끊으십시오” (왕의 기도, 230)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already but not yet’의 개념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며, 또한 진행적이며 확장적인 개념을 포괄한다. 그러나 손기철 대표가 생각하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참으로 유치하게도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보여주는 견본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 즉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은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이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다. 즉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백성들이 아픈 것도 없어야 하므로, 하나님나라가 임한 이 지상에서도 병고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나 최종적인 완성은 오지 않은 (Already…not yet) 과도기입니다. 이 기간은 표적(헬라어로는 semerion, 영어로는 sign)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견본(sample)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때입니다. 표적의 헬라어 세메이온은 가리키고 지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표적은 영원한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견본과 맛을 이 땅에서 보여주며 가르키는(지향하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표적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는 아픈 것이 없음을,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한 표적을 통해서 자연재해가 그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음을, 그 견본을 이 땅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지요. 마치 모델하우스를 통해 실제 분양받을 아파트가 어떤지 미리 보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왕의 기도, 101-102)


손기철 대표는 Already not yet을 자신의 사역에 맞추어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왕의 기도로 치유가 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이미 임함”(Already)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모두가 치료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not yet)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그는 Already Not yet의 역동적인 개념을 잘못 이해하여 과도기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영생을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샘플 혹은 모델하우스가 된 현재 지상의 과도기에서도 몇 명 정도는 죽지 않고 살거나, 또는 500세 아니, 200세나 300세쯤 사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왕의 기도를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것을 자신의 믿음만 탓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호불호(好不好) 탓만 하지 말고 지금이 구원사의 과도기(already….not yet)임을 직시하는 거시적인 믿음의 안목 또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왕의 기도, 103)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잘못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은데, 그들의 특징은 자신이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의 개념만이 올바른 사상이며 기존 기독교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사역을 자신만이 깨달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기독교의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부족하다고 하거나 부정한다.


그러한 주장과 똑같이, 역시 손기철 대표도 기독교의 가르침은 절반의 복음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완전한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은 다른 이단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결국 자신의 신학적 부재와 성경적인 무지때문에 모르는 것을 오히려 정통신학을 과소평가하고  부정하고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사역과 관련된 어떤 사상이 유일하고 위대한 비밀인 것처럼 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풍성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인즉, 바로 하나님나라가 무엇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대로 살아가기가 불가능해 보인 것이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복음의 반쪽이 바로 하나님나라에 관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전할 것은 단순한 죄사함이 아닌 하나님나라에 관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집회를 시작할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합니다(왕의 기도, 93-94

 

결론적으로 손기철 대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복음은 곧 기름부음으로 나타나는 신령한 초능력이며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을 뜻한다.


아버지는 그 아들 예수에게 아버지의 일을 행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모든 법적 근거와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왕의 기도, 196)


기사와 표적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누려야 하는 특권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질서뿐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것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나라에서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에게는 질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권세와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162)


손기철 대표의 주장은 성경적인 무지와 잘못된 신학적인 주장이다.

성경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직접 파송하신 칠십문도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7)


그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10:20)


다시 말하여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은 것으로 기뻐할 일이 아니며, 그러한 일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더욱 중요한 본질적인 것이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언제나 그 구성원들로 구성된 개인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귀신과 악한 영에 대적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귀신을 쫓아냄으로서 육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6:12)


2. 정통신학적인 하나님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

영어 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

히브리어 말쿠트 야훼”. 알람어 말쿠타 디스마이아”.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실레이아 톤 우리논은 본래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매우 오랫동안 다양하게 체험되어져 전해오고 발전되어진 개념으로 정의된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몇가지의 관점으로 정립되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슈가 되는 몇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실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나라는 영역적인가, 통치적인가? 혹은 영역적이며 또한 동시에 통치적인가?

또한 하나님나라는 미래적인가, 현재적인가? 혹은 미래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인가?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은 하나님나라가 아닌가?

또한 하나님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인가? 혹은 진행적이며 확장되어지는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며 성취되는가?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어떤 한가지의 개념만을 하나님나라라고 국한하여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도래하였으며, 또한 그 분의 재림으로 온전히 성취되며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에, 영역적이며 통치적인 개념을 말할 수도 있고, 또 현재적이며 내면적인 개념을 강조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배제하면 안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4)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11:15)


이러한 개념은 구약에서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내가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 할 것이라.“ (7:13-14)


1) 영역적이고 통치적인 개념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통치의 영역적인 개념을 뜻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지금도 그들은 유대인의 왕국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 되어있다. 예를 들면 가나안의 신은 바알과 아세라였으며(2:11, 3:7), 시돈은 아스다롯을 숭배하였고, 몰록은 암몬의 밀곰 신이었고,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었던 것처럼(왕상 11:5-7), 이스라엘은 여호와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였다. 물론 여호와는 만유의 주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여호와 유일신의 통치적인 개념이었다. 이스라엘의 주변국가와 종족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들과 교제나 혼인을 할 수 없었으며, 땅을 얻기위한 영역적 전쟁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과 동시에 자신의 민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동일시 되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곧 여호와하나님에 대한 죄악으로 인한 심판을 의미하였다. 모세가 아론과 함께 손을 높이 들면 전쟁에서 승리하였듯이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이스라엘과 함께 직접 전쟁에 참여하셨다.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 가서도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가기를 엘리사에게 요청한다(왕하5:17-18) 그것은 하나님나라와 이스라엘의 영토가 동일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으로 본다. 온 세상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장막에 계시는 분이었으며, 나아가서는 그들의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동일시 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남북조가 멸망을 당하고 포로기를 거치며 그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어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점차 지리적 영역이나 정치적 실체만의 개념에서 떠나게 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디아스포라로 흩어졌을 때에, 국한된 영토적인 개념에서부터 내면적이며 통치적인 의미로 간주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은 결코 예전의 영광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갈등과 긴장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의 실체적이며 영역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충성된 개인들의 내면적인 믿음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간주하게 되며, 마지막 때와 연관되어지는 종말적이며 심판적이며 영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진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된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마지막 때 인류를 심판하시는 역사의 정점에서의 새로운 왕국의 출현을 고대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그들의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줌으로서 정치적이며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인물로써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례요한마저도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


그러나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것이며,(11:2) 하나님 나라는 오직 능력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고전4:20) 나라의 본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며,(8:12) 농부에게 맡겨진 포도원은 빼앗김을 당하며(21:33-40) 혼인잔치는 청한 사람들 외의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212:1-1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18:36)


예수님께서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가 도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신약에서 말하는 현재적인 개념과 궁극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가 있어왔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조지. E. 래드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책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H. Dodd)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l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A. 후크마, 기독교문서선교회, 65-66)


웨슬레도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지상과 천상의 두가지 개념을 동시에 말하였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두 개의 술어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하늘에서 누릴 행복한 상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상태로서, 이것은 소유한다기보다 인간심령 속에 있는 하늘의 영광스런 상태이다.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는 복음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백성들의 사회인데, 먼저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이 천국이 특히 지상의 것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천상의) 영광의 상태로도 나타났으나, 보통으로는 둘다 함께 포함한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성광문화사, 345-346)


2) 현재적이며 내면적인 개념

신약에서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개념은 현재적인 개념과 장래적인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하나님나라는 고정적인가? 확장적인가?

하나님나라는 장소적인가? 내면적인가?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만을 국한시켜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였고 그 나라는 진행적이며 확장적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말한 것은 결코 사후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3:2)라고 말하였는데,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으며, 다만 세례요한과 다른 점은 때가 찼고”(1:15)라는 말씀이 추가된 것과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되”(4:17)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라고 말씀하신다.

에프타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미 도착하였다, 임하였다는 뜻이며 (to come before, precede)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곧 이미 그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2-4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였으며, 계속 진행되며 확장되어진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내면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강조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였으며(14:17)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으며, 성도들 안에 있다고 말하였다.(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또한 성도들을 곧 그의 나라와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된다(벧전2:9. 1:6. 5:10)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1:6)


성도들의 회중을 의미하는 교회(에클레시아)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믿음의 영적 세계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영적인 내면세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후에 가는 곳, 역시 하나님 나라이지만, 하나님나라가 곧 사후 장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3) 긍극적이며 미래적인 나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9:1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현실과 달랐다.

하나님나라는 긍극적이며 미래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26:29)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하나님만이 높힘을 받게 될 것이며(2:11) 그 분이 몸소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11:9)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될 것이다.

혹간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을 강조하다가 사후천국이나 궁극적인 미래의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놓치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장소적인 개념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14:12)


주님이 직접 가르쳐 준 기도문은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3:3.5) 또한 믿는 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6:33)

또한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사후 영적인 장소도 천국이라고 말하며,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적이고 궁극적인 장소의 실체라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20-21)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왜 예수님은 일부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 말씀 뒤에는 변화산 사건이 뒤따르게 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 9:1)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 9:27)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택하신 몇몇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변화산에서 보여준 사건은 상상적인 허상이 아니라, 영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일부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미리 보여준 하나님나라는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죽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1-13)


그 나라는 지연되어 왔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어느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갔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 귀인은 예수를 비유한 것이 분명하며, 왜 먼 나라로 비유하였을까? 누가복음 19장에서 귀인이 왕위를 받아갖고 오는 날은 분명히 장래적이며, 그가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그가 떠났던 동일한 장소, 즉 지상이 된다.

악인들은 종말적으로 심판을 통하게 될 것이며, 의인들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의 추수를 거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13:38-43)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13:38-43)


예수님은 지혜로운 서기관에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았음으로 설명하시며(12:34) 분명히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였다.(13:2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때에,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나타난다. 계시록에서의 그 나라는 갑자기 나타나게 되며 완성되어진다. 궁극적으로 인간사회는 심판을 거쳐야 하며, 구원과 멸망, 영생과 영벌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게 되어진다. (20:7-10)


4) Already but not yet

Already but not yet 의 개념은 Already 만을 주장하거나 Not Yet 만을 분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더욱이 손기철 대표의 주장과 같이 시간적으로 중간기간이나 과도기간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현재가 하나님나라의 모델하우스나 샘플이 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두 단어가 말하는 긴장감은 항상 구원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사도바울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도 궁극적인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8:23)


또한 사도요한은 믿는 자가 현재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지만, 한편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죽음에서 살아나게 된다고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4-25)


이미 아직의 개념은 불연속성인 분리적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다. 그 나라는 믿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진 영적인 영역으로서 점점 확장되어지며 진행되어지게 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발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내적이며 영적인 실체로써 점점 그 영역을 넓히게 되어질 것이며 마침내 종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선택적이며 심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짐으로서, 현실적인 세상나라를 모두 포괄하게 될 것이며, 그 나라는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세세토록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이미 임한 나라이며 또한 진행적이며, 그 나라는 영적이기도 하며 실제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현재적이기도 하며 궁극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통치적 영역적이기도 하며,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개념을 갖고 있기도 하며, 그 나라는 실제적이기도 하며 내면적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겨자씨의 성장에 비유되었으며(13:31) 가루서말에 넣어 부풀어지는 누룩에 비유되었는데(13;33) 그것은 예수와 함께 도래하여 진행적이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져 가는 통치적인 개념이 분명하다. 또한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어짐으로서(13:3) 선택적이며, 그 보화를 획득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살 필요가 있는 가치적이다.(13:44)

마침내 종말적인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산상보훈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시민들의 에 대한 개념이다. 하나님나라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나라의 충만한 실현과 성취는 분명히 미래적이며 궁극적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고 성경은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3:3)는 것은 거듭난 사람은 그 시점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적인 개념과 확장적이며 진행적인 개념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나라는 현재 온전히 성취되거나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주기도문에서 보듯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19:28)


(참고서적)

치유기도 (손기철, 2010, 규장)

알고싶어요 성령님 (손기철, 2012, 규장)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손기철, 2009, 규장)

기름부으심(손기철, 2008, 규장)

왕의 기도(손기철, 2008, 규장)

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2007, 규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조오지 엘든 래드, 1992, 성광문화사)

현대종말론연구(밀라드 에릭슨, 1996, 생명의말씀사)

개혁주의 종말론(안토니. A. 후크마, 2006, 기독교문서선교회)

웨슬레조직신학(한영태, 1996, 성광문화사)

벌콥 조직신학(루이스벌콥, 1999, 기독교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