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닉 운동에 대해서 (4)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 6월 17, 2016

메시아닉 운동에 대해서 (4)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평이협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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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 네이버 카페와 기독교포털뉴스에서 자세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또한 평신도들이 혼동하기 쉬은 성경 50”(이인규, 카리스)라는 책에서 세대주의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시야닉과 관련된 세대주의 신학, 특히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와 옛 언약과 세 언약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신약의 교회는 이스라엘 왕국을 위하여 중간에 잠시 삽입된 과정이며, 기독교의 신학은 대체신학에 지나지 않을까?

                    

세대주의의보편적인 교리 특징은 크게 네가지로 보는데, 첫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며(그러나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둘째,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며 옛언약과 새언약의 교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말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 왕국의 회복을 주장한다. 셋째, 세대를 인류의 역사를 일곱으로 분류하여 각 세대별로 하나님의 경륜적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넷째로는 7년 대환란 전 휴거설과 이중재림을 주장하며 그 때와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론적인 시간을 징조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별

세대주의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이며, 이들의 연관성과 지속성은 단절되어진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게 제공했으나 그들이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왕국은 일단 보류 또는 연기되어 종말적으로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은 임시로 다른 세대, 즉 교회 시대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즉 신약교회의 시대는 소위 중대한 삽입이라고 불려지며, 이스라엘과 왕국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인 세대가 되어진다.


이 세대주의의 특징은 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점에서 교회는 7년 대환란 전에 이 세상 밖으로 휴거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은 잠시 보류시켰던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의 계획으로 다시 되돌아 가신다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미래적이며 즉 전천년의 왕국이 된다. 그들에게 신약교회는 중간에 삽입된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으며, 신약교회가 휴거를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것이고, 비로소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종말론은 언제나 이스라엘로 연계되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백투예루살렘이며 다윗의 장막의 회복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세가지 직분(, 선지자, 제사장)에서 특별히 왕적인 직분을 강조하게 된다. 특히 세대주의를 따르는 신사도운동이 예수의 왕권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왕의 군대, 왕의 나라라는 용어를 애용하며 특별히 왕국(Kingdom)이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키이스 인트레이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왕과 만왕의 왕으로 자리를 다시 취하실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국가이기에 지금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의 왕으로서와 왕중왕으로서 권위를 동시에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은 전세계중에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고, 이스라엘 최의 통치자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과 동시에 만왕의 왕이 될 것이다”(그날이 속히 오리라, 키이스 인트레이더, WLI, 176-177)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다시 왕위를 차지할 것이 아니며, 예수님은 현재 영원히 왕노릇을 하시며, 이미 왕위에 앉아 계신다고 말한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2-33)

더욱이 예수님은 요한복음 18:36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이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아닉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단어는 없으며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단어가 오직 한곳에만 나온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1:6-7)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때가 언제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때와 시기는 아버지만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아닉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만이 아신다라고 답변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언젠가 회복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자들과 예수님은 이스라엘나라의 회복이라는 관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된 정치적인 나라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이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8:36)

메시아닉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는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나라의 개념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이며 육적인 개념이 아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9)

   

메시아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첫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기록된 성경말씀을 잘 기억하여야만 한다. 첫언약은 보류된 것이 아니라 폐하여졌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8:6-8)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8:13)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 10:9)                                                     

구약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집에 새 언약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옛 언약이 잠시 보류되었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또다른 언약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이 폐하여진 것이며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 즉 둘째 언약이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일까? 새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말한다.( 26:28, 22:20, 고전 11:25) 즉 예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어진다.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8:11-12)

                  

예수님은 보류되었던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고 동서로부터 온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의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의 비유는 더 이상 천국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대신 다른 손님, 즉 이방인으로 채워지게 된다.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적다. 이러한 성경적인 예는 많으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신약에 와서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재해석 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3:7-9)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모든 혈통과 종족과 관계없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27-29)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그 언약이 지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로 택하신 영적 개념의 백성으로 재적용 되어진다. 즉 이스라엘은 육신의 자녀가 아닌 영적인 자녀로 재조명되어진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6)

              

위의 로마서 96절 본문의 이스라엘이란 단어 중, 전자는 육적이며 혈통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지만, 후자의 이스라엘은 영적이며 신실한 내면적인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참이스라엘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에(1:47),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혈통적거나 육정의 개념이 아니라 내면적인 개념이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1-1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제사장이 되며, 그의 나라가 되고, 소유된 백성이 되어진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였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에클레시아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스라엘 대신에 접붙임을 받은 것이다.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11:17-21)

뿌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나무의 가지인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원가지가 꺾였고,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새로 섰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3:10)

거룩한 성은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믿음으로 자발적인 참여를 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새 예루살렘 성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2)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예수를 좇는 믿음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19:28, 참고: 22:30)

             

진정한 이스라엘의 조건은 표면적이거나 육신적, 혈통적인 할례가 아니며, 내면적인 신령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28-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6-8)

    

세대주의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이방인들의 교회가 세웠으며, 종말적으로 다시 유대인들이 회심을 하므로서 유대인만의 왕국이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6-8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언제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18절부터 나타난다. 성령이 임하면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모든 족속들에게 전파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하신 것이다. 즉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정치적인 메시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인가를 질문한 것이고, 예수님은 항상 답변해 왔던 방식대로, 이스라엘에 국한된 정치적인 회복이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성령의 총체적인 사역시대를 언급하신 것이다.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땅끝을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백투예루살렘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동방을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황당한 견해일 뿐이다. 성경은 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고 예루살렘과 땅끝을 구별하였는가? 마태복음 12 42절 땅끝에서 온 남방의 여왕은 예루살렘에서 왔는가?

세대주의들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성경구절이 또 하나가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5-26)

           

과연 본문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에서 온 이스라엘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뜻할까?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접붙힘이 언급된다. 즉 이방인은 새로운 나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나무에 접붙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는 구절에서 뿌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뜻한다. ‘온 이스라엘은 문자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로 선택된 이스라엘만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한 해석이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기 까지라는 앞부분의 의미에 적합하다.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들이 들어오면 완악하지 않았던 남아있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 뒷 구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 11:30)

           

개역 한글에서는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라고 잘못 해석을 하였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수정하였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대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구원을 받기로 택함을 받은 일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여 온 이스라엘로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완악한 이스라엘의 숫자만큼 이방인들이 대신 채워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앞구절에서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힘을 받는다는 내용과도 연결이 된다. 하나님은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을 부르시기로 하셨고, 또 남은 소수의 유대인들도 부르시기로 하셨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부르시기로 하셨다면, 본문에 기록된 앞부분의 구절과 뒷부분의 구절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 되어질 것이다. 또한 구약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에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한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11-12)

              

그러나 신약에서 아모스 본문은 그 이스라엘 자손만을 별도로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과 모든 이방인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5:15-17)

본문을 인용하여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곧 아이합의 24/7 예배이다. 최근에 신사도운동과 아이합등에서 극단적 세대주의와 이스라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세대주의의 잘못된 비성경적인 해석과 오류는 수없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세대주의와 종말론을 연계한 세대주의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신사도운동의 단체들이며, 그리고 백투예루살렘을 주장하는 인터콥이나 G12, KIBI, 이스라엘 성회라는 단체등이다.

세대주의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숱한 이단들을 만들어왔던 주장이다. 특히 종말론적으로 많은 이단들을 배출하였던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666을 컴퓨터 시스템이나 은행카드, 바코드로 해석하였다가 최근에는 베리칩으로 해석하는 소위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세대주의 사상에서 나타났다.


최근에는 신사도운동 혹은 아이합같은 곳에서 세대주의와 연합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으며 백투예루살렘, 다윗의 왕국, 이스라엘의 회복, 3의 성전 건축등은 그와 같은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24/7 기도의 집을 운영하는 릭 라이딩과  메시아닉과 같은 단체, 특히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은 대표적인 세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물론 지방교회나 구원파계열, 형제교회도 같은 세대주의이지만 그들의 특성으로 볼 때에 신사도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나 베뢰아 계열과 오순절계열, 세대주의 계열은 신사도운동과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현재 일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세대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변질되고 있고,  많은 이단들이 세대주의에서 파생되고 있으며, 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부 극단적인 세대주의들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성경해석과 함께,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므로서 그 위험성이 매우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다. 그 말은 기독교가 유대교로 다시 복귀하여야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야한다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흘리신 피가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새 가죽부대이며, 새 가죽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한다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참고서적

토라의 회복 (김주성, 메시아닉)

백투예루살렘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이필찬, 새물결플러스)

그날이 속히 오리라 (키이스 인트레이더, 두란노)

메시아닉 교회: 언약의 뿌리를 찾아 (로버트 하이들러, WLI)

한 새사람 (루벤 도런, Eastwind)

시온의 크리스찬 군사들 (스테판 사이저, CLC)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 (찰스 C. 라이리)

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A. 후크마, CLC)

현대종말론연구 (밀라드 에릭슨, 생명의말씀사)

시한부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천정웅, 말씀의집)

하나님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조오지엘든래드, 성광문화사)

신약과비평 (조지래드,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종말론 (신복윤, 개혁주의신행협회)

조직신학 종말론 (정서영, 도서출판 진리)

평신도들이 혼동하기 쉬운 성경 50 (이인규, 카리스)

초대교회의 형성 (김명혁, 성광문화사)

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그랜트 제프리,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교회사 (김영재, 이레서원)

기독교회사 (윌리스턴 워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박용규, 충신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