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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 |
기독교와 구원파의 교리 비교
구원파의 구원론과 기독교의 구원론이 어떻게 다른가?
이인규
각종 매스컴에서 구원파에 대한 교리가 보도된 후에 어떤 신문에서는 장로교의 교리가 구원파의 교리와 같다는 글이 있었다. 필자는 장로교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의 내용은 구원파 교리를 전혀 모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권신찬씨의 글을 보자. 그는 분명히 장로교의 구원관에 대해서 구원이 없다고 스스로 구별하고 있다.
“저는 장로교 목사로 시무하는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 육신의 생각으로는 장로교 안에 그대로 있고 싶었습니다. 이 넓은 무대를 발판으로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복음을 깨닫고 나서 교파 안에서 복음을 전하면 굉장히 인기를 끌고 명성을 떨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입으로 아무리 복음을 증거해도 구원받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약 1년 동안 현실교회의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한두 사람쯤 구원받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눈에 보이게 구원받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운반하는 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66쪽)
1)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구원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혹간은 믿음과 깨달음이 같다고 말하는데, 구원파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과 전혀 다르다. 실제로 아래 이요한 구원파의 스크랩은 예정론을 지옥으로 가는 주장이라고 가르치며, 장로교는 구원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두 교리가 동일하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구원파가 말하는 첫 번째 주장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하셨음을 깨달으면 그 순간에 이미 거듭났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깨달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사이비집단을 제외한 일반기독교와 심지어 예수의 대속을 인정하는 이단들도 다 구원이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구원파에서 깨달음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후에 불신자가 되거나 사이비집단에 미혹되었다면 그는 구원을 받는가? 물론 구원파 측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 자체가 스스로 자신이 자기의 구원을 단정하는 자체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즉 그들의 구원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깨닫는 것이 된다. 그 깨달은 날을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날이라고 가르치며, 구원받은 날짜에 대해서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일반 기독교의 구원관과 달리 그들은 그 시간을 “깨달았다“고 표현을 하며 지속적인 믿음과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으로 구원을 단정한 날짜를 거듭난 날이므로 영적인 생일로서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구원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예외사항은 그 날이 오래 되었거나 기억나지 않는 경우일 뿐이다.
2) 깨달음과 믿음의 개념이 다르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견인교리와 구원파가 말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스스로가 단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내주하여 그 개인의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진정으로 거듭난 참신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카톨릭 구교로부터 분열되어 나올 때에 그 슬로건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였다. 다시 말하여 이 세가지를 부정한다면 개신교라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은 (1) 지적 요소(지식, 지) (2) 감정적 요소(찬동, 정) (3) 의지적 요소(신뢰, 의)가 있으며, 연약한 믿음도 있고 장성한 믿음도 있으며 성장하게 된다. 즉 믿음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는 전혀 다르다.
구원파는 “한번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믿음의 경우에는 과거에 한번 믿었다고 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장로교의 견인교리를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현재 진행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과거 한번만 깨달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즉 개혁주의 견인교리는 자의적인 단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예정하신 성도들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구원파가 말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에 위한 구원의 확정과 다르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을 살펴보자.
(안토니오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386쪽)
견인의 개념 : 이 교리의 의미는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모든 예배 참석자나 교회 회중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끝까지 견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는 공적으로 신앙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안정하게 된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참 신자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신앙에서 떠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더군다나 이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구속사 가운데 드러난 은혜 언약 속으로 결합된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도 아니다.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하권, 기독교문사, 312쪽)
성도의 견인의 교리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의 상태로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떨어질 수 없으며 다만 분명히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은성, 462쪽)
성도의 견인이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전되어 그들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일 것이며 또한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감리교의 웨슬레목사는 견인교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웨슬리안은 칼비니즘의 견인교리와 달리 구원의 조건부 취소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측에서 예정된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니며,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웨슬리안은 믿음을 인간의 책임적 측면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신자(信者)의 입장에서 믿음을 잃을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은 행함이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예정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가 믿음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본다. 즉 신자의 개념을 진정으로 거듭난 참 신자로 본다면, 개혁주의 견인론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중생하고, 그리고 성화되어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은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웨슬리는 예정된 자의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웨슬리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8쪽)
다시 말하여 구원파가 주장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주장은 정통 기독교적인 주장이 아니다. 구원파에서 스스로 깨달았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예정 안에 있다는 주장과같기 때문에 자신이 심판주가 되는 것이다. 구원파가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인 증거라고 제시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영원한 속죄제사”가 된다는 구절인데, 영원한 속죄제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독교의 교회도 동일하게 가르치며, 그 성경구절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한번만 깨달으면 영원한 효력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며,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이 단회적인 제사이며 영원한 대속이라는 의미이다
3) 죄가 없는가?
구원파는 거듭나면 모든 죄가 없어졌으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과연 거듭난 자는 모든 죄가 없어졌을까? 만약 우리가 예수의 대속으로 모든 죄가 없어졌고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면 성령이 내주할 필요가 없어진다.
죄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롬5장과 같이 아담의 죄로부터 온 인류에게 사망이 온 것이다.
즉 우리는 죄가 없어져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죄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구원파는 본문을 인용하며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본문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내용인가? 요한일서는 분명히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았을까?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어떤 일반 기독교라도 모두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곳은 이단일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은 죄가 없어졌다는 내용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가 있지만 믿음으로 인하여 정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죄는 죄책과 죄성으로 나누어 진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책을 사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즉 죄가 있지만, 죄책(정죄함)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또 거듭난 사람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죄성, 즉 오염과 부패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1-23)
4) 영에는 죄가 없고 육에는 죄가 있다?
구원파의 3대 패밀리는 박옥수계열(기쁜소식선교회)와 이요한계열(예수교복음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과 유병언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으로 분류된다.
또 구원파에서는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은 이미 죄가 없으며,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권신찬 측은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으로 분류하는데 반하여 이요한 측은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으로 분류하며, 박옥수 측은 아예 “죄가 모두 없어졌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므로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혼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중에 차츰 육적인 생각이 약화되어 가서 나중에는 순전히 육신의 생각을 가지던 마음이 영으로 기울어져 하나님께 대한 주님께 대한 생각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영의 구원을 받고 난 뒤 세상을 향하던 그는 마음이 차츰차츰 힘을 잃어가면서 마음이 주님께 가게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 갑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육신이 들림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직도 세상을 좋아하는 육신의 마음과 욕망이 있다면 아직 자기 혼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혼이 구원받는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굉장히 시달림을 받고나서 나중에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다시 한번 벗어지는 것이 있고서야 영의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23쪽)
인간은 살아서 영과 혼과 몸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전인적인 존재로서 죽으면 비로소 분리된다. 사람은 전인적으로 구원을 받으며, 전인적으로 그 마음에 죄가 있다.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육에는 사탄이 거하며 혼에는 인격이 거한다는 주장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이원론적인 인간론일 뿐이다.
성경은 영도 죄를 지으며 육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며, 전인적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7-18)
마찬가지로 육체만이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구원파는 이미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자백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하는 것으로서,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지어도 좋다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5)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구원파의 홈페이지를 보면, 종교개혁자들도 자신들과 같은 깨달음의 견해를 갖고 있는데 기독교가 후에 그것을 변질시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거듭난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는지, 혹은 죄가 완전히 없는지에 대해서 마틴로이드존스목사와 웨슬레, 루터, 캘빈의 주장을 살펴 보자
–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골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 (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을 전연 느끼지 않으리 만큼 충분히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계속 싸워야 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로 인해 그들은 훈련받는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모든 저술가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유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거기에서부터 욕망이 끊임없이 튀어나와 죄를 짓도록 유혹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캘빈 기독교강요, 3권, 3장. 10)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 죄와 죄 용서
1) 원죄에 대한 스콜라 교의의 그릇됨
2) 우리의 모든 의는 불결하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는 여전히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4) 선을 좇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5)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6) 원죄(죄성)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고 죽어가고 있다.
7)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
(루터신학개요, 한국장로교출판사, 132-136)
구원파의 주장과 달리, 종교개혁자들과 신학자들은 모두 거듭난 사람에게 죄가 있으며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6) 일생에 한번만 회개를 한다?
구원파는 자신들도 반복적인 회개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구원파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하면 되고,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단회적인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회개를 말하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후에…”를 말하는 “메타”와 “마음”을 말하는 “누스”의 합성어로서 변화된 마음을 뜻한다. 즉 방향수정을 뜻한다.
구원파는 회개와 자백을 구별하여 회개는 단회적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구원파가 자백을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죄가 더이상 없다“는 주장과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파는 “죄를 지어도 좋다”라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이러한 주장은 죄와 상관이 없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실제로 도덕폐기론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아래 내용은 각각의 구원파의 홈페이지에 있는 실제 내용이다.
– 회개와 자백 : (1) 회개의 두가지 의미
첫째, 회개의 의미는 죄인이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의 전환을 가르킵니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회개입니다. 두 번째, 회개는 자녀가 아버지에게로 잘못을 고하고 돌이키는 회개, 즉 자백을 말합니다.(예수교복음침례회, 생명의 말씀선교회 홈페이지)
– 당신이 참된 마음으로 자백하면 그는 즉시 용서해 주시며, 비로소 당신은 깨끗함을 얻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백과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혼돈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회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백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한번이고, 자백은 매일매일 생활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사단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중생을 말하고, 자백은 하나님의 아들된, 즉 중생한 자들이 생활의 잘못을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딕욕선교사의 양육편지 중에서)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오해하면 안된다. 요13:1-11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이 나온다. 이미 목욕한 자는 구원 받은 자를 얘기하고, 발씻는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생활 속에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구원받은 후의 생활 속에 짓는 죄에 대한 자백, 부분적인 회개인 것이다.(예수교복음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
–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백을 통해서 해결하면 됩니다. 영원한 속죄는 지옥갈 죄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회개를 통해 단번에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짓는 죄는 그때 그때 자백을 해서 처리하고 다 용서를 받아도 징계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복음침례회, 권신찬)
구원파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하면 되고,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박옥수계열은 여전히 자백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박옥수측의 구원파의 주장을 살펴 보자.
– 우리 선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는 단체들은 많지만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구원의 선이 애매해져 있어서 교회만 나오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만 하면 여전히 마음에 죄가 남아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
– 특히, 몇몇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성경적으로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바른 믿음으로 고집하기에 마음이 말씀 앞에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통 신앙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참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믿음을 참 믿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믿음 중 하나가 바로 ‘비록 죄가 있지만, 예수를 믿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
구원파에서는 일단 자의적인 구원의 단정 이후에 죄를 지으면 병이 걸리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입는 징계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즉 구원이나 영생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일반기독교에서는 회개를 단회적과 반복적인 두가지의 개념으로 사용하며,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도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백이 아니라 돌이킴의 방향수정을 뜻하는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구원 작정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죄를 짓는다고 하여 구원이 취소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피구원자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죄를 짓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화는 구원의 과정이며 동시에 구원의 완성이 된다.
즉 불신으로부터의 믿음의 개념과 함께 성화과정에서의 죄에 대한 회개는 중요하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반복적인 죄의 경우에도 사용되며, 그 때에는 죄에서 돌이키는 반복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성경은 반복적인 죄에 대한 회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4)
일곱 번을 회개하라는 것이 단회적일까? 이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죄에 대한 반복적인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구원파가 주기도문을 부정하는 이유는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이 반복적인 회개와 죄사함에 대한 교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곱 번 죄 지은 자가 일곱 번 반복하여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듯이 주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일생에 한번 회개하라는 구원파의 주장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성경에는 일상적인 죄에서도 “반복적으로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회개는 일생에 한번만 하고 자백만 하면 된다는 구원파의 주장과 다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준 “이렇게 기도하라“는 일상적인 기도문의 예이다.
성경은 죄로부터의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자백이 아니라 회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라고 충고하는 내용)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바울이 음란과 호색함의 범죄를 지은 고린도교인에게 회개하라는 내용)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2:21)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는 것은 다시 닦지 않을 기본원리)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6:1-2)
(일곱교회에게 악함과 범죄로부터 회개하라는 성령님의 말씀)
그리고 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교회에 대한 회개를 예로 든다. 그것은 범죄와 악함으로부터의 회개이다. 즉 일곱교회에게 성령께서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데, 구원파들은 회개를 하지 말고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회개를 하였는데,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눅18:13-14)
7) 구원의 확신
더욱 중요한 점은 구원파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정통교회와 전혀 다르다. 즉 구원파가 말하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구원의 단정”이다. 어떤 일부의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성령이 내주하고 거듭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내가 부분적인 사실과 어떤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은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두꺼운 성경이 왜 필요한가?
올바른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현재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깨달음만 가졌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구원은 나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8) Already but not yet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거듭난 자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제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며 “이미 받은 구원”, “현재 걷고 있는 구원”, “장차 궁극적으로 받을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모두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는 이미 받은 과거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성경구절만을 선택하여 그 구절들만을 강조하여 가르침으로서 불균형적인 구원관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현재적인 시제와 미래적이며 궁극적인 시제의 구원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빌2:1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grow up in your salvation)”(벧전 2:2)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 5:9)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still stands)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