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와 이단들의 비유풀이
이인규
(신천지의 포스터)
예수님의 비유 1 – 4가지 밭에 대한 비유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3-9)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일곱개가 나온다. 이 비유가 신천지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비유풀이의 구절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가르칠 때에 종종 비유법으로 가르쳤다. 비유는 헬라어로 ‘파라볼레’라고 하는데, ‘파라’와 ‘발로’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파라’는 ‘옆에서’라는 뜻이며, ‘발로’는 ‘던지다’라는 뜻으로서, 비유를 문자적으로 말하면 최초의 물건이 있는 ‘옆에 던져놓음’으로서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그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에 대해서 그동안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왔는데, 교회사에서는 소위 영적해석이라고 불리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본문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도출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진 때도 있었다고 한다.
19세기의 ‘윌리허’라는 사람이 성경의 비유에 대해서 “한가지 비유에서 한가지의 멧세지만을 유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므로서 비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윌리허’의 주장은 알레고리적인 풍유해석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그러나 비유를 항상 한가지 비유만으로 해석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해석이 적용된다면 성경은 단순한 도덕적인 비유로 축소가 될 수도 있다. 가장 본질적인 해석방법은 주어진 본문의 문맥과 배경, 그리고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상황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자’(호 스페이론)는 영어성경은 a sower 혹은 a farmer로 번역하였는데 <부정관사 + 대표단수>의 형태로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농부를 가르킨다고 보아야 한다. 학자들은 전도를 하는 기독교인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데 동의한다. 물론 본문과는 달리, 그 다음 구절인 13장37절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예수)가 맞다. 그러나 4가지 밭의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전도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또한 본문은 4가지의 밭을 말하고 있다. (1) 길 가 (2) 흙이 얇은 돌밭 (3) 가시떨기 위 (4) 좋은 땅의 4가지인데 이 4가지 밭은 씨가 뿌려진 4가지 형태를 말하는데,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는 4가지 경우의 사람의 마음 상태를 뜻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이유는 그 씨의 곡식, 즉 결실을 보기 위함이다.
이러한 비유법은 사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 13:18-23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풀어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문이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예수님의 해석이 가장 정답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한다. 마13:3-9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18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직접 풀어주신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18-23)
(1) ‘길 가’는 땅이 굳게 다져져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땅을 말할 것이다. 새가 땅 위에 드러난 그 씨를 먹는 것을 예수님은 마음에 뿌린 것을 악한 자가 와서 빼앗는다고 해석하고 계신다.
(2) ‘흙이 얇은 돌 밭’은 ‘길 가’보다는 약간 좋은 조건으로서 씨가 외부로부터 감추어질 수는 있으므로 새가 곧 먹을 수는 없겠지만, 역시 뿌리를 내리기 매우 어려운 조건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서 곧 넘어지는 자로 해석하셨다.
(3) ‘가시떨기 위’는 ‘가시나무 위’가 아니라 가시나무가 있는 덤불 안의(among thorns) 땅에 떨어진 것을 뜻하며, 땅에 뿌리는 내릴 수 있지만, 옆에서 가시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면 성장에 방해가 되므로 결실이 어렵게 된다. 예수님은 그 비유에 대해서 말씀은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해석하신다.
(4) 좋은 땅에 대해서는 뿌리와 결실이 모두 충분한 조건을 가진 곳으로 해석한다.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해석으로 볼 때에, 씨는 ‘말씀을 뜻하며, 4가지 종류의 밭은 ‘4가지 경우의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신천지는 이 본문의 비유에서는 씨가 말씀이며 밭은 마음 혹은 교회라고 비유풀이를 하는데 일단 본문에서는 그 비유가 틀리지 않는다. 다만 밭에 대해서 ‘마음’은 맞지만 ‘교회’라는 비유는 옳지 못하다. 또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씨가 ‘말씀’이고, 밭은 ‘마음이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4가지의 밭을 교회로 해석한다는 것은 신천지 교회만이 좋은 땅이라는 음흉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씨는 신천지가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된다.
또한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였을 때에는 ‘밭’은 사람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뿌려진 장소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거룩한 수동성’(holy passivity)이라고 부른다. 길가의 땅이나 돌밭이 좋은 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어떤 땅에 뿌려진 씨가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었느냐는 수동적인 결과를 비교하여 추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신 이유는 결과적으로 복음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상태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바꾸어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된다는 능동적인 멧세지가 될 것이며, ‘거룩한 수동성’을 ‘적극적인 능동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질 때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받아들이지도 않고 거절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에서 말씀을 받지만 형식적일 것이다. 또한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욕심에 사로 잡혀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즉 ‘마음이 강퍅한 자’와 ‘형식적인 신앙’과 ‘세상 제물과 욕심이 더 중요한 자’의 세가지가 모두 결실이 없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비유의 본질적인 멧세지는 신앙의 터전이 되는 뿌리 내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성한 믿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결실을 말하고 있다.
즉 본문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나라(천국)의 선택적이며 제한적이며 확장적인 개념을 말씀한 것이다. 특히 어떤 목사는 이것을 헌금의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라고 해석하는데, 이와 같은 황당한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2 –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24-30)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로서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라고 불린다. 본문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국 = 씨 뿌린 사람>으로 본다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씨 뿌린 사람의 상황’ 혹은 ‘씨 뿌린 사람의 사례’를 천국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 본문 역시 예수님이 마 13:36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비유를 해석하여 주신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13:37-40)
‘밭’은 ‘교회’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라 ‘세상’을 뜻한다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여 주셨다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첫번째의 비유와 동일하게 본문의 두 번째 비유에서도 ‘씨’를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밭’을 ‘사람의 마음이나 교회’라고 동일하게 해석한다. 이것은 신천지의 소위 추수꾼들이 다른 교회에 들어와서 포섭 활동을 하는 것을 성경적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한 엉터리 해석이다. 또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구절에서 ‘제 밭’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소유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이 ‘밭’은 ‘교회’라고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며, 그 씨는 교회 안에서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가라지의 씨를 예수님은 악한 자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악한 자의 아들은 교회에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뿌려진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밭’이 ‘세상’이라고 해석하여 주었으므로,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가라지에 대해서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불의와 악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집 주인의 종들이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라고 질문을 한다. 오늘날도 “공의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는데 어떻게 악이 나타났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 아니시며 악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천사가 자유의지로 타락하여 사탄이 되었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범죄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이 처음부터 이원론적으로 함께 존재하였고 대결구도로 양립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탄이 처음부터 함께 존재한 것이 아니며, 후에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결과로 나타났다. 악은 선의 부재(不在)이며 선의 결핍을 말한다.
‘잘 때’라고 하는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라는 의미일 것이다. 원수는 사탄을 뜻하는 것이 당연하며, 곡식이 뿌려져 있는 밭에 가라지의 씨를 덧뿌리고 간 것이다. ‘덧 뿌리고 갔다’는 것은 이미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두 개의 씨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가라지는 몰래 덧뿌려진 것이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에 뿌려진 씨가 알곡(천국의 아들들)과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씨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가라지가 몰래 덧뿌려진 것이다. 신천지와 같은 악한 자의 아들들이 일반교회에 몰래 들어온 것을 뜻한다. 즉 ‘좋은 씨’는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는 심판을 받을 사탄의 자녀들을 말한다. 추수꾼은 천사이며, 추수는 현세가 아니라 종말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하게 신천지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은 세상 끝에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특히 신천지는 구약의 예레미야 31장27절을 인용하면서 처음부터 두 종류의 씨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신들이 ‘사람의 씨’고 기독교는 ‘짐승의 씨’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 해석으로서 구약성경의 본문은 두 종류의 씨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 아니다. 신천지는 성경을 본문의 뜻과 전혀 다르게 짜맞추는 엉터리 해석을 상습적으로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7-28)
본문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의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씨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을 모두 좋은 의미로서 둘 다 번성시켜준다는 뜻이다. 그 씨는 ‘말씀’이 아니라 ‘후손, 자손’을 뜻한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에서 사람(후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짐승(육축)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모두 동일한 축복으로 보는 의미이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동번역] 앞으로 이런 날이 오리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 이전에는 자나깨나 이 백성을 뽑고 부수고 허물고 멸하고 해치기만 하였으나, 그만큼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세우며 심어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현대인의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땅에 사람과 짐승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게 할 날이 올 것이다. 내가 그들을 철저하게 뽑고 파괴하며 허물고 엎어 버리며 멸망시키고 재앙으로 쳤던 것처럼 앞으로는 철저하게 그들을 세우고 심을 것이다.
또한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단어풀이가 아니라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마지막 날의 심판이며, 즉 하나님나라(천국)의 선택성과 제한성을 뜻한다.
(1)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의인과 불의한 자에 대해서 공존하도록 허용하신다.
(2) 하나님은 종말적으로 의인을 구원하시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땅이 아니라 악과 불의가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종말적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가라지는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비슷하여 실제로 이삭이 열리기 전까지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경은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지를 미리 뽑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라도 알곡이 함께 뽑힐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의미는 가라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과 늦게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잘못 뽑히게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권한이라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혹간은 가라지와 알곡을 비유하여 이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단을 비판함으로서 이단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 이단에 빠진 자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이단을 비판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중세 교회사 때와 같이 이단을 죽이고,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심판은 현 세상에서 악을 근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심판은 예수님의 주권이라는 뜻이며, 현세에서 직접적인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즉 본문은 이단도 불의도 범죄도 비판하지 말고 그대로 용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며, 단지 현 세상에서 직접 심판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행동을 제어하는 의미이다. 세상은 의인과 악인이 모두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런 경우가 다른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한 촌에 대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할 것을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눅 9:54-56)
추수는 세상끝에 있으며, 의인은 구원하시고 악인은 멸하시는 방법으로 심판은 제한적이며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 추수꾼은 천사이며, 곳간은 천국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3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1) 겨자씨의 비유 :
본문의 비유도 <천국 = 겨자씨>와 같이 문자적인 등식의 비유를 하면 곤란하며, ‘겨자씨의 사례’ 혹은 ‘겨자씨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대한 세 번째 비유 역시 씨에 대한 비유이다. 본문에서 ‘씨’도 역시 ‘말씀’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는 의미로 비유되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떤 종류의 겨자는 3m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즉 겨자씨의 비유는 씨가 무엇을 비유하였느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씨보다 아주 작은 씨인 것이며, 그것이 매우 크게 성장한다는 하나님나라(천국)의 확장성의 개념으로 비유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용구적인 속담에서 “겨자씨보다 작다”는 의미는 아주 작은 것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특히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서는 성경본문이 주는 멧세지에는 관심이 없고, 씨가 무엇을 뜻하고, 나무가 무엇을 비유하고, 새가 무엇을 비유하며, 가지가 무엇을 비유하느냐는 단어풀이 놀이를 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씨는 말씀으로,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풀이를 하고, 새를 영으로, 가지를 전도자로 비유하여, 결국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에게 영이 모여든다”라는 황당한 결과로 짜맞추려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신앙과 이성, 성경적인 지식을 갖춘 성도에게는 이러한 엉터리 해석을 비판하는 자체까지도 아주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님이 모여든 유대인 군중들에게 한국의 이만희라는 교주에게 모여드는 영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비유를 했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구약성경에서는 크게 자란 나무와 그 나무의 새가 깃든다는 구절이있다. 구약성경은 일차적으로 큰 제국과 그 제국에 모여드는 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을 상징하지만, 종말적으로는 메시야 왕국과 그 왕국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징할 것이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겔 17:23)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하였었느니라” (겔 31:6)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단 4:12)
‘깃들이느니라’라는 단어는 ‘카타스케노오’로서 ‘장막’을 가리키는 단어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다. ‘카타’라는 단어는 ‘아래, 밑’을 뜻하며, ‘스케노오’는 ‘살다, 거주하다’로서 “그 아래에서 산다”는 두 단어의 합성어가 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크고 온전한 장막”(히9:11)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누룩의 비유 :
본문에서 ‘여자’가 누구를 의미하느냐는 선문선답식의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방교회와 같은 곳은 ‘여자’를 음녀와 같은 부정적이고 나쁜 개념으로 해석하고 ‘누룩’을 역시 나쁜 개념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나쁜 의미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특히 신천지는 ‘여자’를 ‘목자’라고 비유하는데 이런 식은 완전한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만약 성경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모두 목자로 비유시켜 해석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다. 또한 신천지에서는 ‘누룩’을 ‘심령을 변화시키는 교훈과 말씀’이라고 비유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라고 말했을 때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훈과 말씀이 없는 자’라는 뜻인가? 신천지의 비유풀이 목적은 이만희가 가루 서말에 말씀을 넣었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조작으로서, 사이비집단에서 교주를 신격화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일 뿐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팽창한다, 확장시킨다”는 개념으로서, 좋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나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옳지 않은 사상이 오염되고 확장하는 것”을 뜻하며, 누가 보아도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것이다. 누룩은 단지 반죽을 크게 팽창시킨다는 이스트, 효소의 개념으로서, 앞에서 기록한 아주 작은 겨자씨에서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비유와 동일한 의미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이 될 것이다.
‘가루 서말’ 역시 큰 의미는 갖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로 비유한 것에 반하여, 가루 서말은 약 20 리터 정도가 되는 일반적인 가정에서 하루에 필요한 빵을 만들 수 있는 가장 많은 량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가족의 하루 세끼 분량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라고 말하므로서,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사례를 예로 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겨자씨와 가루 서말의 누룩의 두 가지로 비유하였을까? 마태복음에서 전자의 겨자씨의 경우에 씨를 뿌린 사람은 “a man”이 되고, 반죽에 누룩을 넣은 여자는 “a woman”으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농사를 짓는 일은 남자의 역할이고, 반죽을 하는 일은 여자라는 관점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두 가지 비유의 평행구조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비유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된다는 관점이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되며, 이 비유는 남자와 여자가 하고 있는 일상적이며 현실적인 사건을 통하여 가능한 많은 청중에게 이해를 시키며 호소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카슨이라고 하는 학자는 이 두가지 비유에 대해서 전자는 외향적으로 성장하는 비유를 말하고, 후자는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비유를 묘사한다고 하였는데, 그 견해가 매우 동감을 준다.
예수님의 비유 4 – 보화, 진주, 그물에 대한 비유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마 13:44-53)
1) 다섯 번째 비유 : 밭에 감추인 보화
그 당시에는 은행과 같은 보관소가 없었으므로 보물이나 재물을 분실이나 약탈에 대비하여 자신만이 알고 있는 땅의 위치에 항아리나 상자 안에 넣어 묻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의 랍비들 율법에는 만약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물을 발견하였을 때에, 그 밭의 주인이 소유자라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그가 보화를 발견했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면 그 보화는 밭주인의 소유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보화를 숨겨두어야 했고, 먼저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소유하여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밭 전체의 가격보다 보화의 가치가 더 크기 때문이다.
신천지는 위와 같은 성경적인 상황과 배경을 전혀 무시하고 ‘숨겨두고’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외부에 성경공부를 알리지 말라고 해석하는데, 웃을 수도 없는 해석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한국의 신천지라는 곳에서 외부로 성경 공부하는 것이 발각될 것에 대비하여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비유하셨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넌센스가 될 것이다. 이런 해석은 사이비집단의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천지는 이 비유에 대해서도 비유풀이 단어놀이를 하고 있는데, ‘보화’를 ‘말씀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즉 ‘보화’는 신천지교회의 ‘이만희’ 혹은 ‘신천지가 가르치는 성경공부’가 되는 셈이다. 신천지 비유풀이에서 ‘밭’은 ‘마음이나 교회’가 되므로, 이것을 단어 비유풀이로 해석하면 “신천지 말씀이나 이만희를 갖기 위하여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신천지 교회를 소유하여야 한다”는 뜻이 되고 만다. 성경의 본래 멧세지를 왜곡시키는 것이 모자라, 이만희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짜맞추기로 해석하는 신천지가 저급한 사이비집단이 되는 이유는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태여 신천지가 아니더라도 이단들과 일부 극소수의 거짓목사들은 이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에, 진리를 찾기 위하여 재물을 팔아서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소유하기 위하여 밭을 소유한 것이며, 보화를 소유한 이후에도 그 밭의 소유는 여전히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본문의 중요한 내용은 “보화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즉 본문은 하나님나라(천국)에 대한 최고의 가치성을 언급한 것이다.
2) 여섯 번째 비유 :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본문의 주인공은 일반 장사가 아니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이었다. 즉 주인공의 목적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좋은 진주를 찾을 수 있는 전문가적인 안목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찾게 된 것이다. 즉 그가 추구하는 전문성과 추구하는 목적을 만나게 된 것이며, 그는 자기의 소유를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샀던 것이다. 본문 역시 중요한 멧세지는 ‘소유를 모두 판 것’이 아니라 ‘극히 값진 진주의 소유’에 있다. 그는 전 재산을 누구에게 준 것이 아니며 그 재산이 모두 소멸된 것도 아니다. 그는 가장 가치있는 진주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본문의 비유도 역시 하나님나라(천국)에 대한 최고의 가치성을 언급하는 비유가 된다.
다섯 번째 비유는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게 된 경우를 뜻하고 여섯 번째 비유는 자신이 계속 좋은 진주를 추구해 왔던 사람이 매우 값진 진주를 찾은 경우가 된다는 점이 다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우연하게 가치있는 것을 만날 수도 있고, 자신이 계속 진리를 추구하다가 마침내 가장 가치있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두가지 경우가 모두 천국의 가치성을 뜻한다.
3) 일곱 번째 비유 :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
그물은 바다에 쳐져 있었으며, 그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잡혀 있었다. 성경은 좋은 것과 못된 것이 모두 잡혀 있었다고 말하며, 어부가 그것을 선별하는 과정을 비유하고 있다. ‘각종’(every kind)이라는 단어에서 ‘종류’(게노스)라는 단어는 원래 “민족, 종족, 자손, 나라”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세상에 쳐 놓은 ‘그물’은 유형적인 지상의 교회를 상징할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는 여러 가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섞여 있으며, 형식적인 믿음과 거짓믿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성경은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성경은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물의 못된 고기와 풀무불에 던져지는 악인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악인은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못된 물고기는 그릇 밖으로 버릴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라는 설명은 못된 물고기가 곧 악인과 동일한 비유로 보아야 한다. 그릇 밖으로 던져지는 고기는 단순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곧 썩게 될 것이다.
특히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구절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뜻하는 표현이 분명하다.
신천지는 여전히 단어풀이를 하는데, ‘바다’를 ‘세상’으로 비유한다는 것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물’을 ‘말씀’이라고 비유하고 ‘어부’를 ‘전도자’라고 비유한다. 신천지의 해석은 자신들의 소위 추수꾼 전도를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처럼 짜맞추는 황당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의 중요한 멧세지는 단어풀이를 하여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전도에 짜맞추는 것이 아니며, 천국의 선별성, 제한성과 함께 최종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구별도 동일한 의미가 될 것이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여덟 번째 비유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고, 혹은 마태복음13장의 결론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문은 결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데,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라는 비유는 상당히 난해하다. 그 의미는 (1) 유대인의 서기관으로서 천국의 제자가 된 경우 (2) 천국에서 서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제자의 경우, 두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유대인의 서기관이라는 율법시대의 직분과 비교를 하기 위하여 복음시대의 제자를 강조하는 의미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옛 것’과 ‘새 것’에 대해서 ‘옛 것’을 구약의 성도, ‘새 것’은 신약의 성도라고 하는 해석도 있으며, 본문에서 ‘옛 것’은 율법을 말하고 ‘새 것’은 복음을 말한다는 견해도 있는데, 대부분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곳간’(데사로우스)은 일반적인 창고의 의미보다는 ‘보물창고, 저장소’의 값비싼 재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뜻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비판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형식화, 외식화, 문자화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천국에 대한 멧세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성취된 것이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보물창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오는 집주인과 같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내면적인 믿음과 은혜로서 옛것과 새것의 구별이 없다. 천국은 자발적이며, 선택적이며, 진행적이며, 확장적이며,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서 마지막날에 선별적이며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성경은 비유가 아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마 13:53)
이 모든 비유는 영어로 these parables이다. 그렇다면 복수명사로 사용된 these 는 무엇일까? 마태복음 13장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비유를 말한다. 신천지나 정명석집단과 같은 이단들은 마 13:34절과 사 34:16등을 인용하여 성경이 모두 비유와 짝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마 13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직접 해석하여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비유가 마 13장의 비유라는 것을 말한다.
신천지와 같이 성경을 비유로 풀이하는 대부분의 이단들은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마 13:34)
즉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만 말씀하셨으므로 성경은 모두 비유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다 비유라는 뜻이 아니며, ‘이 모든 것’(All these things)은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마태복음 13장 34절 본문 앞에서 언급된 4가지의 비유를 말하며, “무리들에게“(to the crowd)라는 구절은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던 유대인들을 뜻한다.
마태복음 13장 34절의 앞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날 모인 유대인 군중들에게 4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4가지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다음 구절로 시작된다.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즉 예수님은 마13장에서 기록된 것과 같이, 그날 모인 유대인들의 군중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마태복음 13장의 내용 전체도 모두 비유라고 말할 수 없다. 마 13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제자들에게 직접 해석하여 풀어주신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직접 비유를 풀어주신 것은 다음 구절로부터 시작된다.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이 풀어주시는 내용도 비유란 말인가? 예수님은 그날 모인 유대인 군중들에게는 4가지의 천국에 대한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자세하게 풀어 주셨으며, 그 풀어주신 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즉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비유가 아닌 것이며, 당연히 모든 예수님의 말씀도 비유가 아니다.
많은 이단들이 성경에 비밀이 비유로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성경을 비유라고 주장하며, 성경이 비밀이 감추어진 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경을 기록된 내용과 달리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교주나 목사만이 유일하게 성경의 비밀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 혹은 그들만이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아울러 기독교에서 그동안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