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호목사(에스라하우스)의 비판 – 오직 믿음이 오류이다?

  • 5월 29, 2015

노우호목사(에스라하우스)의 비판 오직 믿음이 오류이다?

                                                                                                                                        이인규

우리들 즉 목회자들이 잘못된 이유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7년을 했었고 수석이나 차석을 할 정도로 성실하게 공부했지만 신학교에서 성경을 바르게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경연구에 전력투구해 왔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공부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하는데 만 15년이 걸렸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그 동안 배운 것들이 대부분이 다 오류라는 것입니다. 맨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부터 살펴 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바울이 한 말이지만 그 기원이 구약에서 출발했습니다.” (노우호목사가 카페에 올린 글)

노우호목사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대부분 오류라고 주장하였다. 그 말은 곧 노우호목사가 가르치는 것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결론적으로 오류라고 주장을 한다. 참고삼아 큰믿음교회 변승우목사가 노우호목사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1) “알라의 용법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노우호 목사는 오직 믿음을 부정하기 위하여, 위 성경본문애서 사용된 오직을 성경이 잘못 번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고 마르틴 루터가 만들어 낸 말이었다. 이를 한국 교회 복음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루터를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지만 우리 성경에 [오직]이란 말은 실제로 헬라어 원문에서는 [; but, yet, now, then, indeed, and], [알라;but, indeed]라는 단어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는 오직이란 의미는 찾아 볼 수가 없고 그러나 혹은 오히려, 그리고 등으로 번역해야 할 말씀이었다”(노우호목사가 카페에 올린 글)

      

그렇다면 우선 성경에서 사용된 알라의 용법을 찾아보자

그러나 필자가 찾아본 디럭스바이블 헬라어사전은 알라라는 단어는 노우호목사의 주장과 달리 두가지의 뜻이 있는데 (1) 그리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 강조용법이라고 되어있다.

             

필자는 노우호목사보다 헬라어사전을 더 신뢰한다. 헬라어의언어전문가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서 알라라는 단어가 오직이라는 강조용법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아 보았다. 시간이 허락치 않음으로 우선 로마서를 찾아 보았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알라라는 단어가 오직이라는 강조용법으로 사용된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우호목사의 주장은 완전히 엉터리가 된 것이다,

        

2:13, 2:29, 3:27, 4:13, 6:13, 7:13, 8:20, 8:26, 9:7, 9:8, 9:16, 12:2, 12:3, 13:14, 14:17에서 알라라는 단어는 오직으로 번역된 것이다,

     

심지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6:13)에서 다만 알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알라는 강조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영어 단어의 but 그러나 라는 용법외에 강조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오직 믿음에서 오직은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옳다. 이러한 평범한 강조문법을 구태여 부정하면서, 마틴 루터가 틀렸고 번역성경이 틀렸다는 노우호목사는 스스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2) 1:17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에서는 알라가 아니라,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알라의 단어와 비슷한 용법의 단어이며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소위 우위접속사라고 하는데, 먼저 노우호목사의 문제를 살펴보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구절에 대해서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이 같은 의미인가 다른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본문에는 두개의 전치사, “에크 에이스가 언급되어 있다. “에크는 대개의 경우 출발(from)을 말하며, “에이스는 방향(to)을 가르키므로 본문은 믿음에서(으로부터) 믿음으로()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 두 믿음에 대해서 많은 학설과 견해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A. Clarke)

(2)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 (마틴 루터)

(3) 수동적인 믿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능동적인 믿음으로 (캘빈)

(4) 고백하는 믿음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실천적인 순종의 믿음으로 (어거스틴)

(5)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으로 (칼 바르트)

(6)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E. F. Harrison)

(7) 전자와 후자의 믿음의 뜻은 동일하며 강조적인 어법이다. 즉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라는 뜻이다.

               

많은 견해와 학설이 다 일리가 있으며 그 나름대로 논리성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일반적인 정통해석적인 견해는 (7)번의 견해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주석성경을 찾아보면, 톰슨주석성경은 (3)번의 캘빈과 (4)번의 어거스틴의 견해를 유력한 견해로 소개하고 있으며, 아가폐성경주석은 (7)번을 유력한 견해로 소개하고 있다. IVP 성경주석도 바울이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7)번과 같은 강조적인 반복을 한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루터의 견해도 캘빈과 어거스틴과 표현적인 차이는 있지만 그 개념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의 믿음을 초기 단계의 믿음으로 보고 후자의 믿음을 성숙된 믿음으로 보는 해석은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7)번의 견해는 전자와 후자의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조적인 문학적인 기법으로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강조적인 표현기법인 것이다.

     

케제만(E. Ke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며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악에서 악으로’ (9:3), ‘죽음에서 죽음으로’(고후2:16),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3:18)등에서 드러난다. 이 어법은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상 앞의 말들과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공동번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 같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영어 킹제임스에도 “The just”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특히 로마서1:17은 마틴루터뿐 아니라 웨슬레의 회심으로도 유명하다. 다시 말하면 노우호목사는 헬라어 단어 문법을 따지는 자신의 어쭙잖은 개인적인 견해로 종교개혁자들조차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의로운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신칭의가 된다.

다이스만(A. Deissmann)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법정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석방이 바울의 이신칭의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칭의란 죄가 없는 자의 무죄석방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방법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적인 내용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이미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에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로마서 5장이 말하는 것은 아담의 죄가 인류를 대표하여 죄가 된 것처럼 예수의 의가 인류를 대표하여 전가된 것이다

   

3) 하박국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2:4)

      

구약에서 에무나라는 단어를 찾아 믿음이 아니며 충성이라고 해석하는 노우호목사의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에무나 성실, 진실함으로 번역되었고, 다시 말하여 신실함을 믿음이 아니라 충성이라고 해석하는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노우호목사는 그 단어가 믿음으로 번역된 곳이 구약에서 한곳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충성이라고 번역된 곳도 단 한군데에 지나지 않는다(28:20)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faithfull 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단어 자체가 신의, 성실, 신뢰를 뜻하며 the faithfull 이라는 단어는 성실한 신자들이 된다(뉴월드콘사이스).

에무나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디럭스바이블을 찾으면 확고함, 상징적으로 안전, 도덕적으로 신실성, 믿음(신실한, 신실히, 신실성, 신실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다시 말하여 에무나를 믿음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노우호목사의 주장은 오직 믿음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려는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록된 바라는 것은 하박국2:4을 인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사도바울이 하박국을 에무나를 믿음”(피스티스)이라고 헬라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노우호목사의 견해를 따르면 바울도 구약성경 하박국을 질못 번역했다는 결과가 되어진다.

문제는 왜 노오후목사가 오직 믿음을 비판하고 부정하였는가 하는 것인데 이 점이 매우 의심스럽다.

      

노우호목사의 주장을 따르자면, 마틴 루터와 웨슬레도 잘못된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해석을 잘못하였고, 심지어 사도바울도 히브리어 에무나를 믿음으로 잘못 번역하였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또한 모든 번역성경이 잘못 번역하였으며, 그의 주장대로라면 신학대학 교수, 신학자들과 목사들도 다 잘못이라는 결론이 되어진다, 더욱이 개혁주의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다는 노우호목사의 배타적인 주장은 자신을 이단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사도바울이 믿음(피스티스)으로 번역한 것을 신학을 겨우 7년 공부했다는 노우호목사가 번역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신학대학에서 잘못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루터와 웨슬레가 롬1:17을 읽고 회심하여 개신교의 기초를 마련한 것을 신학을 7년 공부했다는 노우호목사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4) 믿음으로 얻는 의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아마 노우호목사의 눈에는 위 성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노우호목사에게는 구원이 오직 믿음이 아니라 충성과 순종의 결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우호목사의 성경에는 소위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히11장의 구약의 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도 찢어지고없을 것이다. 그들의 성경에는 야고보서만이 밑줄을 쳐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야고보서는 특별히 행함과 열매가없는 나태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한다(고전1:30).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말한다면,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펠라기우스적 견해: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도덕적인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2) 가톨릭의 견해: 교회의 성례로 죄를 씻고, 보상적인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3)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의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전가받는다고 한다.

    

노우호목사의 아래 주장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그의 구원관은 성경과 관계없이 오직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가 카톨릭을 지지한다는 이유가 바로 그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한다는 증거이다,

         

개혁 교회가 볼 때 로만 가톨릭은 만국종교 혼합주의요 초대형 이단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개혁교회 성도들보다 훨씬 더 경건하고 정직하고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노우호목사의 주장)

  

게다가 666을 베리칩이라고 하며, 아무 근거도 없이 삼각형의 도형을 사용하는 사람과 단체는 모두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하는 노우호목사의 식견에 참으로 실망스럽고, 에스라하우스를 문제있는 단체나 교류금지로 규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내 딸 방문 앞에도피라밋 삼각형의 도형이 붙어있는데, 우리 딸은 프리메이슨 몇기인지 가르쳐 주기 바란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상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이다. 어떤 표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상징적인 도형을사용한다고 하여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에 단 한마디도 없다.

그들이 중세때에 종교문제에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외국에서 보는 현재의 프리메이슨은 친목단체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에 대한 소설이 수없이 많은데, 거의 현실과 동일한 것처럼 각색되어 있다. 미국의 역대대통령이 모두 프리메이슨이고 우리나라 유명한 목사가 다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노우호목사는 오직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며, 율법적인 행함과 충성을 가르치면서 율법주의를 양산하지 말고더이상 요한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적 세대주의를 가르치지 말고,  하루 빨리 에스라하우스를 문을 닫기를 권고한다. 지금도 에스라하우스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는 제보와 메일이 간혹 오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라고 불러준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다른 복음이며 저주일 뿐이다. 나는 오늘 돼지고기 삽겹살과 비늘없는 오징어를 먹었다. 나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잃는가?

미국에서는 치매가 있는 노인에게 베리칩을 주입하여 그 행적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 노인이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도 베리칩을 받았으므로 구원을 잃는가? 매우 비싼 애완견에도 베리칩을 주입한다고 하는데 그 애완견도 지옥에 가는가?

그가 가르치는 결론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이 아니고 오직 충성이니 노우호목사의 말을 충성하고 따르며 베리칩을 받지 말아야만 천국간다는 것인가?

혹시 노우호 자신에게 충성하라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노우호목사의 주장을 따르자면, 삼각형 도형이 있는 것은 모두 주의하고 경계하여야 하며, 오직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음식물규례를 지켜야 하고, 베리칩을 받지 말아야 하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보다는카토릭의 충성된 행위를 따러야 한다는 것인가?

노우호목사의 헬라어 성경을 보면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2000년 후에 베리칩을 환상에서 보고 계시록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666은 교회사 2000동안은 아무런상관도 없고 해당이 되지 않는가?

십여년 전만 하여도 은행카드가 666이고바코드가 666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