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 CBS 방송 녹취록

  • 6월 16, 2016

                              안식교에 대한 (영동 CBS)방송 녹취록

                                                                                                                                               이인규

아래 내용은 영동 CBS 라디오방송과 2014 10월에 방송을 한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엘렌화잇 사진.jpg

엘렌화잇과 그 남편

 

첫째날 (2014 102)

안식교의 명칭이 실제와 다르다고 하는데 실제 명칭은 무엇이며, 현재 그 교세의 규모는 어떻습니까? 또 어떤 기업체가 연관이 있는지요?

안식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라는 이름이 정식명칭이며, 영어로는 Seventh Day Adventists Church 라고 하며 영문약자로는 SDA라고 합니다.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유명한 기업으로는 SDA 외국어학원과 청량리에 있는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부산위생병원, 삼육재활원, 두유가 나오는 삼육식품, 삼육대학교와 삼육고등학교등의 삼육학교법인, 안식교의 출판업무를 하는 시조사등이 있습니다.

국내의 안식교 교인들은 약 18만 여명, 교회 수는 688, 교역자 수는 3 500여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안식교는 최근 12년 만에 약 3배 가까이 급성장하면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200여개국 1300만 여명으로 추정합니다.

안식교는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요?

미국의 윌리암 밀러(1782-1849)라고 하는 농부가 2년간의 개인적인 성경 연구 끝에 다니엘 8:14 23백 주야에 대한 비밀을 깨닫고 재림의 날짜를 알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니엘 8:14 23백 주야에 대해서, 1일을 1년으로 해석하여 23백 년으로 해석하고, 그 기점을 성전중건령이 있었다고 하는 BC 457년을 기준으로 1844년이라고 계산을 하고, 유대력의 속죄일 710일을 현재 달력으로 환산하여 10 22일이라 함으로서 1844 10 22일에 예수 재림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다미선교회의 19921028일의 시한부종말론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며 더 규모가 컸다고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 종말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12만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여 회의에 빠졌는데, 엘렌 화잇이라고 하는 여자가 다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윌리엄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다시 재해석하였는데, 1844 1022일에 예수가 지상에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소위 조사심판을 시작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교의 시작이었으며, 실망하고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이게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엘렌화잇은 안식교에서 선지자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윌리엄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세 천사의 기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과 예수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도둑같이 오신다 또는 아버지만이 아신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한부종말론은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안식교가 일반 기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1)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유대인들의 방식대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지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표를 받은 것이라고 배타적인 주장을 합니다

2) 구약의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와 비늘이 없는 생선등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안식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소와 양같은 허용된 육식도 하지 않으며 그 기준은 여선지자인 엘렌화잇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안식교와 같은 곳을 혼합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3) 사후 영혼이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영혼수면설을 주장합니다

4) 고통을 받는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며, 악인의 영혼은 멸절한다고 주장합니다

5) 안식교는 자신들이 남는 자(남은 후손, 12:17 렘난트)라고 합니다. 이 용어를 다른 이단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성경에서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도록 남겨졌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6)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안식교가 윌리엄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세천사의 기별이라고 부른다는 자체가 안식교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그 시한부종말론을 변형시켰던 조사심판 교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184410월부터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인류를 조사심판하고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1844년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 하늘에 계십니다.

4계명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나요?

안식교는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을 지켜야만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4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을 하며 전도를 합니다. 안식교는 구약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 당황할 수가 있습니다.

20:8-10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성경 그대로 지키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만 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모든 상점을 문닫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들, , 여종, 남종, , 육축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날 (20:10)

처소에서조차 나오지 못하는 날(16:29)

불도 피울 수 없는 날(35:3)

장사를 할 수 없는 날(10:31)

성문을 닫으므로 성문 밖에 나갈 수 없음(13:19)

오락을 하지 못함(58:13)

짐을 지지 못하는 날(17:21-22)

일정한 거리 이상을 갈 수 없는 날 (1:12)

원래 안식일이란 뜻은 헬라어, “솨바트“(멈추다)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불도 피울 수가 없었으며(35:3) 짐도 들 수가 없었고(17:22. 13:15) 정해진 거리 이상의 먼 거리를 갈 수 조차도 없었습니다.(1:12) 그것보다 더 극단적인 것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 죽여라라는 것입니다(31:15)

만약 안식일을 성경대로 지키려면 안식교인들은 불도 피우면 안되므로 밥도 먹지말고, 먼 곳에 있는 교회에도 나가면 안되며, 성경책도 들고 갈 수 없고, 봉사와 같은 일도 하면 안됩니다. 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살인을 해야만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지키지 말라고 말합니다. 안식일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4:10-11)

성경은 누구라도 율법을 지키거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며, 우리의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받는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인들이 많이 있던 곳인데, 그들이 할례를 지켜야 한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골로새서 2 17절에서는 장래일의 그림자라는 내용이 있는데, 구약의 명절과 절기인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며, 우리는 그것을 모형론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표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구약의 명절과 절기는 그림자가 되며, 그 실체는 예수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은 그림자이며,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참 안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고,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안식이 되며, 오직 그에게만 참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에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은 장자를 멸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유월절은 페싸흐라고 하며 영어로는 Pass-over(건너뛰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의 피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고 모형이 되지만, 그 실체는 예수님의 보혈이 인류를 구원하며 심판을 건너 뛰게 하는 영원한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서 41-11절에서도 안식에 대해서 종말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쉬는 구원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둘째날 (10/9)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이지만, 주일은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날로 만든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짐승을 잡는 희생제사였고, 신약에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찬양과 경배였습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성경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초대교회는 안식후 첫날, 즉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기록이 있습니다. 2:42, 2:46. 20:7, 고전10:23 모여서 떡을 떼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특히 고전10:24 축사하다는 헬라어 단어를 유카리스테오라고 하는데, 성찬을 헬라어로는 Eucharist라고 합니다. 그 원래의 의미는 감사하게 생각하다, 감사를 드리다”(giving thanks)는 뜻입니다. 성경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안식후 첫날에 떡을 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구약의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하나요?

구약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경도 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돼지고기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등도 부정하여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것은 부정하여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과 정결의 규례는 달라졌습니다. 만약 지금도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있다면 경도하는 여인은 부정하니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돼지고기도 먹지 못하고, 비늘이 없는 오징어나 장어, 추어탕도 먹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13:9)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4:2)

구약에서 정결법이 신약에서 바뀌게 됩니다. 특히 신약에서 음식물의 정결과 부정의 개념은 내면적인 마음에 달려있으며 모든 음식물이 깨끗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음식물에 대한 재해석은 상당히 많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 7:19)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1:15)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14:20)

기독교의 정통신학에서는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정통신학에서는 율법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율법폐기론도 문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또한 율법이 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접근법은 모형론(typology), 즉 신약과 구약의 요소들의 상응성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이며 실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10:1)

이 세상에는 율법의 요구충족에 달할수 있는 자가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그렇다면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율법이란 왜 존재하여야만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은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기능은 폐하여진 것이지만, 율법은 두가지의 기능에서 아직도 폐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기능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7)

두 번째 기능은 율법은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3:24-27)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자랄 때까지 돌보아주는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실체이신 예수가 오기 전까지 율법은 연약한 어린아이들의 가정교사역활을 담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에 무엇을 하지 말라라는 금지법을 가르치거나, “무엇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규정을 정합니다. 왜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왜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은 구체적인 이해를 할 수가 없으므로, 단지 하지 말라 혹은 지키라는 법을 적용시켜서, 그 법을 범하지 않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율법과 복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옛언약과 새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구체화된 반면에 새 언약은 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서 배타적이며 선택적이었지만, 새 언약에서의 교회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포괄적이며 개방적인 개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구약은 예비적 성격(즉 예표)을 갖고 있으며, 신약은 집행적 성격(즉 실체)을 가집니다. 구약은 행위언약이지만 신약은 은혜언약이라는 명칭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약에만 얽매어 신약의 성취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이며, 그 십자가의 피로서 말미암아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새 언약에 사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돌비에 기록된 법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 기록된 법에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6-17)

심지어 사도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2:21-3:3)

율법은 하나의 이정표입니다. 어느 지점에 도착하기 위하여 이정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에게 이정표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날 (10/16)

안식교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사후영혼이 음부에서 무의식상태로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부가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안식교뿐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들은 사후영혼의 의식적인 활동에 대해서 같은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는 모두 사후영혼이 무의식 상태에서 잠을 자는 상태로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음부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구절 중에는 죽음의 상태를 잠을 잔다고 말하는 표현이 몇 개 언급되어 있지만, 그러나 죽음의 상태가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은 실제적인 상태가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기법으로 간주합니다. 또 음부는 단순히 죽은 자가 갈 장소라고 표현하는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는 성경에서 사후영혼이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23절의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에는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본문 뒤에 있는 25-26절을 보면,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즉 음부와 낙원은 선택적이며, 부자는 고통속에 있었지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서, 무의식상태가 아니라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 히브리서 9:27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에서도 시편 9:17을 보면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음부가 악인과 의인 모두가 가는 단순한 사후장소가 아니라 악인이 가는 곳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음부로 가는 길과 위로 향한 생명 길의 선택적인 구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적으로 볼 때에 영혼은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영혼이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을까요?

1) 바울은 사후영혼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의 교리와 다릅니다. 바울은 그가 죽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함에 대해서 더욱 좋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2-24)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2) 사도요한은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와는 달랐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 곁에 있는 사후영혼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6:9)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20:4)

3) 예수님도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과는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강도에게 그날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43)

성경은 고통받는 지옥이 없다고 말하나요?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고통을 받는 지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라고 인정한다면, 절대로 지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받는 지옥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신들의 입장과 견해를 기준을 말하지만, 공의라는 것은 Justice 로서 정의를 뜻하는데,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공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성경은 지옥 불”(5:22, 18:9, 3:6), “꺼지지 않는 불”(9:43, 3:12, 9:43, 3:17), “영영한 불”(25:41), 심지어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 불”(9:48)이라고 말하고 있고, 풀무불에서 이를 갈며”(13:42, 13:50)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서”(딤후3:1),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4:1)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25:46)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한다는 것을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영생이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영벌은 영원히 받는 벌을 뜻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생은 eternal life 이고 영벌은 eternal punishiment 로서 동일한 헬라어 아이오니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는 지옥의 판결이 없는데도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해서 수많은 구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구약의 음부를 말하는 스올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신약에서 헬라어 하데스와 같은 단어로서, 고통받는 곳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들었던 부자와 나사로에서 음부도 하데스이며, 계시록 20:13-15을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못의 음부도 하데스입니다. 또 앞에서 설명하였던 시편 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에서 음부도 히브리어 스올이며, 헬라어 하데스와 같은 용어로 음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성경적으로 볼 때에 고통받는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설명을 한 내용은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모두 함께 갖고 있는 동일한 교리에 대한 비판이 되었습니다. 일단 안식교에 대한 주요교리에 대한 비판은 오늘까지로 하고, 다음 주부터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비판을 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