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류광수) 고려총회 신학부 연구보고서

  • 7월 16, 2015

고려 총회 신학부 연구보고서

   

 

다락방 운동의 신학사적(神學史的)성격

참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택자 구원의 전도운동(케뤼그마 운동)을 요구하고 있고,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바로 이것을 위한 구속사였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였고, 이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 자신으로 말씀하시었다( 1;13, 1:21).

그리고 신, 구약의 전시대에 걸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the Faith only)의 원리가 강물처럼 흘러왔고, 성경은 그 진리를 온전히 계시하고 있다( 1:17, 3:11, 10:38, 2:24).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기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전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구원의 교리를 유포시키는 운동이 있어 왔다.

때로는 그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뭇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대역사를 이루는 듯하다가도 끝이 이상하여 사이비 기독교(似而非 基督敎) 운동 혹은 이단(異端)으로 정죄되기도 하였다.

타락한 인간들이 아무리 은혜와 은사를 받아서 순수한 복음 운동을 전개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신학적 오류를 범하는가 하면 복음을 왜곡시켜 기독교의 변질을 초래하여 구속역사를 오히려 방해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신학 혹은 교리적인 면에서 역사상의 수많은 복음 운동을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진정한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성경적 기독교 운동은 초대교회의 사도 및 속사도 시대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교주시대부터 벌써 동서 기독교의 분할과 함께 신학적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정상화되었다.

성경으로 되돌아간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면 또다시 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의 운동을 전개하거나(지성주의 경향의 신학운동), 감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감성 강조의 신학사조)으로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 교회사적 교훈이다.

교회사적 신학의 추운동(Pendulum movement)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감성을 강조하는 신학과 지성 강조하는 신학이 교대로 즉 반동운동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2세기에 지중해를 강타한 강력한 보혜사 운동인 몬타너스주의(Montanism)는 감성을 강조한 성령운동이었는데, 이에 대한 반동(reaction)으로 2, 3세기에는 지성을 강조하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풍미하였다.

이에 대한 감성적 반동 운동으로 금욕주의(Monasticism)가 일어나 310세기를 지배하였다. 여기서 지성적 반동 운동인 스콜라주의(Scholsticism) 1114세기에 신학적 주류를 이루는 사변신학 혹은 번쇄신학의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현학적 신학에 혐오를 가진 운동이 일어났는데 극도의 감성을 자극하는 1415세기의 신비주의(Mysticism)운동이었다. 즉 기독교의 말씀(로고스)과 성령이 함께(Cum Verbo)하는 신앙과 신학 운동을 지향한 성경적 기독교(Biblical Christianity)의 회복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감성에 치우친 경건주의 및 감리교운동(Pieitism &Methodism) 1718세기를 주도하였고, 1920세기는 자연과 역사 연구의 결과로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Liberalism)가 전 기독교에 파고들어 구라파 교회를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20세기에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Pentecostalism)이었다. 이러한 운동과 함께 극도의 이성과 지성을 추구하는 현대주의(Modernism)가 다양한 유니폼의 신학을 창출하며 20세기의 영혼을 사로잡아 갔다(신학이라기 보다 인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흑인 신학, 여인신학, 해방신학, 문화명령주의신학, 한의 신학, 민중신학, 과정신학 등의 인간학이다).

그리고 감성적 은사를 강조하는 신오순절 은사주의 운동(the Charismatic Movement)이 일어나 컬컬한 심령을 만족시키려 하고 있다. 이 운동으로 60년대 이후에는 교파의 벽이 허물어져 버렸고 교파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20세기 신학의 사조도 세계 신학사의 조류에 편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한 선교의 섭리로 칼빈주의 신학의 영향과 근본주의적 퓨리탄 신앙이 한국 신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가 한국 강단을 이끌어 왔다. 바로 1901년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영향이며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신사참배의 강요에도 성경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파수하는 축복을 받았다.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정통신앙의 파수에 한국교회는 혼신을 다했다. 625 전쟁으로 다시 한번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교회 운동이 더욱 활발해 졌다. 하나님의 경제적 축복과 함께 한국교회에 베푼 축복으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교회의 부흥을 맛보게 되었다. 1,200만 성도를 헤아린다는 한국교회는 지금 평신도 선교사를 포함하여 8,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의 힘을 가진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 성장의 과정에는 내적으로 상당한 홍역을 치러야한 했다. 교단 분열의 현상도 문제가 되겠으나, 그보다도 유사 기독교 내지 사이비 기독교의 신흥종교가 우후죽순처럼 돋아났고 수많은 영혼들을 사로잡을 사실이다. 90년대 들어서는 다미 선교회를 비롯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 1992 10 28일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여 교회에 일대 혼란을 야기시킨 바 있었다.

지금도 한국 교회 안에 버젓이 기독교의 탈을 쓴 유사 기독교, 사이비 기독교, 이단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대체로 성령의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은사주의 경향을 보임과 함께 귀신론에 심취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진리를 왜곡하는 중대한 이단의 경향이라 아닐 수 없다. 젊은 층을 사로잡는 다양한 형태의 유사기독교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한국 교회를 다시 흔든 운동이 출현했는데 그것이 다락방 전도운동이라 할 수 있다. 기성 교회의 목회자를 비방하며 성도를 교회에서 떠나게 하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복음의 대열에 서지 않으면 구원 마저 의심하게 하고 있다. 불신자에게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신자는 예수님을 재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구원해야 한다는 망상에서 소위 한국의 무디, 웨슬레 운동을 꿈꾸며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이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매력있는 운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교회부흥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다락방이란 사실상 교회에서 행하는 구역예배와 다른 것이 없는 데도 세계적인 발명품인양 따라서 하고 있고, 다락방 운동의 교회가 무엇이며 신학적 배경에 대한 검증을 생략한 채 무조건 추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류광수 씨의 신학의 배경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없이, 젊어서 배웠던 이상한 사상으로 독특한 혼합주의 형태의 다락방 운동을 창안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부흥과 전도의 열망에 성경이 아닌 이단사설을 섞어서 만든 메시지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박진규 박사가 쓴 다락방 전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류광수 씨 다락방 전도운동의 성경 신학적인 문제점 비교대조표 그리고 류공수 씨의 전도신학의 문제점이란 글을 참조해보면 류광수 씨의 신학의 뿌리가 네 가지임이 드러난다.

첫째는, 권신찬의 구원파 사상이요, 둘째는, 김기동의 귀신론(베뢰아 아카데미), 셋째는, 한만영의 귀신론(그레이스 아카데미), 그리고 넷째는,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지방 교회 신학이다.

그 증거는 그들이 접근할 때 던지는 세 가지의 질문에 나타난다.

첫째, 구원받았습니까?(구원파의 영향을 받은 것), 둘째,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구원파와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방법), 셋째, 예수 영접했습니까?(지방교회의 영향) 여기에 나오는 구원파, 귀신론 그리고 지방교회(회복교회)는 이미 한국 교회에서 사이비 혹은 이단으로 정죄된 사상이다.

이제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류 씨의 허구성이 천하에 공개되었지만 그이 이후에는 최근 카나다의 빈야드(Vineyard) 운동이 또 한국 교회를 혼란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21세게는 고도의 정보화 지식 축적 사회로서 심령의 고갈 상태를 채우며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리라 전망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위축된 감성은 어떻게 표출될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시대를 바로 이끌어 갈 신학은 바로 종교개혁원리로 형성된 신학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와 현실적 요소가 설명되는 개혁주의 신학인 것이다. 신학은 철도의 레일과 같다. 신앙의 열차가 달리기 위한 신학이 새삼스러이 강조된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와 그의 행위로 나타난 결과론적인 혼란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그 내용을 공개하는데 지금까지 나타난 것을 종합하면 그의 신학은 판단컨데 일종의 사단신학 내지 축사신학이다.

비개혁주의 신학임에는 틀림없고 복음주의적인 사상도 아니다. 균형을 잃어버린 일종의 감정을 전도를 통한 체험을 유도하는 신학운동이다.

교회사적으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종의 유사 기독교 내지 사이비적 성격을 띤 한시적 교회운동이라 하겠다.

다락방 전도 운도의 신학적 문제점

이제 그이 신학이 과연 어떤 신학인지 살펴 볼 차례이다.

그가 행한 설교와 강의가 다락방 추종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또 다락방을 통해서 일반 성도에게 파급되는 상황에서 다락방 전도 운동의 문제란 역시 류광수 씨의 사상과 메시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본 연구는 기독교의 진리가 가장 잘 조직화된 7영리의 체계에 맞추어 그의 신학성을 성찰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7영리는 개혁주의 신학교의 정규교육과정을 주류를 이루는 것인 바, 신학 서론(종교, 계시 및 성경), 신론(Theolo Proper), 인죄론(Anthropolgy), 기독론(Christology), 구원론(Soteriology &Pneumatology), 교회론(Ecclesioligy), 그리고 종말론(Eschatology)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류광수 씨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적 문제점을 찾아보자.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전에 아직도 류광수 씨의 신학이 옳다고 착각하고 추종하는 목회자들이 발표한 변호성 성명과 일부 지방 기독교 신문에 게재된 변호성 기사를 짚어보자.

류광수 씨의 신학이 건전하며 하나님이 축복으로 지금의 사역을 한다고 변호하는 성명서를 각 지역 대표를 비롯한 1,000명의 서명을 받아 몇 군데 기독교 유인물에 게재하고 있으니 그 사태가 심각하다 할 것이다.

 1995 9 17일자 기독교 호남저널에 실린 그들의 성명서를 읽어보자(134쪽 참조).

참으로 서명에 동참한 목회자들이 어떤 힘에 이끌리어 이렇게 주장하는지 모르지만, 서명한 목회자 중에는 이미 상회(노회)에서 당회장권이 정지된 분들도 있고, 교회를 분리했으면 했지 끝까지 다락방운동에 동참한다는 지사형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이 분들은 류광수 씨의 좋은 면을 보고 추종을 맹세하고 있으나 우리가 제시한 본 보고서를 참조하면 목회자의 본분을 깨닫고 자기 목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신령한 젖으로 양무리를 인도하게 될 줄로 믿는다. 류 씨에게 얻어 온 밥으로 자기 교인들을 양육하는 일이 중지될 것이다.

한편 류광수 씨는 한국교회에서 자신의 전도 운동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자 일반적으로 사이비 기독교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즉 명예회복 위해 법정에 고소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교회복음신문(95. 7. 17) 1면과 7면에 류광수 씨에 관한 변호성 기사를 싣고 있다. 1면에는 목사 면직 결의 무효확인 제소, 명예회복 위해 법정 투쟁도 불사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법정에서의 귀추가 주목된다고 보도한 후, 7면에 류광수 목사 베뢰아 관련설은 낭설: 형사법 총동원 명예 회복 강력 의지라고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결론부에서 예장(합동) 교단 K목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고 같이 마무리 하고 있다.

 “ 현역 목회자들이 법정에 서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며 당시의 회의록 내용을 변조한 당사자들은 이제라도 류 목사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류 목사 역시 너그러운 마음으로 화해 차원에서 용서하는 아름다운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한 교계 인사는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기독교신문(95. 7.23)은 집중취재의 형식으로 다락방 전도훈련원의 정체를 밝힌다는 제목 하에 부산 동삼제일교회 류광수 목사는 과연 이단인가라고 부제를 단 후 베뢰아 아카데미 관련설 사실무근: 변론도 없이 재판 속결 정치성 짙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류광수 씨 측에는 이 두 신문을 전국의 주요 신학교 등에 보내어 자신을 변호하는 홍보를 하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목사의 진정한 명예 회복은 무엇인가?

그가 진정한 주님의 일꾼이라면 법정에서 시비를 가릴 것 없다. 목사가 목사를 법정에 가릴 것 없다. 목사가 목사를 법정에 고소하는 자체는 이미 고린도전서 6 111절의 말씀을 위배한 것이며 참으로 무익하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깊은 하나님의 공회에 순복하며 자신이 설사 억울한 조치를 받았다 하더라도 살아 계신 주님을 믿으면 그 신원이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목사 재심청구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잘못이 있으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그는 끝까지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한국 교회를 무시하고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의 정치적 논쟁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메시지에 나타난 비개혁주의적, 비복음적 내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한국 교회 앞에 사실 자체를 알리고 바른 진리 운동을 전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싶은 것뿐이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의 메시지에 나타난 신학성을 평가해보자.

계시 및 성경관의 혼미

마귀 계시 및 성경 외의 계시를 주장

그의 주장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

성령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도록 기도하라. 어떻게든 성령은 인도하신다. 꿈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으로, 환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환상으로,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이해한대로 인도하신다 성령 치료받으면 발가락이 문제인 사람은 발가락에 역사가 일어 날 것이고,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성령은 완전한 영이기 때문에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환상으로 인도하신다. 귀머거리에게는 꿈으로 인도하신다(파급 단계 2).

또 다락방 파급 단계 3에서는 마귀의 계시를 언급하고 있다.

마귀가 주는 계시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나면 여러분이 교역자이면서 복음을 굉장히 막고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것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게 마귀가 계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계시, 하나님만 계시하는 것 아닙니다.

마귀가 계시해 가지고 여러분이 진짜 이것 못하게 합니다.

마귀 계시를 받아 가지고 자기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어쨌든 행정, 조직 열심히 하면서 그게 나쁜 것 아니거든 그러면서 복음만 희미해진다.

평가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성경을 계시의 종결로 본다. 성경을 넘어가거나 벗어나는 것은 성경 자체가 금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 18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리라고 하였다.

그는 마귀가 계시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성경에는 마귀의 말이 있다는 말이고 결국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물론 성경에는 마귀의 말을 인용하나 그 모두는 성령님의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는 결국 성경의 완전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있고, 지금도 성령을 통한 계속적인 영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을 분간하지 못하여 사용한 듯하나 그의 성경 계시관은 이미 비복음적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성경의 자의적 추정과 해석

그의 주장

류광수 씨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걸 못 깨달으면 하나님이 몇 명 장례식을 한다. 두고 보라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부르는 걸 못 깨달으니까 아버지 부르고 형님 부르는 게 아닙니까? 보통 운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씀 운동이 시대적인 사명입니다(창세기에 나타난 다락방 메시지).

아브라함 보고 아브라함아! 자꾸 안나가려고 하니까 아마 내 생각인데 롯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형 아닙니까? 이 형이 못 가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형을 불러간 것 같아요.

끝까지 말씀 앞에 버티면 하나님이 불러가 버리는 거여. 그래가지고 아브라함이 가면 되는데 또 빌빌 돌아 다니는 거여. 어디를 가느냐 하란으로 가는 거 있지요. 하나님이 또 부르는 거 있지요. 거시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불러 가버린 거 있지요. 아마 내 생각인데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자꾸 불러들인 거 같아요. 그래놓고 재차 말한 것이 창 12장입니다(압제 당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사도 바울에겐 안수나 아나니아에 대한 설명 또한 이상하다. 사도행전 9장에 비로소 등장하는 그의 과거를 추정하여 설교하고 있다.  

첫째, 아나니아, 예수님 당시 은혜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사실은 아나니아는, 70인 요원은, 제자가 사도가 아나라는 것이지, 제자들이 받는 훈련을 다 받았어요. 두번째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1:114절에 이미 아나니아는 보통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명령한 것 있지요. 그것을 기억한 사람이에요 2:117 그냥 일꾼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 아나니아는 행 2장에 나타난 제자훈련에 참여된 자입니다. 2:4147 그러니까 여러분은 기도제목을 붙잡아야 됩니다. 아까 말했듯이 한 지역을 어떻게 살릴 것이냐? 이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나니아가 파송 받은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평신도입니다. 평신도 아나니아에게 세계적인 전도자 사울을 맡긴 것을 알아야 돼요. 그 정도 여러분이 그릇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미래를 흔들 지도자를 하나님이 맡길 수 있겠금 되어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목사가 아니잖아요. 그냥 지역에 말씀 운동을 펴고 있는 평신도인데요.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전혀 이름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름이 사울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거론도 안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목사 뒤에 보다 여러분 뒤에 진짜 임무를 갖다 붙여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을 키우는 것입니다(지역을 살리는 일꾼 아나니아).

그 외에도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 썩는 나무를 택해야 되겠어요. 안 썩는 나무를 택해야 되고 거기다가 다른 사상 안들어오도록 틈 사이에 역청을 발라야 되겠어요. 조직적인 예수 운동을 빨리 펴야 되겠어요 너를 위하여 잣 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보통사건이 아니에요. 지금 말씀 운동 펴란 말은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여 다른 말씀 운동 펴면 안돼요 (94년도 전도 신학원 집회)

평가

그의 설교는 참으로 추정과 자기 생각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의 소명과정에서 그의 시나리오가 가능하겠으나 본문에 언제든지 충실하지 않는 설교는 생명성이 없다.

그가 설교한 창세기 11:3132의 성경본문을 보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새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하였다. 이 본문의 말씀으로 다락방 전도 운동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 깨달으면 장례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류광수 씨는 70인 핵심 요원의 성경적인 근거로서 아나니아를 아주 실감있는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설명하고 있고, 결국 목회자보다 평신도가 복음 사역에 더 큰 사명이 있는 것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면 멈추는 것이 개혁주의 목사의 자세이다.

그는 다락방 전도를 강조한 나머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한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무모한 성경의 인용과 해석은 성령의 영감과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를 왜곡한다 하겠다.

그가 젊은 20대에 영적인 병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창세기 3장을 보고 전 성경이 열린 경험이 있다고 하였고, 기도하고 전도하니까 모든 성경이 깨달아진다고 하였다. 여기에 그의 한계가 있다. 그는 누구로부터 성경 해석의 원리를 정확히 배웠다기보다 스스로 성령의 감화로 다 깨닫게 되었기에 그의 성경 해석은 상당히 풍유적이며 심지어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자의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메시지는 듣는 자에게 전혀 새로운 성경의 해석 혹은 계시로 인식되어 그의 메시지를 받으려고, 류광수 씨의 집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일 날 비행기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 목회자가 있었다. 자기 목장의 양들을 내버려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그의 메시지를 사모하여 합숙 훈련을 참석하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 절대 의존 신앙과 신학만이 한국 강단을 기름지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진정한 구속 역사 성취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신론과 인죄론의 오류

천사 동원권의 강조

그의 주장

류광수 씨는 기도를 강조하는 가운데 천사의 동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연약한 줄 알고 사단을 이기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늘 인도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뭘 합니까? 분명히 성경에 보니까 하늘 문 여시고 누구를 보냅니까? 하늘에 천사들을 보내사 뭐합니까? 기도 응답을 주십니다(영적 축복).

기도한단 말은 일곱 가지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가만 앉아서도 사단을 결박시키고 가만 앉아서도 천사들을 움직이고 (야곱과 에서).

네 번째 구원받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천사 동원권입니다.

성경을 분명히 봐야 됩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러 가면 주임이 천사를 동원 시키십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옥문을 열은 것은,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가 사람을 활용한 것입니다. 어떻게 역사할 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1:14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창조한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종노릇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분명히 창조했다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가 나왔을 뿐 아니고 바울이 풍랑 만났을 때 그날 밤에 주의 사자가, 전도하러 가는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주님이 여러분을 다스릴 뿐 아니라 우리 옆에는 누가 있지요? 주의 천사들이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가는 곳에 천사들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천사들을 심부름 시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우리의 종입니다(다락방 개요 수영로).

사단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니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눈이 열려버렸다. 오늘 밤에도 가다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차 미끄러져 안 넘어지는 이런거 말고 천사들을 도우너해서 응답의 전도문 선교문 열리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집회 갔는데 하나님이 기뻐가지고 하늘문을 여시고 하는 군대를 동원합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다 뒤집어 집니다(아비멜렉이 본 여호와).

평가

천사가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은 스콜라 신학 때 유행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를 하면 천사가 동원된다는 생각은 다니엘의 사자굴에서 건짐을 받을 때의 설명들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천사 동원 사상은 잘못되었다. 원세호 박사는 이러한 천사 동원권은 베뢰아 귀신론에서 다루는 문제라 하였다. 은연중 류 씨가 기도의 강조와 함께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개혁주의 신학은 아니다. 주님이 천사 동원권을 가지고 있고 성도가 천상에서 천사를 부릴 권세가 있으나 이 세상에서 성도가 기도하면 언제든지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New Age 사상과 상통하며 귀신을 결박한다는 사상은 베뢰아에서 기원하고 있다. 김기동 씨의 책 믿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읽어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므로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p.128). 베드로가 옥에서 빠져 나온 것은 놀라운 이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철문을 뚫고 그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천사가 동원된 것은 곧 합심기도의 결과입니다(p.137).”고 하였다. 그리고 김기동 씨의 책 마귀론에서는 습관이 되면 미혹의 영이 되어 이를 회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기는 방법은 천사를 동원하여 능력을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고 하여 류광수 씨의 천사동원권의 원천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그리고 김기동 씨의 사람에게 접근하는 영이란 책은 우리가 예수를 알게되면 구원이 있게 됩니다. 또 신유를 알게 되면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의 존재를 알게되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천사에 대해 알게 되면 그를 볼 수도 있고 또 그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는 집에서 파출부 대신 집이나 지키며 밥이나 하고 빨래나 빨아주는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후사들의 하는 일을 도우라고 보냄을 받은 영입니다(p. 193).”고 하였다. 그래서 류광수 씨가 베뢰아 아카데미를 수료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설사 그가 김기동의 얼굴을 모른다 해도 그의 사상은 그와 통하고 있는 사실은 부인할 길이 없다.

사단론으로 모든 현상 설명(죄와 사단의 일체설)

그의 주장

개혁주의 신학은 신론에서 타락한 천사로서 사단을 취급하나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대부분 사단에 관련되어 있다.

창세기 공부하기 전에 인간의 큰 문제는 죄와 사단의 출현입니다. 이것부터 공부 안 하면 3장이 이해가 잘 안되겠지요. 하늘의 천사가 타락했습니다. 마귀가 된 것입니다. , 특히 루시엘은 찬양 담당이었지요. 그래서 찬송이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창3 16절에 보니까 내려와서 아담, 하와를 넘어뜨린 것입니다 전부 정신 돌은 사람은 사단 때문에 그랬느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아요 (다락방 선교의 메시지).

마귀 얘기만 나오면 겁을 내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분명히 있어요. 아담, 하와를 꺽는 마귀는 감히 누구에게 도전하느냐? 예수님께 도전했고 이 사단은 지금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시험에 일어나는 거 보면 똑 같습니다. 교회마다 들고 일어나는 중직자들 보면은 똑 같습니다. 뭐 전도가 뭐 어떻다 전부 핑곕니다. 원래 사단이 그래요(94전국 전도 신학원 집회).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도 아닙니다. 죄가 사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단이 죄를 가지고 인류를 넘어뜨리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만 해결한다면 우리에게는 응답의 큰문이 열릴 것입니다(다락방 파급 단계2).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단에게 묶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지, 이 사람은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단에게 묶여 놓으니까 우상 숭배해야 되고 귀신 섬겨야 되고 점쳐야 되고 굿해야 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에게 묶인 자는 죄 가운데 빠져서 일평생 저주의 프로그램을 지키다가 지옥에 간다는 사시리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 깨달은 사람은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모든 문제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 못 만나면 아무리 모아 놓아도 축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눈에 안보이게 여러분들을 야금야금 쪼개 먹는 것입니다. 사단 요것 꺾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이걸 누려야 합니다.

복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냐, 여러분 기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은 여러분 가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여러분 입으로, 손으로, 발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주위에는 마귀가 꺾이고 저주는 떠나가고 성령은 임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만큼 사단에게 여러분이 당하게 돼있는 것이고 기도 안하는 만큼 당하게 돼있는 것이야. 아니 학자가 복음을 이해해야지 안 그래요. 학자가 사단을 모르니까 뒤에서 자꾸 건드리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학자입니까?.

안디옥 교회가 무슨 운동을 폈느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당신 저주와 운명과 미신에서 빠져 나와라 이게 다락방입니다(다락방 파급단계 5).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죄하고 사단하고 딱 붙어 다닙니다. 언제든지 분리가 되지 않아요.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아니란 말이요. 보통 지금 말하는 사람은(EBS양육).

우리가 죽어서 성령됩니까? 살아 있을 때 성령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서 잘 알면은 그런 실수 안 할 건데 불신자 살아 있을 때 악령이 따라 다닙니다. 그 사람 죽어버리면 영혼이 갇혀 있다가 악령은 가만히 그 영혼은 후손을 괴롭히잖아요(복음편지 테이프).

평가

죄와 사단의 일체를 주장하는 류광수 씨의 인죄론은 개혁주의 신학과 거리가 멀다. 죄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 즉 행위 언약을 어긴 것이다. 사단의 개입에 의한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죄인 것인데 류 씨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의 마귀 문제의 해결에 복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사단과 마귀로서 구원뿐 아니라 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이는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Witness Lee, 이상수, 1905)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정동섭 교수가 쓴 그것이 궁금하다에서 위트니스 리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류 씨의 사상가 맥이 통한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사단을 가지고 있는 인간(Man with Satan)을 사망과 무덤으로 데리고 가서, 사망과 무덤에서 사단이 없는 인간(Man without Satan)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스도는 사단을 무덤 속에 장사지내고 매장했다. , 이제 이 부활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성육신에 의하여 하나님은 인간 안에 들어 왔다. 부활에 의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인간의 영속에 계신다“(p.249).

위트니스 리의 이단 사상은 죄를 사단과 동일시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위트니스 리가 죄를 사단으로 만들며 의인화(擬人化)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단을 죄로 만들며 비인격화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죄와 사단을 동일시하는 것은 크게 성경을 벗어났다. 류광수 씨가 죄와 사단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일체사상은 마귀의 진멸을 회개하고 파악하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한 결과이며 잘못된 사상의 영향으로 이러한 괴설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의 설교에서 영혼이 갇혀 있다가 악령은 가만히 그 영혼은 후손을 괴롭히잖아요.”라고 한 것은 귀신을 불신자의 사후 존재로 보는 김기동의 귀신론과 같은 생각이다. 김기동은 그의 귀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고 할 때 불신자의 영을 귀신으로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는, 회개하지 않고 살았을 때는 귀신 노릇한 것이고 죽었을 때는 귀신인 것입니다.”

잘못된 삼위일체론 수용 및 인간의 신격화 주장

그의 주장

그의 다음 주장들을 조심하여 들어보자.

더 확실한 것은 고린도 전서 3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다. 우리 안에 누가 계신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 보고 삼위일체, 그래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전부 삼위일체를 부인하지요(EBS 양육 테이프 2).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에 부딪힐 때 누가 살아납니까? 영이 살아납니다. 영이 살면 즉각 우리의 마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심령이 살아나면 즉각 어디로 전달되느냐? 뇌로 전달됩니다. 뇌로 전달되면 어디로 갑니까? 신경으로 열결됩니다. 신경으로 연결되면 온몸으로관절 골수(복음편지 강의 테이프 3).

세 번째로는 창조의 복을 강조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 말은 사단의 간섭받기 전이기 때문에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축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요걸 놓쳐 버린 것 있지. 마귀 때문에,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개발하면 끝이 없습니다. 인간은노력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능력이 나옵니다. 원래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축복은요? 무한한 가능성을 축복했습니다. 그거를 강조해야 됩니다. 창조했다는 말을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만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럼 이거 얼른 이해되지요? 왜 이것 뺏겼겠습니까? 우리는 회복됐다 이말 아닙니까?(복음편지 강의 테이프 3).

평가

그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비적 연합을 말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과의 연합사상이 스며 나오고, 마귀를 진멸하므로 마침내 인간은 무한한 능력의 회복을 주장하므로 한만영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말았다.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진리공과 1단계 제 4권에 류 씨와 같은 사상이 서술되어 있어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또한 삼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 분 안으로 믿고 침례 받은 후 우리는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되므로 그분의 거룩한 생명과 성품을 갖고 그분과 생명의 관계와 성품을 가지며 그로써 유기적인 연합을 산출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아들 하나님과 연합되므로 그분 안에 넣어지고 그분 또한 우리 안에 계신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분과 하나됨으로 그분과 동일한 생명과 성품과 생활과 행동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성령 하나님과 연합되므로 우리의 생존과 어떠함과 생명과 생활을 위하여 본질적인 면에서 그분을 우리 안으로 영접하였으며, 또한 우리의 영적인 일과 기능을 위하여 우리 안에 임하는 능력의 영으로 그분을 영접하였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의 이같은 놀라운 연합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105).

특히 위트니스 리는 그는 거듭나는 것은 신인이 되는 것, 거듭 나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우리의 영이 혼합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데(정동섭, 그것이 궁금하다 p.245), 한만영의 신화(神話)사상과 유사하다. 한만영은 그의 그레이스 아카데미 강의록에서 하나님의 입장은 마귀 진멸을 위하여 인간을 이용하신다. 그리고 기도하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사용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신령과 진정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pp. 222223).”라고 주장 하였다.

그렇다면 류광수 씨의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정통 교리의 삼위일체 신론이 아닌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 교리로서 사위일체이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신인(神人)합일의 교리로 분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박진규, 류광수 씨의 전도신학 문제점 p.2 &류광수 씨 다락방 전도운동의 성경 신학적인 문제점 비교 대조표, p.8).

기독론의 오류

성육신의 목적 오해

그의 주장

류광수 씨는 철저히 성육신의 목적을 요한 일서 3 8절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계획에 세운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전혀 관계없이 로마서 5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뭐하셨느니라?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란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이 길을 여셨다 이것입니다. 누구를 보냈느냐? 예수 하나님 보내셨습니다. 두 가지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한 일서 3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완전히 끝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영적인 부분을 모르면요? 인생에 대해서 절반은 모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생 전체를 모른다고 봐도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중요한 것은 하나도 모른다고 봐도 됩니다. 그 인생 자체는 실팹니다 모르면 무식꾼 아닙니까? 중요한 걸 모르면 하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심이라 보통 말이 아닙니다(복음편지 강의 테이프 3).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심이라. 죄하고 사단하고 딱 붙어 다닙니다. 언제든지 분리가 되지 않아요( 8:44, 요일 3:8).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강단에서는 언제든지 이기(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의미)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 66권이 전부 이것 선포하도록 다각적으로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EBS 양육 강의 테이프2).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이 말씀이 이해되야 그때부터 창세기 3:16, 1620 무엇 때문에 고난 당하는가 알게 돼요. 이기 이렇게 되어져야 구약의 예수님은 뭐한다고 피를 흘렸는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왜 졌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평신도 기초 전도 이론6).

평가

류광수 씨의 복음은 요한일서 3 8절이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진술한다. 마태복음 1 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분명한 목적을 계시하였다. 그리고 요한복음 3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한 성육신의 목적을 밝혔다.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은 택자 구원의 과정 즉 죄인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로 보아야 되는데, 그가 유독히 요한일서 3 8절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김기동과 한만영의 귀신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기동 씨의 마귀론 상권 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만을 기록하고 그의 일만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pp.2324)”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 관계를 부인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만영 씨의 그레이스 아카데미 강의록에는 그레이스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펼쳐온 신학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정을 안다. 하나님의 의도 =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하시기에 창조계획 전부터 있었느냐? 하나님의 사정은 마귀 진멸이라는 대명제가 있다. 일반신학의 명제 = 구원, 구원론 놓고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다룬다. 그러나 인본주의이다. 하나님의 입장은 마귀 진멸을 위하여 인간을 이용하신다(pp. 222223).”고 하였다.

한마디로 그들의 성육신 목적의 진술은 잘못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로 깨닫지 못한 류광수 씨의 전도신학은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

요한일서 4 2절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했는데 그 목적을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되리라 본다.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것은 구원의 과정상의 문제임을 명심하자.

사단배상설로 그리스도의 속죄설명

그의 주장

류광수 씨는 성육신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속죄의 원리 역시 뒤틀리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때부터 마가복음 10 45절 대속물로 오셨던 대속물이라는 말은 뭔가 갚아 주는 것 아닙니까? 사단에게 모든 우리의 실패의 대가를 전부 다 갚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 주님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뭔 말인가 아시겠지요 어마어마한 권세를 주셨습니다(평신도 기초 전도이론 강의 테이프 6).

평가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실패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사단 보상설 혹은 사단 배상설(賠償說)이라고 한다. 이 설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거부되는 속죄이론이다. 초대교부들이 사단에게 속가(贖家)를 보상했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으나 곧 폐기된 설이다. 라보드(Rovert S. Rapp) 및 김달생 박사는 공저 바른 신학 362p’에서 사단 배상설을 설명하고 훌륭한 비판을 하고 있다.

 “사단 배상설은 특히 오리겐이 주장한 것인데 다음가 같이 설명된다. 즉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나 할 때 그것은 사단이 정복의 권세로 택자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배상으로 사단에게 속전을 헌납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사단에게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석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단 배상설은 매우 그릇된 이론이다. 만일 이 이론이 옳다면 사단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결론이 나오고 말 것이니 이것은 성경의 교훈과 전연 부합하지 않는다. 속죄의 대속물은 사단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 이유는 사단은 죄인에 대한 법적 청구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의 행방을 위하여 보상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주신 것은( 10:45) 분명히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의 값을 사단에게 지불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값을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지불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찌 사단에게 값을 지불함이 되겠는가?

그는 아무렇게나 말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사단 배상설이나 다른 이론을 알고 주장한다고 할 수 없다. 사단과 그리스도를 성경해석의 축으로 삼다보니까 한 성구만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구원론의 오류

사단에서의 해방을 구원으로 생각

그의 주장

그는 사단에서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할 수 있다면 두손들고 두발까지도 다 들고 축복해 주고 싶다. 주일 날에도 나는 9시 몇 분에 교회를 간다. 차를 직접 몰고 간다. 구석 구석에 사람들이 놀러 간다. 순간 내 마음 속에 나도 놀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일날 어디 가고 없으면 되겠는가? 지금 힘을 잃은 백성들이 저 골목에서 학교에서 공단에서 다 죽어가고 있다. 사단에 공격받아 다 죽어가고 있다. 이들에게 가서 사단을 꺽는 생명을 공급시켜야 그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누리고 증거하기를 바란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 있다. 살려줘야 되고 사단에게서 풀어줘야 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의 말씀 이기는 길을 꼭 말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는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 사단의 권세, 공중 잡은 자가 지금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해방 받아야 한다(서울 전도신학원 강의).

새 신자에게 당신이 지금부터 완전히 축복을 받는 길이 뭐냐? 사단에게서 해방 받았기 때문에 사단의 풍속에서 벗어나라 역시 안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창세기에 나타난 전도 메시지).

지금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저주 가운데 빠져 들어가고 거의다 모르고 있는 마귀 사단의 세력에 묶여서 사람들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지만 계속 말하면 지금 현재 어떻게 되느냐? 성령이 역사해요. 그리스도만 계속 말하고 들으면 지금 당장 해방이 돼요. 모든 귀신, 세상 이런 것에서 해방돼요. 그리스도 계속 말하면 지금 당장 권세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사단이 꺽이고 하늘 군대들이 동원되고 그렇습니다(아비멜렉이 본 여호와).

평가

류광수 씨의 구원관은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철저히 사단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죄를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 하고 그 원인 제공자가 사단이므로 사단에게서 해방되는 것,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 사단 문제만 해결되면 구원이 된다고 보고 있다. 사단 문제만 해결되면 구원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구원은 주 안에서 전도의 문이 열리고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종말론적인 미래적 구원보다는 현세적 능력과 은사의 체험 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한 나머지 귀신과 사단을 삶 속에서 축출함으로써 구원을 느끼며 살자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할 때 사단은 쫓겨 나가지, 사단을 쫓아내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가 말하는 그 이상이다. 아들의 권세로 영생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는 중생과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나는 성화의 개념을 착각하므로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인생최대의 선물이고 마침내 영광의 보좌에 동참하게 되는 것인데 그는 구원을 사단에게 해방되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궁극적 구원의 부인과 반구원설 주장

그의 주장

그는 한번 구원받아도 넘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구원받아 놓고도 넘어질 수밖에 없으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 받아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단에서 다락방에서 생명의 말씀이 계속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 놓고 또 넘어진다(서울 전도 신학원 강의).

구원받은 사람도 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죄를 자꾸 반복하면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러면은 죄 자꾸 짓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되지요. 그린도 전서 5 5절에 보면 그 육체는 어디에 내어 주고? 마귀에게 내어 주고 영혼을 건지기 위함이라. 여러분 육체를 멸해버리고 여러분 영혼을 어떻게 해요? 건지리라. 그러니까 똑바로 살아야 되지요(다락방 개요8).

평가

사실상 고리도 전서 5 5절의 말씀은 이해하기 난해하다. 여러 주석학자들에게 논란되고 있지만 한마디로 영혼만 구원받고 육체는 마귀에게 내어준다는 것, 즉 반구원설(半救援說)은 개혁주의 해석이 아니며, 다른 사상이 그에게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기동의 마귀론 상권 고린도전서 5 1절 이하에 계모와 통간하는 음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에게도 없는 일이기에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 줌으로 멸하게 하고 영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이나 얻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은 것이기에 그들이 구원은 받으나 미혹의 영에 이끌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p.145).”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Witness Lee) 고린도전서란 책에서 그 출처를 발견할 수 있다.

 “죄 있는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은 징계를 위한 것이다. 5절에 언급된 멸한다는 것은 주로 어떤 질병으로 인한 심신의 고통을 말한다(고후 12:7, 13:11, 126). 육신은 멸해져야 할 정욕적인 몸을 말한다. 어떤 질병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그와 같은 질병은 그의 영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육신은 멸하는 데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죄악을 인하여 그의 죄악된 육신을 파괴함으로 주님의 날에 구원되는 상태로 유지되도록 징계 받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육신을 멸함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준비이다(p.9).”

참으로 성경 전체의 정신을 오해한 해석이다.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 구원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육체는 구원을 못 받고 영혼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죽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여 영생의 상태에 들어가게 할 것인데 성화 과정에서 넘어질 지라도 궁극적으로 구원받는 진리도 그는 간과하고 있다.

강력한 예수 재영접의 주장

그의 주장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면 구원을 위한 예수의 재영접을 강력히 주장한다. 먼저 들어보자.

11:114절에 바벨탑을 쌓기도 하고 별짓을 다합니다. 구원의 비밀을 모르는 자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도요 옛날에 구원을 못 받았을 때는 뭐든지 좋은 것은 아 저게 좋은 것인가 보다. 사람의 기준이 없어요. 도둑놈도 기가찬 대도(大盜)를 보면 아! 매력이 있고(아비멜렉이 본 여호와).

요한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영접한다는 말은 또 잘 모르고 있는데요 전도를 하려면 영접이라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신자는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가운데 이 부분(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구원받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느냐? 이게 또 중요하거든, 이런 것을 우리 머리 속에 언제든지 넣어 있으라고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일으켜 세워야 됩니다. 우리는 영접하면 끝나는 줄 압니다. 영접한 이후에 더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있지요 구원받은 이후에 비밀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기존 신자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EBS 양육 2).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단계( 53:5, 요사 1:2), 그 다음에 믿는 단계, 세 번째가 영접하는 단계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이 내주 합니다. 그 성령은 영원히 거합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마귀권세에서 해방합니다. 우리의 내세를 보장합니다. 네번째가 시인하는(고백하는) 단계(로마서 10:29), 그 다음에 나타내는 단계거기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다락방 개요 수영로 89).

평가

다락방에서 영접이란 말은 요한일서 3 8절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마귀 쫓아내기 위해 오셨고 3년 동안 마귀 추방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능력이 오고 기도응답을 받는다는 논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에서 영접하는 자나 곧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는 말은 현재 분사형으로 동격을 나타내고 중복성이 아닌 지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류광수 씨는 여기의 영접과 믿음을 별개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단계를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어디서 왔겠는가? 그의 말대로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인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성경요도(聖經要道) 1권을 보면

 “요한복음 1:12 복음과 주 예수의 구속에 찬성하더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여길 수 없다. 믿음에 찬성과 인정함이 포함되었지만 믿은 그 자체는 영접이 아니다. 찬성과 것과 인정한 것이라 해서 반드시 영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접한 것은 반드시 찬성하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접만이 믿음이다(p.105106)”고 하였다. 류 씨 역시 그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기성교회 성도들이 빠져버린다.

수십 년 예수님을 믿었으나 영접하지 못했다는 착각에 빠져 교회를 불신하고 다락방의 메시지에 심취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류광수 씨의 메시지에 감화를 받아 지금까지의 교회생활과 신학교에서의 말씀의 연단과정도 헛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구원의 비밀을 깨닫는 것과 예수 영접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므로 아직도 교회 다녀도 주님을 모르면 다시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은혜를 받았다고 좋아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상 중생은 단 한 차례 일어나며 그가 말하는 영접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성화과정에서의 새로운 은혜의 체험으로 보아야 될 것이다.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체험적 신앙이 분명히 있으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 즉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의 차원이라 할 것이다.

교회관에 왜곡(기성교회는 전도가 없는 사단의 교회로 간주)

그의 주장

그의 기성교회관은 심각하다.

한국교회 98%가 지금 시험에 들었습니다. 한국교회 90%가 싸움에서 쪼개져 생겼대요. 그것도 내가 낸 통계가 아니고 책에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교회 98%가 마귀한테 잡혔어요 인기, 명예 따라 움직이면서 복음하나도 안전하고 복음전하는 것 다 막고 너무 한국 교회가 컬컬해요(다락방 개요 수영로11).

영의 세계를 똑바로 모르는 교역자는 무당보다 못해요(다락방 개요 수영로8).

마귀 손에 붙잡힌 사람은 집사가 돼도 변화 안됩니다. 마귀 손에 붙잡힌 사람은 장로가 변화 안됩니다(다락방 개요 수영로8).

마귀가 이것을(다락방) 막습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지면 안돼요다락방은 마귀가 막습니다. 저는 15년을 해 왔는데 제게 훈련 받은 교역자들이 많아요. 음으로 양으로 하다가 그만둬요. 주로 그런 사람 보면 잡탕교인 만들어요(다락방개요 수영로9).

나는 여태까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싸움하는 것만 보았거든여가 천국이지 싸움하는 곳이 보수 신학인가? (다락방 개요 수영로 7).

평가

전장에서 다락방 전도 운동의 성격을 분석하였듯이 류광수 씨의 교회관은 잘못되어 있다. 그는 기성교회는 사단이 역사하는 종교로 간주하고 교회의 중직자에 대하여 상당한 혐오감을 노출하여 왔다.

자신들은 진정한 복음운동을 하고 자신은 전도를 위한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가르치나 그의 교회관은 어릴 때의 잘못된 시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하겠다.

자신의 인장이 찍힌 일련 번호가 부여된 핵심 요원만이 진정한 복음의 일꾼이라고 호도하는 것도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평신도로서 장로가 되었다면 목사님을 잘 섬겼을 것이란 말도 하고 있으나 그는 본래 교회의 목사와 장로 때문에 교회 출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면 그가 기성 교회를 무시하고 자신의 운동만 부각시키면서 균형과 합력하여 주의 나라를 이뤄야하는 덕목은 팽개쳐 버렸다. 그의 다락방 전도 운동은 선풍적인 일시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도간의 이간 및 반목질시, 심지어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인데( 3:1318), 그가 주도하는 전도운동은 결국 교회에 유익보다 어려움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단과 교회에서 진정한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총회와 노회에서 다루고 있는 등 해결의 기미가 있어 다행이라 하겠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류광수 씨의 다락방 전도 운동은 비개혁주의 신학 사상이요, 나아가 비복음주의적이며, 균형을 잃은 신학이라 하겠다. 이는 류광수 씨가 심취하고 수용했던 여러 단편적 사상이 혼합주의 형태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의 신학은 성격상 체험과 증거를 강조하는 감정신학이며, 사단, 마귀, 귀신을 중심으로 인간의 죄와 구원을 풀어가는 일종의 사단신학 내지 축사(逐邪)신학이라 하겠다. 결국 교회사에 자주 등장했던 유사(類似) 기독교 운동 내지 사이비(似而非) 기독교 운동의 특성을 지닌다 하겠다.

전도는 류광수 씨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의 마지막 지상 대명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 복음운동을 열심히 해왔다. 하나님은 자기가 세우신 몸된 교회운동을 통하여 구속 역사를 계속 진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성령이 역사에 순종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날, 구속의 목적이 성취되는 날 그 일은 끝날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목장에서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주님의 양무리를 인도하고, 온 성도는 목자와 더불어 성경적인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