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 안에 무당(은혜로선교회, 신옥주)의 비판
이인규
1) 기독교를 무당이라고 한다.
필자는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이 열고 있는 현상적인 집회와 예언, 계시등에 대해서 그런 행위는 기독교의 무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 무당>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신옥주도 동일한 표현을 한다. 그러나 필자와 신옥주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필자는 신사도운동과 빈야드운동이 추구하는 기적과 표적, 신비주의와 예언등의 현상을 강조하는 자들을 ‘무당‘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옥주는 일반 기독교의 가르침과 신학 자체를 대상으로 ‘무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신옥주는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신학을 ‘도의 초보‘라고 말하며, 도의 초보를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개독교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의(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우리들은 성경을 통하여 2천년 전에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육체로 오신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저 보이는 이스라엘 땅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승천하셨고 반드시 다시 강림하실 것은 다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알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인 구원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년간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말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하는 말이다. 지난 날 필자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렇게 믿어왔고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었다. 그러나 이렇게만 성경을 보고 듣고 믿고 전하는 것은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이다.(히브리서 6:1-8절 참고) 이처럼 도의 초보적인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믿는 단계는 성경적으로 말하면 아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영적인 상태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개독교라는 욕을 듣고 있는 것이다.(교회 안에 무당, 18-19쪽)
과연 히브리서 6장1-2절이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뜻이며,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개독교의 사상인지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6:1-2)
히브리서 6장1-2절을 살펴보자. 과연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뜻일까?
이단들은 오역하는 성경구절은 언제나 동일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그리스도 도의 초보란,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이라는 것이며, 즉 이단들은 회개할 필요도 없고, 신앙과 세례와 부활과 심판도 모두 초보를 위한 것일뿐, 실제로는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영어성경(KJV와 NIV성경)을 보자.
그 구절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너무나 당연한 교훈이므로) 성숙(완전)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자는 뜻이다.
Go on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NIV)
Let us go on unto perfection,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KJV)
[공동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현대인의성경]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납시다. 행위를 회개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기초를 다시 닦지 말고 성숙한 데로 나아갑시다.
즉 초보적인 지식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뜻이며, 초보적인 지식에서 떠나라는 의미이며, 오히려 “다시 닦지 말고”라는 구절에서 “닦다”는 단어는 “카타발로”로서 “to throw down”(아래로 던지다, 내려가다)는 뜻으로 ”아래로 던지지 말라“는 뜻이 된다. 즉 신앙과 부활과 세례와 심판에 대한 교훈을 아래로 던지지 말고(버리지 말고), 신앙적 성숙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라는 의미가 된다.
2) 신옥주가 영적으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뜻
그렇다면 신옥주가 주장하는 영적으로 거듭난 내용이 무엇일까? 그의 책과 설교동영상에서 계속적으로 발견되는 이단적 기독론과 양태론, 즉 지방교회와 같은 사상, 즉 예수와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양태론과 이단적인 기독론이 거듭난 내용이며, 초보적인 지식을 벗어난 것인가?
– 지난날 우리들이 성경을 가지고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었던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가 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진리의 성령님이시다. 즉 육체로 오신 예수님(인성)은 그리스도(신성)이심을 진리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분은 진리의 성령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진리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진리대로 깨닫게 하시고 영혼이 거룩하게 되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 무당, 20-221쪽)
– 또한 이들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께 속한 영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 여기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분별하는 방법은 육체로 오신 예수(인성)는 그리스도(신성)라고 성경을 가지고 방언도 하고 방언통역을 해야 한다.이렇게 전해야 강단에서 말의 실수를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무당, 110-111쪽)
– 즉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가셔서 보내주신 진리의 성령님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육체로 오신 예수(인성)는 그리스도(신성)라고 깨닫도록 하시는 일을 하신다.그리고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하신 일을 더 구체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본문이 다음 말씀이다. (요16:13) (교회 안에 무당, 74-75쪽)
3) 엉터리 해석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구절의 엉터리 해석)
– 그래서 진리를 진리대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성경적으로 마지막 때인 지금 이 시대는 “인자의 날”로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대로 정말 진리를 진리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드문 시대이다.(교회 안에 무당, 32쪽)
본문은 “지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가 세상이 올 때”를 말하는 것이며 그 때에 믿음을 볼 수 없다는 뜻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의문문 형태의 강조법으로서 예수가 오신다고 하는 것이 늦어지더라도 그 때까지 믿음을 지킬 사람들이 있겠는가?(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를 갖는다. 신옥주는 지금 시대에 진리대로 믿는 자가 없다는 왜곡된 해석을 하므로서, 자신의 가르침이 곧 진리대로 가르치는 믿음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4) 절기의 해석
더욱이 구약의 절기를 현재 시간표로 해석을 하는 신옥주는 지금이 속죄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이 신옥주의 책에서 발견되어진다.
신옥주가 가르치는 절기표를 보면, 2001년부터 나팔절이 시작되었고, 2010년부터 속죄절이 시작되었으며, 초막절은 2015년부터 시작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나팔절은 이미 지나갔고, 속죄절은 지금 지나가는 중이며, 조금 있으면 모든 절기가 다 지나가게 된다는 이상한 주장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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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 속죄일이라는 주장)
– 제발 대 속죄일이 다 지나기 전에 이 시대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시간에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교회 안에 무당, 60쪽)
– 전체를 종합하면 호리는 말(아첨하는 말)을 하는 교회 안에 무당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일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 정하신 때가 지금 이 시대인 “인자의 날이요, 심판의 날인 전 우주적인 일곱째 날이며, 대 속죄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 안에 무당들에 대한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교회 안에 무당, 81쪽)
5) 천사가 사람이며, 성령의 음성을 전하면 천사이다?
(천사가 사람이며, 성령의 음성을 전하는 사람이 곧 천사이다)
– 창세기 18-19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그 천사를 두고 “내 주여”라고 말한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가 주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전하기 때문에 그 천사를 통한 말(설교)을 주의 음성, 즉 성령의 음성으로 들은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교회 안에 무당, 65쪽)
수5:14에서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대장을 만나 “내 주여”라고 말하는데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사람인가?
시편110:1에서 다윗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였는데, 내 주가 사람인가? 예수님은 사복음서에서 내 주가 선재하신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신옥주는 “주”라고 부르면 천사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성령의 음성으로 말하면 주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주”라는 단어의 용법조차 모르는 무지함을 보여주고 있다. 주는 히브리어 아도나이, 아돈, 또는 헬라어로 퀴리오스, 데스포데스가 사용되었는데, 이 주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예수뿐 아니라 상급자나 주인, 소유자, 선생, 심지어 남편을 부를 때에도 사용되었다.
(아도나이, 아돈, 창18:12 주인, 창23:6 내 주여, 창24:9 주인)
(데스포데스, 딤전6:1 상전, 딛2:9 상전, 벧전2:18 주인, 딤후2:21 주인)
(퀴리오스, 엡6:5 상전, 골3:22 상전)
– (계시록22:8-9절 인용) 이렇게 사도요한과 천사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적으로 분별해보면 요한에게 나타난 천사는 확실하게 당 시대에 함께 된 종 즉 사람이라는 증거가 확실하다. 또한 천사가 당 시대에 사람이라는 증거가 다음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시록 21:17절에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천사는 곧 사람이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성경적이다. (교회 안에 66-67쪽)
본문은 “사람=천사”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측량 = 천사의 측량”이라는 뜻이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144규빗이 사람의 척량이며 곧 천사의 측량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혀와 개의 혀가 같다”고 하면 “사람 =개”가 되는지 묻고 싶다.
– (계시록 7:13-14절 인용) 위 본문에서 사도요한도 확실하게 장로 중에 하나에게 말하기를 “내 주여”라고 말한다. 본문 앞뒤 문맥 전체를 보면 사도요한과 장로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요한에게 장로가 질문하기를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요한이 대답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사도요한도 자기에게 나타나서 질문하는 장로가 하는 말(설교)을 주의 음성 곧 진리의 성령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내 주여”라고 말하는 것이다.(교회 안에 무당, 67-68쪽)
창24:18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서 물을 청하였을 때에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내 주여”라고 한다. 물을 달라고 청하는 아브라함의 종 목소리를 성령의 음성인가?
창43:20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내 주여”라고 하는데, 요셉의 집 청지기가 성령의 음성으로 말하였는가?
삼상1:15에서 한나에게 술이 취했다고 핀잔하는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는 “내 주여”라고 하는데 엘리 제사장의 음성은 성령의 음성인가?
이러한 이상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신옥주는 ‘천사‘이고 ‘주‘로 불려져야 한다는 뜻인가? 혹은 자신의 주장이 성령의 음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6) 그릇이 두가지라는 신천지와 동일한 이원론적인 주장
–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은 크고 넓게 보면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성령의 도구로 쓰시는 주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대한 예를 들면 성경을 기록한 인물들이다. 다른 한 부류들은 악의 영들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천한 그릇들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기록되어 있다. 증거로 다음 말씀을 보자. (딤후2:20-21) (교회 안에 무당, 105쪽)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4:8)
그릇에 대한 비유를 신천지는 이상한 의도와 고의적인 목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천지를 ‘하나님의 그릇’이라고 해석하여 ‘진리를 담고 전하는 사람’으로 보며, 기독교를 ‘사단의 그릇’으로 해석하여 ‘비진리를 담고 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사야 64:8, 롬 9:20-21에서 언급하는 멧세지는 그릇이 무엇을 담느냐는 내용도 아니고, 두 가지의 그릇으로 구별하자는 것도 아니며,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뜻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역사하시는 주권적인 통치와 권세를 상징한다. 귀하게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은 하나님과 사탄의 그릇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뜻한다. 동일한 해석을 신옥주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21)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 18:3-6)
신옥주는 기독교를 악한 영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하고, 자신을 성령을 담는 그릇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신천지의 비유풀이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