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가톨릭) 교리 비판
이인규
1. 마리아의 위상
카톨릭에서 마리아의 위상은 예수의 육신적인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거의 신격화 되어있으며 카톨릭 성도들은 마리아의 동상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신격화에 대한 개신교의 비난에 대해서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최상의 존경을 드리자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그러한 ‘존경’의 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카톨릭 교인들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카톨릭에서 마리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상상하고 추측하는 정도뿐이 아니며, 매우 심각하고 지나치다. 이 실상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필자주–마리아에 대한 카톨릭의 공식자료를 곧 별도의 글로 올릴 예정이다)
본인은 이 마리아에 대한 교리가 카톨릭의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라고 생각한다.
한때, 이탈리아 남부지방에서 마리아 돌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순례자가 들끓게 되고 큰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눈물의 성분을 조사하자 올리브기름으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십수년 전에 우리나라 나주에서는 마리아상이 피눈물을 흘린다고 하여서 테레비젼 방송국에서 조사팀이 이것을 보도하게 되었는데, 그 피를 손수건에 묻혀와서 성분조사를 하였더니, 두가지 이상의 짐승의 피라고 판명되었던 적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마리아 동상의 눈물 사건이 매스컴을 탔는데, 그럴 때마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그 사건은 다시 그 신앙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과학적인 성분조사를 하게되었을 경우에는 항상 인위적인 가짜로 판명되어지며, 그럴 경우 카톨릭 교황청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발표한다. 물론 조사를 하지 않았거나, 조사를 거부하는 이유 등으로 과학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던 사건들은 아직도 기적이라고 불리워 진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사건이 수없이 많았는데, 우리가 잊어서 안될 중요한 점은 마리아는 신(神)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자.
마리아의 현현은 기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접행위와 초혼과 같은 박수, 무당적인 행위는 성경에서 절대 금하고 있다는 것임도 잊어서는 안된다.(레19:31, 20:6, 20:27, 신18:11, 왕하21:6, 23:24, 대하33:6, 사8:19) 성경은 그러한 신접, 초혼, 박수와 무당행위에 대해서 죽이라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카톨릭은 가장 비성경적이며, 가장 비기독교적인 초혼, 신접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카톨릭에서 변명하듯이 마리아가 다만 예수의 육신적인 어머니라고 받아들인다면, 마리아는 인간임이 분명하며, 그녀는 단지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여인이며, 그렇다면 마리아의 돌상이 눈물을 흘리거나, 특히 마리아가 다시 나타나는 사건은 반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인 사건이 분명하지 않는가? 만일 어느 교회나 단체에서 베드로나 요한을 신격화하거나 신앙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기도를 드리는 단체가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이단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단체가 카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용납되어져야만 하는가? 마리아는 예수의 육신적인 모친이였지만, 그녀는 단지 죽은 여인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카톨릭은 특히 이러한 기적을 조장하는 미신적인 행위가 유난히 많은데, 극단적인 경우를 살펴보자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교황 피오12세는 태양이 몇분간 춤추는 기적을 보았다고 간증하며 매스컴과 신문등에서 이것을 대서특필하게 되므로 카톨릭은 많은 호사가들의 관심의 집중을 받는다. 그러나 그 춤추는 태양을 본 목격자는 불행하게도 피오 12세 혼자였으며, 아무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이 만일 그렇게 흔들린다면 지구는 심한 통신두절과 전자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며, 지구는 인력의 영향으로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카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마리아는 카톨릭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다. 교인들은 실제로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자비로운 마리아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카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마리아론, 즉 현재 카톨릭교회가 그들의 교리서를 통해 직접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론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첫째,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지냈다.
둘째,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무염시태론: 마리아를 잉태한 태도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주장)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하늘로 승천했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며, 하늘의 황후로서 공경받아야 한다.
다섯째, 죄사함과 심판, 구원의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는 주님과 공동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중보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사단이 가장 무서워 하는 원수가 된다.
첫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을까?
카톨릭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 보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로 시작하고 있는데, 성경은 예수님에게 형제와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동정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13:55, 참고: 막3:32, 막6:3, 요2:12, 요7:5등)
요셉은 목수였다. 즉 목수인 요셉과 모친이었던 마리아의 사이에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아들들(최소한 4명)과 누이들(복수형)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수를 잉태할 때에 마리아는 동정녀가 분명하며, 이것은 성경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카톨릭의 주장은 명백한 비성경적이다.
“비성경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언급되어지지 않은 것을 임의로 사실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만일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면, 예수에게 형제와 자매는 없어야만 한다. 카톨릭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와 누이를 사촌이라고 주장하는데, 성경의 기록을 그렇게 변명하며 부정하는 것은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위의 성경본문은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비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향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며, 그의 아버지와 어버니, 형제와 누이를 통하여 그의 그 가르치는 지혜가 어디서 왔는가 하면서 그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의미로 언급되어진 것이다. 즉 예수의 직계가족인 부모형제를 통하여 그의 신분을 재확인하는 것이며, 굳이 사촌이나 친척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다고 익히 알려져 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더라”(마1:25)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을 낳은 후도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있었다는 성경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 카톨릭은 위 본문이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하였다는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는데, “까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헤오스라는 전치사는 till 혹은 until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비성경적인 주장을 카톨릭이 하는가?
유일한 성경해석권을 가진 역대의 무오류한 교황이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인들은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무오류한 교황이 이렇게 공식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의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는 사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카톨릭의 주장이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 외에 그 누이와 형제도 낳았다면, 마리아는 더 이상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어지지 못하며,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주장인 마리아 무원죄설과 무염시태설과 셋째 주장인 마리아 승천설을 보자.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었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니라 ”(롬5:12, 14)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 마리아가 원죄가 없다면 마리아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존재라는 것과 같다. 즉 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죄가 없어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여야만 된다.(누구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므로)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을 뿐이며 삼위하나님만이 죄가 없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인간은 누구에게나 죄가 있다. 성경은 매우 많은 곳에서 그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20:9)
“하나님 한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8-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3)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카톨릭인들은 에녹과 엘리야도 승천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물론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사항이므로 마리아와 비교되어질 수 없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게 에녹과 엘리야를 승천시킬 수도 있고, 모세와 같이 그 시체를 보이지 않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기록은 어느 성경에도 없으며, 더욱이 마리아가 죄가 없다는 기록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마리아가 죽은 후 사도들이 모여 관을 열자, 마리아의 시신이 없었다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다소 황당한 전승에 의하여, 카톨릭은 마리아의 승천이라고 주장하고 동방정교는 마리아가 안식에 들어갔다고 주장을 한다고 전해진다.
만일 마리아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것을 금지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마리아가 믿음이 신실한 여인이며 은혜를 받은 여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리아는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특히 예수가 돌아가신 후의 초대교회에서의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나 영향력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마리아는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적도 없으며, 사도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믿음을 받는 신앙의 대상은 성삼위일체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이젠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마리아의 사역에 대한 카톨릭의 공식적인 견해를 알아보자.
다음의 카톨릭의 주장은 정말로 우리에게는 놀랄만한 일이다.
▶ [교회헌장] 66. 마리아께 드리는 특별 공경
4. 교회내의 마리아 공경
66.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옛적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받으시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카톨릭 교회 헌장 중에서)
성자 다음의 위상을 가진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고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인 것으로 공경되어진다는 것이다. 카톨릭의 공싣입장은 “성자 다음의 위상이며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다”고 되어있으며, 모든 신도들이 그녀의 보호를 받으며 도움을 청한다. 물론 마리아는 은혜받은 여인이었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선택된 여인이었으며,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어머니이다. 다음의 카톨릭의 글을 보면 카톨릭에서 마리아가 어떻게 간주되는지 명백하게 밝혀진다.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서 인류구원을 하시며,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한다고 가르치며, 또 그리스도의 왕국도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고 카톨릭은 가르치며, 카톨릭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마리아가 회개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마리아는 구원과 죄사함과 재림과 왕국의 사역을 담당하며 교인들의 기도를 받는 신적존재인 것이며,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 <성모님께 기도 드리는 이유>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 드려야 하는 이유
1. 성모님의 역할
1)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을 마리아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셨다.
– 천주 성자가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그랬고,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실 때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셨다 (마리아께서 육체적으로 죽으신 것은 아니나 어머니로서 육신보다 더한 정신적 죽음을 당하셨다)
2)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기적을 시작하실 때도 마리아를 통해서 하셨다
–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기적을 시작하기 원하셨음을 알게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의 입을 통해 성자가 되게 하셨으니, 마리아가 말을 하자마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성령을 받아 거룩해졌기 때문이다.이는 초자연계에 있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이며 가장 큰 기적이었다. 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와같이 세상 마칠 때까지 당신의 기적을 마리아를 통하여 행하실 것이다 (성 루도비꼬)
3) 그리스도의 왕국은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
–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길이므로, <그의 재림에도 비록 방법은 다르겠지만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오실 것>이다.마리아는 세상 종말에 자비와 권능과 은총에 의하여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마리아는 자비로써 천주의 가련한 죄인들과 길 잃은 자를 카톨릭 교회로 회개시켜 맞아들일 것이다. 유혹과 협박으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멸망하게 하며 반역하는 천주의 원수들에 대해서 마리아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악마들에게 맺어준 <가장 무서운 원수>이시다. (성루도비꼬)
–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신가? (레지오의 까떼나 성모 신심 봉사회에서 발행)
예수님께서는 아주 효성이 지극하셔서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청을 올리면 예수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주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대신 들어주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와 같은 예를 카톨릭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의 부탁으로 예수가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로마의 백부장의 부탁을 들어주어 그 하인의 병을 낫게 해주었으니, 우리는 로마의 백부장에게도 기도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을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다만 포도주가 잔치도중 떨어졌음을 말했을 뿐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는 칭호로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오직 한분 예수님이라는 성경구절을 무시하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적인 기능을 하는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모친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오직 한분의 중보자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도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라“(딤전2:5)
마리아의 교리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용서되지 않는 사건이 마리아에게 나아가면 용서를 받게된다는 것이다. 즉 카톨릭인들에게 마리아는 “사랑과 자비로써 용서하여 주는 어머니”이며 “예수께 간구하여 주시는 어머니”가 되어진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만이 진리요 생명이며 길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카톨릭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의 기록과 전혀 반대적인 입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만일 하늘로 가는 길이 예수가 아니고 마리아가 된다면, 이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주장이 되고 만다는 것을 카톨릭인들은 왜 모를까? 카톨릭인에게 과연 진리란 성경말씀인가? 다음의 글도 카톨릭 교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공식주장이다.
– 성모님은 은총의 중재자이시다. 우리는 모든 참된 속죄의 기도가 성모님을 통해서도 주님께 전달됨을 믿는다. 교황 분도 15세는 1917년 5월에 ‘모든 은총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처한 이 시련의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고통을 받는 성모님의 자녀들이 생생한 신념을 가지고 위대하신 천주의 모친께 간절히 호소의 기도를 올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에 8일 후에 파티마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파티마는 모하멧의 딸의 이름이며 포르투칼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당시 이스람교들이 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할 때에, 카톨릭과 회교는 평화중재협상을 갖게 된다. 즉 회교들은 터어키를 카톨릭에게 양보하고, 카톨릭은 레바논이 아랍영토에 속하도록 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 후 카톨릭은 터어키와 포르투칼, 스페인지역에 회교도들의 간섭이 없이 카톨릭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경, 포르투칼에서 갑자기 사회주의의 세력이 강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사회주의의 출현은 카톨릭을 매우 당혹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음에 분명하며 사회주의는 카톨릭을 정면으로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은 난국에 봉착하게 된다. 이스람교와 협상을 하여 레바논을 포기하면서 얻은 포르투칼이 사회주의의 드센 영향으로 말미암아 카톨릭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1917년 성모마리아가 파티마라는 마을에 발현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많은 군중들이 파티마에 몰려들었고, 그 사건은 온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파티마는 성지순례자들의 발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실패를 겪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의 카톨릭의 여인뿐이었다. 훗날 쉰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그 사건을 회상하였다.
“파티마의 성모마리아의 출현은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어려운 회교도들 3억4천7백만명에게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로부터 죽은 여인 마리아는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그 효과는 항상 기대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교회 안에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발전된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시 종교에 여신 숭배 정신이 있었는데, 여신 숭배 정신이 카톨릭교회 안에 여신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 숭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 숭배는 기원을 찾아 들어가면 원시 종교의 여신 숭배에 기원이 있다는 것이며,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데메터(Demeter)라고 불리는 이방여신이 있었는데 “신의 어머니”라고 불려졌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인 데오토코스(theotokos)라고 부른다.
비록 거부되었지만, 최근에 카톨릭 내부에서는 마리아를 차라리 신으로 추앙하자는 과격한 견해도 있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카톨릭은 칼케톤신조를 개신교인들도 인정하지 않는가하고 묻는다.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셨고, 그리고 지금 마지막 날에 와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의 인성(anthropoteta)면에서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이시다.”(칼케톤신조)
칼케톤신조를 개신교가 인정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것이다.
어쨋든 마리아가 인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한 것은 칼케톤회의이며, 그러나 칼케톤회의는 예수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즉 마리아는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서의 육신적인 어머니”일 뿐이다.
그후 마리아의 무염시태론은 1854년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회의 결렬한 논쟁 끝에 공표되었으며, 성모승천교리는 20세기 중엽이후에야 발표된 내용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육신적인 모친이었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전승에 의거하여 원죄없는 여인이 되었고, 20세기가 되어 하늘로 승천한 것이다.
마리아의 위상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는 점점 발전되어지며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포오드가 어느날 카톨릭신자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왜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를 물었다. 그 카톨릭신자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와 가까운 국무총리나 비서실장 같은 고위층 관리를 통해서 부탁하는 것이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그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포오드는 “대통령의 자녀도 국무총리나 비서실장을 통해서 만납니까”라고 묻자 카톨릭신자는 답변을 못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집단들이 그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또다른 중보자 혹은 예수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카톨릭은 예수와 인간 사이의 또다른 중보자를 마리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칠성사
카톨릭은 7가지 성사를 갖고 있으며,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식 두가지만 인정한다.
카톨릭이 인정하는 7성사는 세례, 성체(성찬), 신품(성품), 고백(고해), 견진, 혼인, 종부(병자)성사인데, 성찬에 대해서는 별도의 문제로다루어 볼 것이며, 또 신품(神品)성사라는 것은 신부가 되는 예식을 말하며,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말하는데 신부와 수녀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특히 카톨릭은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없어지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카톨릭의 7성사는 모두 죄를 사하여주는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세례성사 : 물로 이마를 씻는 예절로 이루어지는 성사로, 이 성사를 받는 사람은 원죄와 본죄, 그리고 죄에서 나오는 벌까지 모두 용서를 받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가톨릭 교회의 정식신자가 되어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가톨릭 교리 사전, 박도식, 가톨릭출판사, 2012년, 168쪽)
이와 같이 죄를 사하여 주는 은총을 카톨릭의 신학적 용어로 ‘성화케 하는 은총’ 또는 ‘의롭게 하는 은총’(Justifying grace) 이라고 말하는데 “세례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수단”이며 “의롭게 하는 은총이 영혼에 주입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첫째 고백성사라는 것이 있다.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에게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카톨릭교회에 교리에 의하면 세례에 의해서 원죄가 사해진다고 하며, 성찬식을 통하거나, 또 이런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진다고 기록되어있다. 카톨릭의 교리서를 보면,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카톨릭은 죄에 대해서 대죄와 소죄로 구별하는데,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를 일컬어서 대죄라고 하고, 소죄는 조금 가벼운 죄를 가르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살인, 간음, 거짓말, 도둑질, 미사불참 이런 것들은 대죄에 해당되는데, 이런 대죄를 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부에게 가서 고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고해성사는 유럽에서 켈트족을 선교할 때에 한 방편으로서, 그들의 도덕생활이 저속하고 문란하므로, 비밀고해를 대중화시킨 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레오1세(440-461)이후에는 사제앞에서의 개인고백이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좋지 못한 윤리적인 소문으로 인하여 강요되지 않았으며, 763년 메츠주교에 의하여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지금은 이러한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만 한다고 카톨릭은 가르친다. 즉 반드시 신부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당사자는 구원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즉 카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만이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세례를 통해 사제가 원죄를 사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부가 대죄를 사하는 것이 된다. 또 미사를 드리며 성찬을 할 때,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 죄가 용서되는 순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비록 신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노라”고 대리적인 선언을 한다고 하여도, 신부를 통하여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신부의 “네 죄를 사하노라“ 라고 말할 때에 죄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카톨릭교회는 면죄부를 취소한 적이 없다.
중세 때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는데, 물론 지금은 카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더 이상 팔지는 않고 있다. 단 ‘면죄부‘란 말은 원래 ‘보상‘ 혹은 ‘대사‘(Indulgence)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죄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종의 보상적인 행위를 가르키며, 결론적으로는 지금까지도 면죄부, 즉 보상은 공식적으로 취소된 적이 없다.
다음은 “대사”에 관한 카톨릭의 공식적인 주장이며, 그러므로 면죄부는 판매는 하지 않고 있더라도 지금도대사, 보상에 대한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대사(大赦, Indulge): 환자가 수술을 했어도 상처에 따르는 고통을 치루듯이 우리 영신에도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에 해당하는 보속(補贖)을 치워야 한다. 이 보속은 극기, 기도, 희생으로 할 수 있으나, 교회가 공식으로 베푸는 대사를 받으면 그에 해당되는 만큼의 보속이 면제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범죄했을 때 고백 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았어도 보속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 성녀의 공로로 보속의 일부, 혹은 전부를 면제해 주는 은사(恩赦)를 대사라고 한다. 보속(잠벌 : 暫罰)의 전부를 없애준 것을 전대사, 그 일부를 없애주는 은사를 한대사(限大赦)라 한다. 예를 들어, 전대사(全大赦)는 카톨릭 기도서에 있는 대사를 얻기 위한 기도를 미사 영성체 후 바치고, 교황의 뜻대로 주모경, 영광송을 바치면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대사 중에 70일 대사라면 이는 초대교회에서 범죄한 자에게 공적으로 정해준 보속기간이었는데, 그들이 공적으로 70일간 보속했던 것에 해당하는 만큼 감면받는 은혜를 말한다. 대사는 <죽은자를 위해서 양도할 수 있고> 1일 1회에 한한다. 만일 세상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연옥에서 해야 한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성베드로의 성당의 건축비 모금과 자신의 호사스러운 귀족적 취미를 위하여 면죄부를 확대하기로 결심하는데, 면죄부가 잘팔려지지 않자 면죄부 전담상인을 두었다. 도미니크의 테첼이라는 독일의 수도사가 비텐베르크 근방에서 면죄부를 팔게 되었는데, 면죄부를 사게되면 천국에 가게 된다고 주장하다가 마틴루터가 마침내 그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것이 마틴루터에게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는 사건은 너무나 잘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세 때의 십자군 때에도, 십자군에 참여하면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였는데, 면죄부 역시 그러한 것과 동일하다. 즉 결론은 면죄부를 사게되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사함은 교황이나 신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받으며,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내면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이러한 것의 첫째 원인은 교회와 신부가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카톨릭은 종교개혁의 대책을 토의하기 위하여 트랜트공의회를 열게 되는데, 면죄부에 대한 비판과 토론이 있자 “면죄부의 남용과 오용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결정이 있었고 그 효력은 아직도 유지된다. 즉 면죄부는 아직 취소된 적이 없으며, 고해성사의 대사제도는 아직도 있는 것이며 아직도 보상적 행위나 헌금등으로 죄사함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묵주를 돌리며 사도신경을 1000번 외우라는 행위나 교회를 청소하라는 행위로 죄사함이 되어질수 없다. 결론적으로 면죄부 사건은 신부가 직접 죄를 사하여 준다는 비성경적인 논리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점을 마틴 루터는 그의 95개 항의문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카톨릭에서 말하는 루터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이다.(인터넷 카톨릭 동호회의 자료실에서 직접 발췌한 글이다)
12.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1505년 수도회에 들어간 루터는 수도회 신학원 교수의 권고로 새로운 방법으로 등장한 유명론신학(唯名論神學)을 탐구하였다. 유명론의 교의신학에 의하면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이루고, 인간의 이성은 무력하여 사람은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구원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능은 무능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만이 만물의 근거가 된다.루터는 이렇게 오도(誤導)된 신사조(新思潮)를 받아들여 나중에 자기 나름대로 ‘성서만‘ ‘은총만‘ ‘신앙만‘이라는 ‘3유일사상‘을 내세웠다. 아울러 유명론의 구원관은 인간노력을 강조하며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도 의화될 수 있고 선행을 통해 쌓은 공로로써 구원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엄청난 왜곡이다. 루터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 대신에 노예의지를 주장한 사람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주장한 것이 무엇이 “오도된” 신사조라는 말인가? 오히려 그들 카톨릭이 “선행에 의한 공로주의”를 주장하면서, 루터가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고 인간노력을 주장한다고 오히려모함을 하고 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에서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다음은 루터가 면죄부에 대해서 잘못 알았다는 카톨릭의 공식주장이다.
– 루터는 성(聖) 베드로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교회 관습대로 반포된 대사의 시행에 있어서 신자들이 대사의 참된 의미를 잊고 면죄(免罪)의 효과를 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는 대사를 시행한 대주교와 교구장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자들이 대사를 오용(誤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대사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요청하였다.
카톨릭의 주장대로 보면, 면죄부는 단지 교회 관습대로 반포된 대사의 시행이었고(이들은 면죄부를 ‘대사’라고 번역함) 신자들이 대사의 참된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다고, 루터에게 뒤짚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즉 교회의 잘못이 아니라 루터와 신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개신교의 목사들이 카톨릭과 면죄부를 오해하여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카톨릭은 면죄부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교과서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루터의 95개 조항이다
다음은 루터가 1517년 만성절(All Saint’s day)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앞에 걸었던 95개 조항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로 씌어진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인쇄, 배포되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돈과 행위로 살 수 있는 면죄부(대사)를 비난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 1 5 1 7 –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밝게 드러내려는 열망에서 아래의 논제들은 문학석사이며 신학석사인 말틴 루터에 의하여 비덴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루터는 그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 받은 바 있다. 그는 직접적으로 토론에 참여 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없다. 만일 그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을 외적으로 억누르지 못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 (참 내적 참회를 계속하는 한에는) 형벌이 계속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한 형벌 이외에는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권세나 의지(意志)를 가지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만을 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때 사함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할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 [제벌(諸罰)에 대한 교회의 규정]에 의하여 부과 되어서는 안된다.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죽음과 곤궁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교황의 법령에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임종(死)에 처한 자에게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어진 것이라고 보인다.(마13:25)
12. 종전의 예로서 종교상의 벌은 진실한 회오(悔悟)의 증거로서 사면의 후자(後)가 아니라 전에 부과되었던 것이다.
13. 임종에 처한 자는 죽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며 교회 법령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그 법령의 형벌에서 정당하게 자유 해방된다.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이 불안과 공포만으로도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그 고통은 절망의 공포에 매우 가까운 때문이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 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17.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목사는 자기의 감독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교황이 열쇠(천국)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사실 그와같은 힘이란 이런 경우에는 아무 필요도 없지만),대도(代禱)의 방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린(St. Severin)과 파스칼리스(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히 알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같이 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리켜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정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사–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있다는 허가:역자주)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크리스챤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크리스챤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제6논제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면죄증의 구입을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황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크리스챤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베푸는 이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 만체 지나쳐 버리고(요3:17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 (사고 안사는것은)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서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 위탁자,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 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 개의 방울과 백가지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증을 주는 교회의 보화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또 그 ‘보화‘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도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티어스(St.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보화‘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과 보유사건의 면죄를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한 일이기 떄문이다.
62. 교회의 참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렇지만 이 ‘보화‘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19:30; 20:16; 눅13:30 참조)
64. 그와 반대로 면죄증의 ‘보화‘가 나중 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그러므로 엣날에 있어서 복음의 ‘보화‘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면죄증의 ‘보화‘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면죄증 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높여 부르짖는 면죄증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감독들과 교구목사들은 사도 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 들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이들이 교황이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71. 사도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 지어다.
72.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74. 면죄증을 구실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대단한 능력이 있어 –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만일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라 하더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가르치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교황의 문장(紋章)으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그와 같은 뻔뻔스런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예로써 만일 교황이 베드로 성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기년제(忌年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또는 돈 때문에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 때문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 되었는데 왜 마치 그것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고나 있는 것처럼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은가 ?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 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 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면죄증에는 그것으로써 한 번만 사죄된다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89. 만일 교황이 면죄증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 전부터 주어 오던 증서나 면죄증을 정지하는가? 이들은 똑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크리스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만일 면죄증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Bedenken)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 가라(겔13:10,16; 렘6:14; 8:11; 살전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크리스챤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
즉 면죄부(대사) 사건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의 동기가 되었으며, 카톨릭의 면죄부(대사)에 의한 카톨릭의 교리적인 제반문제는 아직 취소된 적도 변경되어진 적도 없다는 것이다.
또 칠성사 중에는 견진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유아세례를 받았던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면 신부가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는 의식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랐지만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싸우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는 의식을 의미하는데, 이제부터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므로 성령을 그 영혼에 주입하여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해성사를 신부가 죄사함을 주는 행위라면, 견진성사는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아니라) 신부가 전해주는 주입의식이 되어진다. 즉 죄사함과 성령의 능력이 모두 카톨릭의 사제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뜻이다.
또한 종부성사라는 것도 있다. 요즘은 이것을 병자성사라고도 지칭을 하는데, 사람이 죽을 때에 신부가 눈과 코와 귀와 손과 발에 기름을 부으시고 기도를 해주는 예식인데, 이것은 일생토록 눈으로 지은 죄, 귀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손,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의 의식이다. 이렇게 신부가 기도하면 그 죄가 모두 사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카톨릭은 죄사함의해결책이 모두 성사제도에 달려 있는데, 이러한 성사가 모두 죄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죄를 용서하는 제도가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카톨릭교회 이론에 의하면, 사제와 신부가아니면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카톨릭의 칠성사는 모두 사제를 통하여 죄사함이나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것이 되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카톨릭의 사제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마치 제사장을 통하여 제물을 드림으로서 죄사함을 받는 구약의 제사제도와 동일하다.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누가복음18장 9절에서 14절 사이에 보면 세리의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그와 같이 기도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누구를 통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세리는 오직 스스로 자기 죄를 인정하였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고하였을 뿐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누구를 통하여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인 회개를 하였으며 주님은 그 집에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은 평신도가 모두 만인제사장이라는 의미를 말한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10:19-22)
이것은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일이 되어진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만인제사장이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더 이상 죄를 위한 반복적인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다만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뿐이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8)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3. 미사제도와 화체설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카톨릭은 제사의 종교이며, 우리 개신교회는 예배의 종교라는 것이다. 카톨릭이 제사의 종교라는 뜻은 카톨릭은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미사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곧 제사를 의미한다.
그 제사의 핵심은 죄의 용서에 있다. 그래서 카톨릭의 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사를 드리는 핵심은, 죄의 용서를 받는 제사를 매주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거나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카톨릭은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만일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과 살과 피로 변화된다면, 카톨릭이 드리는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실제로 매주마다 반복하여 드리는 것이 되고만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희생제사(피와 살)는 단 한번의 온전한 제사가 아니고, 매주마다 반복해야만 하는 온전하지 못한 제사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문제점이 종교개혁자들의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카톨릭의 공식미사에서 떡은 매주 평신도에게 주는데, 포도주는 주지 않으며 신부들만이 마신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포도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개신교의 경우에는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하여도 아주 적은 량의 포도주를 주거나 떡을 포도주에 적시는 방법을 사용하므로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피로 변화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포도주를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들기도 하는데, 왜 사제들만 예수님의 피로 변한 포도주를 마시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4. 성경
카톨릭교회는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전에는 성경을 번역하는 성서공회를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며, 카톨릭에선 일반 성도들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으며, 일반평신도의 성서 소유마저 금지시켰다(1229년, 툴루스회의).
지금도 성경에 대한 해석은 오직 교황권에만 있다는 것이 카톨릭의 공식견해이다. 이것을 비판하면 카톨릭은 오히려 개신교는 성경해석을 맘대로 하기 때문에 분열과 종파가 일어났지 않느냐고 오히려 역설적인 궤변을 주장한다. 그러나 분열과 종파가 일어나지 않아야만 한다는 주장은, 통일교, 정명석집단, 여호와의 증인안식교같은 이단들이 오직 교주나 지도자의 일률적인 성경해석을 맹종함으로 인하여 분열과 종파가 없으므로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즉 분열이 있는가 없는가가 진리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해도 성경을 일반 교인들에게 읽지 못하고, 오직 교황만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카톨릭의 교리는 분명한 비성경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또한 카톨릭은 성경 66권 외에 외경을 사용한다. 이것은 카톨릭의 연옥, 죽은 자에게 하는 기도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카톨릭은 전승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준다. 이러한 카톨릭의 주장은 트랜트공의회 이후부터 제도화된 공식견해인데, 어떤 전승은 인정하고 어떤 전승은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 객관적인 해석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전체 25회기를 갖는 트랜트공의회는 예수회 중심의 바울3세의 소집으로 반종교개혁, 반개신교의 대책회의로서, 제4회에서 성서와 성문화되지 않은 유전과 전승을 대등한 위치에 두도록 결정하였으며, 결정문 14장에서는 고해의 4단계, 즉 참회, 고백, 사죄선언, 보상의 단계를 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제7회에서 일곱성례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구원에 필수적임을 결정하였고, 제23회에서 교회의 일곱성직제를 확인하며 만인제사장을 부정하였고 제25회에서 연옥, 성인 기원, 성인숭배, 유물, 성상, 면죄부에 대해 이러한 것들을 폐기시킬 것이 아니라 다만 신중하게 사용할 것을 논의하였고, 특히 면죄부에 대해서는 그 비판 때문에 교회의 규율이 약화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즉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부 동요하는 카톨릭 신자의 위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준 공의회가 트랜트공의회이다.
5. 교황제도
그리스도인의 “감독”은 반드시 한 가정의 가장이어야 하고(딤전 3:2),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양떼를 돌보아야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요 21:16, 행 20:28,32).
교황의 호칭은 “아버지”(마 23:9)나 “거룩하신 아버지”(요 17:11)여서는 안되고, “감독”(딤전 3:1)이나 “형제”가 된다.
카톨릭은 앞서 말하였듯이 교황만의 성경해석권을 주장하며, 게다가 교황의 무류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교황은 절대 무오류하다는 것이다. 그 내면적인 의미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권을 계승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바울 3세가 개최한 트랜트 공의회에서 참가했던 모든 성직자들은 아래와 같은 조항을 암송하며 서약하게 된다.
“나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로마교회를 모든 교회의 어머니와 여왕으로 인정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들의 대표자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에게 진정한 복종을 약속하고 맹세합니다.”
레오대제(390-461)로 알려져 있는 레오 1세는 칼케톤회의(451년)에서 처음으로 교황이라는 용어의 체제를 주장한다. 그는 로마의 감독을 전세계의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드로의 지상권(마 16:8)에 대한 주장을 한 자도 레오 1세이며, 그는 서방교회의 지지를 받았으며 “교황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국가에 대해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베드로는 자신이 부여받은 교회의 지도권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지만 오히려 거부되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감독을 전 세계의 감독으로 인정받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던 레오1세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내세우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가 큰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칼케톤회의마저 그러한 것을 거절하고 말았다. 단지 451년의 칼케톤 회의는 “교황“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적용하기로 합의를 하였던 것이다. 교황의 전세계 감독권과 지상권을 극단적으로 반대한 것은 당연하게 동방교회(동방정교)측이었다.
그후 그레고리에 의해 다시 교황의 지상권에 대한 요구가 재개되고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베드로의 계승자“로 주장됨에 따라 동방교회만을 제외한 모든 서방교회가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교황의 위상을 세움으로 전유럽을 선교해야만 한다는 미명의 깃발아래 절대권력과 전후무후한 세력의 로마교회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한 주장이 인정되어진 배경은 그 당시 유럽의 삼분지 이가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통치력을 빌미로 레오 1세가 주장했던 것을 다시 재개시킨 것이다.
그리고 588년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대주교에 의해 “전세계적 감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황을 비난하거나 교황권에 도전하는 일이 있으면 그는 파문을 당하였고 끝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일지라도, 교회를 거스리거나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황권의 입장으로서는, 무오류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권을 비난하거나 반역하는 일은 곧 반그리스도이며 사탄이 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비난할 수가 없는 이유는 오직 교황권만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교회내에서 인정받는 전승도 오직 교황권의 선택에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숱한 중세의 반인륜적이며 반도덕적인, 타락하고 범죄한 카톨릭의 교황들이 무류했었다는 주장은 코메디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역대 교황들의 어록에서 참람된 말과 그에 대한 참람된 말들을 조사해서 발표한 아일랜드의 알렌 켐블의 저서의 내용을 보자(발췌 인용)
1)Ferraris의 말
“교황은 아주 존엄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그러므로 만약 천사들이 잘못을 범하게 된다면 교황이 그들을 판단하고 서로 교통시킬 수 있다.”
2)Gregory XI의 말
“그 사람 교황은 하늘의 힘을 가졌으며 자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불의를 정의로 바꿀 수 있고 그는 모든 힘에 가득차 있다.”
3)교황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하는 말
“이 세상를 다스리는 통치자와 왕과 왕자들의 아버지임을 잊지 말고 이 삼중관을 받으시오.” (삼중관이란 교황 머리에 쓰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3층으로 된 왕관)
4)교황 Innocent X의 대관식에서의 말
“가장 성스럽고 축복스런 아버지시여 교회의 우두머리이시고 세상의 통치자이며 하늘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시며 천사들이 하늘에서 숭배하고 두려운 지옥의 문들과 모든 세상들이 경배하고 특별히 저희들이 당신을 존경하고 숭배하나이다.”
5)교황 Boniface의 말
“로마 교황은 모두를 판단할 수 있으나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아니하고 그 로마 교황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물들은 다 함께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6)교황 Julius II의 말
“세상에 있는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
7)교황 Pius X의 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8)교황 Leo XIII의 말(1895년 7월)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의 지상 장소에 살고 있다.”
9)베이룬 추기경이 교황을 두고 한 말
“하나님의 영이 볼 수 있도록 변한 인간이다.”
10)1949년 아일랜드 카톨릭 성직자들이 교황 레오 12세를 두고 한 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다른 예수이다.”
11)데시우스의 말
“교황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주장임에 분명하다.
1997년 11월 초, 각신문에서는 교황의 고해성사에 대한 기사를 올렸는데, 이 기사를 한 신문사의 기사를 통하여 직접 확인하자.
지난 2월 바티칸에서는 70명의 신학자와 성직자가 참가하여 비밀회의를 가짐으로 아래와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카톨릭의 교황은 그간에 카톨릭에서 저지러졌던 과거사에 대해 2000년 대회년을 맞이하여 교황이 직접 고해성사를 공개적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그 과거사란 종교전쟁 등을 통한 비카톨릭 신도들의 박해. 개신교와 동방정교의 분열에 대한 카톨릭의 책임. 여성의 차별과 자연과학에 대한 편견을 견지해 온 일. 카톨릭의 나치 협조와 방관에 대한 교회 수뇌부의 적극적 가담등의 내용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카톨릭의 내부에서 반대견해가 많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교황권의 신학적인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1997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 보도)
로마 교황은 2000년을 1300년 교황 Boniface VII이후 700년 동안의 죄에 대한 대사면과 죄의 용서를 위한 ‘거룩하고 특별한 해‘로 선포했었다. 이러한 은혜는 반듯이 로마와 전세계의 성지 여러 곳을 방문하거나, 교도소의 피수용자들을 방문하거나 자신을 희생함, 담배나 음주를 끊음 등 선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교황이 선포했었다.
그래서 베드로 성전 정문의 우측에 있는 거룩한 문이 2000년도에 열렸는데,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250만명의 카톨릭인이 로마 베드로 성전을 찾았다고 한다. 카톨릭인들은 그 거룩한 문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한 연도에만 죄사함을 주시지 않으며, 어느 성당의 특정한 문을 지난다든지, 혹은 선행을 통하여서 죄사함을 주시지 않음이 분명하다.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대사를 얻는 한 방법에 속한다는 것이 기이하다.
다음은 안양평촌의 12사도 성당의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인데,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를 얻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이 사죄함을 받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러한 방법이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내면적인 회개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0년 대희년 전대사를 얻는 방법
1) 고해성사를 통하여 은총지위(속죄에 대한 애착까지 완전히 떠나 생활이 변화되어야)에 있어야 한다.(1번 고해성사는 8일간 유효)
2) 희년 대사 조건중 하나를 채워야 한다.
– 지정 성당, 성지의 미사, 아침 저녁 성무일도와 십자가의 길,묵주기도, 아카키 토스 찬미가등의 신심행사에 참여한다.
– 지정성당, 성지를 방문하여 성체조배 및 묵상을 하고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바친다.
– 곤경이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병자, 수인, 독거노인, 장애인등)을 방문하며 영신적이고 성사적인 조건을 채우며 일상기도를 바친다.
– 불필요한 소비 억제(금연, 금주, 단식, 금육–절제)와 자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인 희생 봉사(시간)을 한다.
3)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채우는 날에 영성체를 한다.
(안양 평촌의 12사도의 성당, 홈페이지에서 발췌함)
6. 연옥 사상, 성인 숭배, 제사 인정, 사제의 혼인금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선행등 비성경적인 제도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완전한 자들은 천국에 가며,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또 이 기간이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선행에 의하여 단축되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교리의 근거는 외경인 마카비2서 12:42-45에 두고 있는데 외경을 성경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트랜트공의회 이후이다.
그러한 연옥신앙은 결국 면죄부의 폐단을 가져왔고, 죽은 자나 성인들에 대한 기도가 행하여지게 되었던 이방종교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받을 수 있으며, 부자와 나사로에서 보듯이 사람이 죽으면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는 낙원이나 음부로 가게 되는 것이며, 다른 장소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고통받는 부자는 즉시 음부로 들어갔으며,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눅16:28-3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연옥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는 1439년 플로렌스회의(Council of Florence) 이전까지는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신앙조항에 속한 적이 없었다.
카톨릭이 공식적으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은 트랜트공의회(1546년)이다.
트랜트공의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회의로서,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킴으로서 그들이 비난받던 교리를 정당화시킨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전승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본다든지, 죽은 자에게 속죄기도를 할 수 있다는 면죄부의 근거, 연옥에 대한 교리는 외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이 있자, 그 교리적인 근거를 제정하기 위하여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카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연옥은 다음과 같다.
“연옥은 세상에서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는 받았지만 거기에 해당되는 보속을 다 못했다든지 또는 소죄를 지니고 죽은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보속하는 곳이다. 연옥에도 지옥과 같은 실고와 각고가 있다. 그러나 지옥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연옥은 영원한 곳이 아니고 잠정적인 곳이라는 것이다. 연옥의 영혼들은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자기들 힘으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그들의 보속은 경감될 수 있다….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연옥 영혼을 구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한한 가치를 가진 위령 미사를 바치는 것이다.”(가톨릭 교리 사전, 박도식, 가톨릭출판사, 2012년, 211-212쪽)
카톨릭의 트랜트공의회는 외경중에서 에스드라1서와 2서와 므낫세의 기도서를 제외시켰는데, 그 중에서 에스드라2서를 제외시킨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그 이유는 에스드라2서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강력히 반대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에스드라2서 7:105) 아이러니칼하게도 초대교회 클레멘트는 에스디라2서를 정경에 포함시킨 적이 있었다(참고: 성경의 유래, 노오만가이슬러, 생명의 말씀사, 109, 113쪽)
카톨릭이 증거하는 것은 일부 발견된 일부의 칠십인역(바티칸사본등 몇몇 알렉산드리계열의 사본)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칠십인역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보던 성경이었고 그러한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우리들도 외경의 정경성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경이 포함된 칠십인역은 신약과 구약이 함께 책으로 묶인 사본(예를 들면 바티칸사본, 시내사본등)으로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보던 성경이 아니었고(예수님 당시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으므로), 그 칠십인역은 후기(주후 4-6세기)에 필사된 것이었고, BC 2-3세기에 번역된 칠십인역에는 외경이 포함되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사본들마다 외경이 모두 달랐다는 증거들은 외경이 동일한 목록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며 정경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특이한 것은 트랜트공의회에서 결정한 지금의 카톨릭 외경과 다르다는 것이다.
“트랜트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에 걸쳐 열린 교회 회의였다. 이 회의는 예수회 출신의 학자들인 라이네즈와 살메론이 중심이 되어 교령과 교칙을 작성한 공의회였다. 교황 바울3세에 의해 트랜트에서 소집되었는데 그 목적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중심으로 한 신교를 배척하려는 것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중요한 사항들을 보면 성서와 전통은 동등하게 진리의 근원이며, 교회만이 성서를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등이다. 이렇듯 이 결정들은 철저히 반종교개혁적, 즉 반신교적인 성경들을 갖고 있었다. 이 회의는 로마카톨릭 교회와 신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25회기에 걸쳐 개최된 이 공회의 중 특별한 결정을 한 회기들을 간추려보면 제4회기에서는 성서와 성문화되지 않은 전승을 대등한 위치에 두도록 하는 결정을 했는데, 이는 성서만이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신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또한 이 회기에서는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교회의 결정에 땅라야만 한다고 못박았다. 다음으로 제6회기에서는 신교의 견해와 비슷하게 율법에 의해 새롭게 되지 못한다고 결정하기는 했지만, 이는 카톨릭 교회의 공로에 의한 의인사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회기결정문 14장에는 고해의 4단계, 즉 참회, 고백, 사죄선언, 그리고 보상의 단계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도 신교로써는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7회기에서는 일곱성례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23회기에서는 교회의 일곱성직을 확인했으며, 모든 신자가 사제라고 하는 신교의 주장을 부정했다. 마지막 제 25회기에서는 연옥, 성인을 향한 기원, 성인숭배, 성인의 유물, 성상, 면죄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단지 올바르고 신중하게 사용할 것만을 가르쳤다. 특히 면죄부의 오용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지나치게 편법화하지말고 그것 때문에 교회의 규율이 약화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결정은 면죄부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신교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트랜트에서 개최된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는 신교의 개혁적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으며 신교와의 차이점만을 다시 한번 확연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교의 공격에 동요한 일부 가톨릭 신자에게는 자신들의 위치를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TBC 성서연구, 교육목회협의회, 612-613쪽)
트랜드공의회는 신교의 종교개혁이후 가톨릭이 자신들을 방어하고 변명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신교의 비난을 입막음하기 위하여 교리를 임시로 제정한 것이며, 그 교리를 위하여 고의로 합법성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칠십인역에 있는 외경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일부만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교리에 다르기 때문이다.
즉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 – 성경을 교리에 짜깁기로 맞추는 행위 –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외경서의 14권이 모두가 트랜트공의회에서 승인받지 못한 것을 보면 트랜트공의회의 행동강령이 분며이 논쟁 위주였을 뿐 아니라, 편파적이었음도 엿볼 수 있다. 에스드라 1서와 2서(천주교는 에스드라 3서와 4서)와 므낫세의 기도는 제외되어졌다. 에스드라 2서를 제외시킨 것은 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제외시킨 이유라면 그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기도를 강력히 반대하는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에스드라2서 7:105) 실제로 중세의 서사(서기관) 중 몇사람은 에스드라 2서의 라틴어 필사본에서 이 구절을 삭제시켜 버렸으며, 이 사실이 로버트 벤틀 리가 1874년 프랑스 아미엔에 잇는 한 도서관에서 라틴어로 된 것을 다시 찾았을 때까지는 그것이 어랍어 필사본으로 알려 졌던 것이다.(성경의 유래, 노오만가이슬러, 생명의 말씀사. 113쪽)
다음 아래의 역사적인 증거는 외경이 정경에 포함된 적이 없다는 증거가 되어진다.
(1) 신약성경에서 볼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는 외경의 구절을 인용한 적이 없다.
(2) 오랫동안 구약성경을 유일한 정경으로 간주했던 유대인들은 외경을 성경이라고 하였던 적이 없었다. 탈무드에서는 유대인의 성경목록이 열거되어지는데, 12 소선지서를 하나로 묶고,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역대기서 상하를 한권으로 계산하여 22권으로 열거하였다.
(3) 사데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가 쓴 주후 170년경의 성경목록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지금의 성경과 동일하며 단지 에스더서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4)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리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AD90년경에 유대인이 받은 22권의 책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유대인들은 이런 성경을 바꾸거나 부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것이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마카비서(외경)는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언급하였다. 요세푸스는 구약정경에 에스더서를 포함시켰다.
(5)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67년에 유월절편지를 쓰면서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경목록을 열거하였다. 특히 외경에 대해서는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유딧, 토빗,등의 외경에 대해서는 ”이것들은 정경에 속하지는 않지만,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경건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기 위한 자들이 읽도록 교부들이 지정한 책들“이라고 설명했다.
(6) AD 90년경에 유대인들은 잠니아 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 회의는 전도서와 잠언에 대해 정경성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이 회의에서도 외경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된 적은 없었다.
(7)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에서는 외경을 성경이라고 부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사해사본의 외경은 연대가 오랜 것이 아니다.
(8) 제롬은 주후 404년에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성경을 번역하였다. 그가 외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이 카톨릭에서 자주 외경의 정당성으로 주장하지만, 막상 제롬 자신은 외경은 교회의 책은 될 수 있지만 정경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을 덧붙혔다.
(9) 적어도 4세기 전까지 외경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다는 증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10) 동방정교나 성공회등에서는 외경이 예배의 의식에서 사용된 적은 있다고 할지라도, 정경에 속한다고 정의한 적은 없었다.
또한 카톨릭에서 사제는 혼인을 할 수가 없으며 카톨릭의 이러한 제도도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
육식을 못하게 하는 안식교와 혼인을 금하게 하는 카톨릭은 위의 성경본문을 그대로 적용하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되어진다. 베드로는 그가 살아 생전에 교황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카톨릭이 1대 교황이라 일컫는 베드로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성경적인 기록은 베드로가 결혼을 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질 뿐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마8:14. 참고: 막1:30, 눅4:18)
또 카톨릭은 선행과 공로를 매우 강조하는데, 우리의 구원은 은혜이며 만일 행위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은 값없는 은혜가 되어지지 않는다. 물론 선행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행같은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지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또한 이들은 믿음외에 선행도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키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비난하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며 변명을 하면서, 한편 “야고보서도 성경인데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야고보서의 행함은 믿음없는 행함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없는 믿음을 책망하고 강조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야고보서 1장6절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함은 믿음의 조건이 되어질 뿐이며, 구원의 조건이 되어지지 않는다.
카톨릭에서는 선행을 하는 타종교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타종교에도 진리와 조명의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 카톨릭은 미신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베드로 성전에 가보면 베드로의 동상은 발이 움푹 패여 있는데, 수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길게 서서 그들의 복을 간구하며 베드로 동상의 발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 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베드로 성당의 지하실에는 베드로의 시신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에 묶여있었다고 하는 쇠사슬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쇠사슬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여, 카톨릭 교인들이 그것을 자꾸 긁어가서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 베드로 성당에는 정문 우측에 벽돌로 쌓아 패쇄시킨 거룩한 문이라는 것이 있어 2000년 전대사의 해에 열린다고 하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약 250만명의 카톨릭인들이 그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유럽지역의 많은 성당들도 천국의 문이라고 불리는 문을 갖고 있어, 100년에 한번 혹은 정기적으로 한번씩 그 문을 개봉한다고 하는데, 유명한 천국의 문은 피렌체(플로렌스)에 있는 두오모성당이다.
또 독일 쾰른에 가면 쾰른성당이 있는데 그곳에는 순금으로 된 황금관을 놓고 그곳에 동방박사 한 사람의 시신이 있다고 한다. 방부제가 발라져 썩지도 못하는 그 시신이 동방박사인지 아닌지 객관적인 검증도 믿을 수 없지만, 왜 페르시야의 점성술가의 시신을 황금관에 보관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일, 그 숱한 조각, 동상과 성화등에 대해서는 금하여야 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설명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가 행하여지는 일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787년 제2차 니케야회의부터 였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대상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더라도, 그 형상에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하였을 때에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천명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출32:28)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32:4,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7.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카톨릭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바티칸 2차 공의회가 있었는데, 이 회의가 카톨릭의 새로운 전기로 불려진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교황은 타 종교에서도 길이 제시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최고조명이 있다는 포괄주의와 다원주의적인 주장을 한다. 물론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유일주의마저 부정하는 이러한 주장은, 정체된 카톨릭의 입장에서 선교를 표방하는 다분히 정책적인 발언이라고 보여지며 비성경적인 주장임에 분명하다.
에큐메니컬운동(교회 연합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가장 그것을 외면하던 곳이 바로 카톨릭이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 2항)
……..또 불교에 있어서는 여러 학파에 따라 무상한 현세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열심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해탈 상태에 이르든지 혹은 자신의 노력이나 위로부터의 도움에 의하여 최고 조명(照明)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성스러운 예식 등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제시한다……
칼 라너라는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는 “교회 밖의 구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힌두교의 간디같은 이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타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이 예수를 오직 믿음이 아니라 선행적인 행위에 있으므로, 다원적인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의 길이 되어지는 입장으로 산 정상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듯이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칼 라너의 주장은 보편적인 카톨릭의 주장이다, 이제 카톨릭은 오직 예수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만일 타종교도 진리며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심각한 모순이 발생되어진다. 성경은 오직 예수만이 진리이며 생명이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행4:12, No Other Name)
유대교에 의하면 예수와 사도들은 나사렛이단이 되며, 이스람교에 의하면 예수는 한명의 선지자가 될 뿐이며, 힌두교에 의하면 예수는 3억3천명의 신들 중 한 명이 되고 말지만,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는 삼위 하나님이 되신다.
로마 교황은 2000년을 1300년 교황 Boniface VII이후 700년 동안의 죄에 대한 대사면과 죄의 용서를 위한 ‘거룩하고 특별한 해‘로 선포했었다. 이러한 은혜는 반듯이 로마와 전세계의 성지 여러 곳을 방문하거나, 교도소의 피수용자들을 방문하거나 자신을 희생함, 매일의 애연(담배)를 끊음 등 선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교황이 선포했었다. 이러한 대 사면의 은혜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갈라 놓는 작용을 하고 있다. 16세기 개혁가 마틴 루터가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대사면의 판매를 반박했으며, 개신교는 죄는 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와 사죄함의 확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대 사면은 비성경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Religious Today)
다음은 안양평촌의 12사도 성당의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인데,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를 얻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이 사죄함을 받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러한 방법이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내면적인 회개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0년 대희년 전대사를 얻는 방법
1) 고해성사를 통하여 은총지위(속죄에 대한 애착까지 완전히 떠나 생활이 변화되어야)에 있어야 한다.(1번 고해성사는 8일간 유효)
2) 희년 대사 조건중 하나를 채워야 한다.
– 지정 성당, 성지의 미사, 아침 저녁 성무일도와 십자가의 길,묵주기도, 아카키 토스 찬미가등의 신심행사에 참여한다.
– 지정성당, 성지를 방문하여 성체조배 및 묵상을 하고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바친다.
– 곤경이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병자, 수인, 독거노인, 장애인등)을 방문하며 영신적이고 성사적인 조건을 채우며 일상기도를 바친다.
– 불필요한 소비 억제(금연, 금주, 단식, 금육–절제)와 자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인 희생 봉사(시간)을 한다.
3)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채우는 날에 영성체를 한다.
(안양 평촌의 12사도의 성당, 홈페이지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