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목사의 가계저주론의 위험성을 진단한다
– 86회 예장합신 총회 이단연구보고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어라』(이윤호)의 책이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많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어 이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내용을 가지고 많은 교회에서 저주론을 가르치고 세미나를 하면서 저주퇴치축사를 하고 있어 교회에 경계가 필요하여 이 연구를 하게 되었다. 위의 책은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어야 산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와 데렉 프린스의『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하라』와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영성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주로 귀신축출을 하는 귀신론자들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윤호 목사는 서강대에서 경제학을 하였고 미국 남침례회 서남침례신학대학원(M.Div)을 거쳐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과 철학박사(Ph.D)를 받았다고 한다. 와그너와 크레프트의 지도하에 교회성장학을 전공하였으며 인도네시아 선교사로서 사역하면서 쟈카르타의 하비스트 국제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고 알려졌다. 현재는 교회개발원 국제총재로서 치유사역, 내적치유, 영적전쟁에 대한 세미나를 한국과 인도네시아와 여러나라에서 인도하고 있다.
1. 가계저주론의 잘못된 접근
‘가계저주론의 출발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라고 질문할 때 그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상담을 온 내담자의 삶의 정황을 통하여 임상적인 현장에서부터 얻어낸 이론이라는 것을 바로 자신의 책에서 이윤호 목사는 스스로 밝힌다.
“질병의 원인이 가계를 통한 유전일 수 있다?”
“내 친구의 가계에 내려오는 이런 질병의 저주를 끊었더라면 내 친구는 30대중반의 젊은 나이로 죽지는 않았을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계저주론 p.17.).
정리하여 말하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성경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가계저주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가계저주론’의 이론을 주장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여기서 저기서 떼어다 견강부회하고 있으며 성경을 문맥과 상관없이 가져다 붙이기 때문에 자연히 자의적(恣意的) 성경해석도 하게 된다. 장신대 오광만 교수는“내담자의 특수한 상황을 일반화시켜서 마치 그것이 일반적인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이윤호 목사의 생각 속에는 인간사에서 다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원인 없이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인과론을 가지고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계저주론’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어떻게 다 규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욥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이 온 것이 아니냐? 당신이 죄지은 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인과론을 들고 나왔다. 욥의 고난과 그 전말을 아는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얼마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인가를 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책망하시며 잘못을 지적하셨다. 바로 욥의 친구들 수아, 빌닷 엘리바스의 사고와 이윤호 목사의 사고는 같은 인과론에 불과하다. 욥의 친구들은 욥 자신의 범죄의 결과라고 주장한 것이고 ‘가계저주론’은 욥에 대하여 조상 중에 저주받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하여 주님은 부모나 소경 자신의 어떤 범죄나 저주의 결과라는 제자들의 생각을 뒤집었다. 그러고 보면‘가계저주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것임이 분명하다.
총신대 정훈택 교수는“이윤호의 저주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가계저주론’도 성경적인 것이 얘기가 되지 못한다. 그의 저주론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정령숭배사상과 물신론 등 한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미신적 샤머니즘과 비슷한 이야기를 기독교적 개념으로 각색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2. 이윤호목사가 그의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
이윤호 목사의 먼저 죄와 그 결과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주장, 은혜시대의 신자들은 저주와 무관하다는 주장, 신자들은 조상의 죄와 저주로부터 이미 해방되었다는 주장,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등은 기독교인들이 깨뜨려야할 고정관념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무지와 착각, 합리주의적 세계관 때문에 세상도 다 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가계저주론’을 보편타당한 성경적 진리로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유전인자를 비롯하여 다섯 가지).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통로 5가지
① 유전인자를 통한 전가 ② 부모의 삶을 모방한 전가 ③ 추수의 법칙을 통한 전가
④ 악한 영들을 통한 전래 ⑤ 혼의 결속을 통한 전가(pp.113∼118.)
둘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
셋째, 유전적인 죄는 죄의 뿌리를 끊지 않는 한 가계를 타고 계속 내려간다.
넷째, 저주도 차단하지 않으면 가계를 타고 내려간다(p.17.).
다섯째, 신자도 저주아래 살 수 있다(p.151.).
여섯째,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조상의 삶이 자손에게 반드시 어떤 종류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영적 법칙을 설정하셨다.
여덟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귀신이나 거짓된 영이 함께 있을 수 있다(p.55.).
아홉째,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사탄과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위치적으로는 자유함을 얻었지만 상태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계속 받고 있다(p.77.).
열째, 한 가계를 통해 계속 전래되는 영들을“가계의 영”(family or familiar spirits)
라 부르며 이런 영들은 조상이 지은 죄들과 후손에 대한 저주 때문에 법적 권리를 획득해서 가계에 들어온다(p.118.).
열한째, 혼의 결속을 통하여 죄와 저주가 전가된다(p.118.).
열두째, 신자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영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요 혼과 육은 조상의 죄로 인하여 대물림된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pp.130∼131.).
열세째, 가계치유를 성경적인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하며 신자가 개인의 구원을 통해 조상의 죄의 영향이 이미 다 제거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pp.140∼141.).
열네째, 조상들의 죄를 밝혀내고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다(p.154.).
열다섯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저주가 복이 되기 위해서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더 필요하다(p.151.).
여러 가지를 나열했지만 처음 세 가지에 모두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3. 가계저주론을 위하여 제시한 증거들
1) 빌클린턴의 성추문에 대한 이윤호목사의 주장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적인 스켄달을 “성 중독증”이라 표현하고 이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가계전체가“중독의 역사”이며 클린턴의 탈선원인은 중독의 가계사로 인한 성중독증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그래서 계부의 알코올 중독, 할머니의 몰핀 중독을 들고 나온다. 그러한 저주와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성 행각은 과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요 성 중독증일까? 아니면 그의 기질일까? 아니면 그의 절제 못하는 충동일까? 과연 클린턴의 성 추문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죄일까? 성경은 한군데서도 어떤 특별한 죄가 조상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 곳이 없고 그와 비슷하게 말한 곳도 없다. 또 조상의 저주 때문에 후대가 그와 같은 죄를 짓는다고 추궁한 적도 없다. 단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범죄는 클린턴의 성적인 죄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 가나안백들의 타락은 하나님이 더 이상 세상에 둘 수 없는 타락이었다. 살인 간음 남색 우상숭배 짐승과의 성교 등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악들이 타락한 인간의 일반적인 죄악들인데 클린턴이 무슨 특별한 저주가 임한 사람처럼 특별한 죄를 지었다고 특수화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클린턴이라는 이름 있는 사람을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볼 때는 인간의 죄가 크고 작을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적인 죄는 개인과 상관없이 모두 아담의 직접적인 전가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정통교회는 지금까지 고백해왔다.
2) 노아에게는 술취함, 아브라함에게는 거짓말
다윗에게는 간음과 살인이 그 대표적인 죄인데 그들은 후손에게 죄와 저주를 대물려주었다. 노아의 죄는“동성연애”를 아브라함의 죄는“속임수”를 다윗의 죄는“음란과 살인”을 물려주었다는 주장.
먼저 생각할 것은 노아의 술취함이 실수인 것은 사실이나 어떻게 그것이 저주를 낳았고 동성연애와 같은 죄를 후손에게 물려주었다고 주장하는가? 함이 자기를 낳은 아비의 하체를 본 것을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박윤선 박사) 불경스러운 죄악이다. 그러나 이윤호 목사는 함이 아비의 하체를 본 것에 관하여“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라는 말씀은 아비의 하체를 탐익한 함의 동성연애적인 성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의 노아나 셈과 야벳도 함의 아비의 하체를 본 것을 동성 연애적인 성향이라고 알았을까? 그래서 노아가 함을 저주했을까? 오히려 자식으로서 부모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 자체를 불경스러운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이윤호 목사는 함이 죄를 지었는데 왜 노아가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렸느냐 이것이 곧 집단성과 연대성의 문제이며 저주가 후대에 흘러간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9장을 보면 유의해야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함을 소개할 때 따라나오는 수식어이다. 18절을 보면“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22절을 보면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의 저자가 마음속에“가나안”을 이미 마음에 두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실 가나안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저주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가나안 족속의 타락상 가운데 동성연애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에게서 흘러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성연애와 같은 죄악상은 흘러 들어간 죄악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온 하나의 죄악일 뿐이다.
로마서 1장(26∼27절)에 나타난 죄악들 중 동성연애도 타락한 일반적 죄로 말하고 있지 함에게서 나온 특별한 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만일 그것이 함에게서 나온 특별한 죄였다면 성경에는 동성연애의 시조를 함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또 아브라함의 거짓말 때문에 거짓의 영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계속적으로 흘러갔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삭도 똑같은 죄를 지은 것은“부모의 두려움과 거짓을 담은 유전인자 혹은 성향이 사라가 이삭을 임신했을 때 전수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이“눈덩이처럼 불어나 야곱에게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거짓말했다고 책망하시거나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당시 상황가운데서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인 아브라함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아내 사라는 그의 이복 누이였다. 만일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속에서 자신이 보호자 되시며 인도자 되심을 보여주시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화시키셨다.
거짓말 그것은 타락한 인간, 사단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죄악일 뿐이다. 신학적으로 인간의 자범 죄의 전가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잘못된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가계에는 유전적인 죄가 있는데 바로 그것은 음란죄이며 솔로몬의 성 중독증은 부모의 음란한 죄가 한 요인이 된다고 한다. 다윗의 죄는 어머니의 성적범죄 때문이고(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 그 조상 중에 라합같은 기생이 있어서라고 한다. 다윗의 고백은 자신의 모친의 성적범죄의 결과로서 자신이 잉태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설명하는 것이다. 음란한 것 역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죄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이라면 다 이러한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 음란한 죄에서 떠난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결국 인간의 타락으로 나타난 보편적인 죄악을 특수화시켜 특별한 가계에만 저주로서 나타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자기 논리를 가지고 성경을 가져다 붙이기 때문이다.
4. 가계저주론의 문제점
1) 저주에 대한 잘못된 이해(정훈택교수의 비판 요약)
이윤호 목사는“저주란 무엇인가? 저주는 남이 안되거나 망하기를 바라고 비는 것이다.
저주의 다양한 주체는 하나님의 저주, 사탄의 저주, 다른 사람의 저주, 자기 자신의 저주, 맹세나 무심코 뱉어내는 한탄과 자조도 저주의 역할을 한다.
모든 저주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닌다, 저주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p.47). 조상이 특정한 죄를 범한 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정한 영적 원리에 의하여 당사자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p.98.). 이윤호는 자신의‘가계저주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저주라는 단어조차도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사탄의 저주는 있지도 않다. 사람사이의 저주는 윤리적 차원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즉 남에게 악한 말을 하거나 좋지 않는 결과로 끝나도록 소원하는 것을 말한다. 저주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면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저주만이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반대어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 활동하는 저주가 가계를 타고 흘러간다는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저주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떤 영적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인 것이다. 이윤호의‘가계저주론’은 저주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별도의 영적 질서로 이해함으로서 가계를 타고 그냥 떠돌아다니는 저주나 축복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호의 저주론은 성경의 저주론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복음전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다른 악한 사상이다. 이윤호는 저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사탄의 활동, 사탄의 무기로 둔갑시켰다. 즉 그는 인간이나 사탄의 저주를 하나님 없이 그 자체로 효력이 있다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주는 그 자체로서 효력을 지니거나 결과를 만들어 내는 무슨 힘이 아니다. 결국 그는 미신을 기독교화하고 있는 미신적이고 샤마니즘적인 저주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한다면 이윤호는 현세적, 인본주의적, 물질주의적 축복관과 저주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모든 질병과 사고와 실패, 가난등은 나쁜 것 곧 저주요 건강과 안전과 성공과 부는 좋은 것 곧 축복이다라는 말초 신경적인 전제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는 풍요로운 성도의 삶은 질병과 사고와 실패에 시달리지 않는 평화로운 삶 정도를 말한다. 그는 삶의 해악적 요소들을 한데 모아 저주라는 아름을 붙여 놓았고 그것을 피하는 길을 연구하여 치유라 이름 붙였다. 자세히 보면 그의 기도문도 대부분 사탄과 온갖 귀신들, 악령들, 병을 실어 나르고 몰고 오는 기이한 영들을 향하고 있다. 삶의 해악적 요소를 신의 저주나 악령의 저주로 보고 길흉화복을 조상과 연결하여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화를 피하고 복을 얻는 비결을 배운 사람들하고 이윤호의 저주론과 치유론은 공통점이 있다.
2) 이윤호목사의 성경해석(오광만교수의 비판요약)
‘가계저주론’주창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거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열거한다. 그런데 그 인용한 성경구절에 대하여 주석학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윤호만 단 한 번 주석학자 카일 델리취를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가 필요한 것만 인용하였고 델리취의 원래 의도를 곡해하였다.
이윤호는 시편 51:5의“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뜻을 어머니의 성적 범죄의 가능성을 주장했다고 델레취를 들먹이더니 신디 제이콥스를 인용하여 다윗 조상중에 기생 라합이 있어서 성적인 범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델리취의 주석(pp.136∼137.)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구절을 다윗이 자기의 범죄한 사실 자체만 아니라 죄의식을 표현한 것이고 자기 어머니가 죄인이며 이 죄의 상태에서 그의 잉태 그의 출생이 이루어져 자기의 죄인됨을 출생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철저한 자기 성찰을 가리키는 고백이라고 설명한다.
시편 51편이나 델리취의 주석이나 어디에서도 다윗의 범죄가 조상 탓이라는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 이제 그의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견강부회한 예들을 제시하고자한다.
① 잠언 26:2
대부분의 오류는 그 말씀이 등장하는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한데 발생한다. 이윤호는 “저주가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까닭없는 저주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로 잠언 26:2을 인용하고 있다. 이윤호는“저주는 원인이 없는 한 작용할 수 없다, 저주가 역사하는 곳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말로 한 가정에 온 저주는 반드시 가계에 원인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잠언 26:2은 가정에 닥친 저주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앞절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잠언의 주제인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다루면서 그 사람에게 닥친 저주도 이유가 없이 닥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미련하게 행했기 때문이라는 자업자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② 예레미야 31:29, 에스겔 18:1∼32
죄의 유전적인 전승을 주장하기 위해 든 성경 중에 많이 사용되는 것이 위의 두 구절인데“아비가 신 포도주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리다”(렘 31:29)는 부분만을 인용하여“에스겔 선지자의 의도는 자신들의 죄악의 모든 책임을 조상에게 전가시키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서“그렇다고 본문은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에스겔 18:1∼32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은 포로 경험이“조상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기에 유행하던“철 이른 포도를 아버지가 먹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가 이처럼 시리게 되었다는 속담을 인용하여 모든 탓을 조상에게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속담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직접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조상 대대로 쌓여온 죄악 때문에 자기가 불행을 겪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연대적, 집단적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불 신앙이다. 바로 이스라엘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이다(Eichrodt, Ezekiel, OTL,237). 이 말씀은 세대가 서로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불의에 대한 것은 각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다.
③ 출애굽기 30:4~5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성경이 이 본문이다. ‘가계저주론’의 주창자들은 이 구절을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윤호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유전적인 복과 저주의 법칙을 선포하시고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이런 진리를 확인하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조상의 삶이 자손에게 어떤 종류의 긍적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적 법칙을 설정하셨다”고 지적한다(p.92.). 그러나 그의 책 전반적인 경향이 저주 주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조상의 죄에 대한 문자적인 계승은 인정하지만 복에 대한 것은 얼버무린다. 유전적인 복은 강조하지 않으면서 유전적인 저주만 부각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의 뜻은 조상의 저주가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비의 죄를 자식이 그대로 답습하는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말씀이다. “나를 미워하여”“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는 전제를 보면 알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조상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죄와 거기서 나오는 저주를 자기가 안고 있는 경우란 없다.
④ 그 밖에 [집]이라는 단어를 [세대]라고 번역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마 10:6)
히브리서 7:9∼10에 대하여“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말씀을 유전인자를 통한 전수를 설명하기 위하여“이 말씀은 레위가 아브라함의 한 행동 즉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로 인해 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자손임을 설명해 준다”(p.114.)라고 하여 본문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이 유전인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3) 이윤호의 가계저주론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제한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신자도 저주아래 살 수 있다”(p.151.).“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p.151.)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려야할 많은 신자들이 저주 아래서 살고 있다”(p.71.)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사탄과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위치적으로는 자유함을 얻었지만 상태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계속 받고 있다”(p.77.) “신자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영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요 혼과 육은 조상의 죄로 인하여 대물림된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pp.130∼131.)”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귀신이나 거짓된 영이 함께 할 수 있다”(p.55.)등 많은 말들이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위치적으로 구속이고 상태적으로는 구속함을 얻지 못했다는 이상한 구속론이다. 그리고 신자가 예수를 믿어도 완전히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제한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구속론을 성경적으로 입증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자신의 생각으로만 증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논리와 신자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는 현상적인 것으로서 증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러한 근거를 제시할 만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롬 6:18)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롬 6:2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2).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주님의 구속은 단순히 어떤 위치적 이동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신분으로서 아들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순종하고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하셨다. 더 이상 죄도 사단도 저주도 신자 위에 왕 노릇할 수 없다. 따라서 신자에게 저주란 있을 수 없다. 만약 신자에게 어떤 질병이나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다루시는 손길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영과 혼과 육에 임한 저주 중에 영은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혼과 육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는 주장 즉 신자는 영만 구원받았고 혼과 육은 아직 저주아래 있다는 주장은 예수께서 우리의 영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의 구원자일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사상인가? 성경은 또한 믿는 자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은 믿는 자의 영에만 거하고 혼과 육은 악령에게 내버려두고 계신다는 말인가?
김철홍 목사가 이윤호 씨와 전화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교회의 성도들 80%가 영적 전쟁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즉 교회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령 안에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는 해석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윤호는 성령의 사역 또한 제한하고 성령의 활동을 부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윤호 목사 자신도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가계치유를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일 수 밖에 없다.
4) 이윤호의 가계저주론에서 이중구원론과 잘못된 인간관
그가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신자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영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요 혼과 육은 조상의 죄로 인하여 대물림된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와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pp.130∼131.)는 주장을 편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은 그의 잘못된 인간관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 생각된다. 대부분 3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적 구원 육적구원을 주장하고 영혼구원과 성화구원을 주장하는 파도 있고 영은 타락하지 않았으며(영의 타락설을 부인)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귀신론자들과 영의 몸이 따로 있고 육신의 몸이 따로 있으며 영의 인격이 따로 있고 육신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영성운동자들이 있다.
이윤호 목사도 두 가지 구원을 말한다. 율법의 저주에서의 해방은 신자의 영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요 이것이 칭의(Justification)라 하면서 우리의 혼과 육체는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육신과 세상과 사탄의 공격 및 조상의 죄로 인하여 대물림된 저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말한다. 이것을 또한 위치/신분(position/status)과 상태(condition)으로 구분한다.
영의 구원 따로 혼과 육체의 구원을 따로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이중구원이다. 이 논리는 바로 자신의‘가계저주론’을 입증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
구원은 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 생명의 수여로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영적 교통의 회복으로 말씀하며 ②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골 1:13∼14),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엡 2:1∼6), 어두움에서 빛으로(엡 5:8)의 전이(옮김)를 말씀하신다. 소속이 바뀐 것이고 통치를 받는 권세가 바뀐 것이다. 성경 아무데도 2중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화는 이미 구원받은 자의 변화와 성숙을 말하는 것이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윤호 목사의 말 대로라면 영의 구원을 받은 신자들은 많으나 아직 혼과 육의 구원을 받지 못한 신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윤호 목사의‘가계저주론’의 근저에는 그의 왜곡된 인간이해가 도사리고 있다. 그는 성경이 가르치는 전인적인 인간이해와 대립되는 영, 혼, 육으로 찢겨서 성령과 악령의 지배를 동시에 받는 정신분열적 인간관을 대변한다”고 김철홍(퓰러 ph.D 과정)목사는 말한다.
5) 이윤호의 교회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김철홍목사의 비판)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고 이것 때문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다.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복음전파를 위해 무장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이 임하신(마 3:16) 시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교회가 받은 성령은 그리스도가 보내신 영이며 교회가 다른 매개체를 통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
따라서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임재하며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악한 영들)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롬 8:38∼39) 만일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를 분리하려는 시도이며 성령의 능력아래 있지 않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목사의‘가계저주론’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임상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 “C집사, 선교사 자녀 K군, P형제, 죽음의 영에 사로잡힌 L집사”는 모두 성도들이다. 그는 예수를 믿는 신자라 해도 믿기 전에 침입한 귀신은 그대로 있고 악한영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한다. 도망간 것으로 간주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주장소를 영에서 혼과 육체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pp.183∼184.)고 본다. 결국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각종 악한 영들이 우글거리는 악령들의 소굴에 불과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악령이 들린 장로 권사 집사 등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성령의 능력아래 있는 교회가 아니라 악령의 능력아래 있는 교회를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목사는 악령의 영향아래 있는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은 하지 않고 거꾸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엉뚱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선교학에서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 관심을 끌게 된 동기는 복음이 교회 밖으로 나가면서 교회 밖에서(교회 안이 아니다) 즉 선교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성령과 악령의 충돌(Power Encounter)현상 때문이다
6) 직통계시인가 영적능력인가? 점쟁이 능력인가?
이윤호 목사의 임상 치유사역세미나에서 그는 기도사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기도를 통하여 내담자의 조상들의 내력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P집사이다. 그는“나는 기도 사역 중에 P집사의 할아버지 형제 중에서 한 분이 전도사였는데 핍박이 너무 심해 배교한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P집사의 문제는 그후로부터 가계에 배교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p.28.) 또 한사람은 L장로이다. 그의 말을 보자“나는 기도 사역 중에 정승벼슬을 한 5대째 할어버지의 유배로 인한 복수의 영이 L장로의 가계에 흐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p.28.)
그는 기도를 통하여 본인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조상의 문제를 알아내었고 그것이 무슨 영인지를 밝혀 냈다. 과연 그는 점쟁이인가? 직통계시를 받은 자인가? 기도의 능력인가? 어떻게 조상들에게 있었던 가슴아픈 사건을 알아냈을까? 하나님이 알려 주셨을까? 아니면 환상으로 보여주셨을까? 예언기도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진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를 받는 자의 액운이 어디서 왔는가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점장이나 복술가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가증히 여기시고 죽이라 명하셨다(신명기18:9∼14). 믿음이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서 액댐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7) 이런 영도 다 있는가?
그의 책에는 다양한 영들이 나온다. 과연 그렇게 붙여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영이 과연 있는가? 책에 나오는 영들을 보면 ① 가계의 영(한 가계를 통해 계속 전래되는 영들) ② 공유의 영(혼의 결속을 통해 함께 하는 같은 영/수평적 관계: 부부 수직적 관계: 부모자식) ③ 복수의 영(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영) ④ 가문의 영/성씨의 영 ⑤ 마약의 영 (마약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영) ⑥ 죽음의 영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영) ⑦ 악한 영 (죄를 짓게 하는 영) ⑧ 슬픔의 영 (사람을 슬프게 하는 영)등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영을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영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악한 영 곧 귀신의 역사로 돌리는 것이다. 귀신론자들은 모든 것을 귀신의 역사로 보고 그 귀신을 쫓아내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윤호 목사의 영의 문제도 귀신론과 맥을 같이 한다. 저주퇴치와 축귀 사역도 같다. 복수의 영, 배교의 영이라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영의 문제인가? 복수의 영이 복수심을 유발하며 배교의 영이 배교를 유발한다는 것인가?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영밖에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요 성령을 나타내기 위하여 거룩한 영, 성결의 영, 진리의 영을 말씀하고 다른 하나는 마귀를 말씀한다. 마귀는 그의 속성을 따라 다양하게 표현된다. 거짓말하는 영, 미혹케 하는 영, 악한 영, 어두움의 영, 귀신의 영으로 말한다. 물론 정사와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슬픔의 영이니 복수의 영이니 하는 식의 명칭은 없다. 비인격적인 것을 인격화시켜서 말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영에게 돌리고자 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윤호의‘가계저주론’은 결국 귀신론자들과 같은 백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