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의 종결성
이인규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1) 현현 (2) 전언(傳言) (3) 기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물론 오늘날도 특별계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도 특별계시입니다. 대부분의 일반 교회에서는 계시의 종결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직통계시의 종결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혹간 사람들이 어느 성경에 계시와 예언이 끝났다는 구절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의 종결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종결이라는 주장은 앞으로 계시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확실합니다.
이단들이나 사이비집단의 교주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성경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계시를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성경적인 내용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계시나 예언이 성경과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변치 않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두 말로 식언하시는 분이 되어질 것입니다.
(1)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성경의 객관성과 완전성에 대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성경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앙은 재점검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이미 사실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입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없던 시대에는 예언과 계시가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거꾸로 예언과 계시가 성경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여, 성경의 객관성과 성경의 온전성을 인정한다면, 기록된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은 곧 신약성경말씀을 뜻하며, 신약의 기록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온전한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 계시에 추가할 또 다른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계 22:18-19).
이것 역시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적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완전성, 객관성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곧 그것이 계시의 종결성입니다. 만약 다른 계시가 필요하다면 성경은 불완전한 기록이 되어집니다.
(2) 계시와 예언이 성경과 다르다면 이단적인 주장이 됩니다.
이단이란 아주 황당하고 해괴망측한 주장을 하여야만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성경적인 주장을 가르치는 곳이 곧 이단입니다. 특히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이나 계시, 선지자들은 어느 개인을 위하여, 그 개인의 장래에 대해서 점을 쳐주거나, 장래의 일을 알려주었던 적은 없습니다.
사사나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혹은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나 예언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객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 66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예언과 계시를 전해야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시기는 AD 4세기경입니다. 신약성경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구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것도 BC 2세기경이었습니다.
개인의 장래에 대해서 점을 치는 행위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하는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 18:10-12).
(3) 성경은 선지자나 신령한 자보다 권위가 더욱 높습니다.
초대교회에 자신을 신령하다고 하는 자칭 거짓사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선지자나 신령한 자들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편지 즉 신약성경이 주의 명령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6-37).
바울의 서신은 그것이 곧 주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바울의 최초의 서신이라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도 등장하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얼마 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심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확고합니다. 바울의 서신, 즉 신약성경과 다르면 이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비난합니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어떤 계시나 어떤 예언, 심지어 천사가 전하여준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완전성과 계시의 종결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4-16).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동일한 신빙성을 갖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더욱이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지말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성경으로서 인정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시 베드로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주님에게로부터)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많이 발견되는데, 유다서 17, 1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유 1:17-18).
유다는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이라고 언급하면서 벧후 3:3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3).
이 유다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베드로후서가 “사도의 가르침“으로 이미 인정을 받으면서 널리 읽히고 있었으며, 즉 베드로의 사도성이 이미 정립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서신에서 자신이 목격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쓴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1-4).
사도요한은 계시록에 대해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계 1:2)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계시록에 대해서, 그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거나 감하는 행위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당히 선포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이제 계시의 종결성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계시의 종결성은 성경의 완전성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즉 성경의 완전성과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임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와 예언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계시의 종결성입니다. 그 계시나 예언도 성경말씀에 부합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전하는 주의 명령이며,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으며, 하늘의 천사에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말(우리의 말)로 미혹의 영에 대한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