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과 CCM
이인규
교회 음악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찬송가, 복음성가로 구분하기도 하고 혹간은 더 복잡하게 장르별로 구분하기도 하며, 전문적인 음악적인 기술로 구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찬송가와 성가명곡을 다시 구별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CCM이라는 등장으로 복음성가와 CCM을 다시 구분하기도 한다.
CCM은 Contemporary Christan Music의 약자로서, 시대적으로 유행하는 기독교 음악적 패턴이라고 해석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그 시대의 대중적인 음악 스타일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실 가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복음송과 CCM의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찬송가도 그 시대의 대중적인 음악 스타일이었건 곡이 있었다. 또한 복음성가도 훌륭한 노래가 있고 음악적이며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곡도 있다.
CCM의 유래는 1970년대 초 미국의 흑인영가와 가스펠을 주축으로 한 전통적인 복음성가와 차별화된 보다 대중적인 음악을 지칭하는 음악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물론 찬송가 중에서는 미국 흑인영가의 곡도 있다. 또 찬송가에는 외국의 전통적인 민속음악도 있고, 시대적으로 널리 불려졌던 대중적인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 또 우리의 찬송가에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쉬운 동요와 같은 곡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얼마 후가 지나면 일부 복음성가와 CCM이 찬송가에 포함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이 CCM의 장점은 기존의 찬송가만 접해왔던 젊은 청년에게 새로운 취향으로서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누구든지 함께 부를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기성세대와 년령이 많은 층에서도 새로운 시대에는 그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찬송이 필요하다는 주장 아래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찬송과 복음송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복음성가와 찬송가도 엄격하게 말하면 그 시대에 불려졌던 패턴의 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복음송을 일반 복음송과 CCM으로 구별하여 복음송은 허용되더라도 CCM은 허용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사람들도 있으며, 복음송을 왜 다시 구별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실로 다양한 견해가 나타날 수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성가대를 해왔으며, 찬송가와 성가명곡은 계속 불러왔지만, 복음성가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성가나 CCM을 반대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없다.
CCM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첫째, 교회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쉽게 접근할수 있는 요즈음에 시대적인 문화를 수용함으로서 특히 젊은 청년들의 교인들에게 가장친숙한 기독교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대중적이며 시대적으로 유행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을 거부감 없이 교회로 인도하는 데 적합하며 대중문화적 특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둘째, 음악은 가사의 전달이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찬송가나 성가명곡에도 기승전결이 있으며, 강약과 서급이 있다. 비트가 강한 음악이라고 하여 무조건 거부시 하거나 사탄의 역사나 미혹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러한 논리라면 유명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의 서곡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셋째,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와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며, 또 지역적으로 다르며,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풍조를 외면하고 구태여 구 시대의 옛 음악만을 정통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일뿐이다.
우리는 음악적 장르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가사에 주의하여야만 하며,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신사도운동의 영향이나 이단적인 내용이 가사에 포함되어 있다면 당연히 거절하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사까지도 굳이 트집을 잡아서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을 하는 것은 어떤 공감이나 지지를 가져올 수 없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내용을 문제 삼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그러한 가사가 성령을 오라 가라고 하는 명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말투가 어떻게 명령문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이 온 세상에 편재하기 때문에 어느 장소로 오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성경에서는 성령이 어느 장소에 오셨다거나 어느 곳으로 임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령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다(마 3:16)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거듭나서 성령이 거하는 성도들에게 다시 성령이 임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더욱 이상한 주장이다. 기독교인들의 집회는 모두 거듭난 사람들만 있는가?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집회에는 성령이 임하시면 안되는가? 오히려 성령이 성도들 안에만 있다는 생각은 국한된 장소에만 성령이 있다는 주장으로 더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성경에서 “임하다”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 아니라 “오다”(come)라는 의미이며 “성령이 임하다”는 표현은 성경적인 내용이며(눅 1:35, 눅 4:18, 행 1:8, 행 11:15) “성령이 온다”는 표현도 성경에는 기록되어있다(요 15:26, 요 16:13)
물론 “기름부음”을 “하나님의 임재”로 표현하거나 임파테이션을 뜻하는 가사는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기 때문이다. 임파테이션은 사람이 안수를 통하여 성령이나 은사를 준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이러한 가사는 주의를 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신사도적인 표현은 조심하는 것이 옳다. 특히 정통신학적인 개념을 벗어나는 가사는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대적이며 대중적인음악을 사용한다고 하여 그것을 사탄의 역사라고 표현하거나, 비트성이 있는 음악이라고 하여 사탄의 음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배타성과 독단성의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문제가 없는 가사의 내용을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공감을 줄 수 없으며, 단순한 용어로 인하여 문제가 있다는 비판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