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에 귀신이 있다는 이원론
이인규
인간의 구성요소에 따른 신학적인 견해에는 이분법과 삼분법이 있다. 이분법은 영혼과 육체로, 삼분법은 영, 혼, 육으로 분류하는 것인데, 물론 필자는 삼분법이 옳은가 이분법이 옳은가를 신학적인 문제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며, 교단에 따라 다른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은 혼과 영과 육을 언급할 때도 있지만, 혼과 영을 혼동하여 언급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다만 우리가 주의하여야만 하는 이단적인 이원론은 이분법이든 삼분법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서 영(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견해를 뜻한다. 즉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연합하여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존재인데, 살아서 영과 육을 서로 분리하고 견해들이 있으며, 특히 영과 육을 분리된 장소적인 개념으로 구별하여,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이 거한다고 가르치는 주장을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주장은 소위 귀신축사, 그리고 번영신앙(기복신앙)와 직접 연결되는데, 모든 질병과 불행, 사고, 가난의 원인이 되는 귀신이 육체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귀신과 악한 영을 쫓아내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육체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거나 학대를 할 때에 육체에 거하는 귀신이 견디지 못하고 쫓겨간다고 생각하는 주장이 일부 교회들과 기도원을 통하여 만연히 퍼져 있기 때문이다. 소위 안찰기도라고 하여 환자를 때리거나 눈을 찌르는 육체적인 학대를 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큰소리로 꾸짖거나 욕설을 하여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큰 소리로 꾸짖거나 명령을 하여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등한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귀신에게 명령을 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것을 대적기도, 선포기도라고도 하며, 어느 곳에서는 사단결박권이라고 하는 곳이 있고 또 장자권의 회복이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성경적인 방법도 아니요 정통신학적인 방법도 아닌 무속적인 방법일 뿐이다. “안찰”이라는 용어가 개역성경에 한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손을 얹는 약속의 의식을 뜻한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왕하 13:16)
물론 개역개정에는 이것을 다시 번역하였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즉 “안찰”이라는 용어는 lay hand, 즉 손으로 병자를 어루만지는 행위 또는 손을 얹고 약속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신약에서 “안수”와 같은 용어인데, 안수 자체에 어떤 주술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형태라고 보아야 하며, 환자를 때리거나 눈을 찌르는 등 환자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치료행위는 성경에 전혀 없다. 물론 성경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서 귀신을 쫓아낸 적도 없으며, 이러한 행위 자체를 하는 곳은 비성경적인 이단이라고 보아도 문제가 없다.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치유행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➀ 육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등이 육체에는 죄와 귀신이 있고 영에는 성령이 거한다는 주장을 하며, 자칭 내적치유나 영성운동을 하는 단체라고 주장하는 곳에도 이런 주장을 한다. 교회사를 보면 중세 때에 수도원등에서 금식을 하거나 힘든 육체노동을 통하여 죄를 제어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때로는 몇백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행위를 통하여 죄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구성요소로서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으며, 육과 영(또는 영혼)을 구별하는 구절이 분명히 있다.
‘육체’를 뜻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에는 ‘바사르’가 있는데, 그러나 그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의 근육조직과 고기 덩어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전인적인 사람 혹은 총체적인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히브리어 ‘바사르’라는 단어는 약 1/3을 동물로 사용되었고, 2/3는 사람에게 사용되었는데, 단 한번도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 적은 없다. 다시 말하여 사람과 짐승이 육체적인 어떤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육은 하나님과 반대가 된다는 의미, 즉 하나님은 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의 뇌는 육체에 속하며 뇌가 없는 정신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뇌에 치명적인 부상이 있으면 죽거나 또는 죽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마음도 정상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혼없는 육체는 시체이고 육체없는 영혼도 사후에 존재한다. 즉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연합하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개혁주의 인간론, 362쪽)이라고 호칭한다. 육신에 고통을 주면 육체도 상처를 입지만, 영혼도 그 고통으로 상처를 입게 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지로다“(시145:21)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바사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5)
성경의 기자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라고 하였던 것은, 영과 다른 고깃덩어리 부위만이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말하며 모든 인류가 육체를 갖고 있다는 함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신약에서 ‘육’은 헬라어 ‘사르크스“라는 단어이며, 히브리어 ‘바사르’는 70인역에서 ‘사르크스’로 번역되었으므로 호환성이 있다. 물론 ‘사르크스’라는 단어도 순전히 영과 대조되는 근육조직과 신체적인 기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히브리어 ‘바사르’와 같이 대부분 육체는 사람 자체를 뜻한다. 한글에서도 ‘육체적’이라는 단어는 전인적인 인간 자체의 본능과 욕망, 혹은 죄악을 상징한다. 당연히 영혼을 배제한 고깃덩어리의 육체 자체가 욕망과 죄악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영을 좇는 자’는 “성령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육신이 죄로서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이 곧 성령을 거스리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즉 본문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인간과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어 ‘루아흐’ 혹은 헬라어 ‘프뉴마’로 표현되는 ‘영’이란 때로는 인간의 영, 즉 인간의 내적인 생명력으로서 신적 실재와 접촉하는 직접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르킨다. 인간의 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태어난 후에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좇는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반대되는 개념을 의미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여, 바울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표현한 “영에 있는 자”는 거듭난 사람을 뜻하며, “육에 있는 자”는 성령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뜻한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즉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깃덩어리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반대되는 인간의 소욕, 즉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여호와께서 그 영을 강퍅하게 하셨다“(신 2:30)는 것처럼, 성경은 불신자에게는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영’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있음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것이며, 그는 곧 ‘육신에 있는 자’로 표현된다. 바울의 표현은 거듭난 자가 곧 “영에 있는 자”이며, 거듭나지 못한 자가 “육에 있는 자”로서 육의 소욕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썩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 되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대부분 영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을 말하거나 혹은 개념상으로 영과 대조되는 육체로서의 의미를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살아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우가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26절과 같이, “영혼없는 몸은 사실상 죽은 시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후에 온전한 구속으로서 부활은 다시 영혼과 새로운 육체로 연합된다는 것을 말한다.
최근에는 영성개발원이니 영성신학이니 하는 곳에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헬라철학적인 이원론 사상일 뿐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은 곧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며, 어떤 훈련이나 연습을 통하여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의 능력을 개발시킨다는 기독교의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과 같은 곳에서는 영은 죄가 없으며 하나님이 거하고, 죄가 육체에 있으며 사단이 거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생각하여 보아야만 한다.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영혼(혹은 영)이 배제된 육체가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과 영지주의, 마니교등은 이 세상의 근원을 영(선)과 물질(악)의 두가지로 구별하려고 하며, 모든 창조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신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려고 한다. 즉 세상의 악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간주하며, 물질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초래된 것으로 봄으로서, 육체는 근원부터 악하고 죄가 거하는 좌소이며 악신이 거하는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한 헬라철학은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인격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육이나 물질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원천이 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죄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능력에 있어서 약하고 힘없는 존재가 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성경에는 육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을 뜻하였고, 영이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육체의 일을 나열하는데, 그중에서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등은 육체적인 문제보다는 영적인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은 죄가 육체의 독단적인 문제가 아니라 육과 영이 함께 타락하고 범죄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육체의 소욕”이라는 용어는 육체라는 부위만의 욕망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간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육체적으로 간음을 행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의 생각을 품는 자가 간음이라고 하셨다.(마5:21-22)
성경은 선악 간의 문제에서 육체와 영혼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육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영도 더러운 것이 되며 전인적인 인간이 곧 더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육체에 사탄이 거하며, 육체에 죄가 있다고 하거나, 영은 죄가 없으며, 영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우리의 육과 영혼이 모두 더러워지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1)
또한 성경은 육체에 사단이 거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도 혼도 죄를 짓는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마귀가 우리의 육체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생각을 넣는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마찬가지로 육체만이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육체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송축하고, 영혼도 죄를 짓는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➁ 죄는 전인적인 기관으로서 그 좌소가 마음에 있다.
성경적인 표현을 보자면, 죄는 마음에 있다. 마음은 영을 표현하는 기관이며 마음 안에 영이 있으며, 또한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죄가 의지에 있다”고 하였는데, 의지는 인격과 격리되어지지 않는다. 또한 죄는 육체적인 행위뿐 아니라 생각도 포함된다.
즉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영혼의 전인적인 대표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heart)을 주고 그 속에 새 신(spirit)을 주며, 그 몸(flesh)에서 굳은 마음(heart)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heart)을 주어서“(겔11:19)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히: 레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헬: 칼디아 포네로스)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즉 성경에서 ‘육체의’ 라는 말은 ‘죄많은’ 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육체에 죄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육신을 가진 인간 자체가 연약함으로 유혹의 목표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마귀는 유다의 육체가 아니라 그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헬라인 이원론자들과 같이 죄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 영향과 활동이 지정의에 미쳐 전인적으로 죄가 파급되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죄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보다 확실한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8-30)
죄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른 눈과 오른 손이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에 음욕을 갖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실제로 오른 눈을 빼거나 오른 손을 자른다고 하여 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지음으로 지옥에 간다는 강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큰 죄는 육체에 의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교하는 영적 간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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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➂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물론 우리는 악한 영과 대적하여야 하며,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는 마귀나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만약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을 귀신이 들어와서 그를 사로 잡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작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도하고 보호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성경적인 근거로 보아서는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견해가 옳다고 보아야 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8:14-15)
또한 아래 본문은 귀신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만,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성령과 마귀를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신갑주라고 말하며, 능히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말한다. 성령 안에 거하는 우리들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3-17)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빌 1:28)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도하고 보호하시며, 인치심으로 보증하여 주시는데 불구하고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 귀신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성령을 보내주셨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⓸ 모든 불행과 악의 원인이 귀신과 악한 영때문인가?
모든 질병이 귀신때문이 아니다. 물론 가난과 불행과 사고도 모두 귀신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가난의 영을 쫓아내면 부의 이동이 있다는 신사도운동의 황당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가난의 영을 쫓아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다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에 친지나 가족, 은행등에서 어렵게 자금을 융통하여 위험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사업을 해 본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가난의 영만 쫓아낸다고 하면 과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어느 선교단체는 채무의 영을 쫓아내면 모든 빛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주장이 번영신앙, 기복신앙과 직접적인 연결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두 고난과 순교를 당하였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모두 귀신에게 사잡힌 사람들이었는가?
신사도운동과 가계저주론, 영성운동, 내적치유를 주장하는 단체에서 최근에 불순종의 영, 질병의 영, 가난의 영, 채무의 영, 음란의 영등을 주장하며, 그러한 악한 영때문이 불행이 초래된 것으로 간주하며 귀신을 축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인죄론의 문제를 나타내는데, 간음을 한 사람은 그가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음란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이 되어진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단지 음란의 영만을 쫓아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모든 경우가 귀신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십자가 승리 이후 사단의 세력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약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귀신이 들어온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 귀신만 쫓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처방이 된다. 실제 예로 우리는 질병에 걸렸을 때에 거의 대부분 병원에 가서 처방된 약으로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병원의 의사는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며, 약을 먹으면 귀신이 도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모든 병이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병은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하다. 심지어 정신질환도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을 병을 치료하여 주실 수도 있지만 병을 치료하여 주시지 않을 경우도 있다. 즉 모든 병을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세 번을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치료하여 주시지 않으셨다. 귀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도바울도 귀신이 육체로 들어와서 계속 내주한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기도원이나 교회, 선교단체에서 귀신이 들렸다고 진단하여 축사를 하다가 치료시기를 놓쳐서 병원에 입원하여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느 집회나 어느 기도원에 찾아가서 귀신을 쫓아낼 필요가 없으며, 성경을 보면 실제로 귀신이 임하였던 경우에 제자들조차도 귀신을 쫓지 못하였던 사례가 있었는데, 이 때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