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
이인규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설명은 특별계시와 성경이 다른 점과 같은 점을 함께 말한다. 즉 성경은 특별계시에 분명하지만, 특별계시가 반드시 성경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총신대의 임영옥교수의 설명이 잘 표현되었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특별계시라는 말은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연속을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의 칭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조직신학1, 임영옥, 113쪽)
“특별계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말이지, 특별계시 자체가 곧 성경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적인 것으로, 그 기록을 인간적인 것으로 구별짓는 태도는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이나 생각도 전혀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특별계시라는 말은 역시 성경과 특별계시가 동일하다는 뜻에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조직신학1, 임영옥, 114쪽)
루이스 벌콥도 특별계시를 세가지로 분류하였지만, 박윤선 박사는 개혁주의교리학(영음사)이라는 책 27-37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계시를 여섯가지로 분류한다. 즉 (1) 하나님의 나타나심 (2) 이적과 기사 (3) 예언 (4) 꿈 (5) 이상 (6) 성경이다. 정이철목사는 박윤선박사도 위험하고 이단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는지 답변을 하기 바란다.
이정석교수의 특별계시에 대한 정의를 세가지로 소개한다. (1) 언어적 특별계시 (신현) (2) 비언어적 특별계시 (제비, 꿈, 환상, 이적현상) (3) 성경이다.
이정석교수는 (1)번과 (2번의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기록된 성경에 근거하여 수용하여야 한다고 필자와 동일한 견해를 말한다. 또한 (1)번에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내재하는 성령의 감동을 특별계시로 포함시킨다.
3. 특별계시
특별계시란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그 대부분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언어적 계시(verbal revelation)”이지만, 환상이나 기적같은 비언어적 계시도 있다. 특별계시는 자연계시보다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자연계시를 보완해 주고 혹은 강조적으로 반복하며 바르게 해석해 주시도 한다. 따라서 특별계시에는 상당량의 일반계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비진리의 오염과 자연의 혼란으로 인해 흐려지고 도착된 일반계시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말대로, 특별계시의 안경을 통해서만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특별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의 원리에 의해서는 죄인에게 오로지 심판과 멸망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골 1.16-17, 엡 1.10, 롬 8.19-22).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창조에 기초에 근거한 일반계시가 불분명해지고 왜곡됨으로서 불충족해짐에 따라, 구속을 위해 특별계시가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첫째로, 하나님 자신이나 그 사자를 통해 나타나시는 신현(神現)의 방식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지성소 구룹 사이에서 또는 불과 연기, 폭풍우, 미풍 속에서 나타나셨으며, 그의 사자를 보내기도 하셨다(시 80.1, 99.1, 창 15.17, 출 3.2, 19.9, 16-17, 33.9, 시 78.14, 99.7, 욥 38.1, 40.6, 시 18.10-16, 왕상 19.12, 출 23.20-23, 사 64.8-9, 창 16.13, 31.11,13, 32.28).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창 2.16, 3.8-19, 4.6-15. 6.13, 9.1,8,12, 32.26, 출 19.9-10, 신 5.4-5). 그러나 신현은 예수님의 강림에서 그 극치를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대화하시고 가르쳐 주셨으며, 그의 삶과 희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또한 그의 승천 후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와 성도에 내재하여 지도하고 계신다.
둘째로, 비언어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는 방식이다. 제비를 뽑거나(삼상 10.20-21, 행 1.26),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으로(출 28.30, 민 27.20, 신 33.8)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셨으며,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꿈이나 환상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을 혼란시키게 됨으로서 무서운 형벌로서 무서운 형벌로서 경계하였다(신 13.1-5, 렘 23.23-32, 29.8-9). 인류 역사상 꿈이나 환상같은 회화적 방식을 통하여 계시하신 경우는 사실상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심으로서 그를 나타내시기도 하였다(신 4.32-35, 시 106.8, 요 2.11, 5.36, 10.37-38, 행 4.10). 그런데 이적현상도 악령에 의해 오용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뜻을 계시하심에 있어서 어떤 때는 이러한 비언어적 방식도 사용하셨지만 악령의 혼란공작이 가장 극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수용해야 한다.
셋째로, 그의 선지자와 성경기자를 통하여 언어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방식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입”이 되어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했으며 성경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기록했다. 이러한 계시는 동시대인들에게 주어졌으나,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 가감이 허락되지 않는 완전한 형태의 성경으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게 되었다.“(이정석교수의 홈페이지에 있는 조직신학 발췌 – 필자의 카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벌콥의 주장을 살펴보자
루이스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상권에서 특별계시의 방편에 대해서 세가지로 분류한다
(1) 신현들 (Theophanies) (2) 전달들 (Communications) (3) 이적들 (Miracles)
“하나님은 끊임없이 신현, 예언, 이적에서 사람에게 임하시며 또한 이 임하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서 그 최고점에 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돌이켜 교회에서의 성령의 내주로 인도하고 있다.계시 전체가 향해 움직이는 신적 텔로스는 계시록 21:3에 묘사되어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희와 함께 계셔서”(루이스벌콥 조직신학 상권 159-160쪽)
과연 정이철목사와 같이 모든 특별계시를 부정하여야만 하고, 오직 성경만이 특별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이 맞을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루이스벌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시니안파는 의심할 여지없이 특별계시가 단순히 사람에게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의 의무에 관한 정보를 마련할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도 마찬가지로 마치 하나님의 계시가 언사적이기 보다는 사실적이며 또한 지식의 전달보다는 오히려 구속적 행동에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별계시는 오로지 말씀과 교리에만 있거나 그 자체를 지성에만 전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전보다 현재에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구약계시는 율법이나 선지자들에서만 발견되지 않고 신현이나 이적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도 발견된다.”(조직신학, 160쪽)
“바르트나 부룬너는 완성되어 이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소원된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응답은 계시 자체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의해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 그것이 없이는 비록 그것의 증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계시가 없다. 계시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지속적 혹은 아마도 더욱 낫게는 반복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조직신학, 162쪽)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루이스벌콥은 직통계시나 현현과 이적을 받아들여야 하다고 인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루이스벌콥도 그러한 계시가 기록된 성경과 일치한다는 조건부를 말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역시 루이스벌콥도 특별계시와 성경에 대해서 동의어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지만, 또한 성경이 특별계시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에 찬성하는데, 그것은 사도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벌콥은 성경과 특별계시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조직신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면 (1) 현현 (2) 신언의 전달 (3) 꿈과 이상 (4) 기적을 통하여 나타나지만, (5) 기록된 말씀인 성경도 특별계시이다. 특별히 성경은 객관적인 특별계시로서, 또 신앙의 기준으로서 유일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특별계시는 개인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여야만 그 검증을 받을 수 있다.
이성주교수의 조직신학 1권(성지원) 117-128쪽을 보면 특별계시에 대해서 (1) 성경 (2) 그리스도 (3) 예언(개인의 장래의 점을 치는 것과 다름) (4) 이적과 기사로 구분한다.
또 김준삼박사의 교의신학을 살펴보면 바르트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볼 수가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초자연적 계시를 부정하며, 따라서 기적을 부정한다. 바르트의 경우는 자연계시를 부정하며 역사적 계시도 부정한다. 또한 초자연적인 계시도 부정하고 만다. 즉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일 혹은 자연적이 아닌 기적적인 일들 그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의미로는 역사적 계시라든가 초자연적 계시로서 구별하고 있다.”(교의신학 1권, 김준삼, 34쪽)
정이철목사는 특별계시를 오직 성경 외에는 없다고 모두 부정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이단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객관적인 특별계시는 성경이 유일하며, 성경으로 그 사실성과 진리적 기준이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필자가 오래 전에 올려 놓았던 특별계시와 성경에 대한 글을 올린다. 필자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전체적으로 글을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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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이인규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하였고, 어거스틴은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였다. 즉 인식과 신앙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두 견해가 모두가 맞지만, 정확히 설명하자면 어거스틴의 주장이 더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자세가 되어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기독론같은 신론(神論)의 부분은 인간의 지혜와 사고로 명확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삼위일체나 기독론은 인간의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성경을 그대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하게 측량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믿음과 이성은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결코 신앙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으며 그러한 생각은 인본주의로 흐르게 된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지식이란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전체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곧 지식의 원천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즉 예수님 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또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란 말은 히브리어 “갈리”, 헬라어 “아포칼뤼프토”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나님 자신과 그 목적, 행동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서 밝히고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아포칼뤼프시스라는 동사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다, 베일을 벗기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인간의 체험과 명상을 근거를 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을 물론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계시를 우리는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누구나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기에 불충분하다고 본다. 즉 아담의 타락 이후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계시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또 이러한 계시의 내용은 주관적, 자의적, 개인적이 되어질 수 있으며, 그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표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의 멧세지는, 계시를 받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지식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혹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공동체)을 위한 지식, 혹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멧세지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확실한 인식을 위한 특별한 계시가 필요하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옛적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셨으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히1:1-2)
즉 특별계시에는 역사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특별계시는 사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과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고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특별계시는 목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특별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있는 것이다.
즉 특별계시의 세가지 요소는 (1) 역사성 (2) 사실성 (3) 목적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기록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완전하고 유일한 기록된 객관적 계시는 바로 성경밖에는 없다. 즉 하나님을 외적인 원리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특별계시는 바로 성경말씀이 된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요한계시록이 주님의 계시라고 말한다.(계1:1)
사도바울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주님께 받은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갈1:11-12)
즉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을 기록한 것, 그 성경말씀이 곧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나님 자신과 그 목적, 행동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서 밝히고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하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한 내용이 성경과 전혀 다르며, 상반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 계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과 다른 책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인정하는 곳은 이단이다. 예를 들면, 통일교는 원리강론이란 책을, 몰몬교는 몰몬경을,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이 달리 번역한 신세계역을, 지방교회는 회복역을 사용한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계시가 성경과 전혀 다르며,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계시와 보혜사 성령에 대한 계시가 여태까지 기록되고 읽혀온 성경과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을 주시고 오랫동안 그것을 보존케 하신 이유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경과 전혀 반대가 되는 계시를 주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보존케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내용의 계시를 내려주셔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성경 말씀은 폐하지 못한다(요10:35, 롬9:6)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님조차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마1:22)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또 계시의 내용이 너무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목적을 가졌다면 그 계시의 내용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 특정한 개인을 위하여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 앞에 나타난 주님의 경우를 들자면, 바울 개인의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주님의 계시가 아니라 그를 이방인의 전도자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신령한 사람이 받은 계시라고 할지라도, 그 계시의 내용이 성경과 전혀 다른 내용이라면, 우리는 그 계시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