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최종 정리와 요약)
이인규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최종정리와 요약)
이인규
필자는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계시여, 완전하고 객관적인 신앙의 기준이 되며, 모든 계시는 성경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정이철목사와 림헌원목사가 필자의 책을 앞부분만 인용하고 본론과 결론을 인용하지 않음으로서 마치 필자가 성경 외의 다른 특별계시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조작을 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필자의 견해를 고의적으로 조작과 매도를 하기 위한 목적인데, 필자가 오늘날도 성경 외에 다른 계시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심지어 필자가 신사도운동을 지지하고 있다고 글을 올린 것을 보고 양심의 화인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특별계시라고 필자의 책에서 여러차례를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 카페에서 필자가 신사도운동을 비판한 글을 하나라도 읽어 보았다면, 필자가 평소부터 직통계시를 비판하는 글을 하나라도 읽어보았다면 그런 주장이얼마나황당한 조작이라는 것을카페 회원들은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본다.
소영웅주의에 잡혀서 자신들과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면 모두 이단이며 사단이라고 주장하며, 텍스트를 앞부분만을 인용하며 조작시키면서까지 상대방을 왜곡시키고 매도하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본문의 뒷부분에 제 책의 내용을 전문 전체를 첨부하니 하나도 빼지 않고 읽어볼 것을 부탁드린다. 필자는 성경의 객관성, 완전성, 유일성, 종결성,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유일한 특별계시로서 진리”가 맞다. 그러나 성경이 “유일한 특별계시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계시”(revelation)는 “하나님이 그의 뜻을 드러내는 방법”을 뜻한다.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필자는 “오늘날도 특별계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현현이나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직통계시가 오늘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기록된 성경 외의 다른 계시가 필요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는 뜻일 뿐이다. 예를 들면 기적과 섭리등과 같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섭리의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자연적인 계시와 초자연적인 계시로 분류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언어적계시와 비언어적계시로 분류하기도 한다. 감리교의 신학은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분류하지 않는다.
필자가 말하는 “특별계시“라는 신학적인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뜻하는 철저하게 조직신학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정이철과 림헌원은 아마 특별계시를 직통계시와 동의어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도 기적과 이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다는 것뿐이며, 현현이나 음성, 꿈같은 직통계시에 대해서 필자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보편적인 설명은 특별계시와 성경이 다른 점과 같은 점을 함께 말한다. 즉 성경은 특별계시가 분명하지만, 특별계시가 반드시 성경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총신대의 임영옥교수의 설명이 잘 표현되었는데, 임영옥교수는 특별계시에 대해서 성경을 말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연속성”이라고 정의한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특별계시라는 말은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연속을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의 칭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조직신학1, 임영옥, 113쪽)
성경은 특별계시가 분명하다. 그러나 특별계시 자체가 곧 성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별계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말이지, 특별계시 자체가 곧 성경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적인 것으로, 그 기록을 인간적인 것으로 구별짓는 태도는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이나 생각도 전혀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특별계시라는 말은 역시 성경과 특별계시가 동일하다는 뜻에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조직신학1, 임영옥, 114쪽)
이러한 견해는 루이스벌콥에서도 동일한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임영옥 교수가 루이스벌콥의 견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특별계시란 말은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연속을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의 칭호로 사용되기도 한다.”(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45쪽)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전개의 각 시점에서 주어진 특별한 계시 사건이고, 성경은 그것의 문자적 보존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특별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 전체가 성경은 아니다.
특별계시와 성경의 차이점을 보면, ① 방법상 : 특별계시는 외적인 나타남, 내적인 암시, 이적 등을 통한 전달 사건이나 성경은 그 전달 사건의 내용 및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② 시간상 : 특별계시는 그것의 기록인 성경보다 먼저 주어졌다. ③ 범위 : 특별계시의 일부만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요21:25).
한편, 양자의 동일한 점을 보면, 성경은 특별계시의 종합적 방법으로서 특별계시 내용의 수집이며, 양자는 공히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리될 수 없다(요10:35; 롬3:2; 살전2:13; 히4:12).” (특별계시와 성경,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다시 말하면 성경은 특별계시가 맞는데, 특별계시는 오직 성경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경은 “특별계시된 유일한 진리”가 분명하지만, “특별계시의 유일한 양태”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벌콥의 주장을 살펴보자
루이스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상권에서 특별계시의 방편에 대해서 세가지로 분류한다 (1) 신현들 (Theophanies) (2) 전달들 (Communications) (3) 이적들 (Miracles)
박윤선 박사는 개혁주의교리학(영음사)이라는 책 27-37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계시를 여섯가지로 분류한다. 즉 (1) 하나님의 나타나심 (2) 이적과 기사 (3) 예언 (4) 꿈 (5) 이상 (6) 성경이다.
많은 조직신학자들은 특별계시를 3-6가지로 분류하며, 성경을 특별계시의 하나로 언급한다. 혹시라도 오해를 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설명하는데, 필자는 직접계시가 지금 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성경과 다른 특별계시를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또 이정석교수는 특별계시에 대한 정의를 세가지로 분류한다. (1) 언어적 특별계시 (신현) (2) 비언어적 특별계시 (제비, 꿈, 환상, 이적현상) (3) 성경이다.
이정석교수는 (1)번과 (2)번의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기록된 성경에 근거하여 수용하여야 한다고 필자와 동일한 견해를 말한다. 또한 (1)번에 대한 설명에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내재하는 성령의 감동을 특별계시로 포함시킨다. 물론 성령의 감동과 조명은 주관적일 수 있다.
아래가 이정석교수의 전문이다.
3. 특별계시
특별계시란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그 대부분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언어적 계시(verbal revelation)”이지만, 환상이나 기적같은 비언어적 계시도 있다. 특별계시는 자연계시보다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자연계시를 보완해 주고 혹은 강조적으로 반복하며 바르게 해석해 주시도 한다. 따라서 특별계시에는 상당량의 일반계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비진리의 오염과 자연의 혼란으로 인해 흐려지고 도착된 일반계시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말대로, 특별계시의 안경을 통해서만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특별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의 원리에 의해서는 죄인에게 오로지 심판과 멸망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골 1.16-17, 엡 1.10, 롬 8.19-22).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창조에 기초에 근거한 일반계시가 불분명해지고 왜곡됨으로서 불충족해짐에 따라, 구속을 위해 특별계시가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첫째로, 하나님 자신이나 그 사자를 통해 나타나시는 신현(神現)의 방식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지성소 구룹 사이에서 또는 불과 연기, 폭풍우, 미풍 속에서 나타나셨으며, 그의 사자를 보내기도 하셨다(시 80.1, 99.1, 창 15.17, 출 3.2, 19.9, 16-17, 33.9, 시 78.14, 99.7, 욥 38.1, 40.6, 시 18.10-16, 왕상 19.12, 출 23.20-23, 사 64.8-9, 창 16.13, 31.11,13, 32.28).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창 2.16, 3.8-19, 4.6-15. 6.13, 9.1,8,12, 32.26, 출 19.9-10, 신 5.4-5). 그러나 신현은 예수님의 강림에서 그 극치를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대화하시고 가르쳐 주셨으며, 그의 삶과 희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또한 그의 승천 후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와 성도에 내재하여 지도하고 계신다.
둘째로, 비언어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는 방식이다. 제비를 뽑거나(삼상 10.20-21, 행 1.26),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으로(출 28.30, 민 27.20, 신 33.8)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셨으며,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꿈이나 환상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을 혼란시키게 됨으로서 무서운 형벌로서 무서운 형벌로서 경계하였다(신 13.1-5, 렘 23.23-32, 29.8-9). 인류 역사상 꿈이나 환상같은 회화적 방식을 통하여 계시하신 경우는 사실상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심으로서 그를 나타내시기도 하였다(신 4.32-35, 시 106.8, 요 2.11, 5.36, 10.37-38, 행 4.10). 그런데 이적현상도 악령에 의해 오용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뜻을 계시하심에 있어서 어떤 때는 이러한 비언어적 방식도 사용하셨지만 악령의 혼란공작이 가장 극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수용해야 한다.
셋째로, 그의 선지자와 성경기자를 통하여 언어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방식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입”이 되어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했으며 성경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기록했다. 이러한 계시는 동시대인들에게 주어졌으나,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 가감이 허락되지 않는 완전한 형태의 성경으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게 되었다.“(이정석교수의 홈페이지에 있는 조직신학 발췌 – 필자의 카페)
위 이정석 교수의 자료 중에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뜻을 계시하심에 있어서 어떤 때는 이러한 비언어적 방식도 사용하셨지만 악령의 혼란공작이 가장 극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은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지만 성경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와 동일하다.
또한 이정석 교수는 “그의 승천 후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와 성도에 내재하여 지도하고 계신다.”라고 설명을 한다. 루이스벌콥도 교회에서 성령의 내주로 인도하심을 특별계시로 포함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신현, 예언, 이적에서 사람에게 임하시며 또한 이 임하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서 그 최고점에 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돌이켜 교회에서의 성령의 내주로 인도하고 있다.계시 전체가 향해 움직이는 신적 텔로스는 계시록 21:3에 묘사되어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희와 함께 계셔서”(루이스벌콥 조직신학 상권 159-160쪽)
과연 정이철목사와 림헌원목사와 같이 모든 특별계시를 부정하여야만 하고, 오직 성경만이 특별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이 맞을까? 물론 이러한 주장은 “성경만이 권위있는 특별계시이다”라는 뜻으로 볼 때에 옳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그렇게 표현을 하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경 외에는 모두 필요가 없으므로 주석과 신학서적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학교와 세상의 지식을 모두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은 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으며,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 외에 더이상 계시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른 계시가 모두 중단되고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섭리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계시가더이상 중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주장은 자유주의의 견해가 된다.
오늘날 직접계시는 중단되었다. 필자가 오늘날도 지속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오늘날에 기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중단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자연계시만 하고 있다는 뜻일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루이스벌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시니안파는 의심할 여지없이 특별계시가 단순히 사람에게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의 의무에 관한 정보를 마련할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도 마찬가지로 마치 하나님의 계시가 언사적이기 보다는 사실적이며 또한 지식의 전달보다는 오히려 구속적 행동에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별계시는 오로지 말씀과 교리에만 있거나 그 자체를 지성에만 전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전보다 현재에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구약계시는 율법이나 선지자들에서만 발견되지 않고 신현이나 이적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도 발견된다.”(루이스벌콥 조직신학, 160쪽)
“바르트나 부룬너는 완성되어 이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소원된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응답은 계시 자체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의해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 그것이 없이는 비록 그것의 증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계시가 없다. 계시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지속적 혹은 아마도 더욱 낫게는 반복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루이스벌콥 조직신학, 162쪽)
오늘도 성령께서는 교회에서 계시된 진리를 이끄신다.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의 지속성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이것을 밝히고 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강성두, 글로리라) 355페이지, 성령의 일반적 사역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듯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생각나게 하셨다. 성령께서는 복음 안에서 믿음을 통해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시고 이끄셨으며, 받은 계시를 되새기는 제자들의 이러한 성령감화는 교회 안에서 계시를 해석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에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온갖 진리로 이끄신다. 교회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교회가 발전적으로 이해해 가는데,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하나님의일반 섭리에 있어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없이도 그 이상의 것과 또는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라도 자기의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조, 5장3절)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하나님의 직접계시에 대해서는 중단되었다고 말하지만, 오늘날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계시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이스벌콥은 직통계시나 현현과 이적을 받아들여야 하다고 인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오늘날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음성듣기와 같은 직통계시는 중단되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루이스벌콥도 그러한 계시가 기록된 성경과 일치한다는 조건부를 말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 그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역시 루이스벌콥도 특별계시와 성경에 대해서 동의어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지만, 또한 성경이 특별계시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에 찬성하는데, 그것은 사도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이스벌콥은 성경과 특별계시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조직신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면 (1) 현현 (2) 신언의 전달 (3) 꿈과 이상 (4) 기적 등으로 분류되지만 (5) 기록된 말씀인 성경도 특별계시이다. 특별히 성경은 객관적인 특별계시로서, 또 신앙의 기준으로서 유일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특별계시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여야만 그 검증을 받을 수 있다.
이성주 교수의 조직신학 1권(성지원) 117-128쪽을 보면 특별계시에 대해서 (1) 성경 (2) 그리스도 (3) 예언(개인의 장래의 점을 치는 것과 다름) (4) 이적과 기사로 구분한다.
이성주 교수는 신유의 이적에 대해서 (4) 이적과 기적의 소제목으로 특별계시에 포함시킨다. 물론 이상한 집회를 통한 신유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물론 신유의 이적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으므로 모두 인정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는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성주교수는 오늘날 지속되는 기독교인들의 병치유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말한다.
“신유의 이적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있다.신유의 이적은 구약시대부터 시작해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더 강렬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적은 엘리야, 엘리사,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 교부들, 로마카톨릭교회, 그리이스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 등에서 지금까지 계속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신유의 이적은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지금도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며, 이와같은 사실은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간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다”(이성주, 조직신학 1권, 성지원, 127-128쪽)
모든 조직신학자들은 특별계시에 기적을 포함시킨다. 오늘날도 기적은 있으며, 기적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게하시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들은 기적이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말한다. 오히려 기적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합리주의자들은 초자연적 계시를 부정하며, 따라서 기적을 부정한다. 바르트의 경우는 자연계시를 부정하며 역사적 계시도 부정한다. 또한 초자연적인 계시도 부정하고 만다. 즉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일 혹은 자연적이 아닌 기적적인 일들 그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의미로는 역사적 계시라든가 초자연적 계시로서 구별하고 있다.”(교의신학 1권, 김준삼, 34쪽)
마틴로이드존스도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일반계시(자연계시)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말한다
“물론 기적은 자연법칙을 깨트리는 것이기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지금 그 자신이 자연에 정해놓은 법칙에 속박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그 자신의 법칙에 대해 보조적인 위치로 끌어 내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마틴로이드존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208쪽)
“사람들은 자주 기적에 대한 이런 문제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적이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생각부터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고민입니다. 그 잘못된 고민의 이유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연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두가지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차적인 원인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행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가 길게 말해 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범사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법칙에 제한을 받거나 속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틴로이드존스, 같은책. 208쪽)
웨인그루뎀는 성경 이후에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사도시대에 특별히 많은 기적적인 능력의 사역들이 집중된 듯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사후에는 기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생각해야할 이유는 없다. 사도들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특징을 이루는 새 언약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교회의 덕을 위해 성령께서 기적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한은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본받기를 추구해야할 모형을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550-551쪽)
“우리는 기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경외와 두려움을 갖고 그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 이 정의는 만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섭리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적에 대한 다른 정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533쪽)
정이철목사와 임헌원목사는 특별계시를 오직 성경 외에는 없다고 모두 부정한다. 물론 정이철목사에 국한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외에는 계시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조직신학적 의미는 다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이단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특별계시라는 용어도 조직신학자들과 전혀 다르다. 필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객관적인 특별계시는 성경이 유일하며, 성경으로 그 사실성과 진리적 기준이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은 지금도 있다는 뜻이며, 그러한 계시를 성경과 다른 계시의 방법으로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고 필자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오직 성경만이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며, 완전한 계시이다. 특히 필자는 하나님의 현현이나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수차례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책에 쓴 전체의 내용을 아래에 첨부하니 반드시 전체적으로 읽어보기를 부탁드린다. 필자가 성경외의 특별계시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생각이 드는가? 필자가 신사도운동을 지지한다고 생각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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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계시의 종결성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특별계시는 (1) 현현 (2) 전언(傳言) (3) 기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물론 오늘날도 특별계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도 특별계시이다. 대부분의 일반 교회에서는 계시의 종결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직통계시의 종결성을 뜻한다. 그러나 혹간 사람들이 어느 성경에 계시와 예언이 끝났다는 구절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의 종결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시의 종결이라는 주장은 앞으로 계시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확실하다. 지금 수많은 이단들이나 사이비집단의 교주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성경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계시를 거짓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성경적인 내용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일 계시나 예언이 성경과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변치 않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두 말로 식언하시는 분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객관성과 완전성에 대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성경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앙은 재점검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이미 사실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없던 시대에는 예언과 계시가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거꾸로 예언과 계시가 성경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객관성과 성경의 완전성을 인정한다면, 기록된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은 곧 신약성경말씀을 뜻하며, 신약의 기록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온전한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 계시에 추가할 또 다른 계시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궁극적인 계시(final revelation)가 된다는 것이며, 모든 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로 성취되어진다.
사도요한도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하고 있다(계 22:18-19).
이것 역시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적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완전성, 객관성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곧 그것이 계시의 종결성이다. 만약 또다른 계시가 필요하다면 성경은 불완전한 기록이 되어진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1:1-3)
누가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계시의 종결성을 뜻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 곧 신약성경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객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 66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예언과 계시를 전해야 하였다. 하나님은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 자신의 멧세지를 공동체에 전하기 위하여 예언자와 선지자를 사용하였던 것이며, 신약에서 예수가 직접 임명하신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셨던 것이다.
(2) 성경은 선지자나 신령한 자보다 권위가 더욱 높다.
초대교회에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과 신령한 자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편지 즉 신약성경이 주의 명령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6-37).
바울의 서신은 그것이 곧 주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바울의 최초의 서신이라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도 등장하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감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바울은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심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확고하다. 바울의 서신, 즉 신약성경과 다르면 이단이라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게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비난한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어떤 계시나 어떤 예언, 심지어 천사가 전하여준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완전성과 계시의 종결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동일한 신빙성을 갖는 것으로 말하였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더욱이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베드로 사도가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지 말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성경으로서 인정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주님에게로부터)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도요한은 요한서신에서 자신이 “주님의 목격자이며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1-4).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도 동일하게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계 1:2)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게다가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계시록에 대해서, 그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거나 감하는 행위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당히 선포한다. 성경의 완전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계시의 종결성은 성경의 완전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성경의 완전성과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계시의 종결성이다. 그 계시나 예언도 성경말씀에 부합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성경은 사도들이 전하는 주의 명령이며, 주님의 가르침이다. 다른 복음은 없으며, 하늘의 천사에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말(우리의 말)로 미혹의 영에 대한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예수그리스도가 곧 계시의 성취이며 완성이며 궁극적인 계시가 된다.
이 예수에 대한 기록이 바로 사도들이 쓴 성경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