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에 대한 신학적 견해
이인규
루터는 칭의를 강조하였고, 캘빈은 중생을 강조하였으며, 웨슬레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각각 신학적인 관점에서 강조점은 다르지만, 어느 한가지 과정만을 구원의 전부이며 종결이라고 정의해서는 안된다.
특히 구원론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행함에 대한 성화가 약해지고, 이루어가야 하는 성화를 강조하다 보면 이미 받은 법적인 신분으로서의 칭의가 약해진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균형과 조화이며,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여야 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며,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인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칭의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이 될 수 있고, 성화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다보면 행위구원론이 될 수 있다.
칭의는 이미 받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Already)을 강조하게 되고, 성화는 현재 걷고 있는 구원의 시제와 장차 받을 장래 시제의 구원(Not but yet)을 강조하게 된다.
웨슬레주의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함께 강조하는데 반하여, 캘빈주의는 칭의에 비중을 많이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 물론 모든 개혁주의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웨슬레안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는 구원의 시작이며, 동시에 이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칭의와 구원이 같은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의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단 시작되면 곧 끝나지 않고 영화의 단계에 이를때까지 계속된다’ (캐논, 요한웨슬레의 신론, 119) 이러한 계속적인 구원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믿음이다”(조직신학2, 이성주, 성지원, 468쪽)
“웨슬레는 칭의의 개념을 해설할 때에 반드시 성화의 개념을 전제로 해서 풀어나간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개념을 해설할 때에도 성화의 개념을 전제로 해서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지지만 구원은 의와 화평, 그리고 기쁨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포함된 구원은 자연히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웨슬레는 ‘인간의 생활이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의의 성결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조직신학2, 이성주, 성지원, 469쪽)
윌리엄즈(Collin Williams)는 ‘의인’에 대해서 ‘성화라는 집의 문’이라고 표현하고 ‘의인은 기독교인 생활의 진정한 기초요 시작이다’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칭의를 구원의 전체로 함축했으나 웨슬레는 칭의와 성화를 함께 강조하였다. 루터가 그러한 주장을 강조한 것은 그 시대적 배경이 카톨릭의 선행교리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루터에 있어서 의인은 구원 전체의 내용을 함축했으나, 웨슬레에게 있어서 후자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에서 중생을 포함하는 의인은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단계로서 중요하다. 웨슬레의 성화론을 저술한 린스스톰(Lindstrom)도 궁극적인 성화만을 주장하고 역설한 나머지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을 때에 이미 받은 놀라운 선물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의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며, 스타키(Starkey)는 ‘웨슬레의 구원론에서 의인은 성화와 함께 두 개의 기둥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의 개념에 대한 이해없이 웨슬레의 성화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64쪽)
개혁주의신학에서 칭의란 무엇일까? 혹간은 칭의를 구원의 종결로 간주한다. 그 배경에는 견인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개혁주의의 견해라기보다는 구원파의 견해에 가까울 수 있으므로 주의를 해야한다. 칭의는 의롭다함을 받음이며, 자기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누가복음 18:14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했지만, 세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1-13)
다시 말하여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에게 칭의가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세리가 하나님에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오늘날 자신이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한다고 하여 그가 과연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므로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을까?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는 “디카이오오”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39번을 사용되었고, 로마서 4:5에서도 사용되었다. 즉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구절이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값없는 은혜라고 말한다.
칭의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고 칭하신다. 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다른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그 믿음은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개혁주의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 내가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한다고 하여 칭의의 신분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하게 내가 웨슬레주의 교회를 다니고, 웨슬레주의 신학을 한다고 하여 칭의의 신분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내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롭다하심을 주시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여기실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그 성경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구절이다.
웨스트민스터 조항 4번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4]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법적, 신분적인 무죄선언이다. 즉 내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그 법적 신분적인 선언이 나에게 적용될 때를 말한다. 내가 스스로 의인이 되었으므로 나의 구원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구원파와 다름이 없다. 즉 스스로 구원의 종결을 선포하는 것은 자신이 구원주라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므로써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진정한 믿음도 없으면서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나의 구원은 이미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간혹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칭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의인이라고 자칭한 사람들의 구원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스스로 확증할 수 있는 사람, 즉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거듭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그들은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어떤 행위를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Not yet 이라는 겸손함을 가지며, 자신이 혹시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반하여, 구원을 스스로 단정한 사람들은 Already 라는 성급함을 가지며, 스스로 의인이라고 칭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웨슬레는 다른 조직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칭의, 중생, 성화를 각각 분리되고 구별된 구원의 과정이라고 보지 않는다.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는 단계는 이론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나 단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웨슬레가 주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1) 의인과 동시 중생하면 여기서부터 초기의 성화가 시작되며, (2) 그 후 신자로서의 회개와 믿음은 온전한 성화 곧 성결하여지며, 마침내 (3) 영화의 단계를 포함하며 이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행해서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 의인을 얻는데 유일한 조건이 믿음인 것 같이 온전한 성화를 얻는 조건도 오직 믿음뿐이며, 신자가 다시금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이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74쪽)
“웨슬레에게서는 기독자의 완전이 하나님의 요구이면서 약속이 되며, 성화가 궁극 의인 즉 궁극 구원(Final Salvation)에 대한 산소망을 준다. 또한 의인도 오늘 여기서 현실화 됨과 동시에 마지막 궁극 의인을 약속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에게서 현재적 의인과 완전은 하나님에 의한 참된 약속이며 궁극적인 의인에 대한 산소망을 가질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소망이 오늘의 신자의 삶에 성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성광문화사, 182쪽)
칭의에 있어서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웨슬레주의는 믿음을 강조한다. 물론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은 자녀이며, 웨슬레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나의 믿음을 확증함으로서 구원을 받았다는 결과는 동일하다. 공통적인 견해는 같으며, 인간의 행위와 노력과 의지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오직 자기가 속한 교단, 오직 자기가 배운 신학, 심지어 오직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이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교단, 같은 신학대학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신학교수들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좁은 스펙트럼의 신학만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어도 자신은 정작 인지하지 못한다. 그 주위에는 동류의 사람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웨슬레안이다. 이단을 연구하면서부터 필자는 다양한 조직신학책을 읽어왔으며, 성경을 가장 권위있는 진리적 기준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필자가 교류하는 감리교 신학교수들은 필자를 개혁주의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개혁주의나 웨슬레주의에 대하여 상당히 스펙트럼이 넓은 범주의 신학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신학적인 견해들은 성경과 틀린 것(Wrong)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Different)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신학토론을 즐겨하지만, 다른 견해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은 싫어한다.
우리의 적은 이단이다. 장로교의 적이 감리교가 아니며, 감리교의 적이 장로교가 아니다. 이 싸움은 정통교회와 이단교회의 싸움이다.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 외에는 모두 적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싸움을 하면 안된다. 아군이 다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