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십일조
이인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마태복음 23장은 “화있을찐저”라는 저주의 문구가 7번 언급되는데, 본문은 4번째 구절이다. 이 “화있을찐저”라는 저주의 문구는 뒤에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6번 언급되며, “소경된 인도자”가 1번 기록되어 있다.
즉 예수님이 비판하는 이 대상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등 인도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소한 농산물의 십일조까지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십일조였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 27장30절은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라고 말한다. 즉 원칙적인 십일조는 땅의 소산 중에서 곡식이나 열매의 십분지일은 십일조로 드리게 되어있다.
그러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가 뜻하는 의미는 매우 세분화된 것에 대한 십일조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향료나 방향제, 양념으로 사용되는 것이었으며, 주로 집의 마당이나 정원에 심는 중요한 농산물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회향은 십일조의 대상이었다고 말하지만, 박하나 근채는 십일조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본문이 말하는 의미는 사소한 농산물의 십일조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의 내면적인 본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23장23절의 바로 뒤에 나오는 24절을 보면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사소한 농산물의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외부로 보이기 위한 외식이었을 뿐이며, 외부에서 알 수 없는 큰 수입의 십일조는 몰래 삼켰음을 알 수가 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개역은 “의와 인과 신”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역개정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번역하였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로 번역하였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judgment, mercy, and faith”로 번역했고, NIV영어성경은 “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로 번역하였다.
즉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십일조가 지니고 있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요성과 가치성은 외견적인 십일조의 액수가 아니라 그 십일조 율법이 뜻하는 본래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의‘(크리시스)는 정의를 뜻하며, ‘의‘를 다른 말로하면 ‘공정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엘레오스)은 과부나 이방인 그리고 고아등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십일조는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와 성중에 우거하는 손님과 과부, 고아를 위한 것이었다. ‘신‘(피스티스)은 믿음의 신실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신뢰와 약속을 뜻한다.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 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십일조는 “의와 인과 신”과 상관이 없었으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실천이 그 본래의 의미었던 것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원래 이 구절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통용된 관용적인 속담이었다고 본다.
유대인들이 포도주를 마실 때에 위생적인 관점에서 포도주에 섞여있는 하루살이는 걸러내었다. 그러나 약대는 부정한 짐승에 속하였다.(레 11:4) 즉 하루살이와 같이 작은 것은 걸러내면서, 부정한 짐승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존재하는 동물 중 가장 큰 종류인 약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삼킨다는 것은 바리새들인의 왜곡된 신앙의 단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이것‘은 의와 인과 신을 가리키고, ‘저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말한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다.
다시 말하여 이 말씀은 율법의 본래적인 정신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 세부적인 사항에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십일조라고 하여 중단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내는 십일조가 하늘에 있는 창고에 쌓여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십일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희생제물도 하나님이 그것을 직접 먹기 위하여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사람을 위하여 죄사함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
오늘날도 십일조가 남용되어지거나 잘못 오용되어지고 있는 교회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재정적인 문제로 충분한 자립을 하고 있지 않다. 십일조가 없는 유럽같은 경우는 월급이나 수입에서 종교세를 부과하여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분배를 하여준다. 십일조는 선출된 평신도들이 재정부에서 공정한 관리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십일조나 헌금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관리비나 인건비, 운영비, 선교비등에 사용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지금도 십일조가 교회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의와 인과 신”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또한 지금도 십일조를 믿음의 외적인 기준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3장23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형식적인 십일조보다는 그 의와 인과 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신약시대에서 십일조는 폐하여 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누가복음 18장12절에서 바리새인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쳤던 세리를 예수님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십일조나 금식의 이행이 의롭다함을 받는 기준이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가 의롭다함을 받는다. 즉 십일조는 구원이나 칭의와 같은 개념과 관계가 없다.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없어진 것이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율법적인 십일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구약의 제사적인 증여와 봉사는 전인적인 나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예배로 성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