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12와 유사단체, 내적치유와 영성운동 단체의 주장을 주의하라
이인규
십자가에 죄를 적은 종이를 박아 불에 태우는 G12의 인카운터 운동
소위 ‘내적치유’ 혹은 ‘영성운동’을 가르치는 일부 단체들, 그리고 G12와 유사단체, 일부 신사도운동의 단체들, 가계저주론을 가르치는 단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쓴 뿌리 (2) 견고한 진 (3) 혼연(Soul-Tie) (4) 가계저주론 (5) 죄를 물질적인 개념으로 간주하는 오류 (6) 이원론적인 개념에 의한 대적기도, 선포기도, 영적도해, 땅밟기기도등 (7) 영.혼.육의 분리 (8) 기적과 표적, 쓰러짐, 임파테이션, 귀신축사등 신비주의적 현상을 강조 (9) 삼위일체와 비교하는 공동체적 셀 개념
이러한 주장들이 주로 G12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으며, 이것이 신사도운동과 접목이 되었고, 소위 영성운동, 내적치유를 하는 단체들을 통하여 보급되어왔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가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필자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리하였던 내용을 모두 하나로 묶어 요약한 것이다)
1) 쓴 뿌리
정신신경과적인 치료에서 개인의 과거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며, 그것도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트라우마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런 정신괴적 치료는 기독교적인 영성치료와 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영성운동과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트라우마와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G12와 유사운동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서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혀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의 기도문을 낭독하므로서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예수를 믿어도 치유되지 않는 쓴뿌리가 이러한 영성운동이나 내적치유수양회를 통하여 치유가 된다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쓴 뿌리’를 주장하는 곳에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히브리서 12장 15-17절인데, 본문을 살펴보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히브리서 12장의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공동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KJV] Looking diligently lest any man fail of the grace of God; lest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and thereby many be defiled;
[NIV]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29장의 헬라어 칠십인역을 보면 신약 히브리서의 단어와 거의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 또는 우상숭배와 같은 범죄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신 29:17-19)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에 ‘쓴’은 “피크리아”로서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싹,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와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쨋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의 경우를 인용하므로서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서,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쓴뿌리를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해석하면, 개인적인 트라우미가 공동체를 오염되게 만들며,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하는 것처럼 이상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쓴 뿌리가 상속되므로 그것을 치유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가계저주론이나 혈통유전설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앞세워 ‘내적치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쓴 뿌리’를 원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의 육체에 남아있는 사탄의 거처로 비유하여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주장은 이단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회개는 개인적인 기도를 통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또 수백만원을 들여 중동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고 오는 선교라고 할 수 없는 선교가 몇몇 선교단체들에 의하여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역의 귀신들이 땅밟기와 대적기도에 놀라서 쫓겨나 이스람교인들이 기독교로 저절로 개종이 된다고 믿는지 묻고 싶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단지 싱징적인 기도를 하기 위한 선교라면 굳이 수백만원을 들여서 현지에 갈 필요없이 한국에서 기도를 하면 되지 않는가? 그 돈을 현지 선교사에게 보내면 더욱 효과적인 선교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 것을 뜻하며, 땅밟기나 귀신축사로 전도를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더욱이 요즈음 인카운터, 진인적치유수양회, 내적치유수양회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비밀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의 예언에 관한 책을 발간하며, 지역귀신에 위한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발간하고 있다. 또 너도 나도 마이크 비클의 아이합을 모방하여 24/7예배를 모방하며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히9:11) 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할 필요가 없으며, 다윗은 24시간 7일 동안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3-4)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느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KJV]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carnal, but mighty through God to the pulling down of strong holds;)
[NIV]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더욱이 ‘견고한 진’은 가정법적인 설정으로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특정한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성경에 있는 단어를 인용한다고 하여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올바른 해석을 하여야만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을 이원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으로 구별하여 육체가 아닌 성령의 병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육체를 갖고 있어서 제한이 있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의 의지나 행동과 같은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이 위에 생각나는대로 적은 사람의 행위는 오히려 육체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에베소서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이 만든 어떤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어떤 물체 종류의 허리띠나 흉배, 방패, 투구와 검을 쓰면 악한 영과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석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와 양육프로그램은 성령의 무기에 대해서 종이에 죄를 적는 것이나 혹은 공개적인 죄 자백을 하는 것으로 왜곡시켜서 그것을 불태우거나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구호를 외침으로서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오역하여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곧 육체적이며 의식적인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선교단체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한 방법으로는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없으며, 쓴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음이 명백하다.
더욱이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선포기도와 대적기도가 예수 십자가 대속보다 더 권세가 있다는 뜻인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혹간 사람들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라는 본문을 인용하며 교리와 신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도 가지 말아야 하며 공부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비성경적인 이단교리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체계적인 도움을 준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움으로서 죄가 없어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본문에서 파하는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학교 공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뜻하며, 이러한 교만을 파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권세를 파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제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사로 잡아”(아이크말로티존테스)라는 단어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과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며,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는 이상한 의식을 하지 말자. 이제는 넘어지고 딩구는 유치한 현상적인 집회를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르치며, 일년에 몇 번씩 열고 있는 부흥성회를 좀 줄이고 성도들에게 건전하고 올바른 정통신학과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자.
솔직히 말하자면, 이단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에서도 성경을 오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이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수평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교인들을 양육하는 목적으로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며 비건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서 용납되거나 묵인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파운동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던 교단들이 알파운동보다 몇배나 더 위험하고 더 문제가 많은 G12와 두날개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유명한 선교단체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앞 다투어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이단들이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경과 정통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숫적부흥만을 도모하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책임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단들이 성경공부라는 방법을 통하여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다.
3) 혼연(Soul-tie)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육체와 대조되는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를 말하지만, 대부분의 이 단어는 인간자체를 말한다. 더욱이 정통신학적인 인간론은 2분법 또는 3분법이 있지만,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초대교회부터 존재하였던 이단적인 주장중에서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이 있었는데, 선과 악, 물질과 영혼의 대결구도로 보았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주장은 가계저주론, G12, 다락방, 베뢰아, 지방교회, 내적치유단체등을 통하여 전파되었는데, 육체에는 사탄과 죄가 거하고 영에는 성령이 거한다고 장소적으로 분리를 하였고 혼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거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영혼선재설을 주장하거나 혈통유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영혼들이 묶인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왔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된다고 가르쳤다. 만약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방법이 혈통을 통하여 유전되거나, 영혼이 묶여서 후손에게 전해진다고 믿는다면 전자는 박태선과 문선명이 가르쳤던 혈통유전설이 되며, 후자는 우리의 영혼이 아담 안에 있었다는 영혼선재설이 되어진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면 마리아에게로부터 태어난 예수의 무죄성이 증명될 수 없다. 만약 피로 죄가 흐른다면 우리는 수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괴상한 인죄론이 어디에 있는가?
“ICM(필자주: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교회)은 정규적으로 ‘내적치유수양회’라고 불리는 수양회를 열고 있는데, 이는 새로 들어오는 셀 멤버를 위한 것이다. 이 수양회는 새 신자들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 수양회를 하는데는 많은 목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전통주의 교회와 영혼을 묶는 끈이나 예수님이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견고한 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경험하는 동시에 성령충만을 받는다. 이 수양회는 G12 멤버와 후원자들이 새 신자를 후원하는 동료 셀 멤버들이 인도하는 강도 높은 수양회이다“(랄프 네이버, 셀교회 지침서, 328쪽)
<가계적 속박의 사슬을 끊어라>(이윤호, 베다니출판사, 2014년)라는 책을 보면 G12와 가계저주론, 혼타이 등에 대해서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윤호목사는 자신이 풀러신학교에서 피터와그너와 챨스크레프트로부터 배웠다고 스스로 제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상의 죄와 가계적 속박이 후손에게 전가되는 통로에 대해서 1) 유전인자를 통한 전가 2) 부모의 삶을 모방한 전가 3) 추수의 법칙을 통한 전가 4) 악한 영들을 통한 전가 5) 혼의 결속을 통한 전가의 다섯가지의 이유를 주장한다. 그 중에서 다섯 번째 혼의 결속을 소위 Soul-tie/bounding 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윤호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런 내적 맹세는 자신을 묶어놓는 혼의 결속 역할을 한다. 부정적 혼의 결속은 세대를 통해 대물림된다. 사탄은 혼의 결속이라는 통로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부를 사역해 보면 부부간에 같은 영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공유 영 share spirit(s) 이라고 부른다. 이 영은 실제로는 하나지만 아주 빨리 이동하므로 마치 부부 각자 간에 두 개의 영이 각각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유 영은 부부간의 수평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도 성립된다. 우리는 혼의 결속을 통해 왜 우리의 직계조상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176쪽)
이들은 부부간의 영혼이 묶이며, 가족의 영혼이 묶이고, 스승과 제자, 또는 목사와 성도들의 영혼이 묶이며, 심지어 애완견을 사랑하면 짐승과 혼이 묶인다는 주장까지 해왔다. 어떤 영성운동가라는 사람은 집안에서 물질에 지나지 않는 인형을 모두 버리라는 웃을 수도 없는 주장까지 하였다. 어떤 곳은 죄를 물질로 설명하고 내뱉는 호흡이나 하품, 가래침등을 통하여 죄가 배출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주장이 아니다. 죄는 물질이 아니라,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영혼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말하는가?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적인 연합,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유기체적인 연합을 말한다. 예수가 포도나무가 되고 우리가 가지가 되는 그러한 믿음의 유기체적인 연합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진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두 영혼이 하나로 묶이는 것도 아니다. 본문은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세 그룹과 친밀한 교류를 하고 있다면, 내 영혼이 세부분으로 나누어져서 혼이 묶이는가? 부부도 한 몸이라고 말하지만, 두 인격이며 두 영혼이다. 아무리 부부라고 하여도 서로 좋아하는 감정도 다르고 성격과 취미도 다르다.
4) 가계저주론과 G12의 관계
가계저주론의 가장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상의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계를 통하여 후손에서 계속 유전된다
둘째, 그 저주는 질병과 재앙, 가난, 사고등을 포함한다
셋째,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가계의 저주가 끊어지지 않는다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끊어지지 않는 가계의 저주가 자신들이 만든 기도문, 또는 내적치유, 수양회등을 통하여 치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가계저주론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이윤호목사는 그의 책에서 가계저주론이 세계적으로 G12의 내적치유수양회, 전인적치유수양회, 인카운터등의 양육프로그램을 통하여 전파되었다고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신도훈련과 온누리교회의 아버지학교를 통하여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락방을 통하여 가계저주론이 퍼져나갔으며, 두날개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특히 G12의 가계저주론은 우리나라에서 소위 내적치유와 영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다락방에서는 죄로 인한 병에는 (1) 원죄로 인한 병 (2) 자범죄로 인한 병 (3) 조상죄로 인한 병의 세가지가 있는데 조상 죄로 인한 병은 불치병이라고 가르쳐 왔다. 이러한 주장을 아무런 여과없이 두날개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쳤다.
그렇다면 반대로, 저주와 질병을 갖지 않는 자는 역대조상들의 죄가 없기 때문이며, 저주와 질병을 가진 자는 조상에게 죄가 있기 때문인가? 자기가 아무리 의인이라고 가정하여도, 역대 조상들까지 죄가 없었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데, 서기 2000년 이전의 가계저주론을 몰랐던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저주와 질병과 고난을 받았는가?
더욱이 재앙과 질병, 사고같은 저주가 없으며 물질적인 부유함을 가진 불신자나 타종교인은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그들은 예수를 안믿어도 가계의 저주를 받지 않았는가?
가계저주론은 성경과 정 반대의 주장이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 곧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하셨더라”(대하25:4)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을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그 아비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억탈하고 민간에 불선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17-19)
성경은 아비의 죄가 아니라 당사자의 죄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은 당사자의 행위와 행실로 보응을 하신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5) 성경에 없는 영의 등장
이 단체들의 주장 중에서는 성경에 없는 이상한 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순종의 영, 도박의 영, 음란의 영, 교만의 영, 질병의 영…. 모든 범죄에 대해서 고유한 영의 이름을 그 원인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가난의 영, 채무의 영이 등장하고 가난의 영을 쫓아내면 부의 이동이 온다고 주장하며, 기존 기독교를 종교의 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모든 사고나 불행, 가난, 재앙, 질병이 귀신때문이라고 하는 베뢰아의 주장과 동일하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면, 개인들의 죄악과 잘못은 그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라, 귀신 때문이 되며, 그 귀신을 쫓아낸 기독교인들은 모두 죄악을 짓지 않는 사람이 되거나, 부자로 살아야만 하며 질병에 걸리지 않아야만 된다. 심지어 사고나 불행도 당하지 않아야만 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역경을 당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초대교회 성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순교를 당하였고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귀신 때문이었는가?
6) 기타의 주장
이러한 단체들은 은사남용주의, 귀신축사, 신비주의,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 신사도운동이 추구하는 주장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으며,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그들의 최대목적은 교인들이 숫적으로 부흥하는 교회성장에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그동안 많은 이단들이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특히 G12, 유사 셀운동, 두날개의 특징은 셀조직에 있다. 이들의 특징은 삼위일체를 공동체로 간주하여, 자신들의 셀조직이 삼위일체와 함께 하는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셀조직이나 부흥이 되지 않는 셀조직에 대해서는 암조직이라고 부르거나 사탄이 역사하는 조직으로 간주한다. 비난을 받는 셀조직의 사람들은 결국 상처를 입고 떠나거나 교회에서 따돌림을 받는 비주류적인 그룹으로 밀려나게 된다.
삼위일체를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고 보거니와, 인간의 가시적이며 유형적인 교회 조직을 삼위일체 공동체로 간주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다. 페리콜레시스라고 불리는 삼위의 상호교류적인 관점은 상호내재, 상호관통, 상호교류라고 불리는 용어는 삼위 안에서의 상대적인 관계의 개념으로써, 유형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