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祈福信仰)에 대해서
이인규
교회용어 사전에서는 기복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 즉 신앙 대상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형통과 소원 성취와 입신양명(立身揚名), 무병장수와 자손 번영 등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초보적이고 현세적(現世的)인 신앙 행태를 말한다.”
기복신앙은 자신이나 가족의 물질적인 충족(富)과 건강과 형통같은 욕망, 즉 세속적인 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종교를 너무 과다하게 믿는 형태를 말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무속종교나 불교등은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기복신앙인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는 분명히 기복신앙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가 기복신앙적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사실 이와 같은 질문은 답변하기 쉬운 주제가 아니며, 우리가 기독교의 기복신앙을 비판할 때에, 자칫하면 우리나라의 교회 체계나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미 뿌리깊은 기복신앙으로 치우쳤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필자는 기독교의 본질과 목적은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때로는 기복신앙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즉 가족이 아프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에, 혹은 사업이 어려울 때에 우리는 당연히 기도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느 목사가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일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없다“ 혹은 “하나님은 어떤 병도 고쳐주지 않으며 가족들을 위한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는 결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기독교는 기복적인 신앙을 상당히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복신앙적 형태가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질병의 신유나 귀신 축사를 강조하는 어떤 목사는 그러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으며, 예수님도 그런 사역을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일들이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교회와 목사의 본질적인 사역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은 구원이며 영생이 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적 성향은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신앙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해온 요인으로서 ‘성령의 역사’나 ‘한국인의 기질’ 등의 이유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복신앙적인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부흥 집회가 기복적인 신앙체계를 갖춘 것은 6.25 전쟁 이후 물질적 궁핍감과 정신적인 공허감에서 비롯되기 시작해 1970년대 이후에 절정에 달했다고 학자들은 공감한다. 이런 토양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기독교의 집회 형태가 기도원, 부흥회 등이다. (물론 모든 부흥회나 기도원이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현재의 신앙체계는 그와 같은 방식이 비판을 받을 정도로 수준과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또 극단적인 기복신앙은 질병과 사고등 저주와 재앙을 가져다 주는 상대를 마귀로 인식하여, 마귀를 쫓음으로 축복을 찾는 것을 교회의 주된 임무로 여기게 되었고, 일부 교회와 기도원등에서 현세적인 축복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증거로 강조되었고, 헌금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상적인 행위로 강조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복신앙은 교회의 성장주의와 대형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기복적 신앙 위주로 설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소위 삼박자 구원과 같은 은사남용주의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번영신학이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집을 이사하거나, 사업처를 개업하거나, 차를 새로 사면, 무속신앙인들은 굿을 하는 대신에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려왔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무속신앙인들의 굿과 액땜의 의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는 어떤 궂은 일을 당하게 되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자는 기복적인 신앙 자체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 역시 자신과 사역과 가족의 평안과 건강을 위하여 항상 기도한다. 또한 우리가 기복신앙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 곳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12:2) 또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하셨다.(갈3:8-9) 또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육축까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신28:3-6)
사실 성경에는 복에 관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성경은 욥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끝까지 신앙을 지킨 욥에게 전의 소유의 갑절을 주셨으며(욥42:10)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욥42:13)
그러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무조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너무 강조함으로서 자칫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과 목적이 간과되어지는 그러한 형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복의 형태가 성경적임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목적이 그저 현세에서 복을 받자고 예수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려하는 견해로서 올바른 내용이다.
자칫 질병을 고쳐달라거나 물질적으로 잘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무속신앙에서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따위의 저속한 주술적, 기복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께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와 동일시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체제였다는 것이 신약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복의 개념이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잘먹고 잘사는 그런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영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순교를 당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생(eternal life)을 받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어야 한다.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목적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 기복신앙은 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목적과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 팔복은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적인 요소와 정반대의 것이 되어진다. 또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반대가 되는 조건들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는 자이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회평케 하는 자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마5:3-10)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하늘의 상이 클 것”(마5:11-12)이었다.
반대로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 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이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분리하여 이것을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구분한다(요일2:16).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을 나무라셨으며(눅12:34) 부자의 곳간에 쌓아둔 곡식과 물건도 그날 밤에 부자의 영혼을 찾아가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강조하셨다(눅12:19-21). 특히 예수님은 그 부자에 대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는자”(눅12:21)라고 정의하셨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반드시 어렵게 힘들여서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어떤 행함과 노력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재물과 부, 육체적인 정욕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의 시험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의식주/ 명예/ 권력)을 단절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부와 육체적인 정욕을 추구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셨고(마19:24, 막10:25, 눅18:25), 하나님과 맘몬의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다.(마6:24, 눅16:13)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속주의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물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 주님보다 앞설 수 없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2-3)
또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갈5:10)라고 바울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오직 복을 위하여 비는 것은 성황당에서 복을 비는 무속신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가 지나치게 되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가 된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기복만을 위한 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0-12)
이러한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의 정욕을 위한 기복신앙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으며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내 가족과 친지의 어려운 상황과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신앙이 아니며(약5:14)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물질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점은 기복적인 축복이 나의 신앙과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신앙과 기도가 부족한 결과이며 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 케이스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억압과 고통과 질병과 가난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또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아니면 혹시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가정만을 위해, 나의 교회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될 수도 있고, 내 교회가 더욱 부흥되기 위해 다른 개척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만이 더욱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직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는 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형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여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어느 극소수 교인은 어느 교회 목사가 혹은 어느 교회가 용하다 혹은 신통하다고 하며 교회를 옮겨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오직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다 건강하고 다 부유하며 다 복을 받는가? 만일 질병이 있거나 부유하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한 교인은 저주를 받았고, 혹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인가? 더욱이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형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간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혹간은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설교가 결코 될 수 없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하며(마13:23) 그 천국복음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셋째, 기복신앙은 은사 남용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혼동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이사로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존재로 이해하는 신비주의와 유사한 것이 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곧 내가 초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며, 그 능력이 나의 물질적인 축복을 돕는 방편으로 알게 되며, 영적인 은사가 그 증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간혹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일방적으로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만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와 건강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수험생을 위한 40일 특별기도회와 일천번제와 같은 기도회도 열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성령의 동행에 대한 증거는 가시적인 은사의 남용이나 개인적인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다. 재물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형제의 궁핍함을 도와야 한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7)
또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연보액수가 많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즉 넉넉한 사람의 많은 건축헌금보다 어린아이의 저금통의 동전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2-4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곧 가치관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 가치관이란 세속적인 욕망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을지라도, 결코 거듭난 사람이 못된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본질이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 진정한 거듭남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