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신앙의 관계
이인규
죄와 신앙의 관계에서 두가지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첫째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 미래의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과거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구원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기에 부족하다는 견해로서, 죄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고,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적인 견해는 무엇일까?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설명하며, 구원의 시제에 대해서는 이미 받은 구원, 현재 걷고 있는 구원, 장차 받을 구원에 대해서 균형적인 조화를 갖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마틴로이드존스 목사가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 (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마틴로이드존스 목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반동의 원리도 거절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반동의 원리란 “죄가 전혀 제거되지 않았다거나 죄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틴로이드존스 목사가 말한 전자는 구원파와 같은 주장으로서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이 되며, 후자는 변승우목사와 전태식목사가 주장하는 행위구원론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극단적인 주장을 피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죄로부터 우리를 24시간 동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두려워하고 떨 필요는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변승우목사는 오직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단 하나의 죄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관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혹시 하나의 죄라도 미처 회개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노심초사하며 구원에서 떨어질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죄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하거나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구원파는 몇년 몇월 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 시간이 바로 구원파의 성화무용론, 도덕폐기론 교리를 깨달은 날이며, 그 날을 거듭난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영은 죄가 없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고, 육에 죄가 남아있다는 이원론을 가르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우리의 구원은 어떤 교리를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함으로서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깨달음이나 자신의 단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그래서 구원은 값없는 은혜가 된다. 우리에게 죄가 없으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은혜에 기인한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우리를 의롭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우리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했다. “칭의”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서 “디카이오시스”는 헬라 법정용어로서 실제로 죄가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무죄선언 판결을 뜻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4-16)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 멀어지고 죄로부터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분명하다면, 그는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로부터 멀어지는 성화의 과정을 당연히 지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며, 어떤 도덕적인 변화 또는 어느 특정한 교리를 깨달은 시점을 거듭남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어떤 주관적인 은사를 받은 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즉 스스로 거듭났다고 단정하는 자기 판정을 이미 받은 구원이라고 생각하여, 죄문제와 구원여부가 모두 결정되었으므로 성화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극단적인 구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죄 문제에서 번민했던 마틴 루터와 율법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었던 요한 웨슬레를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회심시켰던 성경구절이 바로 아래 로마서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