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Free Will)
이인규
‘자유의지’란 용어는 철학적인 개념, 종교적인 개념, 윤리적인 개념, 법적인 개념등이 있으며 상당히 많은 개념과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실제로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견해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유의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자유의지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용어로서 자유의지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또는 거절할 수 있는 의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여 자유의지라는 관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애당초 죄를 지을 수 없도록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로봇과 같은 존재, 즉 선택권이 없이 시키는대로 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일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에 스스로 지.정.의를 갖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자유의지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이 범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셨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2) 인간이 범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신 것이 아닌가?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1)번의 질문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번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간단한데, 창조한 인간이 스스로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 천사가 스스로 의지대로 악을 선택하고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2:16-17)
만약 그 과실을 먹지 않았다면 사람은 죽지 않았을 것을 내포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실과를 먹지말라는 행동에 대한 금지조항을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갖고 창조된 인간은 그 과실을 먹을 수도 있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금지명령을 시험이라고 이해하여 왔으며, 호세야서는 이것을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 6:7)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여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그로 인하여 죽음이 왔다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2)
게르하르더스 보스란 신학자는 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을 통하여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성숙의 상태로 끌고가기 위하여 정하신 수단“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제한은 (그것이 시험이라고 가정하여도) 그들의 자유에 대한 구속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루이스벌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최초의 죄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을 먹음으로 죄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불리워졌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1) 인간의 미래의 상태가 선하게 될 것인지 악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도록 되어 있으며 (2) 또는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든가 아니면 자신이 결정하든가를 보여 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146쪽)
죄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라는 용어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뜻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죄는 물질이 아니며,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또 자유의지란 죄를 이미 짓거나, 죄가 이미 포함된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을 죄를 지을 수도 있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시험이든지 혹은 언약이었든지를 막론하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의지로 말미암아 죄를 택한 것입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이라는 개념은 그러한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실이 어떤 주술적인 마법이나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실을 먹음으로 선 또는 악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상징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선악과의 과실을 먹게 됨으로서 비로소 선과 악을 알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자체가 자유의지로 행한 죄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를 조장한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자동차는 의지가 없지만) 그 자동차는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유익한 도구로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약 그 자동차가 사람을 죽였을 때에 혹은 범죄에 사용되었을 때에 그 자동차를 만든 공장이 악을 창조한 것이거나 악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동차는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의 의지와 행위로서 악이 된 결과가 된 것이지요.
자유의지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책임이며, 그래서 그 책임으로 심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것이라고 말하여야만 합니다.
참고로 현재의 장로교의 공식적인 캘비니즘(예정론)은 “타락전 선택설“이 아니라 “타락후 선택설”입니다. 현재 개혁주의의 예정론은 모든 세상의 일이 미리 만들어진 연극 각본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운명론, 숙명론이 아니며,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뜻합니다.
혹간 웨슬레안에 대해서 신학적 지식이 없는 분들이 간혹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웨슬레안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서, 웨슬레안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을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며, 그래서 어떤 사람이 멸망을 당하면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웨슬레안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지가 아니라,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중예정론에 의하면 구원뿐 아니라 멸망조차도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유의지로 인하여 타락했고,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가르칩니다.
9항 자유의지에 대해서
1)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지를 부여하셨는데, 이 의지는 본성상 자유하다. 따라서 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억지로 선을 결정하거나 억지로 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필연성이 아무리 강해도 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
2) 인간은 무죄했던 상태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의지할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는 자유와 능력을 소유했었으나 이와는 정반대의 가능성도 소유했었으므로 그는 타락하고 말았다.
3) 그러나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구원을 가져올 그 어떤 영적 선에 대한 그 어떤 의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인이 되었으므로 저 선에 대하여 전적으로 등을 돌려댔고,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능력으로는 결코 선에로 돌아설 수 없게 되었고, 이 선을 위하여 그 어떤 준비 작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4) 하나님께서 한 죄인을 회심시켜서 그를 은혜의 상태에로 옮겨놓으실 경우, 그는 인간을 죄의 자연적 속박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사 오직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의지로 행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이 인간에게는 아직도 부패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완전하게 의지하지 않고 선한 것만을 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까지도 의지한다.
5) 인간의 의지가 완벽하고 변함없이 선만을 의지하고 실천해 낼 수 있는 것은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조,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하권 부록, 539쪽)
솔직히 말하자면, 이중예정론으로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셨느냐는 의문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예정론에서도 자유의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웨슬레안의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웨슬레안은 그 관계를 “선재은총(선행은총)”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개혁주의는 말합니다. 완전타락에 대해서는 웨슬레안도 동일한 주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웨슬레안은 선을 행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선재은총을 주셨다고 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 부분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과 동시에 내면의 율법인 도덕법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어느 정도 회복된 도덕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이 작용한 결과이다. 선행은총이 구원의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존웨슬레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118쪽)
웨슬레안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다면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부르심에 응답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재은총 때문이 됩니다.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 책임은, 그가 부르심을 거절했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은총으로 우리는 선과 악을 택하는 자유, 즉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지는 단순히 의지의 작용이 아니고 인간 영혼의 한 속성으로 각 영혼의 정서와 이성, 그리고 의지를 관장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는 인간의 영혼의 본성에 속하며 모든 인간 – 신자이간 불신자이건 – 이 본성을 가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것이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의지의 자유와 유용에 따라 선악의 행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기 행동에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다.” (존웨슬레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129쪽)
선재은총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과연 있을까요?
성경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으며, 또 에스겔 33장 11절에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는 말씀이 있고,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도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성경적인 근거는 많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도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행14:16-17)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6:8)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17:27)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은 단 한곳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리라는 것도 이미 아셨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죄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범할 수 없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여야만 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30:19-20)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 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삿10:14)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그 의지대로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 자신의 선택과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 두가지에 동의하여야 합니다
(1)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2)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
이 두가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 두가지 개념을 서로 반대라고 안식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선택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그의 뜻대로 역사하시고 섭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즉 예정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 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믿지 않도록 운명지어 놓은 것이 아니며, 그 사람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악을 조장하시거나 불의하신 분이 아니며,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예수를 믿을 자를 구원으로 예정하고 인도하십니다.
동일한 로마서에 아래와 같은 서로 다른 두가지의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정하시는 하나님과 믿어야 하는 인간의 주어(主語)적인 차이라고 봅니다. 구원이라는 결과는 같지만, 주어적인 입장은 다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미리 정하시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 두가지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여야만 하는데, 다음 두가지를 반대하는 주장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명백한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 선하신 뜻대로 섭리하시는 것으로서 악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벌콥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유효적이 아니며 허용적일 뿐입니다
(1) 인간의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피구원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2) 하나님을 불의를 조장하시거나 악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 3:4-6)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며 악을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겠습니까?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 때문이며, 자기가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