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믿음, 의인과 죄인
이인규
1) 야고보서의 배경과 상황
사도바울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과연 이 두 가지의 주장이 서로 다른 주장일까? 만일 다른 주장이라고 생각된다면 성경은 오류라고 하여야만 할 것이다.
야고보서는 반바울적인 내용으로 오해되어 오리겐 이전 3세기까지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던 때가 있었다. 또 마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그의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이러한 말을 삭제하였다. 또 칼빈은 “이 서신서를 배척할 만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를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서신서의 내용을 온전히 안심하고 받아들인다”라고 평가하였다. 지금도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야고보서를 인용하며, 구원은 믿음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행위와 믿음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전체적인 성경구절은 믿음을 강조하지만, 간혹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행위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성경이 곧 야고보서이며, 또한 사복음서에서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부분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복음의 중요한 본질로서 “믿음“을 강조하며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 역시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내면적인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글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실천적 믿음의 열매”라고 부른다. 즉 야고보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행함을 부정하는 도덕폐기론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야고보는 사도바울이 쓴 서신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며,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그 행위의 내면적인 열매가 없는 교인들에게 충고와 권면을 하기 위한 글이라고 본다.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상황, 그리고 문학적 장르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 수신자가 흩어진 열두지파 유대인들이다(약 1:1). 즉 디아스포라로 이방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그 대상으로 기록된 서신문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행위를 중요시하는 율법주의자인데, 이방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혼합된 삶을 통하여 본연의 율법주의적인 자세를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1장22절에서 “도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야고보는 소위 믿는다고 하지만 행함이 없는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2:14-18에서의 내용은 야고보가 바울의 서신에서 언급되는 이신칭의적인 교리를 미리 알고 있었으며 또 그 내용을 염두에 두고 고의적으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에, 야고보는 믿음을 비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행함을 믿음의 조건으로서 보완하며 강조하는 반어법적인 내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
게다가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라고 말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야고보는 당시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2)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십계명은 유대인들도 지킨다. 그렇다면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선행을 하면 모두 구원을 받는가? 이 세상 어느 종교도 사이비집단이 아니라면 모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가르치며, 선행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불신자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단연코 “아니오”라는 답변을 하여야만 한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며, 행함으로는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오직 믿음이다.
야고보 역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믿는다고 하는 자가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거짓말을 계속 한다고 가정하자.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악하고 반복적인 죄를 짓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과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여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는 거짓 믿음 또는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일 것이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와같이 행함으로 그의 믿음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행함의 열매를 보고 그가 거짓 믿음이라는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믿음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행함이 따르는 것이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믿는 자의 결과로서 그 행함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선행과 같은 행함이 없다고 하여 그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쁜 행함은 거짓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겠지만, 행함이 없다고 하여 무조건 거짓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떤 행함도 보여줄 수 없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간음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간음을 하지 않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러한 행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러한 행함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산 믿음이며 실천적인 행함의 열매가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그러나 행함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혹간은 믿음과 행함이 모두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잘못이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행함이 필요하며, 행함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다고 볼 수 있다. 이단들 중에서는 선행이나 구제를 행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행함만으로 분별하기도 어렵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또한 행함도 믿음과 동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도 행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옳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믿는 자도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할 수 있다. 거듭난 자도 죄성을 갖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바울과 같은 사도도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롬7:21-25)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여 주시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3) 치우치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라
어느 이단교회는 거듭난 자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죄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며, 반면에 어느 목사는 끊지 못한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모두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적인 주장이다.
마틴로이드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골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 (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만일 사람이 죄를 하나라도 끊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십자가 이전 율법주의로 복귀하는 주장이 된다. 만일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해 구원을 잃게 된다면, 이 세상은 단 한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이 되고만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어떤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가 단 하나의 율법을 어겼다고 가정하자. 그는 단 하나의 율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만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인간이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곧 구원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도덕폐기론에 빠지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행위구원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극단적인 주장을 주의하여야 한다. 물론 거듭난 사람에게도 인간의 책임적인 측면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의지와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4) 구원의 조건
그렇다면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며 ‘오직 은혜’이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복음이 온 후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5)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가받는 의”가 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본문에는 두개의 전치사, ‘에크’와 ‘에이스’가 언급되어 있다.
‘에크’는 대개의 경우 출발(from)을 말하며, ‘에이스’는 도착의 방향(to)을 가리키므로 본문은 “믿음에서(from) 믿음으로(to)” 라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과연 출발이 되는 전자의 믿음은 무엇이며, 도착의 방향이 되는 후자의 믿음은 무엇일까?
이 성경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전자와 후자의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조적이며 반복적인 문학적인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은 영원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지(Hodge)는 “이러한 표현은 역설체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 같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번역하며 또 NIV 영어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by faith from first to last)라고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6) 이신칭의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하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3-27)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을 하셨는데, 왜 사람들은 아직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미혹하고 있는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인들은 자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내면적이며 실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이며 신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칭의’라는 용어가 헬라어로 사용된 것은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디카이오마(의로움, 심판)인데, 그 중에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는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무죄선언’을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고, 그 죄를 인정치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칭의란 죄가 없기 때문에 무죄선언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 판결을 내려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칭의’란 죄가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하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를 내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 피해자에게 모든 배상을 해주고 합의를 하여, 내가 석방되어 풀려났다는 것이 바로 무죄선언이다. 즉 죄책이 면제된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죄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17절 본문을 읽고 훗날 그의 일기에서 “나는 그 때에 나에게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마틴 루터는 무릎으로 성당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통하여서도 죄의식을 버리지 못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여도 아직도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을 통해서도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올더 스케이트 집회에서 롬 1:17을 들으며 회심을 깨달았던 요한 웨슬레가 과연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남들보다 더욱 강조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요한 웨슬레는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강조하던 사람이었다.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아! 없다. 내가 바로 이 순간부터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의를 행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하여도 이것이 내 지난 죄를 보상할 수는 없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과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천사들의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도 우리가 범한 단 한가지 죄를 대속할 수가 없다. 인간의 행위로 용서받을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생각인가?”(웨슬레, 믿음에 위한 구원, 웨슬레의 조직신학, 한영태,148쪽)
성경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까? 성경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 우리는 오직 믿음을 말미암아(through)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by) 구원을 받는다(엡2:8).
– 우리는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최종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 자신의 주관적인 단정이 아니라 믿음의 객관적인 확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후 13:5).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지만,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have no part with me)이 결코 아니다(요 13:8).
바울은 로마서 1장17절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중복적인 표현으로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록된 바”라는 말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구약의 하박국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하박국 구절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장17절에 인용되어지며, 갈 3:11과 히 10:38에도 인용되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하다.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와 함께 하였던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셨던 그 감동이 바울의 영적지각을 통하여 로마서1장 17절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틴 루터뿐 아니라 요한 웨슬레에게도 뜨거운 회심과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