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
이인규
안식교는 하나님의 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며, 짐승의 표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극단적인 세대주의라고하는 사람들이 즘승의 표 666에 대해서 바코드, 은행카드, 컴퓨터,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며, 666을 거부하여야만 하며, 그것을 받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인침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이고 둘째는 짐승의 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르는 가축에 소유자의 이름을 낙인했습니다. 그것은 방목되는 육축에 대해서 그 소유자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침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은 짐승의 소유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을 베리칩이나 바코드라고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동일한 원리를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녀도 어떤 베리칩이나 바코드를 이마에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8).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에 기록하여 손목과 이마에 표로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경문갑’이라고 불렀는데, 외식적인 유대인의 풍습입니다. 과연 성경구절을 이마나 손에 붙이고 다니면 구원을 받을까요? 아닙니다. 성경구절이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이마나 손에 달고 다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영, 미혹의 영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아래 성경은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인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입니다. 이마에 성령의 인치심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의 이마에 낙인이 찍히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계 7:3~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계 9: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계 20: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이마에 예수라는 이름. 혹은 아버지의 이름이 낙인됩니까? 어느 누구나 그런 뜻이 아니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위 구절들은 이마에 낙인이나 도장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이 곧 하나님의 소유를 상징하는 의미로써, 성령의 보증을 인치심,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징적인 표현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아래 이마에 받는 짐승의 표는 실제로 받는 표로 해석이 됩니까?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계 14:9).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6-17).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만일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짐승의 인을 받는다는 것을 실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어떤 베리칩이나 바코드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동일한 원칙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았다는 것도 어떤 물질이나 형식적인 표라고 해석하여야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치심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성령의 소유’를 뜻한다고 해석이 된다면, 짐승의 표도 역시 ‘짐승을 숭배하는 영의 소유’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성령의 인치심은 도장이나 표가 아니며, 성령의 인도와 보장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현재 베리칩의 시작은 고가의 애완견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 성범죄를 한 사람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혈압, 심장병등 중대한 질환에 걸린 사람의 상태를 수시로 파악하기 위한 원격장치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과 불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컴퓨터가 666이라는 견해가 난무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인하여 바코드라고 하는 주장도 있었고, 은행카드라고 하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데 요즈음은 이런 주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유럽연합 본부의 지하에 있는 컴퓨터가 666이라고 했고, 세대주의자와 구원파뿐 아니라 정통교회의 목사들조차 유럽연합이 10개국이 되면 그것이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열 뿔’이라고 해석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적그리스도가 누구라고 하는 주장이 난무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2절의 동방이 어느 나라라는 구체적인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은행카드를 사용하거나 바코드가 찍힌 물건을 사면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그 표를 실제적이며 문자적인 표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당시에 과연 그러한 주장을 하던 목사들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은행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바코드가 있는 물건은 구매하지 않는지요? 그러한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66권이 말하는 구원과 멸망의 핵심적인 멧세지는 ‘신앙’과 ‘불신앙’입니다. 또한 이것이(신앙과 불신앙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멧세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어떤 형식이나 물질적인 표를 받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구원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충분히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마나 손에 어떤 표를 받거나, 생체칩을 받는 결과로 구원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충분히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것은 어떤 물질적인 표시가 아니라 다른 복음을 통한 사단의 미혹일 뿐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666의 보편적인 해석
(1) 666은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의 어떤 특정한 이름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로 그 숫자는 네로황제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네로황제라는 단어는 “네론카이사르“인데, 유대인들은 알파벳에 고유한 번호를 정하여 그 알파벳을 숫자로 합산하였습니다. 이 헬라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숫자로 표시하면 666이 된다고 합니다. 또 어느 소수사본에는 666이란 숫자가 616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네로황제라는 라틴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그 합이 616이 되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또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라테이노스’ 알파벳의 합도 666이 된다고 하는데, 일차적인 의미로서는 이러한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글자를 숫자로 환산하는 일을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3장17절은 “그 수는 짐승의 이름이니 그 이름의 수“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짐승의 이름“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름의 수“라고 하였음을 볼 때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인 해석이 되어질 것입니다. 아마 사도요한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 형제들을 학살하고 맹수에게 잡혀 먹게 하는 네로황제와 로마 제국이 일차적으로는 “짐승같은 존재“로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성경에서 7 이란 숫자는 완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666은 7진법의 하나 모자라는 불완전한 숫자를 상징합니다. 이 의견 역시 일반적인 견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합산해 보면 888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수가 7진법을 하나 넘고 있습니다. 그러나 666은 그 반대로 모든 수가 7에 미달되고 있음으로 대조가 됩니다. 즉 이 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의에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즉 불신자나 반기독교인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숫자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이 해석은 더욱 합리성을 띄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은 우리에게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범사마다 짐승의 표가 붙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부정하는 세상은 불가항력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것입니다.(엡2:3)
144,000
대부분의 이단교회들이 계시록의 144,000명을 자신들의 교회에서 구원을 받은 숫자라고 주장하며, 반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바로 이단이라고 말하여도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1) 구원이란 지상에 있는 어떤 유형적인 교회의 교인 숫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서 얻는 개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조직을 12지파라고 하거나, 자신들의 교회에서 144,000명이라고 말하는 주장은 명백한 이단집단의 주장이 되어집니다.
(2) 12지파, 144,000명은 상징적인 숫자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계 7:4)
➀ 열두지파란 구약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이스라엘의 실제 열두지파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열두지파에서 단지파가 빠지며, 둘째, 원래 요셉지파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포함되는데(신33:17),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요셉과 므낫세가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에브라임은 없습니다. 셋째, 신33에는 시므온지파가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유다지파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수19:1-9, 삿1:3) 그러나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시므온지파와 유다지파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계시록의 열두지파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열두지파와도 다르며, 구약의 성경기록과 동일하게 기록된 적이 없는 열두지파 명단이라고 말합니다.
➁ 신약시대에서 구약의 열두지파는 유명무실하여 지는데, 이스라엘의 사회적이며 총체적이고 기본적인 단위를 의미할 때에만 열두지파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12’ 라는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사회에 내재하는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실체를 가르키며, 상징적인 의로서 다양한 사회적 단위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적 결속력이 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요소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열두명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며, 가롯유다가 빠진 열두사도는 곧 보충되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➂ 12라는 숫자를 다시 12로 곱하여 144가 된다는 의미는, 구약의 열두 민족과 신약의 열두 사도들을 상징하는 “어느 누구나“라는 보편성을 말하며, 12,000 스다디온이 의미 또한 12 숫자에 1000 이라는 많은 개념의 숫자를 곱한다는 의미를 파악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래 성경구절이 그런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계 21:12-17)
➃ 또한 셀 수 없는 숫자가 어린양 앞에 서있다고 말하는데… 십사만사천명은 계14장에서 다시 언급되어지는데, 이 모습은 계7:9과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숫자는 모두 어린 양 앞에 서있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건이 사도바울에게 두 개의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었다고 해석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