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와 양
(2015년 5월17일 김포 사랑의 교회 세미나)
정동섭 교수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목자로 그리고 사람을 양에다 비유할 때가 많다. 왜 사람을 개나 돼지에 비유하지 않고 양에다 비유할까? 양은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고 영적 분별력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양이 언급될 때는 언제나 우리는 양과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양에게는 인도하는 목자가 필요하고 보호해줄 울타리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도둑은 누구인가? 보통 사단, 마귀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거짓된 종교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을 도둑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양들이 있는데 이 양들은 문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돌보는 사람이 목자이지 담을 뛰어넘어가거나, 울타리 밑을 파고 넘어가는 것은 도둑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위선자이며 회칠한 무덤이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회칠하고 속에는 온갖 썩은 것이 다 들어있다. 위선자다. 그리고 너희는 독사의 자식이다. 너희는 지옥의 자녀들이다.”라고 꾸짖었다. 이 거짓 종교인들이 하는 사역들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짓 종교인을 따라 다니면 결국 영육의 축복을 도적맞고 멸망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뿐이다. 도적이나 삯군 목자는 양을 끌고 가서 죽이고 멸망시킨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디도서 1: 10-11)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6)
거짓 선지자, 거짓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 그래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탐심으로 더러운 이득을 취하고 재산을 착취하고 가정을 무너뜨린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사상으로,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한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가 있다. 이만희의 신천지와 안상홍 증인회, 유병언의 구원파를 보라.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향방없이 헤매는 무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셨다(마 9: 36). 목자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은 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얻게 하신다는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1) 첫째는 영적인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여기서 살리셨다는 말은 육신적이 아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말이다. 에베소서 2장 2-3절을 보면 그 사람들은 육신적으로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믿기 전의 우리의 영혼은 죄와 허물로 인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인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과 원수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람은 자신이 영적으로 사망한 채로 태어나 영적으로 사망한 채로 살아가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영적인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가 열린다. 기도도 하게 되고, 기도 응답도 받는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단절되었다는 뜻이지만 생명은 교통이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는 교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 두 번째 생명의 특징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금 현세에서만 이루어지다가 현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지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생명을 영생이라고 한다.
한 가지 물어보겠다.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영생을 이미 얻어서 가지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영생을 얻을 건데 못 얻으면 어떡하나?” 불안해 한다. 이건 성경을 몰라도 아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서 “영생을 얻었고”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2-13).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영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트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트이고 죽어서 내세에 가도 하나님과 교제가 트인 곳이 어디인가? 천국이다. 영생은 천국에 가는 생명인 것이다. 영생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다른 종교는 극락이나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독교는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이미 갈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 사실이 감사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삶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첫째는 영적인 생명이고 둘째는 영원한 생명이다.
(3) 세 번째 생명은 풍성한 생명이다. 예수님은 우리로 생명을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의미는 아주 놀랍도록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겠다는 뜻이다. 무엇이 그렇게 놀라운가?
내세에서 우리에게 올 생명의 축복이 놀랍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다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내세가 되면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사도 요한은 증언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우리가 내세에서 얻게 될 생명은 바로 이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성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는 곳이다. 나쁜 것들이 다 없고 좋은 것만 있는 곳이다.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는 18-19절에 잘 나타난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알 수 없는 보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영화롭고 조화로운 곳이다.
계속해서 22장 1-5절을 보겠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천국에는 해와 달도 필요 없이 밝은 곳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축복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예수를 믿으면 풍성한 삶이 된다. 나는 예수 믿기 전에 우울증으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 15일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죄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삶은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며,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고, 용기를 주고, 치료가 있고, 나눔이 있고, 사랑과 평안이 있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평안과 기쁨을 일시적으로 잃을 수 있지만, 자복하고 회개하면 또 다시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내세에서나 현세에나 풍성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4) 네 번째 특징은 복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라고 나온다. 여기서 양은 한 마리가 아니다. 양은 영어로 sheep이다. 양은 단수나 복수나 똑 같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에서 ‘생명’과 ‘양’은 교회를 통해서 서로 나눌 수 있는 생명이다. 나누는 생명, 공동의 생명이다. 나만 혼자 생명얻고 나 혼자 살겠다는 생명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삶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혼자 누리는 생명이 아니다. 먹을 것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말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6)
생각해 보자. 양 한 마리가 산으로 혼자 놀러 다니면서 “아 나는 풍성한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양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목자가 있고 다른 양들과 함께 지내야 편안하다.
그리스도를 목자로 두는 양들은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배우고 하나님께 경배한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말씀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제한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으면 그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고 권면한다.
바울은 권면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함께 나누면 즐거움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감된다.
(5) 다섯 번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값을 치르고 산 생명이다. 어마 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산 생명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이 말은 우리가 가진 생명은 우리는 거저 받은 생명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치르고 사신 생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우리에게 주실 생명을 사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져 받아서 공짜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어마어마한 생명,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치르고 사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그런 비싼 생명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으로 다 청산되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노는 모두 제거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치르고 사신 생명이다.
당신은 길 잃은 양으로서, 하나의 죄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온 적이 있는가? 당신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았는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는가?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살인한 것이라 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로새 3:18-19)
당신은 이 모든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는가? 당신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은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양은 누구인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6-28).
여기서 양의 특징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양이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으며 믿지 않는 사람은 양이 아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고 믿는 사람이 양이다.
이 양들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택한 사람들이고, 영원 전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인간 가운데는 양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님으로 믿지 아니한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다. 염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는가?. 그렇지 않다. 양을 구원하러 오셨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예수님이 직접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10:3). 목자는 양을 부를 때 그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는 것이다. 각각 양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 한꺼번에 통틀어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양인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로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시고 죄인인 우리가 양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시다.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갚아주시기 위하여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시편 23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이리로다”(23:1)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라고 하지 않고 나의 목자라고 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그렇게 인간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목자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오늘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가? 예수님은 외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기도하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내 인생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으나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지금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지금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나를 영원히 인도해주옵소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신다.
당신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는가? 신앙한다, 믿는다는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고, 주님이신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것이다.
놀랍다 주님의 은혜
우리의 죄를 속하시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어린 양 보혈 흘렸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씻었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 죄를 내 피로 다 씻어주며, 너희가 사모하는 영생을 내가 너희에게 주며, 소망 없는 너희에게는 소망을 주리라.”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회심은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았으나 이제부터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다는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예수를 믿고 목자를 찾고, 목자로부터 영생을 얻고, 목자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번 죽어도 다시 부활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오늘 목자를 만나신 분들은 목자를 가까이하며 풍성한 삶,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