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닉 운동에 대해서 (2)
평이협 이인규
2. 한국의 메시아닉 운동
1) 토라의 회복(메시야닉, 김주성)
“토라의 회복”이라는 책의 저자 김주성목사는 장신대를 졸업하고 현재 부천 제자공동체교회 담임목사로 있는데, 미국 씨애틀에 있는 토라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천 교회에 토라회복센터를 설립하고 토라회복과 히브리뿌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국 메시아닉교회 연합이라는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시에틀에 있는 토라신학교(히브리 뿌리 예시바 토라신학대학원)는 전윤근목사가 총장으로 있는데, 전윤근목사의 교회명은 늦은비교회이다. (신사도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이 늦은비 운동이라는 단체였다)
토라의 회복이라는 책을 살펴보면 신사도운동과 메시아닉운동, 세대주의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 신학을 헬레니즘에 물들었다고 표현하며, ‘진리의 토라’라는 표현을 한다.
“부족한 자의 심령에 진리의 영을 부어주셔서 희석되지 않은 순전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불어 넣으시고, 결국 헬레니즘에 물들지 않은 진리의 토라를 발견하기까지 변함없는 은혜로 이끌어 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려 드린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4쪽)
그러나 성경은 진리의 영(성령)과 성문화된 토라(율법)를 동일시 하지 않으며 서로 대립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성경은 율법과 복음을 서로 대조하는데 복음을 성령으로 쓴 것으로 언급한다.
다시 말하여 토라의 회복은 묵은 율법 조문이며 성령의 새로운 것과 관계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김주성목사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2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반유대주의적인 기독교와 세상으로부터 갖은 핍박과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600만명 이상이 학살 당하는 잔인한 홀로코스트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토라를 수호하고 지켜낸 유대인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마지막때 기독교가 히브리적인 뿌리로 돌아가고 잃어버린 히브리적 유산을 되찾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열방의 기독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이 분명하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5쪽)
김주성목사는 자신의 책 8쪽에서 로버트 하이들러의 <메시야닉 교회>라는 책을 읽고 눈이 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요일 예배와 성탄절, 부활절이 로마의 이교도에서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알고 고민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세 5경에 나오는 규례와 법령, 안식일과 구약 절기를 왜 지키지 않는가에 대해서 올바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주성목사는 건전한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의 주장에 미혹되기에 알맞은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야닉 교회>라는 책은 어떠한 책인가? 그 책은 로버트 하이들러가 저자이며, WLI(Wagner Leadership Institute)에서 발간한 책으로서 그곳은 신사도운동의 피터와그너가 세운 신학교이다. 그 책을 번역한 진현우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신사도운동을 하는 하베스트샬롬교회 교인이다.
로버트 하이들러는 달라스신학대학에서 Th.M을 받았다고 <메시야닉 교회>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달라스신학대학은 세대주의로 유명한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주성목사의 책에는 신사도운동의 용어와 세대주의적인 용어가 계속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부의 영성, 이스라엘의 회복, 대체신학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심지어 예수를 예슈아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천의 토라회복센터는 기독교의 히브리적 뿌리와 유산을 되찾기 위해 설립된 토라공동체로 토라회복의 절박한 필요성을 깨닫고 2012년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안식일과 절기를 회복해 가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에레브 샤밧 예배로 모여 안식일을 환영하며 시간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 하늘의 신랑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안식일 아침 10시30분에는 공동체 예배로 모여 토라포션을 낭독하고 공부하며 천국의 법도를 배워가고 있다. 예수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접붙힘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야곱의 집에 속한 천국가족으로서 토라의 삶을 배우며 토라준수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특권이며 영광이 아닐 수 있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155쪽)
김주성목사가 쓴 <토라의 회복>이라는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부 잃어버린 히브리적인 유산 :
1장 히브리적 유산을 잃어버린 기독교
2부 되찾아야할 히브리적 유산(1)
2장 토라의 회복
3부 되찾아야할 히브리적 유산(2)
3장 안식일의 회복
4장 절기의 회복
5장 음식법의 회복
4부 되찾아야할 히브리적 유산(3)
6장 신약성경에서의 토라
7장 토라의 어려운 계명
8장 구전 토라
간략하게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자면, 기독교가 히브리적인 유산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안식일과 절기, 음식물규례와 같은 율법을 회복시켜야 하고, 구약의 율법을 회복하여야 하고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며, 부분적인 율법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고, 구전토라까지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야 하고, 유대교적인 율법과 전승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뜻과 같다.
한마디로 김주성목사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모르고 있으며, 십자가의 복음 핵심 자체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김주성목사는 음식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토라에서 분명히 먹을만한 정결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을 자세히 말씀하시면서 정결한 짐승만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규례가 이미 폐해졌다고 철썩같이 믿어왔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완전히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버리고 지금까지 전혀 지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런 음식규례에 매이는 것을 율법주의로 규정해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구약적인 규례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이었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159쪽)
더욱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는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사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처음 나누기 시작한 사람은 2세기의 영지주의자 말시온이었다. 말시온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혼합주의 사상인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타나크의 하나님 여호와를 열등한 신으로 보았고, 그의 무자비해 보이는 속성들을 증오하였다. 반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최고의 신의 현현으로 보면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타나크를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고 구약이라고 불렀고, 복음서와 서신서등을 묶어 신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신약에서도 구약의 색채가 강하거나 구약의 영향이 강한 것들은 다 빼버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당시의 기독교계에 그의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여 결국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구분법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소위 구약과 신약은 잘못된 표현이다. 타나크로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은 낡은 것이고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란 사고는 완전 잘못된 사고이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178쪽)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법을 보면 (1)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시킨다 (2)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 (3) 비성경적인 주장을 추가시킨다… 는 세가지이다. 그런데 김주성목사는 이 세가지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첫째 말시온에 대한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고, 둘째, 초대교회 교회사에서 말시온이나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왜곡시켰으며, 셋째, 구약과 신약의 구별은 성경적인 구별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표현이라고 왜곡시키고 있다.
김주성목사는 구전 토라까지 성문토라를 지키기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전 토라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거운 짐이고 무거운 멍에이기 때문에 모든 구전토라를 다 걷어내고 순수한 말씀, 순수한 성문토라만을 진심으로 준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눈이 더 열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구전토라를 완전히 거부해 버리면 기록된 토라를 준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기록된 토라에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이나 방법들이 나와있지 않은 명령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은 ‘아, 구전토라, 즉 유대교에 의해서 발전되어온 신앙의 전통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224-225쪽)
“결론적으로 유대교에서 발전시켜온 구전토라란 ‘기록된 토라를 온전히 준행하고 온전히 순종하려는 의도에서 성경적 사고에 입각하여 만들어지고 발전되어온 신앙의 전통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신본주의적 사고와 토라의 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그 속에는 메시야의 그림자가 들어있고 메시야신앙이 담겨있다. 물론 지나친 측면이 있고 그것을 절대시하는 측면도 있고, 또 그것을 기록된 토라보다 더 우위에 두려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을 피한다면 구전토라는 정말 아름답고 보배로운 것이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236쪽)
그러나 성경은 구전 토라(유전, 전승)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6-9)
결국 김주성목사가 기독교가 변질되었다고 하며 토라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토라의 회복, 안식일과 절기의 회복, 음식법의 회복등을 히브리적인 유산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을 거스르는 유대주의로 다시 복귀하자는 주장에 불과하다.
더욱이 김주성목사는 기독교 2000년의 교회사를 적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곧 자신이 이단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주장이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교회 안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역사했던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영이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절기들이 폐해지거나 다른 날짜로 변경되었고, 하나님의 토라가 무시되거나 심각하게 왜곡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때와 법을 고치려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배후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 그 영은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 가운데서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영을 믿음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안식일이든 절기든, 날짜를 변경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94쪽)
신약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로버트 하이들러를 포함하여 메시아닉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초대교회가 유대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그나티우스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첫째는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둘째는 가현설이다. 전자의 경우 회심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고, 유대주의 전통을 지키며 안식일을 준수하는 문제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의 유대주의화를 꿈꾸는 이들은 유대교의 틀 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선생으로 전환시키려는 유대주의 경향을 가진 무리들이다.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인들을 향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유대교에 따라 살고 있다면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그리스도를 마지막 예언자로 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나님, 주하나님이라고 강조하였다” (초대교회사, 박용규, 총신대학교 출판부, 131-132쪽)
2)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는가?
우리는 2000년 전의 역사이므로, 아무도 초대교회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 그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즉 기독교서점에 가서 교회사책을 보면 곧 밝혀진다. 과연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는가?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⓵ 이그나시우스의 편지
이그나시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으며 속사도 교부로 불려졌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각 교회에 7개의 서신을 보내었다. 그는 트라쟌 황제 통치시기인 AD98-117년 사이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 중에서 “마그네시아인들에게”( To the magnsians) 이라는 서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오래된 이야기로 인해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우리가 아직 유대주의의 관심을 계속 지킨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옛 관심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소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나쁜 누룩을 피하십시요…..” (The Christianity of Ignatius of Antioch, 1935, 5page: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66쪽))
안증회와 안식교는 이 글에 대해서 “주님의 날”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주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을 한다. 그러나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것은 “주님의 날“이 계시록1장10절의 “주의 날“과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속사도라고 불리는 1세기의 초대교회 감독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고 말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극구 변명을 하고 부정을 하여도 다른 문서를 보면 그 정체가 밝혀지게 된다
⓶ 12사도의 교훈
12사도의 교훈은 그 유명한 “디다케”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속사도들의 작품이며,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수리아 지방의 초대교회의 교리문답과 교회규범을 한데 묶어 놓은 문서로서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주의 날은 특별한 날이므로 주의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먼저 죄를 고백함으로서 제사를 깨끗하게 드려야 합니다. 이웃과 불의한 사람은 화목할 때까지 여기에 참석하지 말 것입니다.”(기독교 고전전집 1권, 초기기독교교부 171-179, 초대교회의 형성, 성광문화사 77-78쪽)
이미 이그나시우스의 서신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의 날을 지키자는 내용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의 날에 함께 모여 떡을 뗀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주의 날은 분명히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떡을 떼는 일이 유월절에 국한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의 날이 무슨 날인지 알 수 있지 않는가?
⓷ 바나바의 편지
주후 70-13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바나바의 서신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말하는 내용이다.. 그 편지 15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서의 내용과 같이 안식일을 종말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때에 가서야만 우리는 참으로 쉴 수 있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그리고 약속을 받은 후에만 참으로 안식할 수 있다. 여덟째 날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바 천년왕국의 안식 후에 마지막 영광을 바라본다.”(바나바서신 15장)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으며, 또 여덟째 날을 언급하고 있다.
여덟째 날이 첫 번째 날과 같은 요일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⓸ 순교자 저스틴
“이 음식을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아무나 취할 수 없고, 오직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참되다고 믿는 사람들….. 거룩하게 된 그 음식물은 바로 성육하신 예수님의 살이요,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식 후에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은 것들을 서로 기억하도록 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부족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모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인하여 우리는 인류의 주께 그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송축을 올립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한 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오래 읽습니다. 독경자가 읽기를 마칠 때에 사회자는 강론을 통해서 그 고상한 교훈들을 모방하도록 권면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한대로 기도가 끝나면 빵과 물탄 술을 가져오고, 그리고 사회자가 높이 들고 그 거룩해진 음식물을 나누어 주어 모두 받게하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사들이 가져다 줍니다…..” (쇼트웰의 순교자저스틴의 성서강해, L.C.C. 66절 286page, 저스틴의 제1변증서)
저스틴은 아예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일요일에 “빵과 물탄 술”을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다.
혹시 안증회는 이러한 역사와 년륜이 오래된 문헌적인 증거들이 19-20세기의 안식교나 21세기의 안증회의 교리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지 않으리라고 본다.
⓹ 제롬
제롬도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교도들이 이 날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도 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 나타나시고 공의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신 날이 바로 이 날이기 때문이다.”(Jerome, In die dominica Paschae Homilia, CCL 78. 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생명의 말씀사, 261쪽)
⓺ 이레니우스의 주해서
초대교회의 어느 교부는 이레니우스의 저술에 대해서 주해서를 썼는데,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요일 에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 관습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하게 되었다. 리웅의 감독인 순교자 이레니우스가 부활절에 관해라는 논문에서 밝혔듯이, 이 관습은 사도 시대부터 생겼다. 여기서 그는 오순절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실을 언급한다. 오순절에는 주의 날과 같은 의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Iranaeus, Fragments from Lost Writtings of Irenaeus-Ante-Nicene Fathers)
⓻ 일요일 휴업령
메시아닉은 안식교나 하나님의교회와 같은 이단들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데, 콘스탄틴황제가 일요일휴업령을 내려서 강제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교회사와 다르다.
“역사적 증거에 의하면 1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모세오경에서 권위를 부여한 관습을 중단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지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 신자들 중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부활 날인 일요일의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에 걸쳐 예배드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많았다. 여러 교회 저술가들은 유대교의 안식일과 그리스도인의 주일 간의 차이점에 주목했다. 초기교회의 저술가인 테오도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던 에비온파라는 이단적인 그리스도 집단에 관해 썼다. “그들은 유대교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며 또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주일을 지킨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일이자 오순절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생명의 말씀사, 262쪽)
“AD 321년에 공표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칙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존귀한 태양의 날에는 관리들과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안식을 취하게 하고 모든 일터들도 문을 닫게 하라” 이 칙령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일요일을 새로운 예배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칙령은 “일요일휴무법”의 초기사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며, 일요일을 휴무일로 채택하고자 했던 기독교 국가들의 법률과 유사하다. 예배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시킨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수백만의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한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점을 참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일요일 휴무법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이후부터 일요일 예배를 드렸음을 나타내는 역사적, 성경적인 증거는 확연하다. 만일 로마황제의 독단적인 칙령으로 교회의 예배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려 했다면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이 반발하며 강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발생했다거나 그처럼 독단적인 칙령에 대한 반발이 일어았다고 하는 역사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일을 독단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열띤 논쟁이나 저항사건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 마련일 것이다.“(성경의 27가지 미스테리, 생명의 말씀사. 258-259쪽)
안식일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 아니었다. 다만 예루살렘지역과 같은 동방지역에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도 예배를 드렸고, 안식일에도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점차적으로 주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변경된 시기는 안증회가 주장하듯이 콘스탄틴황제의 일요일 후업령이 있는 후가 아니라, 주후 1-2세기부터 이었던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있은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모임을 가졌다. 제자들은 이레중 첫날 즉 일요일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하여 그날에 모임을 가져 예배하였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안식일에도 모임을 가졌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날이 감에 따라 안식일에 모이는 것을 폐지하고 주일에 예배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유대교와 차별화하였다.(기독교교회사 46쪽, 김영재, 이레서원)
물론 콘스탄틴황제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그가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태양신도 숭배하고 기독교도 공인하는 혼합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로 인하여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콘스탄틴을 도구로 사용하셨음은 분명하다.
“321년 교회들에게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그로써 합법적인 법인 자격을 부여하였다. 태양의 날(일요일)이자, 기독교의 첫날을 휴일로 정하고 그 날은 노동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기독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49-150쪽)
그러나 콘스탄틴이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어 예배일을 변경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콘스탄틴황제는 교회에게 각종 혜택을 주었고, 그 혜택의 일부로서 일요일을 휴일로 정하여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교회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기독교의 예배일인 주일은 기독교회의 초기부터 성수되었다. 그것은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을 지키는 유대교로부터의 이탈이었다. 한 주간의 첫날로 옮긴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마다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4세기초 콘스탄틴의 시대까지는 주일(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켜지지 못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의 이른 아침이나 늦은 시간에 예배모임을 가졌다“(생명의 말씀사, 라이온사, 교회사 핸드북 9쪽).
3) 성경은 구약의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라고 말하는가?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신약에서 안식은 일곱째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안식의 실체가 되신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는 그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하여 주는데, 히브리서에는 참안식은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개념으로서,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라고 기록하였으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4:11)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에서 안식일의 참의미는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참안식으로 재조명되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가 되시며, 주인이 되신다. 일곱째 날을 유대인들의 유대력으로 지켜서, 그 날짜에 성경에 언급조차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한심한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다. 구약성경의 안식일은 종말적이고 궁극적인 참 안식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4-1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의문에 쓴 증서(율법)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는다. 더 이상 음식물에 대한 규제나 절기, 월삭, 안식일에 대해서 지켜야 한다고 폄론(논쟁)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은 구원에 충분하며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모든 구약의 명절은 신약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래일의 그림자가 되며 몸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를 들면 구약의 유월절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즉 유월절은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예수님이 그 몸의 실체가 된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구약의 칠칠절(맥추절)은 장래의 그림자였으며, 오순절은 성령하나님, 실체의 강림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지켜야 할 행위가 더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갈라디아교회에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인들 중에서, 할례를 행하여야만 하며, 유대인의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오늘도 그러한 혼합율법주의자를 “갈라디안”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4:10-11)
만약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구원에 중요한 일이었다면 신약성경은 몇번이라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단 한마디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절이 없다는 사실이며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4) 메시아닉의 시한부종말론적인 주장
인류의 역사를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보는 세대주의적인 관점의 종말론은 2000년에 예수가 재림하여야 한다. 실제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지지하는 몇몇 이단은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한다. 또 마태복음 24장의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독립 1948년으로 해석하여, 한세대가 지나기 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24:32-34)
마태복음 24:32-34가 말하는 무화과나무의 징조는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일 뿐이다. 세대주의와 메시아닉은 마태복음 24:32-34를 인용하여 무화과나무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여 1948년부터 한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는데, 병행구조인 누가복음 21:29에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비유한다고 해석할 수 없다.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책의 첫머리에 KIBI 대표인 온누리교회 송만석 장로는 마24:32-33 성경구절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로 추천의 글을 시작한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무회과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졌던 유대백성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지가 연해지고 새 앞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그날이 속히 오리라, 추천의 글)
특히 본문은 어느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 잎사귀가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게 되는 것처럼 자연적인 징조로 알게 된다는 뜻으로서, 본래 본문은 AD 70년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을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병행구조인 누가복음 21장20절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너희가”는 예수님의 제자를 말한다.
더욱이 본문 바로 뒤에 있는 36절에서는 “그 날과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무화과 비유가 서기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며, 그 한세대 안에 예수가 재림하신다고 비유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비상식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5)
마태복음은 다니엘서가 기록한 BC 168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뜻하는 예표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이 성경구절을 읽는 유대인들은 다시 깨달으라고 주지시키고 있으며, BC 168년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장차 일어날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다시 예언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복절이나 6.25 사건을 말하면 다 알듯이,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돼지피로 성전을 더럽혔던 사건에 대해서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즉 예수님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와 같은 사건이 앞으로 한세대 안에 다시 일어난다는 예언적인 의미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몇몇 이단들이 봄절기와 가을 절기로 분리하여 봄절기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장하고 가을절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나팔절이라고 하는 이단들이 있고, 대속죄일이라고 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추수를 상징하는 장막절이라고 하는 이단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메시아닉에서도 가르친다
“또한 여호와의 일곱 절기는 메시야의 인격과 사역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절기는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봄의 절기는 메시야 초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있고, 가을 절기는 메시야 재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월절은 메시야의 죽으심, 무교절은 메시야의 장사되심, 그리고 초실절은 메시야의 부활에 관한 예언이다. 여기까지가 메시야의 초림에 대한 봄절기의 예언인데 그대로 성취되었다. 가을절기로 넘어가서 나팔절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있게 될 메시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또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속죄와 회복에 대한 예언이고 초막절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이다. 아직 가을절기의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야의 초림이 1세기 초에 봄 절기의 날짜에 맞춰 정확하게 이뤄졌듯이 메시야의 재림도 이제 곧 가을 날짜의 날짜에 맞춰 정확히 진행될 것이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메시아닉, 94-95쪽)
이러한 주장은 전윤근목사의 히브리신학교의 홈페이지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예슈아)의 절기를 크게 ‘봄의 절기’와 ‘가을 절기’로 나눈다.
‘봄의 절기’ 는 예슈아의 초림의 그림자이다. Passover(Peshach)유월절, Unleavend Bread 무교절, 1st Fruit 초실절, Shavuot(Pentecost 오순절(칠칠절)은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백성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아훼하나님으로 부터 토라를 받고 언약을 맺음으로 카할(광야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부리트 하다샤(신약)에서는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사건으로 초대교회가 재 탄생(언약의 Renewal)되었다
‘가을 절기’는 예슈아의 재림의 그림자이다. 앞으로 이뤄질 것을 대비하게 한다. Rosh Hashanna 나팔절=공중재림, 휴거, Yom Kippure 대속죄일=지상재림, Feast of Tabernacle-Sukkot 초막절=메시아닉 왕국, Simchat Torah=새하늘과 새땅“ (홈페이지 참고)
이러한 주장은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 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책에도 나타난다. 즉 일부의 견해가 아니라, 메시아닉 운동의 대표적인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봄의 절기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초림과 연관이 있었기에 재림의 사건들은 가을의 절기들과 같은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축할 수 있다. 초림 시의 사건들이 전통에 따른 봄 절기에 정확하게 일어났다면, 재림의 사건들을 역시 전통에 따른 가을 절기의 정확한 때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그날이 속히 오리라, 키이스 인트레이터, 두란노, 189쪽)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자. 예수님의 초림이 언제였는가? 예수님의 오신 날을 정확하게 말하면 성탄절도 아니고, 아무도 모른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유월절이었으며, 부활하신 날은 구약의 절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요일이었다.
메시아닉은 봄의 절기가 예수님의 초림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초림은 어떤 절기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은 왜 특정한 절기와 상관이 있다는 추측을 하는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 날과 때가 만약에 나팔절이 아니고, 대속죄일이 아니며, 장막절이 아니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만이 아시며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절대주권적인 시간을 메시아닉은 스스로 단정하고 있는데, 수많은 이단들이 그날과 그 때를 스스로 짐작하고 스스로 추리하여왔다는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