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권구원론 (lordship salvation) 비판
이인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그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 언급되는 “믿음”이 과연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진정한 믿음이며, 앞에서 수식하는 형용사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간단히 정리요약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교단과 교파가 수없이 많지만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다. 분명히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 자체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여 어느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개인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고 잘못되었다면, 기독교인은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해야만 한다.
최근에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준행위구원론에 가까운 소위 lordship salv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구원론으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맥아더목사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목사들이 동의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코 전통적인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내용의 또다른 신학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젊은 신학생들은 성경책을 단 한번도 통독하지 않으면서, 신학자들의 서적만 읽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옳다고 판단되면 맹목적으로 그 신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경적인 주장을 외면한 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장은 무조건 옳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맥아더는 원래 세대주의 학자이다. 미국의 세대주의에서는 도덕폐기론이 성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구원파와 같은 구원론자가 미국에 많았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예수만 믿으면(혹은 어느 교회에 입교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은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에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원파 교회조차 그렇게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으며, 어느 기독교에서도 단지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맥아더의 lordship salvation은 그러한 극단적 세대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한 구원론으로 시작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Savior)로만 고백하면 부족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주님으로 고백하여 자기의 주인(Lordship)가 되어야만 하며, 순종과 회개와 행함의 열매가 나타나야만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교회들이 타락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많은 동의와 호응을 가져 왔으며, 조금 더 나아가서 기존의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복음이며 변질되었다고 맹비난하며 공격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과 인본주의적인 구원론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가세하게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믿는 자의 의무로서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목사들과 이들은 엄격히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학자들과 목사들을 자기들과 같은 견해를 가진 것으로 포함시키기를 즐겨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주장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의도일 뿐이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일차적으로 성경적이어야만 한다. 성경이 기록된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모순과 오류를 살펴보자.
(1)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학적 구원론을 세우기 위하여 기본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혹은 변질된 것이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을 함으로서 기독교의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들은 단골적인 메뉴로서 사영리를 비난하는데, 모든 기독교인이 사영리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며, 사영리는 입으로만 거짓 고백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영리가 말하는 믿음도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말한다. 실제로 사영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간증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으면 사영리로 전도받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거짓 기독교인이 되고만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들이 비난하는 도덕폐기론은 이미 정통기독교의 구원론이 아니며 이미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발표된 구원파의 구원론일 뿐이다.
(2) 물론 필자는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동의를 하며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믿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정확히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은 그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결국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되어지므로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이 되고 만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행함의 요소들이 구원의 또다른 조건이 되고만다. 이들은 믿음과 행함을 동일한 개념으로 포함시키지만, 성경은 믿음과 행함을 다른 개념으로 구별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의 행위구원론은 믿음이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적인 주장이 될 것이며, 결국 믿음과 함께 행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다.
그러나 성경은 “연약한 믿음을 비판하지 말라”(롬14:1)고 기록하고 있으며, “단단한 식물을 먹을만한 장성한 믿음으로의 연단”(히5:12-1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과연 믿음에 카트라인이 있는가? 이들이 누구길래 믿음의 카트라인을 설정하는가?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행함과 얼마만큼의 의지와 순종과 도덕적 결단이 구원의 커트라인이 되며, 그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는가? 100%의 행함과 순종이 구원받을 믿음인가, 아니면 몇%의 행함과 순종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갈라디아교회를 비롯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모두 구원을 잃게 된다.
고전 3:2-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초신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며, 연약한 믿음, 행함이 부족한 믿음, 행함을 아직 보이지 않은 믿음, 순종과 의지가 적은 믿음도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 구원의 커트라인을 신학자들이 정하는가?
과연 예수님의 사도들조차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진 믿음이 완전한 구원이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수십년 혹은 평생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며, 아마 평생동안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비극의 결과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이 평생동안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면 사람은 아무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완전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재권구원론자들은 자라는 사람들조차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만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3) 이들의 구원론은 결국 기초적인 구원의 서정이라는 신학을 외면하는 주장으로서, 칭의와 성화조차 구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성경이 수없이 언급하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즉 단번에 받는 즉각적인 구원(칭의, 중생)과 점진적인 구원(성화)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이상한 구원론이 되고만다.
다시 말하자면 칭의와 성화에 대한 성경구절을 모두 무시하여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행함의 열매가 없으면 모두 무더기로 구원이 취소되어지는가?
또한 예수를 믿고 중생의 거듭남의 체험을 한 사람도 성화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결국 성화구원론이 되지 않는가?
(4)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주한 거듭난 성도들도 행함이 없거나 순종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면 다음 성경구절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5) 이들은 결국 또다른 구원론으로서 기독교의 교계를 분열시키고 있다.
이들의 구원론을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대폭적으로 줄어들게 되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상당한 어려운 양육과정과 고된 훈련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제자와 성도가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지만, 성경은 제자와 성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또 제자만 구원을 받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구원론으로는 어쩌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을 100% 지킬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위 값비싼 구원이 되며, 그러한 논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감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목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충만할 경우가 있으며 때로는 의심을 가질 경우도 있다. 순종과 행함과 의지도 일평생 항상 동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믿음이 장성한 교인도 죄를 짓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받았다가 취소되는 것을 반복하는가? 예를 들어 60평생을 진정한 믿음을 갖다가 죽기 얼마 전에 주님께 불순종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십자가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는 어떤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적인 삶을 가졌는가?
(6)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값없는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구절에 대해서 이들은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며,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수많은 바울서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또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축소시키거나 부정하여야만 한다.
결국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서는 부분적인 일부의 성경구절만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 핸드캡이 된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가 말하는 구원론은 행함이 전혀 필요없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도덕폐기론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천적인 열매이며 성화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들이 이신칭의의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변질되었으며 거짓복음이라고 비난한다면, 이들의 구원론은 이신칭의 자체를 왜곡시키며 부정하는 주장이 되므로 행위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 놓은 것이 된다.
행함의 열매가 없거나 의지, 순종, 도덕적인 결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곧 믿음이 있어도 이러한 행위적인 요소가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과와 동일하므로 이러한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신칭의를 말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믿음이나 입으로만 고백하는 형식적인 믿음으로 왜곡시켜서 기독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것인가?
(7) 결론적으로 이 주재권구원론을 인정한다면 기존 기독교의 복음이 마치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에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에서 믿음을 잘못 가르치지는 않는다. 기존 기독교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구원파와 다르다.
교회가 타락하고 범죄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인의 의무와 책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좋지만, 값비싼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극단적 세대주의의 도덕폐기론을 반박하는 좋지만, 일부 과격한 사람들과 같이 정통신학의 구원론까지 공격한다면 그들은 행위구원론이 되고만다는 교훈을 잊으면 안된다.
물론 맥아더 목사가 소위 과격한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는 훌륭한 신학이다. 맥아더목사의 신학은 세대주의로 분류되지만, 그의 구원론은 애당초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 혹은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재구원론이 행위구원론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의 인터넷을 보면, 큰믿음교회의 변승우를 지지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이 폴워셔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동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맥아더목사의 주재권구원론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직접 목격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