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름
이인규
– 금요일에 충주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느 목사님이 계시록의 “새 이름”에 대해서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집에 와서 그것에 대해서 자세한 연구를 통해 이것을 알려야할 것으로 생각되어, 이것을 올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이름”에 대해서 수많은 이단교주들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계시록의 “새 이름”이 예수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 “새 이름”이 예수 외에 다른 존재를 별도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새 이름에 대해서는 계2:17과 3:12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을 유명하고 권위있는 주석을 통하여 살펴보자.
특히 이 새 이름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이단으로 규정하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1) 계시록 2장17절의 새 이름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호크마 주석)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 승리한 버가모 교인들에게 두번째로 주어질 것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여기서 ‘흰‘것과 ‘새‘것은 장차 천국에서 맞게 될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서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1:14; 3:4,5,18; 4:4; 6:2,11; 7:9,13,14; 19:11,14; 20:11; 21:1,2,5 Trench, Charles, Plummer). 이 ‘흰 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 혹자는 ‘흰 돌‘을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황제 숭배 사상과 관련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offatt).
(2) 혹자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흰 돌로 본다(Rist).
(3)혹자는 당시의 풍습에서처럼 재앙을 막기 위해 사용한 흰 돌에다 알 수 없는 이름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본다(Holtz- mann).
(4)혹자는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사용한 무죄 표시의 흰 돌로 해석한다(Clarke, Bengel).
(5) 혹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보석으로 본다(Trench).
(6)혹자는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우승의 기념으로 새겨 주었던 흰 돌로 본다(Zahn).
(7)혹자는 연회장에서 초대의 표시로 사용한 흰 돌로 본다(Plumptre, Johnson). 이 가운데서 여섯번째와 일곱번째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흰 돌‘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는 상급이며,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하는 상급이다.
한편 ‘새 이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석한다(Kiddle, Lohmeyer, Rist). (2) 혹자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Beasley-Murra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Johnson). 즉 세상에 감추어져 있으나 장차 드러나게 될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이든지(3:12; 14:1), 아니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이름을 나타낸다.
(WBC 주석)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c절에 언급된 흰 돌은 그 위에 새겨진 신성한 이름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주요 문제는 신의 이름(하나님과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돌 위에 쓰여졌는가 아니면 승리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그 돌 위에 쓰여졌는가 하는 것이다(Letters, 102-3). “새 이름”이라는 어구는 이사야 62:2에 나오는 반면에, 관련된 용어 “다른 이름”은 이사야 65:15에서만 발견된다. 탈꿈 이사야 65: 15b에서 이 “ 다른 이름의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개념인 ‘둘째 사망”과 관련된다 : “그리고 주 여호와께서 너희를 둘째 사망으로 죽이실 것이나, 그의 종들 곧 의인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성의 이름 그리고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고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가 말하는 3:12과 이 어구는 유사성이 있다(높임을 받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가진 승리의 전사 형상으로 나타나는 19:12을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과 또는 예수의 이름(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이름이 흰 돌 위에 새겨졌다는 사실은 마술 호부의 심상을 불가피하게 암시한다.
이집트 전통에 의하면, 태양의 신 레(Re)는 이시스에게 드러날 때까지 비밀로 남겨졌던 본명을 갖고 있었다. 보통 마술 호부는 표변에 그림이 있고 이변에는 마술적인 글씨가 쓰여 있다. 따라서 낡아졌을 때 그림은 쉽게 드러나지만 글씨(종종 신비한 마술적 이름들을 포함하고 있는)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 호부의 정확한 기능은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반면에, 리 호부는 인내의 보상이며 따라서 소유자에게 영원한 보호를 보장하는 것 같다(T. Job 6:7-47:11을 보라). 요한계시록 2:17과의 밀접한 유사성은 PDM xii 6-20에 나오는 마술 과정에서 발견된다(Betz, Greek MagicaJ Papyri, 152): “쇠 반지와 포도 모양의 흰 돌을 가지고…그 위에 이 이름을 적으라“ 호부(그리고 다른 마술 자료들)를 만들기 위한 지시를 하는 마술적인 과정들은 종종 호부 위에 비밀 이름을 새기는 과정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돌 위의 도안 밑에 이 이름을 [숨기라]”). 발언할 수 없는 이름들이 종종 마술 파피루스들에 언급된다(PGM XIII.763-64, 845 ). 만일 이름을 새긴 흰 돌이 호부라면, ‘새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거나 또는 (더 개연성이 높은) 그리스도의 이름일 것이다(하나님이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퀴리오스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빌 2:9을 보라; 참조 11절). 아마 이 새 이름은 호부들과 마술 보석들 위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존재들의 과거의 이교 명칭들과 대조 관계에 있을 것이다. 오리겐(Origen, Contra CeJsum 1.24)은 “사바오드”와 “아도나이”와 같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히브리 명칭들의 마술적인 효력에 대해 찬성론을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관용적 표현의 마술적인 사용은(Contra CeJsum 4.33: 5.45 : 참조. Justin Dial. 85, 135) “이스라엘의 하나님”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 “흥해에서 애굽 왕과 애굽인들을 물에 빠뜨려 죽게 하신 하나님“(Conπa CeJsum 4.34)과 같은 명칭들처럼 특별히 우세했다. 유대의 귀신 쫓는 엑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마음대로 사용하는 많은 “능력 있는 이름들“(이스퀴라 오노마타)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치유와 축귀를 행하는 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했다(행 3:6: 4: 막 9:38-41 (눅 9:49-50)은 권한이 없는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금하는 제자들에 대한 기사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 이름이 완전히 마술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놀랍도록 많은 수의 초기 기독교의 마술 호부들이 발견되어 왔다 그러나 주전 2세기 이전 연대로 추정되는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
(옥스퍼드 주석)
2:17 흰 돌을 … 새 이름을 : 버가모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약속은 감추어져 있는 만나와 더불어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수여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흰 돌’로 번역된 ‘프세폰 류켄’에서 ‘프세폰’의 원형 ‘프세포스’는 투표에도 사용되는 크기가 같은 작은 조약돌을 가리킨다(행 26:10). 여기서는 만나와 흡사한 모양 때문에 차용된 상징으로 보인다. 실제로 출 16:14. 31은 만나를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 ‘갓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흰색(류켄)’ 이 상징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계 1:14을 참고하라. ‘흰(류켄)’ 이라는 표현은 여기서는 ‘승리’ 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본서 전반에 걸쳐 ‘새로운(카이논)’ 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묘사할 때 빈번하게 등장한다(계 1:14 ; 4.12; 5:9; 14:3; 19:11. 14 ; 20:11 ; 21:1.2.5).
그렇다면 본문의 흰 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데, 그 견해들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피고의 무죄석방시 던지는 흰 돌과 관련된다. 둘째, 고대의 상거래에 이용되던 화폐와 관련된다. 셋째, 기쁜 날 곧 경축일을 상징한다. 넷째, 빵 표나 곡마단 표를 묘사한다. 다섯째, 행운을 가져오는 부적을 묘사한다. 여섯째, 만나와 힘께 떨어진 보석을 뜻한다. 일곱째, 대제사장 예복의 흉패에 달려 있는 각 지파의 이름을 새긴 돌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견해에도 불구하고 본절이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란 점에서 본다면 구원의 즐거움에 참석할 수 있는 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흰 돌은 각종 이단 사설과 그것을 시주하는 사단과의 종말론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교회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새 이름(오노마 카이논)’이라는 언급은 본서의 후반부인 19:12과 22:4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전투를 수행하시는 백마 탄 자로서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자’로 묘사된다. 나아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을’ 것임이 지적된다. 이로써 본절과 계 19:12 ; 22:4 이 플래시포워드(f1ash-forward)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이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본서에 등장하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노래가 모두 새 이름으로 말미암는다는 점은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결론적 선언은 지극히 상식적인 부연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섰으나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 :27).
(최세창 주석)
위 문장에 대해 (1) 만나가 내릴 때에 같이 하늘에서 내린 흰돌이라는 설(M.Rist) (2) 덩시 유행되었던바 재앙을 막기 위해 사용한 부적으로 흰돌에다 비밀의 이름을 새긴 것이라는 설(Beckwith, Swete, Holtzmann) (3) 고대 법정에서 재판관들이 무죄를 표시하기 위해 항아리에 던져 넣는 흰 돌이라는 설(J.Wesley, J.A.Bngel, M.A.Clarke). (4) 아론의 예복의 가슴 부분에 붙인 바 열두지파의 이름을 새긴 판결 흉패 안에 넣은 우림과 둠밈이라는 설(Trench, 김철손). (5) 연석의 초대장으로 사용했던 흰돌이라는 설 (E.H.Prumptre, G.E.Ladd, R.H.Mounce, A.Johnson) (6) 그들의 믿음에 대한 성령의 증거라는 설(C.H.Lenski) (7) 그리스의 경기장에서 승리자의 이름을 새겨 주었던 흰돌이라는 설(Zahn, 이상근) (8) 믿음의 숭리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의 표시, 즉 그의 본질과 인격과 거기에 해당하는 영광과 지위의 선물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A.Barnes, R.H.Charles, P.E.Hughes, M.C.Tenncy, 박윤선) 등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핍박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1)설부터 (4)설까지는 옳지 않고, (8)설이 옳다. 여기에 (5)설부터 (7)설까지는 보충설명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모페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고대인들은 흰 돌에 신의 이름을 써서 사귀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하였고, 그 신의 거처에 출입하는 증표로 믿었다 (2) 로마 황제 예배와 관련된 제사장이 “내 이름을 돌 위에 써라. 그리하면 영존하리라”라고 한 말과 관련되어 있다. (3) 신비 종파 견습생들이 그 종교의 정회원으로 입참할 때에 흰 돌에 그의 새 이름을 쓰는 풍속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 설명에 대해서 박윤선님은 성경 저자들이 미신의 풍습을 미워하고 멀리 하였다는 점과 우상숭배를 미워한 성경저자들이 그것과 관련된 사상을 채용했을 리 없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받는 자 밖에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의 그 이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또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설과 받는 자의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전후 문맥을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한다.
모든 주석들을 참고하면, 흰 돌에 기록한 이름은 구원을 받은 자의 이름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뜻하며, 전자의 해석이 가장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새 이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 즉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자격, 새로운 변화를 상징하는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계시록 전문가인 이필찬교수의 계시록 강해집 “내가 속히 오리라”(150쪽)를 보면, 흰 돌에 대해서 일곱가지의 해석을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 두가지의 개념으로 압축시키고 있다. 첫째는 고대 재판에서 심판관들이 심판을 위해 던졌던 흰돌과 검은 돌, 둘째는 축제 때 입장을 위한 티켓용 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뜻하는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발부를 받은 초청장을 의미한다.
이필찬교수는 계2장의 새 이름은 받는 자 밖에 알 수 없는 이름으로서 성도의 이름을 뜻하며,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으로 해석한다.
또한 3장의 새 이름에 대해서는 이필찬교수는 예수님의 승리하신 새 이름으로 해석한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나 “나의 새 이름”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나 구약에서 어떤 다른 사람,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한 이름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인격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 이름 받는 것은 바로 새로운 자격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새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나라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내가 속히 오리라, 151-152쪽)
신천지의 주장과 달리, 이기는 자는 이만희가 아니라, 당연히 신앙을 극복하고 인내한(overcome) 초대교회의 성도들이다. 이와 같이 신앙을 극복하고 인내한 성도들에게 주님은 흰돌을 줄 것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이름은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내용이므로, 그 교주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주장은 모두 틀린다.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가르치는가?)
이 새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데, 두가지의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며,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구원을 받은 당사자의 이름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주석에서도 이 두가지 견해가 모두 설명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계2장의 새 이름은 성도, 계3장의 새 이름은 그리스도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대로의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이것은 기존의 이름과 다른 사람을 의미하지 않으며, 새 이름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이사야서 62:12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사람으로서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된다는 것이다.
사 62: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갖으며, 그 사람의 인격과 장래를 결정한다. 예를 들면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이며, 나발은 어리석은 자, 베드로는 반석을 의미하였다. 새 이름의 상징적인 의미는 전과 다른 인격이며, 동시에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새 이름, 다른 이름은 다른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자격으로 새롭게 변화된 가치를 뜻한다.
사 65:15 또 너희가 남겨 놓은 이름은 내가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리라
동일한 존재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으로서 아래 신약성경의 구절과 같은 내용으로 본다. 즉 새 것이 된다는 것과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즉 새 이름이라는 의미는 문자적이라기 보다는 새롭게 구원을 받은 것을 상징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개념이며 동시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성경구절과 같이 그 돌을 받는 당사자만이 그 돌에 씌여진 이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 계시록 3장12절의 새 이름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시록 2장의 새 이름과 함께 계시록 3장에서도 새 이름이 나타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님은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성도들 위에 기록하여 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신약 이후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다.
지진이 있었던 빌라델비아 도시에 성전이 되게 하여 주신다는 의미는 확고한 신분으로서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새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두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외에 또다른 구원자라는 이름이 천하에 없기 때문에, 구약의 구원의 개념과 다르며, 예수님이 곧 새 이름이라는 뜻을 반영한다는 해석이다. 두 번째 해석은 예수의 새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이다. 예루살렘도 이스라엘의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개념의 예루살렘인 것과 같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노래가 모두 새 이름으로 불리워진다는 점은 그 새 이름의 동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새 이름이라는 것은 곧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자격, 새로운 변화를 상징하는 이름이 된다.
(호크마 주석)
내가…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인들 중 승리자에게 주어진 두번째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 종류의 이름을 부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당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있어서 친숙한 것이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을 때 티베리우스(Tiberius)의 도움으로 재건된 후 ‘네오가이사랴‘(Neocaesarea)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아‘(Flavia)로 개명되었다(A.D. 70-79). 이러한 경험을 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여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하나님의 이름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민6:27).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낸다(22:4, Ladd, Morris, Johnson).
(2)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 하나님의 성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소유함을 시사한다(Mounce, Ladd,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것으로(빌3:20) 그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주할 것임을 암시한다.
(3) 나의 새 이름. –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새 이름, 곧 다른 모든 권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력과 인격 그리고 성품을 나타내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이긴 자들에게 주어짐을 의미한다(19:12, Mounce, Morris, Beasley – Murray, Ladd) 다른 하나는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나타낸다(사62:6; 65:15, Johnson).
(WBC 주석)
“더욱이 내가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이렇게 기록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모두 나타내는 은유다. 아마 이 말은 출애굽기 28:36-38 의 인유일 것이다. 이 출애굽기 구절에는 금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 아론의 대제사장 관 위, 곧 아론의 이마 위에 매달라는 지시가 나온다. 이 금패 위에 새겨졌다는 전통 사상(히브리어 성경이나 칠십인역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을 나타낸다 그러나 De Abr. 103에서 필로는 금패 위에 “주님에게 거룩“(하기아스마 퀴리오)이라고 새겨졌다고 말한다. 이사야 43:7은 “내 이름으로 일걷는 자들”을 언급한다. b. B. Bat. 75b에 의하면, ‘그를 찬송할지어다. 거룩하신 분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들은 다음과 같다: 의인들과 메시아와 예루살렘이라“(Sπ-B 3: 795-96). 신성한 이름의 기록과 성소의 기둥이라는 주제가 PGM VIII-41 에서 다음과 같이 결합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너의 참된 이름이 헤로모폴리스(Hermopolis)의 가장 깊은 성소의 신성한 기둥에 새겨진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천상의 시민 자격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새 이름은 랍비들이 숙고하는 문제다. Gen. Rab. 49(3 1a)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렘 3:17)로 칭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매우 유사한 표현의 문맥에서 세 번 언급된다(3:12 ; 21:2, 10) 그러나 형용사 “새”는 3:12과 21:2에만 나온다). 3:12에 나오는 높임을 받은 예수의 말은 이전의 판에서 나온 21:2, 10에서 비롯되었다. 형용 분사 혜 카타바이누사는 독자들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에 정관사를 갖고 있는 내용의 속격, 불변화사 테스 예루살렘과 동격 관계에 있는 주격이다. ‘하나님께로부터”라는 어구는 중복이지만 “하늘과 하나님의 이름의 완곡한 표현임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의 완곡한 표현으로 ‘하늘에 대해서는 Houtman, Himmel, 107-10를 보라).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는 곳이 없다.
“그리고 나의 새 이름“, 성경 전승에서 ‘새 이름”의 수여는 보통 도시나 국가의 지위 변화(사 1: 26: 사 60:14: 65 :15: 렘 3:17: 23:6: 33:16: 겔 48:35: 속 8:3), 또는 개인의 성격, 행동,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창 17:5,17:32 :27 28 : 41 :45: 단 1:7 : 막 3:17: 요 1:42), 회복된 이스라엘의 미래의 영광에 대해 말하면서 이사야 62:2은 ‘너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라고 말하는 반면에. 이사야 65: 15은 의인들에 대해 “그러나 네 종들은 다른 이름(칠십인역 : 오노마 카이논으로 칭하리라”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사야 62:2: 65: 15 의 ‘새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Ulrichsen, Grundschrift, 194-95를 보라)은 레위의 자손에 대해 ‘그는 새 이름으로 일컬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랩세이는 새 이름의 주제가 빌라텔비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이름이 두 번 개명되었기 때문이다. 주후 17년의 지진 수에 받은 최초의 새 이름은(티베리우스 또는 게르마니쿠스[ Germanicus] 의 이름을 따라서 ‘네오카이사레이였고 두 번째 이름은 황제 베스파시안의 통치 기간, 즉 주후 70-79년 동안 그의 성(姓)을 따라 “플라비”로 명명되었다.
(그랜드 주석)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의 승리자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소유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임을 천명하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성도에게 새겨지는 것은 분명히 그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다(7:3.4 ; 9:4).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그 이름이 새겨지는 성도가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것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새 예루살렘’이란 이 땅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그 공동체의 새로운 처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1:1. 2. 10-2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은 독특한 표현으로 아마도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절대적 주권자되시는 주님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름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2:17 ; 19:12). 하여튼 그러한 그리스도의 새 이름까지도 신앙의 승리자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올 나타내 주는 상징적 표현이다.
(옥스포드 주석)
3: 12 하나님의 이름 (토 오노마 투 데우),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첫 번째 종말론적인 약속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본문에서는 그에 이어 두 번째 약속이 언급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의 이름과 에수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이 위에’로 번역된 ‘에프 아우톤’ 에서 ‘아우톤’이 지시 대명사가 아니라 인칭 대명사 목적격으로 사용되었다(KJV, hím)는 점에서, ‘그이’ 가 앞서 언급된 ‘기둥’ 이 아니라 ‘이기는 자’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기둥’ 이나 ‘이기는 자’나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가 곧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이름’으로 번역된 ‘오노마’가 함축하고 있는 뜻에 대해서는 1:4, 5절의 강해 내용을 참고하라. 단적으로 말해 ‘이름’은 히브리 어법에서 ‘존재 자체’를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뜻한다. 출 28:36-38 에 의하면 대제사장인 아론이 그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정금으로 만든 패를 붙였었고,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그 이마에 인을 맞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7:4). 그런데 주지할 것은 한결같이 이 인이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계 14:1; 22:4).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승인의 사인(sign)으로 지상의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교회는 하나님께 속하는 백성이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 12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의 이름 (토 오노마 테스 폴레오스 투 데우…카이네스 이에루살렘), 이기는 자에게 새겨질 두 번째 이름은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이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이기는 자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기록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소유임을 표상하듯 곧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이다(갈 4:26 ; 빌 3:20). 그런데 이러한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 역시 계 21:2, 10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본절에 언급된 종말론적 약속이 약속과 성취의 공식으로 본서의 종결부와 대귀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곳과 플래시포워드 (flash-forward)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읍을 보여준다. 거기서도 새 예루살렘은 본절과 같이 지상의 옛 예루살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 (폴레오스)으로서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 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내려오는’으로 번역된 ‘카타바이누시’는 ‘내려오다’ 라는 뜻을 지닌 ‘카타바이노’ 의 현재 분사형으로 내려오고 있는 광경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하강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의 하늘로부터 지상으로의 도래는 ‘내 하나님으로부터(아포 투 데우 무)’ 라는 어구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본문에서 ‘하나님의 성이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출처와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계 11:2 ; 20:9 ; 22:19).
3: 12 나의 새 이름을 (토 오노마 무 토 카이논), 이기는 자에게 새겨질 세 번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다. 이것은 이전에 호칭된 그 어떤 이름과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계 14:1; 19:12) 이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알려지면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므로 알려지는 것을 막는다는 그런 류의 미신적 사상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은 ‘그의 인격의 완전한 계시’를 단적으로 상징하는데,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은 ‘성육신의 완전한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기에 인간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R. Mounce).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그의 새 이름 곧 그의 완전히 계시된 인격을 승리한 교회들은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의 새 이름은 신비에 감춰져 있다.
(최세창 주석)
두번째 약속인 네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는 빌리델비아의 믿음의 승리자가 얻는 두 번째 상인 천국백성이자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가 된 것을 확인하는데 세가지 이름을 그에게 기록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 믿음과 승리자의 이마에 기록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가 된 것,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확인하는 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그 믿음의 승리자의 이마에 기록하는 것은 그가 새 예루살렘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시민이 된 것을 확인하는 표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되실 그리스도께서도 새 이름을 가지신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의 기존 여러 가지 이름 주의 하나가 아니라,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다(19:12)
계 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계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 19장에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다. 그런데 계2장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 이름을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즉 새 이름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자격,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부여하는 새 이름이 된다. 그 이름을 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그 새 이름이 이단교주의 이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연합된 것을 의미하며, 그에게는 결단코 구원이 없다.
3) 계시록에서의 예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을 뜻한다.
계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11: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계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4) 계시록에서 사탄과 짐승의 이름은 그의 소유를 뜻하며, 즉 멸망받을 자들을 뜻한다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계 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계 9: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계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