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계시
이인규
1. 예언
대통령선거만 되면 과거에 어느 무속인이 대통령을 몇 번 알아맞혔다는 전력을 과시하는 기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미국의 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것을 예언했다는 사람과 일본의 지진을 예언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월드컵 축구때에는 어항 속에 있는 문어가 승패를 정확하게 알아 맞혔다는 웃지 못할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과연 장래 일을 적중시키는 예언이 있을 수 있는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어떤 확률적인 일치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 똑같은 예언이 지금 기독교의 교회에서 연출되고 있다. 목사가 교인들의 장래 일을 점쳐주는 무당과 똑같은 일이 교회와 기도원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일을 예언하였는데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선전과 홍보를 하면서 전력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 무속인의 광고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어느 외국의 목사가 죽은 사람을 수백명을 살렸다는 전혀 근거가 없는 과대광고가 등장하고, 어느 목사가 기도를 하니 여름에 폭설이 내려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을 하며 어느 목사가 선포기도를 하여서 광우병이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어느 목사를 신격화하고 신령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소위 마케팅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예언은 타종교에도 있고 무속종교에도 있다. 그렇다면 문어도 성령의 역사인가? 족집게 무당이라고 불리는 무속인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인가? 행16:16에서 점치는 여종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신학적으로도 여러 정통교단들은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 신비주의적 집회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이단명단으로 발표하였고, 직통계시나 예언등을 이단성/교류금지로 공식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혹간은 성경이 말하는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가 있으므로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언은 개인의 장래를 점쳐주는 무속적인 행위가 아니다. 더욱이 그러한 장래 일을 점치는 행위는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신 18:10-12)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렘 29:8-9)
성경은 개인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렘 23:16-18)
성경은 사람의 장래일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전 8:7-8)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전 10:14-15)
(1)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예언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선지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나비. 호제, 로에 등이 사용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의미하며,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하나님의 입”을 상징한다.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히: 나비)가 되리니”(출 7: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멧세지를 전하는 자로 사용되어왔다.
선지자는 그 놓여진 상황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지하는 자인데 장차 올 시대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장차 하려고 하시는 일을 그 종인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이셨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즉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란 자기의 느낌이나 해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함이나 해석함이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신 18:18)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입에 두는 것이 곧 선지자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는 ‘나비, 로에, 호제’라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원래의 개념은 ‘보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보여주시면 선지자는 그 말씀을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정통교단의 신학은 직통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의 예언과 같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2) 예언은 항구적인 초능력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선지자는 항상 어떤 예지나 예언의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공동체를 위하여 전달하는 것뿐이다. 즉 예언은 그 사람이 갖고있는 어떤 항구적인 능력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민 11:25)
사울도 한정적으로 예언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삼상 10:10-12)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8-9)
(3)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의 예언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는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선지자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직분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의 글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성경이 곧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람의 예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내용과 다른 내용은 거짓 예언이다.
(4) 성경에서 예언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4-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32)
다시 말하여 공동체의 유익이 없는 사사로운 예언은 거짓예언이다. 특히 돈이나 금품을 받고 개인의 장래를 점쳐주는 행위는 하나님을 빙자한 거짓예언이며 무속적인 헹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서는 개인을 위한 예언도 드물게 있다. 예를 들면 요셉, 다윗, 바울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의 개인은 그 공동체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로서, 개인적인 장래 일을 점을 쳐준 것이 아니며,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의미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하며, 개인에게 미리 장래의 일을 알려줌으로서 그것을 사전에 그것을 피하거나 변경을 하도록 대처해 주는 예언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는 선지자가 바울에게 장래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언이 있다(행21:11). 그러나 바울에 대한 예언은 그 공동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를 하였지만, 바울은 올라가지 말라는 주위의 권고를 듣고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즉 그 예언은 사도바울의 개인을 위한 장래 일을 점치거나 그것을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은사(카리스마)는 주님의 몸이 되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는 성령의 선물이다. 즉 은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면 된다. 자칭 사도나 자칭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단한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칭하고, 예언을 해주는 댓가로 돈을 받으며, 어느 개인의 장래를 점쳐주는 행위는 성경이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7-11)
고전 12:7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동번역]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각 사람에게 성령님이 계시는 증거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마틴로이드존스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개념으로 두가지 의미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외부로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고하는 것’인데, 이것은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이며 백성을 가르치는 도구와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들 중 가장 먼저, 일시적인 은사들입니다. 이에 속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도직의 은사입니다. 사도직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영원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사도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은사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동일한 것을 예언의 은사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언의 은사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그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외부로 말하는 것’(forthtelling)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영감을 받아 계시를 전하는 혹은 백성을 가르치는 도구와 통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예고하는 것’(foretelling)을 의미합니다”(마틴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85쪽)
(5) 예언은 개인의 장래를 점치는 행위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는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거짓선지자의 행위이었다
성경은 점치는 행위, 복술, 무당에 대해서는 성경은 많은 곳에서 절대금지를 경고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자들은 죽이라는 구절까지 있다. 또한 성경은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거짓 점과 거짓 예언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장래를 미리 알게 해준다는 수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렘 14:14)
(6) 예언의 성취
예언이 증험도 없고 성취되지 않으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목사나 예언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거짓이다. 예언을 하는 자는 그의 명예와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검증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예언이 틀려도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 18:20-2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겔 13:3)
예언은 검증되어져야만 하며, 그 예언이 틀렸거나, 하나님 이외의 이름을 높이면 그는 거짓선지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적중하였다는 선전을 하면서 막상 검증을 하자고 하면 100%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한다.
즉 그 예언의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예언들이 언제나 틀리지 않았어야만 하고, 그 내용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현재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의 내용과 다르면 안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신사도운동을 하는 소위 자칭 사도들은 그들의 예언에 대해서 다음과 말하는데 그들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신디제이콥스)
“참 예언자가 100% 정확하다는 것이 아니다”(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신디제이콥스, 136쪽).
“비록 잘못된 예언이 있기는 하지만 예언의 은사의 장점은 그것이 유발하는 문제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신디제이콥스, 102쪽)
“당신은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신디, 당신의 예언이 틀린 적은 없습니까?’ 물론 나도 있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신디제이콥스, 270쪽).
“예언에는 분명히 실수가 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예언이나 예언자가 무오하지 않으며 성령의 권위에 동등한 예언이나 예언자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빈야드운동평가, 박영호, 201쪽)
“예언도 마찬가지다. 때때로 맞지만 대부분 경우 아니다. 전부 맞다, 안맞다가 아니다. 조금은 맞지만 대부분 맞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마이클 비클,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예언은 틀릴 수 없다. 예언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서 그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크 헤너그라프는 그의 책에서 빈야드교회 목회자였던 데이빗 레이븐힘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엉터리 예언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를 언급한다.
– 가짜 부흥운동 예언자인 밥존스는 “3분의2 정도만 맞혀도 꽤 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가짜 부흥운동 리더인 잭 디어도 현시대 예언자에게 100%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디어는 800여 명이나 되는 청소년들이 모인 곳에서 한 학생에게 “포르노를 보는 죄를 짓고 있다”고 잘못 예언을 한 예언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려 주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언자는 문제의 학생을 앞으로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포르노에 빠져 있구나. 주가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디어의 말에 학생은 울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어는 그 다음 상황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학생은 800명이나 되는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의 교회로 찾아가 교회에 사과하고 모든 회중에게도 사과했습니다.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하지만 비록 걸림돌이 있긴 하지만 모든 일은 전적으로 성령께 책임이 있다. (행크 헤너그라프, 반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164-166쪽)
위와 같은 예언은 거짓예언으로 밝혀짐으로 공동체의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가져왔던 것이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황당한 내용의 책을 써서 문제를 일으켰던 토마스 주남은 그의 카페에서, “부시 대통령의 임기 안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이 맞지 않자 “그것은 모두 전적으로 주님의 책임입니다”라고 변명을 하였다. 성경은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그리스도를 경고하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막 13:22)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성경은 사사나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혹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어느 개인의 장래일을 점쳐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범죄와 타락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멧세지를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장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멧세지의 예언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2. 계시의 종결성과 성경의 완전성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특별계시는 (1) 현현 (2) 전언(傳言) (3) 기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물론 오늘날도 계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계시의 종결성’ 이라는 것은 직통계시의 종결성을 뜻한다. 그러나 혹간 사람들이 어느 성경에 계시와 예언이 끝났다는 구절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의 종결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시의 종결이라는 주장은 앞으로 계시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 아니며, 성경의 완전성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분명하다. 지금 수많은 이단들이나 사이비집단의 교주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성경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계시를 거짓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성경적인 내용과 다를 수가 없다. 만일 계시나 예언이 성경과 다를 수 있다면, 하나님은 변치 않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두 말로 식언하시는 분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1)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없었던 시대에는 예언과 직통계시가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거꾸로 예언과 직통계시가 성경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여, 성경의 완전성을 인정한다면, 기록된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된다. 지금도 직통계시가 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아직 불완전한 것이 되어진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성경이 없었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그 백성들에게 멧세지를 전하셨다. 그 여러 부분과 모양이 바로 선지자와 사사였으며 때로는 천사가 멧세지를 전하였다.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죽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로 전한 말씀은 곧 신약성경이며, 신약의 기록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다. 성경 계시에 추가할 또 다른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 즉 성경의 완전성, 객관성과 최종성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계시의 종결성이다. 만약 또다른 계시가 더 필요하다면 성경은 불완전한 계시가 되어진다. 성경은 계시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2) 계시와 예언이 성경과 다르다면 거짓이다.
이단이란 아주 황당하고 해괴망측한 주장을 하여야만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비성경적인 주장을 가르치는 곳이 곧 이단이다. 사사나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혹은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나 예언을 전하였다. 그들에게는 객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 66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멧세지를 전해야 하였다. 신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시기는 AD 4세기경이다. 신약성경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구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것도 BC 2세기경이었다.
(3) 성경은 선지자나 신령한 자보다 권위가 더욱 높다.
초대교회에 자신을 신령하다고 하는 자칭 거짓사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났다. 바울은 그러한 선지자나 신령한 자들의 주장은 진리가 아니며, 자신의 편지 즉 신약성경이 주의 명령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6-37).
바울의 서신, 곧 신약성경이 곧 주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바울의 최초의 서신이라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도 등장하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감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얼마 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단호하다. 바울의 서신, 즉 신약성경과 다르면 거부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도들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비난한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어떤 직통계시나 어떤 예언, 심지어 천사가 전하여준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완전성과 계시의 종결성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베드로가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역시 베드로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주님에게로부터)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도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즉 직통계시의 종결성은 성경의 완전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성경의 완전성과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임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직통계시와 예언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계시의 종결성이다. 지금도 직통계시가 있다면 성경의 완전성과 성취성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도들이 전하는 주의 명령이며, 주님의 가르침이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도들의 말(우리의 말)로 미혹의 영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