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관계

  • 6월 16, 2016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관계

                                                                                                                                                      이인규

    

 

많은 이단들이 주로 구약의 성경구절만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한다.

그런데 간혹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정반대가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예를 들면, 구약은 안식일과 유월절등의 명절과 절기를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만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할례를 하나님과의 언약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31:16-17)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17:10)

위의 성경구절만을 본다면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며, 반드시 할례를 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안식일과 같은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며, 육체적인 할례는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특히 구약의 레위기와 민수기는 거의 모든 기록이 제사의 규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신약에서는 구약의 명절과 절기를 지키지 않으며, 할례를 받지 않아도 무방하며, 제사를 더 이상 드리지 않는가? 과연 구약과 신약이 다른 이유는 무엇이며, 어느 성경구절을 올바른 진리로 보아야만 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에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신약에서는 그러한 제사가 없어졌다.

또 구약에서는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없어졌다. 이러한 폐하여진 것은 매우 많은데,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있었으나 신약에서는 제사장이 없으며, 구약에서는 성전의 지성소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게 된다.

율법의 기능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접근법은 모형론(typology), 즉 신약과 구약의 요소들의 상응성을 알아야만 한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이며 실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신약성경은 다음과 같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3:24-27)

몽학선생이라는 것은어린아이가 자랄 때까지 돌보아주는 가정교사를 말한다.

실체이신 예수가 오기 전까지 율법은 연약한 어린아이들의 가정교사역활을 담당하였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에 무엇을 하지 말라라는 금지법을 가르치거나, “무엇은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규정을 정한다.

왜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왜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은 구체적인 이해를 할 수가 없으므로, 단지 하지말라혹은 지키라는 법을 적용시켜서, 그 법을 범하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7)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란 죄를 깨달음이 그 첫째 기능인 것이다.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5:13)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그 뜻을 우리는 잘 새겨보아야 한다. 율법의 기능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죄가 있었기에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즉 율법이란, 죄가 있었기에 그 죄를 죄로 알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죄가 넘쳐났으므로 이것을 어기면 죄가 된다 혹은 이것을 하면 죄가 된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란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3:19) 라고 바울은 이야기한다.

모형론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12:7)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하나님이 넘어가심으로 그 집은 화를 면하였다. 그래서 유월절을 Pass-over 라고 부른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12:13-14)

지금도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을 pass-over 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은 그림자일 뿐이며 몽학선생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실체가 되시는 예수가 오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예표이며 그림자가 되어지지만, 예수님의 피는 인류의 죄를 pass-over 하시는 영원한 표적이 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한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누가의 사도행전은 에디오피아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마차에서 성경을 읽는데 빌립이 나타나 그 성경을 해석하여 줄 때에 그 성경구절이 이사야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8:32)

바울은 예수가 유월절 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또한 계시록에서도 예수를 어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다(5:8, 7:9, 14:10)

우리는 과연 그림자이며 예표인 몽학선생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10:1)

유월절뿐 아니라,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해마다 드리는 구약의 제사도 온전케 할 수는 없다. 안식일과 유월절등은 그림자이지만, 예수가 바로 실체가 되신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안식일은 그림자이며 예수님의 천국이 곧 실체가 된다.

참안식은 아직 남아 있는 종말적인 쉼을 말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4:9-10)

구약과 신약에서 달라진 거룩의 개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거룩의 개념이 달라졌다.

한 마디로 신약의 복음 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이 없어졌다.

구약 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거룩한 사람(제사장)과 장소(성전), 시간(명절과 절기)과 물건과 음식물(정결하고 주장한 물건과 음식물)등에 대한 거룩과 정결의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1)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과 선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졌다.

구약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별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외에는 이방인이라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구약의 이러한 법은 엄격하여 이방인과의 교제와 혼인을 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구별이 폐하여 지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5, 18)고 하였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2)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장소, 즉 성전의 개념이 없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이 따로 있어서 오직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고(18:20), 어느 곳이든지 성도가 모인 곳이 성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고전3:16).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도 성전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고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말씀하셨다.

또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만인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3) 신약 시대에는 제사장의 직분이 없어졌다

구약의 제사장은 오직 구별된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별은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제사장은 언제나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자손만이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지고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성도는 누구든지 만인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벧전 2:5~9).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5-9)

4) 신약에서는 정하고 부정한 물건과 음식물에 대한 구별이 없다( 36:17, 19:9, 5:3, 9:13, 14:14).

구약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경도 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돼지고기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등도 부정하여서 먹을 수가 없었다. 어떤 것은 부정하여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과 정결의 규례는 없어졌다.

만약 지금도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있다면 경도하는 여인은 부정하니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 또한 돼지고기도 먹지 못하고, 비늘이 없는 오징어나 장어, 추어탕도 먹으면 안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4:14)고 함으로 성과 속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5)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날의 구별이 없다

구약에는 거룩한 날과 보통 날을 구별하였다. 이러한 날 중에 특히 안식일에 대한 구별은 철저했다. 만일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돌로 쳐죽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다.

즉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면 살인을 하여야만 한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14:5)

그래서 바울은 모든 날이 같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약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구약에 미리 예언되어 있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절기와 함께 폐할 것이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기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명절을 폐하겠고….”( 2:11)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에 폐할 것이 예언된 것은 안식일과 절기와 월삭과 명절이다.

이것이 우상에 대한 심판의 경우만 해당된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어리석다. 구약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 우상을 숭배해 왔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계속 심판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에만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로마인들에게만 해당되며,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가?

이 예언은 이루어졌다. 선택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의 구원은 예수를 믿는 이방인에게 넘기어 졌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구약의 절기와 월삭과 명절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예수를 모르고 율법만 알면 율법주의자가 된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유대교 교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율법의 의미는 모르고, 복음만을 알고 있다면 그 또한 율법폐기론자가 됨으로서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대한 관계, 즉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구약은 예비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신약은 집행적 성격을 가진다.

구약은 우리가 해서는 안될 것을 말해주고,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은 우리는 감금시켜 주고 신약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구약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말해주며 신약은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말해준다.

구약의 강조는 행함에 있고, 신약의 강조는 인격에 있다.

구약은 소망을 갖게하고 신약을 완성을 가져온다.

구약은 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며, 신약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한다.

구약은 슬픈 소식이지만, 신약은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즉 그 둘은 구별은 되지만, 서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의 열매는 구약의 뿌리와 줄기가 없이는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약은 구약속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속에 제시되어져 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신약은 구약속에 포함되어있고 구약은 신약속에 설명되어 있다.

과연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일까?

과연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구약의 희생제사와 신약의 예배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구약과 신약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예수의 피흘림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차이이다.

즉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와 예수의 보혈의 차이는 그림자인가 실체인가 하는 차이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만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1-12)”

당연히 유월절을 지켜야만 죄사함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교회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구약에서도 피흘림이 있었지만, 그것은 매년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피흘림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되었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진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0:17- 20)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는,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구체화된 반면에 새 언약은 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옛 언약의 국가는 배타적이며 선택적이지만, 새 언약에서의 교회는 포괄적이며 개방적이다.

보다시피 구약은 예비적 성격(예표)을 갖고 있으며, 신약은 집행적 성격(성취)을 가진다. 그러나 아직도 구약에만 얽매어 신약의 성취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장님이나 마찬가지이다.

구약과 신약은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를 드린 단 한번의 제사로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2: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