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이인규
전부터 사도신경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몇몇 독립적 침례교회들, 그리고 주로 이단과 사이비교회들은 사도신경을 거부한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 지방교회, 베뢰아(성락교회)같은 이단들은 사도신경을 거부하는데, 가장 첫 번째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사도신경과 다른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신경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단들이 사도신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며, 그 내용상에 아무 문제가 없다. 굳이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곳은 그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곳이거나, 또한 예수의 재림과 부활, 영생을 부정하는 이단들도 사도신경을 거부한다.
우리가 암송하는 한글 사도신경은 매우 훌륭한 번역으로서, 당연히 우리의 신앙고백이 된다. 다만 구어적인 표현과 다소 오해가 있을만한 표현등은 몇가지 수정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진다. 먼저 사도신경에 대한 비난과 그 문제점을 살펴 보자.
사도신경은 현재 주기도문과 더불어 공식예배의 암송과 회중기도로 사용되고 있다.
1) 초대교회때에는 없었다는 견해.
물론 지금과 똑같은 사도신경은 없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때는 “사도신조“라고 하여 세례시 문답을 주고 받던 것이 있었으며, 많은 이단들이 성행하게 되자 이단들을 경계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이 사도신조는 후에 “내가 믿사오며..”라고 하는 사도신경으로 바꾸어 발전되어진 것이다.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라는 단어에서 원래 “신경“(Creed)라는 단어는 CREDO(내가 믿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이 니케야공의회에서 소위 니케야신조로서 확증된 것이며, 이것을 부정하면 이단으로 분류하는 공식입장을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교단들은, 그러한 용어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사상과 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아마 여호와의 증인같은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과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개적으로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핑계를 굳이 돌리면서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조로부터 유래한다. 아래 신조들은 분명한 삼위일체를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기독교는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으로서 받아 들이고 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낳으신 자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되지 않았고, 낳으셨고,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만물은 존재하게 되었음을 믿는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시어 인간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고난받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제3일만에 일어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고,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이시며,생명의 수여자이시며,아버지로부터 발출된 자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받으시고 영광받으실 분이시며,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를 사면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장차 올 세계에서 죽은자가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한다. 아멘.”(니케야–콘스탄티노플신조, 주후381년)
“거룩한 교부를 따라, 우리는 일치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의 동일한 아들이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참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이다. 신성으로는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본질이 동일하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신성으로는 창세 전에 성부로부터 출생하였고,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신의 수태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자의 양성이 혼합, 변질, 구분,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양성의 구별이 연합으로 제거되지 않고, 각 성의 속성들이 한 인격과 한 실재 안에서 보존되고 협력한다. 두 인격으로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동일한 성자, 독생자, 참 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일찌기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증거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우리에게 전수된 교부들의 신앙고백도 그러하다.”(칼케톤신조)
게다가 신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며 영생을 부정하는 이단들도, 몸이 다시 산다(resurrection)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지 못하므로, 사도신경을 거부할 것이다.
2)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 대하여
이 영어문장은 under Pontius Pilate 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번역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가 맞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문장이 틀림을 말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실제적으로 살명하자면, 박대통령 아래에서 DJ가 고난을 받었다는 뜻은, 박대통령이 직접 DJ에게 고난을 준 것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통치 아래 DJ에게 고난을 주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 당시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모든 것이 그의 통치 하(下)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빌라도는 실제적으로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고난을 주었으며, 군중들의 압력에 못이겨 바라바를 놓아주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과연 빌라도가 무죄한가? 빌라도가 누구였는가?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눅13:1)
저희의 우상의 제물을 위하여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로 바친 자가 바로 빌라도이다. 즉 빌라도가 무죄하다는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직접 받은 적이 없으므로, 사도신경을 거부한다는 것은 더욱 이상한 궤변이 된다.
3)거룩한 공회가 가톨릭교회라는 견해에 대하여…
그 당시 초대교회는 이단들에 대하여 구별된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Catholic Church 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의미는 “보편적인 교회“ 혹은 “일반적인 교회“ 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 그 당시 이단들이 너무나 성행하였고, 그 이단들의 교회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편적인 교회“ 혹은 “일반적인 교회“라고 명칭을 붙혔던 것이다. 개역성경은 그것을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곳에서 “공회“라고 번역된 단어는 지금의 카톨릭교회나 교황권의 공의회를 말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란 헬라어 “에클레시아“로서 부르심을 받은 회중을 말하며, 히브리어 “카알“로써 “하나님의 회” “여호와의 회“라고 이미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렘23:18.22) 또한 헬라어로 교회란 “에클레시아“로써 에크(…로부터)와 클레시아(불러내다)는 말의 합성어이며, 즉 하나님이 부르시고 선택한 “성도들의 모임이나 회중“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의미로써 The Holy Catholic Church는 지금의 카톨릭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한글로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다. 즉 사도신경의 “공회“란 회중적 모임, 예배등을 의미라는 교회의 원래적인 개념이며, 초대교회부터 이단교회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만일 카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는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거부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초대교회도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이유로 모든 초대교회들을 거부하여야만 할 것이다.
즉 사도신경의 공회(Catholic Church)는 지금의 가톨릭교회를 뜻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큰 착각 내지는 무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영어성경은 The Holy Christian Church 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카톨릭에서는 죽은 사람들에게 성인(Saint)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그러나 The Communion of Saint 의 Saint는 “죽은 성인“과의 교통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도들의 교제(코이오니아)를 의미하며, 그러한 카톨릭의 교리를 지지하는 개신교회는 없다. Saint 라는 단어는 원래 기독교인, 즉 성도를 의미한다. Sunday Saint는 죽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만 기독교인척 하는 사람이며 The Blessed Saint는 기독교 신자를 말한다. Saint go march 는 죽은 자들의 행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행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번역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 된다.
카톨릭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성인“(Saint)이라는 칭호를 붙혀주는 제도는 사도신조(니케야신조)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이므로, 사도신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가 행하여지는 일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787년 제2차 니케야회의부터 였으며, 죽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한 것은 A.D. 995년 요한15세 교황때부터였다. 오늘날의 성경에서도 “성도“는 영어로 Saint라고 번역되어져 있다.
5) 원어와 영어성경에 기록된 “He descended into hell”.
직역하면 예수님이 지옥으로 하강하셨다는 것인데, 한글 사도신경에서는 문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생략되어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해석이 있다.
첫째 견해로는, 다음에 언급되는 “He ascended into heaven”(하늘에 오르사)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써 문학적인 표현방식을 갖고 있다. “하늘에 오르사“라는 승천은 영광과 존귀의 의미가 된다. 즉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실감적인 의미로 표현하기 위해 “descended into hell”(지옥에 내려가다)라고 하였다는 견해이다.
즉 descended 와 ascended 라는 두 단어와 into hell 과 into heaven, 즉 영광과 고통이라는 두 단어를 비교하며 대조시켰다는 견해이다.
또 둘째 견해로는, 예수님이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은 벧전4:18-19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3:18-19)
가톨릭은 이 구절로 연옥에 있는 자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두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며 후에 면죄부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전파하다“는 단어는 “유앙게리조“(복음을 전하다)가 아니고, “케루소“(선포하다)이다.
즉 정확한 번역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승리를 널리 선포하신 것이며 그것을 강조한 것이다. 어쨋거나 한글 사도신경은 이 문제를 생략하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번역함으로서 혹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글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한글 사도신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글 사도신경은 교리적이나 성경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함으로서, 전혀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려 드린다.
6) 고어적인 용어에 대해서
또 한가지 “저리로서“라는 의미로는 From thence 이며 현재용어로는 from there 즉 “저곳으로부터“ 라는 의미로 전혀 이상이 없는 고어체이다.
현대적인 어문으로 이것은 수정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된다.
7) 몸이 다시 사는 것(resurrection of the body)
기독교의 부활은 신체적인 부활이다.
성경은 신령한 몸의 신체적인 부활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생전의 육체 그대로 다시 영생한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늙고 병이 들거나 장애를 가진 육체 그대로 영생한다는 것은 고통이 되어질 것이다. 즉 우리의 부활은 신령한 몸의 부활이며, 영만의 부활이 아닌 전인적인 부활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또한 빌립보서3:21에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체는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기도 하셨던 신체적이시며 가시적이었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영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준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이셨으며, 문이 잠겨진 공간에 나타나시기도 하셨으며 하늘로 승천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나신 자이신 예수님의 부활체가 살과 뼈가 있는 신체적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체도 신체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