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반 (한때 두때 반때)
이인규
성경에는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일천 이백 육십 일(1260일), 혹은 마흔 두 달(42달), 삼년 반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모두 동일한 용어이며 동일한 기간이다.
이 용어는 주로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에서 나타나는데, 사도요한이 이것을 계시록에서 기록할 때에 다니엘서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이 기간은 ‘종말에 있게 될 적그리스도 통치 아래의 박해기간’을 말한다고 본다. 먼저 다니엘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단 7:24-26)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단 12:7-13)
먼저 다니엘서가 말하는 3년반이라는 시간은일차적으로는 BC 170년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 겪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기간을 예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다. 물론 이차적으로는 종말적으로 겪게 될 적그리스도의 박해 기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상징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상징적이라는 의미는 그 숫자의 실체를 추측하여 밝히라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서는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을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그 기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니엘과 계시록은 예언서적인 장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예언서에 대해서 개인적인 견해를 강조하여 임의적이며 독단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인적인 해석은 주관적이고 다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단들의 주장은 대부분 계시록과 다니엘서와 같은 예언서를 자신들 임의대로 해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니엘서가 의미하는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문자적이고 일차적인 해석은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은 바벨론과 메대–바사, 헬라, 로마제국을 가리킨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계시록과 그 시대 이후에는 상징적이며 비유적인 개념,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총체적인 반기독교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여 3년 반이라는 기간은 종말적으로 적그리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통치를 하는 기간을 가리킨다. 그 기간이 장차 언제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종말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세력을 갖고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어느 특정한 기간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 기간은 짧은 기간이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서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말하고 있으며(단 12:4), 성경은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만의 고유한 권한을 인간이 상상하고 추측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특히 성경에 있는 단어를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적용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17)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계 11:1-3)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5-6)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4-5)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이 기간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면 ‘종말에 있게 될 적그리스도 통치 아래의 박해기간’을 말한다고 본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이 기간은 아직 닥치지 않은 장래를 뜻하며, 또한 성경은 이 기간이나 이 형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통신학적인 해석은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계시록은 일천 이백 육십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는 기간 이자,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기간 (계 11:1-3)
(2) 여자가 아이를 낳고 도망가서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서 양육을 받는 기간 (계 12:5-6)
(3)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기간 (계 13: 4-5)
(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지역이나 장소를 뜻하지 않으며 교회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은 실제 지역을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핍박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마흔 두 달‘은 구약의 다니엘서를 반영한 것이지만, 다니엘서가 기록될 당시와 계시록의 상황에서 정치적 지리적 상황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마흔 두 달’이 교회에 대한 짐승의 핍박 기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기간임을 시사한다. 이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호는 결코 고난과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붙들어 주신다는 의미이다.
특히 본문에서 두 증인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것을 어느 교회의 교주나 지도자로 비유하는 곳은 이단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3년반에 대해서 현재 자신의 교회에 대한시간표대로 해석하는 주장이나 또는현재를 종말론적인 해석으로 가르치는 곳은명백한 이단이라고 보면 된다.
(2)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일차적이며 과거적인 해석으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을 피하기 위하여 AD 68년 벨라로 피신한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장차 교회가 핍박을 피하여 보호와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즉 ‘일천 이백 육십 일’은 핍박의 기간으로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양육기간으로 나타난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을 피난시켜 양육하며 핍박에 대항 할 수 있는 능력과 인내를 허락하신다.
(3)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은 단 7:8의 넷째 짐승으로부터 돋아난 뿔에게 주어진 ‘큰 말하는 입‘과 유사하며 다니엘서를 반영한 것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마흔 두 달‘은 짐승이 교회를 핍박하는 기간을 상징한다. 이때 짐승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핍박하게 되는데, 짐승의 이러한 권한은 용에게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5-16)
마태복음 24장은 다니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서 과거적인 의미로서 BC 170년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 겪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기간을 유대인들에게 기억시킴으로서, 일차적으로는 AD 70년경의 로마의 티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성전에 가증스러운 우상이 세워진 사건을 예언한 사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계시록을 과거의 해석으로만 적용시킬 수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교회사적인 역사를 뜻한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을 인정한다면 계시록은 단지 열차 시간표와 같아질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시간표를 맞추기 위한 무리한 성경해석이 요구된다. 또한 우리는 장차 미래에 있을 교회의 고난기간을 예언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성경의 지나간 사건들도 “예언의 다중적인 성취”라고 말할 수는 있으며, 성경이 “네가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9)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Swete 라는 학자는 계시록의 해석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전체로서 어떤 학파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모든 해석체계들과 접촉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나는 과거파에게서 당시 상황의 역사를 배우며, 미래파에게서는 장차 올 시대의 성취를 배우고, 이상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철학을 배우며, 역사파에서는 사건의 진행들이 어떠한 원리에서 적용되었는가 하는 예증을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