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이레

  • 6월 16, 2016

                                                            칠십이레

                                                                                              이인규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이 저녁 제사를 지낼 시간쯤에 기도를 할 때에 가브리엘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응답을 주면서 환상(개역성경 이상)의 뜻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9:21-23)


혹간은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는 구절을 마치 종말의 날짜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은종말의 날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는 뜻이며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라는 내용이다.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정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여야만 하며,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메시야왕국이 나타나는 시간을 뜻한다.

              

1. 이레의 의미:

  

칠십이레에서 이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브임이다. ‘샤브임 일곱이라는 뜻으로 한 주’(Week)를 가르킨다.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난해한 성경구절이며, 또 너무나 많은 견해가 있는데 (1) 문자적으로 70이레는 70주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고, (2)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70주는 490일이므로 490년을 말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3) 사건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두지만 숫자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

하루를 일년으로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큰 비중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한 해석은 그다지 어려운 암호나 특별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것을 중요한 비유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구체적으로 1이레를 정확하게 7년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이, ‘이레를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뜻대로 정하시는 어떤 특정한 단위의 기간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러한 견해도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이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만약 가브리엘 천사가 정확한 년도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이레’(week)라는 단위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래의 사건이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 사건을 알려주기 위하여 week라고 하는 특정적이 아닌 시간의 단위를 언급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며 하나님의 숫자를 말한다. 70의 일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완성기간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는 말 안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라는 뜻과 사람이 임의대로 그 기간을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라는 말은 메시야의 성취를 뜻한다.

다니엘서에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계산하는데, 그 숫자에 대한 견해는 너무도 다양하다. 물론 이단들이 주장하는 견해와 시한부종말론으로 해석하는 위험한 견해도 대단히 많은데, 그들이 강조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숫자를 짜맞추는 목적일 뿐이며, 이 수치를 어떤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자체에 오류가 있다. 그들은 490년이라는 숫자에 짜맞추어 칼로 자르듯이 정확한 숫자로 맞추어 계산하려는 목적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다니엘서 9 24절을 보면 칠십이레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생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25-26절을 보면 칠십이레는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그리고 한 이레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70=7+62+1 이라는 등식이며 이 등식은 69 + 1 이 된다. 927절에서 마지막 이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반이레라는 단어에 대해서 또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개념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숫자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정하시는 기한임을 알아야 한다.

다니엘의 칠십이레를 490년으로 계산하는 견해:

칠십이레를 490일로 계산하여 490년으로 해석하는 주장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견해가 있다. 또 그렇게 해석하여야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반드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너무 주관적인 해석으로 치우치거나 너무 개인적인 생각으로 단정하는 추측을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과 견해로서 어느 하나의 견해만이 진리이며,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1) 육십구 이레(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9:25에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6절에서는 이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후가 지난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지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즉 일곱 이레는 에스라, 느헤미야 지도하의 회복기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육십이 이레는 중건령부터 메시야의 초림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2) 일곱 이레 :

이 기간의 기산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물론 이 견해들 외에도 수많은 주장이 있으며, 대표적인 견해만을 소개한다.

(1) 아닥사스다 왕 제 20(B.C. 458)의 포로 귀환 때부터 예루살렘을 재건한 490년 동안을 가리킨다는 견해

(2) 고레스의 칙령이 발표된 때(B.C. 536)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를 의미한다는 견해

(3) 고레스 원년(B.C. 538)에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한(B.C. 444)기간을 가리킨다는 견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를 지시하는 것이란 점에서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대하 36:22-23. 1:1-4. 44:28).

일곱이레는 고레스 원년(B.C. 538)에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한(B.C. 444)기간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다. 94년의 기간이 어떻게 7(49)이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그 숫자는 하루를 일년으로 적용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무리하게 억지로 숫자를 짜맞추려는 시도보다는 하나님의 뜻하신 기간이라는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3) 육십 이 이레 이 또한 세 가지의 대표적인 견해로 구별된다.

(1) 에스라 때부터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까지를 가리킨다는 견해

(2) 그리스도의 성육신 때부터 적그리스도의 출현 곧 신약의 교회 시대까지를 의미한다는 견해

(3) 일곱 이레에 연속되는 기간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중건된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일곱 이레의 주석과 이 육십 이 이레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3)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 육십 이 이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될 메시야왕국의 준비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4) 한 이레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9:26

[공동번역] 이렇게 육십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올 것이다.

[표준새번역]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아무도 그의 임무를 이어받지 못할 것이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서, 성읍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홍수에 침몰되듯 성읍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까지 계속되어,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본다면, 그 이후에 오는 왕은 로마의 티투스가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는 사건을 뜻한다.

그러나 BC168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성전오염사건으로 본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도 가능하며, 기름부음 받은자가 끊어지는 것을 반드시 순서적으로 해석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사건 이전으로 볼 필요는 없다. 성경은 단지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말할 뿐이며, 한 왕의 백성이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 다음의 순서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이레에 대해서 27절은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는 당연히 예수이고 언약은 복음이 될 것이다.

3. 한 이레와 반 이레

다니엘서의 한 이레에 대해서는 장차 있을 종말기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지나간 기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 계시록에서의 3년반(1260)

물론 계시록에서도 3년반(1260)을 기록하고 있지만, 다니엘서와는 동일한 상황으로 해석을 적용할 이유는 없다고 보며,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용될 것이다

(1)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는 기간 이자,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기간 ( 11:1-3)

(2) 여자가 아이를 낳고 도망가서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서 양육을 받는 기간 ( 12:5-6)

(3)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기간 ( 13: 4-5)

이레의 절반 7년 대환란의 3년반으로 보는 견해는 일단 하루를 일년으로 본다는 해석이 옳다는 조건을 수용하는 견해가 인정되어야 하며, 또한 한 이레를 성육신 이후의 기간으로 보는가 혹은 종말적인 기간으로 보느냐 하는 조건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또 반 이레에 대해서 3년 반을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기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나머지 반 이레를 재림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나간 시간을 년도를 맞추어서 계산하려는 시도로 보여지므로 인정하기 어렵다.

2) 잔포하여 미운 물건 멸망의 가증한 것 :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가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고, 구약의 희생제사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혹간은 주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므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곳이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 대속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잔포하여 미운 물건에 대해서는 단11:31, 12:11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과 유사한 표현으로서, 일차적으로는 BC 170년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 겪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기간을 예언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그 후 AD 70년의 티투스왕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기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24:15-16)

마태복음 24장은 다니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서 과거적인 의미로서 BC 170년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 겪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기간을 기억시킴으로서, AD 70년경의 로마의 티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성전에 가증스러운 우상이 세워진 사건을 뜻한다고 본다.

역사적인 사실에 의하면 BC 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말하는데, 마태복음24장에서는 그 사건은 일단 과거이므로 티투스의 예루살렘 멸망을 뜻한다.

비록 외경이지만 마카비서() 1:54-64과 마카비서() 6:1-5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카비() 1: 54 백 사십 오년 기슬레우월 십 오일에 안티오쿠스왕은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다의 근방 여러 도시에 이교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 앞에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다.

57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였다.

58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왕명을 위반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매달 잡아 들여 모질게 학대하였다.

59 매달 이십 오일에는 옛 제단 위에 새로 세운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60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61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사람까지 모두 죽였다.

62 그러나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고 무서운 하느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마카비() 6: 1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티오쿠스왕은 아테네의 원로 한 사람을 유다인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조상 때부터 내려 오는 율법을 버리고 하느님의 율법을 따르는 생활규범을 버리라고 강요하였다.

2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더럽히고 그 성전을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에게 봉헌하게 하고 그리짐산의 성소는 그 지방 사람의 소원대로 나그네의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봉헌하게 하였다.

3 이와 같이 유다인들이 차마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은 날로 더해만 갔다.

4 이방인들은 이 성전 안에서 온갖 방종과 향락을 일삼았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경내에서 창녀들과 놀아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였다. 그뿐 아니라 법에 금지된 물건들을 성역 안으로 끌어 들였다.

5 제단에는 율법에 금지된 부정한 고기를 쌓아 놓았다.

6 안식일은 물론 조상 전래의 축제도 지킬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자기가 유다인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혹간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의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21:21).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 독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의 Titus가 로마군기를 성전 동편 문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또 혹간은 AD 70년 이전 열심 당원들(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Alford). 그 당시 열심 당원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하고 매일의 제사를 훼방했으며,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만행이 바로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3) 칠십이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 :

본절에서 마지막 2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정하신 기간인 칠십 이레에 관한 언급인데, 이 칠십 이레의 환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포로 귀환과 성전 중건 (2) 그리스도의 초림 (3) AD 70년의 티투스 휘하의 로마 군대에 의한 성전의 파괴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또 다른 견해, 다중적인 예언의 성취라는 견해로 볼 때에 (4)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 이스라엘의 운명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 때의 종말론적 사건이 예시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과거의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주장, 즉 일차적인 견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해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반이레를 3년반으로 해석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기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요한계시록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종말적으로 겪게 될 적그리스도의 박해 기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주관적인 생각이나 단정으로 추측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어느 장래의 불확실한 사건에 대해서 마치 다 알고 있는 것같이 자신의 견해만을 옳은 해석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종말적인 년도를 말하지 않는다. 그런 시한부종말론은 언제나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상징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의미는 그 숫자의 실체를 추측하여 맘대로 단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서는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을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 이후에는 상징적이며 비유적인 개념으로 3년 반이라는 기간은 종말적으로 적그리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통치를 하는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 기간이 장차 언제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또한 반 이레가 그 기간인지에 대해서도 단정하기 어렵다. 성경은 때와 기한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만의 고유한 권한을 인간이 상상하고 추측한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다니엘서의 다른 숫자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본문에서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칠십이레에 대해서 어느 특정한 단위의 기간이라고는 보지만, 정확히 490년을 뜻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70이레 혹은 2300 주야등과 같은 상징적인 숫자에 대해서는 날()로 해석하는 방법, ()으로 해석하는 방법등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년도를 종말론적(재림, 휴거등)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시작점을 인위적으로 맞추려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굳이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서 9:2 칠십년은 메시야의 등장을 나타내는 칠십이레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유대인의 포로생활이 70년 만에 끝난다는 예언이다. 만약 다니엘서 9장이 하루를 일년이라고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면, 70년은 25,550일이므로 25,550년으로 해석하여야 하지 않는가? 만약 하루가 일년이라면 92절의 70년도 비유적으로 70일 혹은 십이레라고 기록되어야만 한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깨닫고 기도하기 시작한 때(3-19) 1절에 의하면 B.C. 538(537)경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된 때(B.C. 586)로부터 약 50년이 경과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이 고레스 원년인 B.C. 536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비추어 이 칠십 년의 최초 시점은 예루살렘 멸망 때가 아닌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때인 B.C. 605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장은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 25:11, 12;29:10)을 깨달은 다니엘의 동족의 회복을 위한 통회의 기도(1-19)와 칠십 이레의 환상(20-27)이 기술된다. 즉 칠십이레는 가브리엘을 통하여 전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것이 본질적인 멧세지가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다니엘서의 단어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해석하여 현재로 적용시키고 마치 종말이 곧 오는 것처럼 해석하는 이단들을 각별히 조심하여야만 한다. 그들은 마치 성경에 감추어진 비밀을 자신들이 계시를 받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성경 짜맞추기로서 교인들을 미혹하려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극이며 그들의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