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 2월 07, 2019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평이협 이인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사람은 그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류를 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가 중단되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육체적인 죽음과 함께 영적인 단절을 뜻한다.

성경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공동체에게 멧세지를 전달하여야만 하였는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얼굴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사사, 선지자등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전하여 왔다. 때로는 불꽃이나 구름기둥, 불기둥과 같은 자연적인 모습이나 혹은 천사나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셨다.


1)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딤전1:17)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6:16)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33:11)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구절이 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24:9-11)


그러나 자세히 성경을 보면 본문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는 구절은 없다. 오히려 발 아래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모세의 경우를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 율법을 받으며 함께 6일을 지냈는데, 그도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33:21-23)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영이신 하나님에게 얼굴 혹은 이라는 표현은 신인동형어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곧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22:4)


2)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도 죽는다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는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5:25-26)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4:33)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19)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는 불과 몇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이 곧 사사, 선지자등이었으며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소수의 지도자들이었으며, 그들이 곧 성경의 저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에게 음성을 들었던 저자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3)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현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는 선지자나 사사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가 있었을까?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본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의 사자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3:2)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4-5)


또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술길 샘물 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는데, 하갈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6:7-9)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6:13)


물론 이러한 성경적 기록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천사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과 인격을 통한 대리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무도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인식이 가능한 천사를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시하시며 멧세지를 전하신다. 즉 하나님의 인격성은 천사의 사역을 통하여 확증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여호와의 이름)이 그에게(사자에게) 있음이니라“( 23:21)


때로는 하나님은 구름과 폭풍, 번개 불등으로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15:17, 3:2-6. 13:21, 19:18-19, 24:15-18, 30: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연적인 형태와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며, 오히려 그러한 자연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하며, 천사와 자연물같은 대리적인 현현, 다른 형태의 현현을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은 모세, 이사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성경의 저자가 된다.

구약성경은 사사와 선지자들, 성경의 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곧 성경의 저자와 동등하다는 주장이 된다. 과연 어떤 연습이나 훈련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 곧 성경의 저자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


4) 성경이 최종계시이다.


옛적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곧 예수께서 최종적이며 완성적인 계시의 성취가 된다는 것이며,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곧 성경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1:1-2).


또 성경은 아들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데, 즉 아버지를 아는 통로는 오직 예수뿐이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2)


그런데 유명한 선교단체인 Y 전도단을 비롯한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러한 책들을 여러권 발간하고 있다. 기독교 서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책들이 수없이 전시하고 있으며, 그런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연습이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특히 예수전도단의 단기선교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육과정을 실시한다. 지금 하나님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하는지 각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하라는 과제를 내는데, 지금도 이런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의 교주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들의 주장은 항상 성경과 달랐으며, 그들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목적은 사사로운 정욕과 권세를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그렇게 가르치는 분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거짓말이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하여보라.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가?”


과연 훈련이나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성경적일까?

지금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이거나 혹은 환청이 들리는 사람일 것이다.

주로 이단집단의 교주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알며, 몰몬교와 이스람교가 천사를 만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주장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거나 임하였다고 하는 선지자와 신령한 자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한 편지가 곧 주의 명령이라는 권위있고 당당한 경고를 전달하고 있다. 그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신약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 14:36-37)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잘못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이라는 것은 곧 서신이었고 이것이 곧 신약성경이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3:14)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왜 성경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하며,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고 할까? 모든 계시의 기준은 성경이어야만 하고, 그렇다면 성경이 존재하는 지금에는 계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그 계시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검증받는다면, 다른 계시가 왜 필요하며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물론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볼 수 있으며,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하여 들을 수 있으며, 믿음의 선배가 되는 선조들의 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볼 수도 있다. 또한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령의 조명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으며,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 경륜과 섭리를 느낄 수도 있다. 필자가 그러한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에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예민하게 죄의식을 느낀다든지, 또 먼저 하나님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등은 성령의 감동과 조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세가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곧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령의 감동과 조명을 통하여 구하라 또는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면, 그러한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혹은 훈련과 연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러한 주장은 성경이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와 같은 주장은 자신이 곧 선지자나 사사와 같이 하나님이 택하신 신령한 자라는 뜻이며, 그 주장은 곧 자신의 주장이 성경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갖게 된다는 뜻과 같으므로 매우 위험한 주장이 된다. 그러한 주장은 지금도 계속 성경이 기록될 수 있다는 뜻이 되며, 성경의 최종성과 성취성을 부정하게 된다. 오직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신앙적 기준이 되고, 성경말씀으로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성된 계시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케 하시고, 보존케 하시고, 전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있다면 더 이상 성경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성경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가르치는 곳이 될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사도바울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7-9)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으며,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한다고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1:1-4)


사도요한이 말하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우리(사도)의 말을 듣는 자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게다가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계시록에 대해서, 그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거나 감하는 행위에 대해서 무서운 저주를 선포함으로서, 자신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당히 선포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22:18-19)


예언자학교를 운영하는 미국 아이합의 마이크 비클은 2011 3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크 비클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들었던 것은 단 한 번뿐이며, 그것은 기도의 집을 하라라는 말씀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마이클 비클은 다른 책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며 어느 것이 거짓말인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결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나는 문자 그대로 두려워 떨면서 울고 있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세대에 이 땅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표현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예언사역의 여정, 마이크비클, New Wine, 42)


– 1983 413일 수요일 저녁에 하나님과의 또 다른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적인 음성이 들렸는데, 이번에도 아주 명확한 음성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서 21일 동안 금식과 기도를 위한 거룩한 성회를 열라고 말씀하셨다”(같은 책, 54)


아침 이른 시간에 침대에 누워있던 마이크 비클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후에 밥존스 또한 그날 아침에 열린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초자연적으로 확증해주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10년 안에 열방에 성령의 포도주를 부어주기 시작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같은 책, 293)

마이크비클은 만나는 한국 목사들마다 앞으로 한국교회에서 귀하게 쓰임받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여준다고 한다. 그 상습적인 달콤한 말에 속아 마이크비클에게 아이합의 사상을 배워와서 교류를 계속하는 목사들이 많다.


예수전도단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다가 그 펜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온 데를 다 뒤졌다. 하나님께도 그것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고, 다 찾아 봤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전지하신 하나님! 당신은 그 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죠? 그리고 당신은 그 펜을 찾는 일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고 계시죠? 제게 그 펜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난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즉시 한 문장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사무실 화장실 안에 있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조이 도우슨, pp.13~14)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며,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펜을 찾는 일에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라면 조이도우슨은 신비주의자가 아니면 이단이 되어야만 마땅하다.

조이 도우슨은 신사도운동의 피터 와그너, 신디 제이콥스등과 함께 지역귀신에 의한 영적도해를 주장한 존 도우슨의 친어머니이다. 존 도우슨은 현재 예수전도단의 세계총재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내가 단순히 존이 줄리와 교제를 계속해도 좋을까요? 라고 물었던 것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 열왕기하 14장을 펴라고 하셨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 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9절을 읽으면서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그 후 몇 달 동안 남편과 나는 잘못 들은 것이면 바로 잡아 주시도록 계속해서 그분의 뜻을 구했지만 그 대답은 동일했다. “올바른 길이다” (조이 도우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35)

한마디로 기가 막힌 엉터리 해석이다. 열왕기하 14 9절은 전혀 다른 뜻이다. 본문은 딸을 주라는 뜻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읽고 조이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왕하 14:9)

성경 본문에서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하라는 것은 축복의 말이 아니라 저주와 조롱의 욕설이다. 비천한 가시나무는 유다를, 고급목재인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가시나무가 갑자기 교만해져서 백향목에게 딸을 달라고 하는 요구를 하는데, 결과적으로 백향목을 무시하는 요구이며, 들짐승으로 비유되는 레바논이 유다를 짓밟게 됨으로서 멸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요아스의 비유적인 조롱이 유다 아마샤의 화를 나게 하였고 거절을 하게되자 이스라엘왕 요아스가 유다를 치게 되어 아마샤를 포로로 붙잡게 된다.

과연 하나님이 결혼을 하게하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주셨다면, 그 결혼은 하면 안되는 것이다.

또 이런 내용도 있다. 과연 레위기 14:47이 그런 뜻인가?

– “사랑하는 하나님, 제 열쇠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는 법석대거나 걱정하는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영 가운데 말씀하셨다. “네 성경책에서 레위기 14 47절을 펴라 거기에는 이와 같이 쓰여 있었다.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니라. 당신은 아마도 아니 그게 뭐야. 그게 열쇠 찾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이 있다. 그것도 아주 대단히. 열쇠를 찾는 소동이 있기 전에 그녀는 빨래를 해서 개킨 뒤 식탁 위에 올려 놓았었다. 그러다가 식사하려고 그 위에 있던 것들을 침대 위에 갖다 놓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역사하는 말씀이 말하는 대로 침대에 가서 그 개켜 놓은 옷들을 다 들춰보았다. 바로 거기 열쇠가 있었다.“(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73-74)

레위기 14장 본문은 문둥병에 대한 규례로서 부정한 문둥병 환자가 있는 집에서 교제한 후에 그 처리방법을 언급한 정결의식에 대한 구약성경구절이며, 잃어버린 열쇠와 전혀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이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그 부분적인 구절만 인용하는 것은 이단들의 성경해석의 전용적인 수법이다.

또 예수전도단의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에게 5달러를 받고 심부름을 갔을 때에 돈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돈을 잃어 버렸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갑자기 어머니는 내 어깨를 꽉 쥐면서 로렌, 그 돈은 수풀 아래에 있다고 방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즉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고 나도 그 뒤를 따라서 뛰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아까 왔던 길을 찬찬히 밟아 가면서 수풀과 울타리를 뒤졌다. 어머니가 상록수들이 있는 길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멈춰 섰을 때는 너무 어두워서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저 나무 밑을 살펴보자. 어머니는 나무들이 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리는 나무 밑으로 가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그루터기 나무 아래쪽에 구겨진 5달러짜리 지폐가 있었다.(로렌 커닝햄, 하나님 정말 당신입니까? 24)

하나님은 로렌 커닝햄의 어머니에게 그 돈이 수풀 아래에 있다고 하셨는데, 결국 돈은 수풀에서 찾지 못하고 그루터기 나무 밑에서 찾게 되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Y 전도단에서 발행하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주님, 오늘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때 맞은 편 탁자에 한 젊은 여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님, 저 여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십니까?” 그때 주님의 응답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자는 만성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브래드 저삭, 89)

우리의 신앙적인 기준은 성경으로 충분하며 성경은 우리를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강요하는가?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기록된 성경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 성경의 저자들이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성경 외에 주관적인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필요한가? 그것도 어떤 훈련과 연습에 의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곳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