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이인규
많은 분들이 방언에 대해서 자주 질문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 교계에는 ‘은사중단론’에 대한 책이 등장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은사지속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갑론을박까지 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필자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은사중단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은사지지자나은사남용주의자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히며, 필자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필자의 주장이비성경적인 내용을 강조한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성경적인 내용으로 반박하여 주기를 바란다.
(1) 모든 보수적인 정통교단이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부 보수교단의 사람들 중에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든, 진보적인 신학을 가졌든, 모든 정통교단이 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마다 다르다.
어쨌든 성경은 분명히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현재 많은 한국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방언이 과연 고린도교회에서 있었던 그 방언과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필자를 포함하는 사람들은 방언을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이나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은사남용주의를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방언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록 그대로 하자는 것이며, 즉 순서를 지키며, 질서있게, 적당히, 하자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방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이것을 성경대로 지키는 한국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7-28).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전 14:40).
방언은 두 세사람이 순서대로 하여야 하며,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교회에서 방언은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더욱이 이 통역의 은사라는 것도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의 방언은 더욱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무질서한 방언의 남용은 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결론이 된다. 중요한 것은 방언을 한다고 하여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방언을 못한다고 하여 그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방언에 대해서 은사지속론과 은사중단론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중세에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명이 앉을 수 있느냐는 문제로 논쟁을 하거나, 간음을 한 여인을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을 때에, 예수님이 땅에 쓴 내용이 무엇이냐는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알 수 없는 문제로 서로 자기 견해만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문제가 되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메튜헨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은사와 교회의 질서 14:26-33
[1]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의 은사를 교회에 과시하려 하여 생긴 혼란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26절). “너희들은 예배의 각 부문에 있어서 혼란을 일으킨다“. 혹은 “너희들은 차례를 지키지 않아서 혼란을 일으킨다“. 이런 행동이 덕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 한다.
1)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함에 대해서는 한 예배에서 단지 두세 명만 하도록 지시하며 그것도 차례를 지켜 순서적으로 하라고 한다. 심지어 이것도 만일 통역이 따르지 않으면 하지 말도록 한다(27,28절). 만일 통역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 항상 잠잠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방언을 나누도록 지시했다(28절).
2)예언에 대해서는 ① 한 예배에서 두 명이나 세 명만 하도록 명령했다(29절). 여기에는 거짓 선지자가 있을 수 있으니 참된 예언자는 누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는지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②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동료 예언자에게 계시가 임하면 그 예언하던 자는 조용히 할 것을 명했다(30절). 새로 계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차례에 예언을 할 수 있다. 31절에 그 이유를 밝혔다. 모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예언을 할 수 있느니라. 신령한 예언은 이방인의 사제들이 마귀에게 사로 잡혀 난폭하고 무질서해지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반면에 근엄하고 침착하며 규율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은 계시를 전할 때 항상 정상적으로 자연의 질서와 법을 지킨다.
[3] 사도 바울은 이런 규칙의 이유들을 설명한다. 이것들은 교회의 유익과 교훈과 위로를 위함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감화의 결과가 오히려 혼란을 조장시켜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이런 혼란된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보는 이에게 하나님은 무질서하다는 개념을 심어줄 수가 있다. 이런 태도로써 혼란을 물리치고 질서와 화평을 심는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의 일들이 질서 있게 진행이 되도록 촉구한다. 영적 은사가 그토록 넘치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창피한 사실이 될 것이다.]
(2) 방언의 은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누구나 방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은사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마다 다른 은사를 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임할 때마다 항상 방언이 나타났던 것도 아니다. 원래 ‘은사’란 헬라어 ‘카리스마’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말한다. 은사란 일차적으로 두 가지의 개념을 갖는데, 하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즉 구원 자체를 말하며, 또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쓰도록 주시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은사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영적은사만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롬 6:23의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선물을 말한다. 은사(카리스마)의 다른 의미는 각 지체에게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베푸신 것인데, 영적은사란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님의 나타남”(고전 12:7)이며, 그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5. 14:26). 성령께서 여러 가지 은사를 각 자체에게 나누어줌으로서 공동체인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바로 은사이기 때문이다.
방언같은 눈에 보이는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며, 은사는 각 지체에게 주는 여러가지 형태 중에 하나일 뿐이다(고전 12:4-6). 은사를 주는 성령은 한분이지만, 각 지체가 받는 은사는 여러가지가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모든 교인이 다 동일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4-12).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8-30).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가 은사의 관문이라고 하거나 성령을 받은 가시적인 증거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은사가 있으며, 어느 특정한 은사가 순서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지체마다 주시는 은사가 다르다고 성경은 언급한다.
(3) 외국어로 말하는 것만이 방언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데, 방언의 은사란 헬라어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이며 그 의미는 ‘다른 방언으로(다른 언어로) 말하기’이다. 즉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처음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실제 사용되는 다른 지역의 언어를 말하는 형태였음이 분명하다(행 2:4-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 13:1)이라고 하였고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로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전 14:2)라고 하였으므로 오직 외국어만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전 14:2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라고 하였는데, 다른 지역의 외국어 방언은 그 방언을 알아 듣는사람들이 있으며, 또한 외국어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하는 비밀을 말하는 것이아니므로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사도행전과 다른 형태로 보이며, 그래서 방언은 두 가지의 형태로 추측되어진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한가지 음이나 몇가지 동일한 반복구절만을 발음하는 방언이 정말 방언이냐고 묻는 질문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속칭 “라라라 방언”에 대해서는 필자는 개인적인 견해로 진정한 방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 행해지는 모든 방언을 다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점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러한 동일한 음을 반복하는 방언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포함하여 타종교인과 어떤 사람들도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방언은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진 표적으로 기록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반드시 방언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엉터리 혹은 거짓방언을하는 사람도 거듭났다고 간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며, 방언 외에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4) 반복되는 훈련이나 연습에 의한 방언은 잘못된 것이다
은사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즉 어떤 연습이나 훈련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연습과 훈련에 의하여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연습으로 취득하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할렐루야’를 하루에 천번씩 연습하면 혀가 풀려서 방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도 있고, 방언을 하는 그룹과 방언을 못하는 그룹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연습을 하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한 방언은 분명히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이 전혀 없는 비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도 심지아 어린이들 조차도 이러한 연습에 의한 방언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습에 의하여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자기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지 확인을 하여 볼 필요가 있다.
(5)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교회의 은사의 남용에 대한 바울의 비판과 충고를 기록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은 그다지 어려운 구절이 아니며, 난해한 구절도 없다. 어느 누가 읽어도, 어느 성경주석을 참고한다고 할지라도, 그 구절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에서 행하여지던 방언의 은사에 대한 남용을 바울이 자제하도록 권면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분명하다.
즉 성경대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려면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방언의 형태는 상당히 자제를 하여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2-14장을 마음 문을 모두 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정독하여 보시면 바울의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고전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없는 은사는 어떠한 것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다.
또한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므로 덕 세움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2).
뜻도 모르고 하는 방언은 무익한 것으로서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며, 그 뜻을 자신도 모른다면 야만이 될 뿐이라고 사도 바울은 비평하고 있다.
방언기도는 나의 영으로 기도는 하지만,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기도가 어떤 응답을 받는 지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방언기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송, 즉 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송보다 비효과적일 수 밖에 없으며, 아멘으로 화답할 수도 없는 기도가 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6-17).
고린도전서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행하던 무질서한 방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자제하도록 권면하고 충고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지는 서신을 통하여 방언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하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도 방언이 남용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내용이 아니라고 비판을 받을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남용해도 괜찮다든지, 성경과 달리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행위가 아닐 것이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18-20)
방언의 은사는 은사 중에서 하위의 것으로서 다른 은사에 비하여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으로서(고전14:4) 모두 방언을 한다고 하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14:6)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즉 방언은 다른 은사와 다르게 교회에유익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교사가 가진 남을 가르치는 은사는 방언과 비교할 수 없이유익한 것으로서, 특히 방언의 은사는 성경에서 부분적인 은사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은사로 비교되어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진리를 자기의 기준에 맞춘다. 내가 방언을 남용하고 있으면,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하는 행동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내용이 분명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면 주일학교 교사는 젊은 영혼을 양육시키는 매우 중요한 직분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성가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성가대가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방언의 은사보다는 교사의 은사가 더욱 중요한 것임이 분명하다.
승용차가 없을 때에는 교통신호를 안 지키는 승용차를 욕하지만, 승용차를 갖게 되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입장이다. 이렇듯 이단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교회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며, 정통교회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나’라는 기준이 가치척도의 선입감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사전을 인용하여 보자.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방언의 남용에 대한 고린도전서 12-14장의 객관적인 성경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두었으며,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서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 쓸데없이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고 모본이 될 수 있도록 방언을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모든 고린도교인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헌신적인 생활이 더욱 귀중하며 방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통역은 아마도 단순한 번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표적이나 예언적인 행위들을 해석하듯이 방언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또한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에 세 사람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순서를 정해놓고 차례대로 하라고 가르쳤다. 방언은 성령의 부분적인 은사들 가운데 한가지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아가폐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그 두번째는(필자 주: 고린도전서의 방언) 고전 12-14장에 기록된 방언의 은사이다. 이것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로서 예언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사도바울 자신도 이 은사를 가지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것을 영적 은사의 최하위에 두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은사로서, 이성활동을 동반하고 있지 못하는데서 여러 가지 위험마저 있어서, 교회에 있어서는 지성으로서 말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질서를 지키고, 예배를 문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유익이 되는예언의 지적 은사를 상찬하고, 이에 반하여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운 방언의 은사를 경시했다. 시대의 추이와 함께 방언의 은사는 소실되었다(새성경사전, 하나성서)
물론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시대적이고 전통적인 상황까지 불문하고 반드시 문자적으로 똑같이 지켜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유대인들의 전통과 문화적인 제도까지 그대로 지키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기록된 것을 “도둑질 하여도 좋다”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화가 있을지라도, 도둑질을 하여도 좋다든지, 간음을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바울이 비판하는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지던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인 정리를 하여 보자. 필자가 말하려는 내용은 방언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성경대로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은사중단론자가 아니며, 성경대로 하는 방언을 정리하여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방언을 할 수 있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못한다고 구원을 잃는 것도 아니다. 방언을 한다고 하여 성령을 받은 외적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방언을 받지 않았다고 하여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는다. 첫째, 성경에서는 더 좋은 은사를 받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떄문이며, 둘째,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하여 모두 성령이 주신 진짜 은사라고 볼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짜 방언을 하였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유창하게 하였다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요즈음 같이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시대에, 성경적인 방언과 사도 바울이 비판했던 방언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것뿐이다. 물론 가짜 방언을 사탄의 역사라고 말할 필요까지 없으며, 진짜 방언과 거짓 방언의 여부를 제3자가 판단할 필요도 없다.
6) 방언에 대한 캘빈의 견해
(캘빈 기독교강요 3권 2장 9과)
[9. 고린도전서 13:2―‘형성된‘ 믿음과 ‘미형성된‘ 믿음의 차이에 대한 증거
그들은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는 바울의 말을 강조하는 습관이 있다. 그들은 이 구절로 인해 믿음과 사랑을 분리시킴으로써 믿음을 기형화했다. 그들은 사도가 이 구절에서 “믿음“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생각하지 않는다.22 그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과 능력과 예언 등의 다양한 은사들을 포함하여(고전 12:4-10)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해 논하고, 교회라는 몸 전체에 더 큰 은혜와 유익을 주기 위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고린도인들에게 권면한 후에, “제일 좋은 길“(고전 12:31)을 보여주겠다고 부언하였다. 이런 모든 은사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사들이 이러한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도덕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기독교강요 제3권 20장 33과)
[33. 기도는 일상 언어라야 한다
그러므로 공중 기도도 종래의 관습과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 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사랑이나 친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적어도 완벽하게 명확한 말을 한 바울의 권유에 조금이라도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그러므로 누구나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황한 기도를 장엄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그들 자신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다시 제시한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혀의 은사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知性), 즉 이해력을 분리시킴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 기도에서나 개인 기도에서나 이해력을 수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어서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 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내적으로 감동되는 힘이 충분치 못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너무 강력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일지라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의 감정이 고조되는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신체의 다른 부분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삼상 1:13). 모든 성도들이 항상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터져 나온다. 기도할 때에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께 대한 공경을 더욱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존 캘빈은 무분별한 방언의 남용을 비판하고 자제할 것을 경고하였음에 분명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캘빈은 개인기도를 위하여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7) 방언은 사탄의 역사인가?
물론 타종교나 신비주의적인 종교에서 행하여지는 방언을 성령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간 사람들은 방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며, 사탄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 역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은 방언을 금지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방언이 진짜 방언이냐 거짓 방언이냐는 논란은 있을지라도 무조건 방언자체를 금지하라고 하거나 사탄의 역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어느 성도가 대표기도를 외식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하였다고 하여, 그 기도를 사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항상 모가 아니면 도라고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8)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8-10)
본문에서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이 무엇일까? 온전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볼 때에 부분적인 것은 예언, 방언, 지식등의 폐하여진다고 하는 은사가포함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은사가 부분적이라고 언급되었다고 보여지며, 나아가서는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지식에 대하여 은사는부분적인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온전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해석에 따라 사랑의 완성일 수도 있고, 예수의 재림일 수도 있으며,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지식이 될 수도 있다. 혹간은 성경의 완성이라고 말하는데, 그 답변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11절에서는 어린아이와 장성한 믿음을 비교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온전한 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경은 예언, 방언, 지식의 은사를 부분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으며, 고전 13장12절에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방언, 예언, 지식과 같은 은사는 부분적인 것으로서 폐하여질 수 있다는 것이며,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은사는 영원하며 온전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일부 영적은사라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며, 폐하여 질 것이며,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방언 만마디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아도 남을 가르치는 다섯마디가 더 낫다고 고전14:19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것이지,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고 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방언을 잘 한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구원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9) 성경적인 방언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권면하는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성경을 두 세번만 정독하여 읽어보면 누구든지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방언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이 주신 은사 중에 한가지이다.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도들은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하며, 특히 교회라고 하는 공공체의 유익을 위하여 지체가 되는 우리들은 그 은사를 활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분명히 비성경적으로 남용 되어지고 있으며, 모든 은사가 실제 성령께서 주신은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스스로가 은사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방언에 대한 많은 논리가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방언의 은사는 다른 많은 은사 중에서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는 함께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방언을 금하지 말라. 만약 그 방언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적인 도움을 갖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을 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무질서하게 행하여지는 방언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것이지만, 방언을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또 방언을 한다고 하거나 방언을 못한다고 하여, 구원과 관계가 있는 본질적인문제가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1)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하라(14:3-5).
(2) 너희가 다 방언을 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14:5).
(3) 통역이 없이 방언을 말하면 유익하지 않다(14:6).
(4)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14:7-9).
(5)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야만이 된다(14:11).
(6) 방언의 기도는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가 된다(14:14).
(7)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가르치는 것이 낫다(14:19).
(8) 방언은 믿지 않는자들의 표적이다(14:22).
(9)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자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미쳤다고 할 수 있다(14:23).
(10)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하라(14:27).
(11) 순서를 지켜서 하되,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이며, 통역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며,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라(14:28).
(12)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는 말라, 그러나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여야 한다(14:40).
(13) 사랑이 없는 방언은 꽹가리일 뿐이다(13:1).
(14) 부분적이며 폐하여질 것이다(13:8-10).
(15) 장성한 사람에게는 어린아이의 시절의 것이 된다(13:11).
(16)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17)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주는 수많은 은사 중에서 하나의 은사이다(12:4-11).
(18) 모두 다 방언을 말하지 않는다(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