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정동섭 교수 /가족관계연구소장, 사이비종교피해자대책연맹 총재, 한동대 외래교수
구원파는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사이비기독교운동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이단집단이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단운동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파는 미국과 네델란드 등지에서 파송된 자칭 선교사들에 의해서 수입된 이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구원파는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세 계열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세 분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원파 분파현황
세칭 구원파는 크게 유병언(권신찬) 계열, 이요한(본명 이복칠) 계열, 박옥수 계열 등 3개 파로 분류할 수 있고, 윤방무(Peter Yoon), 서달석 등 유사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인사와 무리들이 다수 있다.
1) 유병언, 권신찬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오대양 사건과 ㈜세모, 녹색회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병언과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모든 구원파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권신찬(1923~1986)은 예장 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네델란드 자칭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길기수: Case Glass)의 영향으로 1961년 11월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아 목사면직을 받은 인물이다.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장인사위의 관계를 맺었다. 유병언은 박옥수와 함께 1960년대 초 외국인 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6개월간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으나 1963년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구축, 1969년부터 1981년까지는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71년 서울 약수동 성동교회에서 구원파의 교리에 미혹된 선교사 3명과 한국인 목사 2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1981년 11월부터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거듭남, 죄사함, 복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에 미혹된 미국국제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현 극동방송을 설립한 선교단체)는 유병언을 극동방송 부국장에 임명했고, 그의 장인 권신찬을 방송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권신찬은 1969년부터 1974년 극동방송국에서 쫓겨나기까지 <은혜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기존교회의 “예배행위, 십일조 헌금, 장로집사 제도, 새벽기도,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등을 종교로 규정하고 “종교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교했다. 정통교단은 그의 이단사상에 항의하여 극동방송 청취거부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팀선교회는 1974년 구원파 소속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였다.
권신찬은 사위 유병언을 “하나님의 입”이라며 신격화하였고, 교인들은 유병언을 ‘모세’에, 권신찬을 ‘아론’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병언은 교제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며 1974년 ‘삼우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인수,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하면서 교인들로부터 “사장”으로 추앙받았다. 1980년대에는 ㈜세모라는 이름으로 스쿠알렌, 컴퓨터, 조선, 유람선 등의 사업에 전념하였다. 오대양 사건과 연관되어 4년을 복역하고 나온 후에는 유 회장으로 통하고 있다.
유병언은 “우리는 천국의 스파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유병언은 자신을 ‘자선사업가, 새마을 운동가, 환경보호운동가, 권투프로모터’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위장술에 뛰어난 유병언은 1982년 자연보호운동을 기치로 내세우며 한국녹색회(회장 정윤재)라는 단체를 만들어 2002년부터는 경북 청송군 현서면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여 집단촌을 형성하여 환경친화적인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이른바 ‘청녹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송군민들은 “한국녹색회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송 외에도 유병언은 안성과 제주도에 농장을 운영하면서 폐쇄적인 집단생활을 유도하고 있다.
현재 유병언은 매주 토요일 안성농장에 있는 선교센터에서 주로 종말론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아들 유혁기에게 설교연습을 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건강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장세척 기기를 팔고 교인들에게 “인샤워, 인클린”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 이요한(이복칠)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은 중학교 졸업 후 6.25 동란 중 대구임시신학교에서 권신찬에게서 사사받은 것이 교육배경의 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파 초창기인 1960년대 중반부터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71년에 권신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전남 목포에서 ‘평신도복음전도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며 정통교회를 비판하고 시한부종말론을 설교하였다.
1974년말 유병언은 부도위기에 놓인 삼우트레이딩을 매입하여, 교인들의 헌금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이요한은 1983년 교회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사업으로부터 “복음을 수호한다”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요한은 유인물을 통해 유병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으며 귄신찬은 유병언을 옹호하고 나섬으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유병언 측에서는 이요한을 집단 구타해 대전에서 5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요한은 “교회와 사업은 분리되어야한다”는 성명을 내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설립하였다. 1995년에는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에 1천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여 서울중앙교회라는 간판아래 활동하고 있다.
정통교회와 달리 일정한 예배형식이 없고 집회식으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씩 성경을 강해한다. 저녁에는 예배대신 교제를 나누면서 각 부서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 모여 교육도 받고 서로의 얘기를 나눈다. 1년에 4차례 “성경강연회”를 가지며 1년에 한 번은 공주에 있는 갈릴리수양관에서 전체수양회를 갖는다.
예배형식과 기도 등 정통교회를 흉내 내고 있으나 십일조와 기타 연보, 기도, 예배를 율법과 종교로 간주하던 그의 스승 권신찬의 근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 100여개의 지 교회를 두고 있으며 4만 명의 추종자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요한 계열은 금전적으로 무리해서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탈자들이 전하고 있는데, 수십억 공사를 하고 “은행융자의 원금은 갚지 않아도 된다. 주님 재림 때까지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자만 갚으면 된다”는 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고 한다.
정기간행물로 월간지 <생명의 빛>이 발행되고 있으며, 포교를 위해 진리의말씀출판사와 영생의말씀사를 운영하고 있다.
3)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기쁜소식선교회: IYF)
박옥수는 경북 선산군에서 1944년 6월 출생하여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후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의 금오산 집회에서 감화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1962년 10월 7일, 내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진 것이 믿어진 그날,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눈처럼 희어졌다고 믿어진 그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저에게는 그날이 1962년 10월 7일 새벽이었습니다”라고 박옥수는 고백하고 있다.
그 후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합천 산골에서 훈련을 받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1968년 전역 후 김천에서 전도하기 시작, 딕욕 선교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대구 계명대 앞에서 중앙교회라는 간판아래 활동하다가 1980년대 말에 활동무대를 대전으로 옮겨 한밭중앙교회를 담임하다가 2005년 서울 서초동 양재동에 있는 기쁜소식강남교회를 중심으로 IYF와 기쁜소식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4ㆍ19 혁명 직후 딕욕 선교사는 대구로 와서 YWCA홀을 빌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도집회를 하면서 삼덕동에 있는 일식집 하나를 빌려 선교학교를 시작했는데 박옥수는 이 선교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 딕욕이 한국을 떠나면서 박옥수가 선교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고 한다.
1983년 기쁜소식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는데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 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세력과시를 하며 성경강연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쁜 소식>이라는 정기간행물이 있지만 MBC·SBS와 같은 방송은 물론 조선·중앙·동아일보와 같은 일간신문을 통해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있으며, 월간중앙·월간동아 등에서는 박옥수 목사를 영향력 있는 기독교지도자인 것처럼 대담기사를 게재한 적도 있다.
박옥수는 최근 국제청소년연합(IYF)이라는 묘한 단체를 만들어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침투하고 있다. 전 세계 35국에 지부와 회원을 두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영어말하기대회, 창조과학세미나, 영어교육, 컴퓨터교육, 연극교육, 자원봉사자모집, 사진전시회 등으로 교묘히 위장하여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2001년 초 사단법인으로 등록이 되었고, 특히 이들이 매년 주최하는 “IYF세계대회”는 MBC·조선일보·YTN 등 일반 주요 매스컴에 소개된 바 있다.
2. 구원파의 공통적인 문제점과 차이점
위의 세 계파 지도자들은 모두 자칭 독립선교사인 딕욕과 길기수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로서, 기존 정통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본전제 아래,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성경을 우화적, 풍유적으로 억지로 해석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세 계파는 모두 하나님관(신관), 인죄론, 구원론, 종말론 등 모든 분야에서 성경과 정통 기독교의 범주를 이탈하고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이들이 모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모두 고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지녔으며,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극단적인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입각해 성경을 영해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던”(딛 1:11) 할례당과 같은 이단집단으로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그 사상과 교리, 그리고 행위로 주님을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딛 1:16).
이들은 정통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합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으로 접근하여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에 회의를 갖게 한 후에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하는 접근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또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칭의론은 “교회가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는 항목”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적이고 기독교적이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은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통과 이단의 차이는 일단 이 교리를 수용한 이후에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드러난다. 이단은 기본적으로 이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내적 일관성 없는 모순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는 “교회가 서게 할 수도 있고 쓰러지게 할 수도 있는 교리”다. 기독교의 성패가 이 교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칭의(稱義)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총족되었다고 죄인에 대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이다(벌코프, 765). 칭의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죄인에게 언도를 내려 그의 신분이나 상태를 바꾸어주는 법적인 행위이다. 이를 테면, 재판관이 재판 때 무죄를 선고하면 그 죄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분의 상태가 변하는 것이다.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구원파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을 힘주어 가르친다(롬 3:24). 문제는 구원파에서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인간 속에 존재하는 물질과 같은 그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악으로 뭉쳐졌기 때문에…나 자체가 죄악덩어리라는 것”이다(박옥수, <회개와 믿음>, p.166).
“죄 덩어리인 여러분이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박옥수).
정통 개신교회에서는 죄를 관계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신, 반항,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구원파의 칭의론은 죄사함을 깨닫는 순간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 구원파의 여러 계파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 정통교회의 제도(장로/집사)와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를 무시한다. 종교와 복음,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여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권신찬이 “이미 기록된 말씀을 계시에 의해서 깨닫는 것”, “내가 깨달은 진리”, “죄사함을 깨닫고”, 유병언이 “복음을 깨닫고”, 이요한이 “중생을 경험하고”, 박옥수가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을 모두 같은 뜻으로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유병언은 “몇 대째 장로교인으로 율법에 얽매인 종교생활을 하다가 1962년 4월 7일에 복음을 깨달았다”(영혼을 묶는 사슬)고 고백하고 있다. 이요한은 “‘영접한다’즉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거나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말씀을 듣고 그 모든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흘리신 피로 나의 죄를 영원히 정결케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믿는 것”(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p.2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권신찬은 “깨닫는다는 것은…말씀에 의해서 죄가 해결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인류역사와 하나님의 사랑>, p.43)고 쓰고 있다. 권신찬은 또 “진리를 깨닫고 죄가 해결되면 영이 살아나는데 그것이 영의 구원이며 거듭나는 것이며 양심의 해방인 것이다”고 주장한다(세칭 구원파란?, p.24.).
따라서 이들은 한결같이 “복음이 믿어졌다”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데, 의지적인 결단으로서의 믿음이 빠져있다는 것이 이들의 깨달음 교리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정통교회에서 “주님을 따른다. 믿기로 결심했다, 영접했다”는 등 적극적인 선택으로서의 믿음을 말할 때, 이들은 “깨달았다, 믿어졌다”는 식으로 수동적인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파의 문제는 죄를 잘못 이해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옥수는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지 않고 죄와 범죄를 구분해서 설교하고 있다. 박옥수가 말하는 죄란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원죄와 자범죄 모두를 포함한다(내 죄벌이, p.143). 그는 오히려 죄와 범죄를 구분한다. 다른 말로 죄와 범죄는 죄와 죄의 증상으로 구분한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I, p.34, 36). 그는 원죄가 인간의 실존을 지배하는 힘 있는 세력임을 모르고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인간을 죄의 종, 사탄의 종으로 표현한다(내 죄벌이 중하여, p.160).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I, p.37)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죄가 흐르고 있다고 표현한다(내 죄벌이, p.2020). 원죄와 자범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 같다. 원죄란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의 삶을 옭아매며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범죄 하도록 만드는 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자범죄는 이 힘에 의해서 범한 악행을 의미한다.
박옥수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죄악 덩어리라는 것이다. “나는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과 죄의 근본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37).
“우리는 죄악 투성이 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죄의 나무이며, 죄의 자식이고 죄의 씨여서 아무리 스스로 깨끗하게 하려고 해도, 죄를 안 지으려 해도 안 됩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I, p.38).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세 계파의 구원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우리의 죄는 존재론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깨닫는 순간에 죄인이 죄 없는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첫 번째 단계인 중생의 체험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통하여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서적인 믿음, 즉 구원받게 하는 회심은 지·정·의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받는 믿음에는 복음진리에 대한 인식(awareness)과 지식적인 동의(mental assent), 그리고 의지적인 위탁(trust/commitment)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파의 구원론(칭의론)에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위탁으로서의 믿음(신뢰)이다. 구원파의 구원관에는 회개와 신뢰(믿음)이 빠져있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시대로부터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해 온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 지도자들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구원은 전인격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을 접하는 것이라고 한다. 워치만 니의 삼분설에 영향을 받은 권신찬은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며 인격의 일부인 이지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양심의 해방, p.9).
이요한은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깨닫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p. 81)라고 그의 구원관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피 흘리셔서 다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인데, 여기 하신 일, 무슨 일을 하셨어요? 예,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나중에 성경 들여다보니 그게 구원이잖아. 성경 들여다보니 아 그걸 깨달을 때 거듭났잖아. 또 들여다보니 아 그걸 깨달을 때, 믿을 때 성신이 왔잖아.”
박옥수에 의하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실 그때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표가 안 나고, 여러분은 몰라도,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여러분들의 죄가 씻어진 것을 보시고 ‘이젠 됐다’ 하시면서 ‘너희는 의롭다. 다시는 정죄하지 아니한다. 이제는 너희 죄를 기억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2, p.146)라고 설교하고 있다.
이어서 박옥수는 말한다.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아들의 죽음이 우리의 죄가 사해져서 의롭게 된 걸 보시고,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의롭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2, p.147).
박옥수는 심지어 “성경에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여러분, 아무리 유명한 부흥목사의 이야기라 해도 성경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 기쁜소식사, 1993. p.50).
박옥수는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회개가 우리 죄를 씻어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놓은 구원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다. 성경을 바로 증거 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
성경은 계속해서 죄 사함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설교하고 있다. 누가복음 24:47에서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되어 있다.
박옥수는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요한일서 1장 8~9절은 구원파 교주 박옥수의 말에 정면으로 논박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요한일서는 이미 죄 사함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써 보낸 편지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죄 없다하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 자백(confession)은 고백, 시인, 그리고 회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죄들(sins: 박옥수씨가 말하는 범죄들)을 회개하고 자백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박옥수씨는 자기의 교리에 부합하는 구절만을 골라 보기로 한 것이 틀림없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행 5:31) 예수님을 구주로 삼았다고 설교했고,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설교했다.
그래서 권신찬은 1973년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전도대회에서 죄사함을 깨달으라고 설교하지 않고,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영접하라”고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했기 때문에 “빌리 그래함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구원파에서 깨달음을 강조한 것은 부분적으로 옳다. 사실 우리는 구원받은 사실을 알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깨달음을 의지적인 결단과 순종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더구나 구원파 교인들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큰 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깨달음이 아니다.
구원파는 피동적인 깨달음을 강조하고, 정통교회와 성경은 능동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결국 죄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정통교회에서는 죄를 개인적인 탈선과 반발의 행위, 적대적 마음의 태도, 악하고 파괴적 세력, 영적으로 죽어있는 정죄 받은 상태, 불신, 전적 부패 등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구원파에서는 죄를 정죄 받은 상태로만 이해하고 있는데서 잘못된 구원관이 파생되고 있는 것이다.
2)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구원파는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깨닫는 순간에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
권신찬은 “회개란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는 특이하고도 엉뚱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임박한 대환란, p.145). 박옥수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책에서 “참된 회개는 내가 거짓말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 살인했습니다”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의 씨임(죄덩어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p. 166)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 회개는 의지의 작용에 의한 죄로부터의 방향전환이다. 그런데 구원파의 구원관에 빠져있는 것이 바로 죄에서 돌이킨다는 의미에서의 회개이다. 박옥수는 “신앙은 내가 할 수 없고 예수님이 하는 것이다”(p.223)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다,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3) 구원받은 날짜를 강조하는 것도 세 계파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박옥수 이단의 가장 큰 맹점이라 할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구원받기 위해서, 즉 거듭나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 없고, 성화를 위해서도 회개가 필요 없다는 회개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박옥수 씨는 죄 사함을 강조함으로 참 기독교를 흉내 내고 있지만 회개의 복음을 부정하는 사이비기독교 이단인 것이다.
사도바울도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모습에 비통해 했고(롬 7:24), 다윗도 자신의 죄를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삼하 24:10; 시 32:5). 저들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받으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구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없다는 이 한 가지 주장만 보아도 박옥수의 무리는 이단이 확실하다 할 것이다(총회출판국, 1994, p.82).
박옥수는 구원받은 날짜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명확히 기록되는 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 바울도 일정한 날짜에 구원을 받지 않았는가? 구원받은 날짜를 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박옥수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죄 사함 받는 날이 여러분에게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날이 없으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늘 어두운 죄의 그림자가 막혀 있어서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임할 수 없습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34). “오늘이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명확하게 기록되는 날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이 되어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같은 책, p.220).
박옥수는 구원받은 날, 죄 사함 받은 날, 거듭난 날을 알아야 구원받은 자요, 알지 못하거나 머뭇 머뭇거리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 계파의 구원파에서는 모두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파의 유병언과 이요한, 그리고 박옥수가 1961년이나 1962년 특정한 날짜에 죄 사함을 깨닫고 구원함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는데, 이들의 회심의 경험이 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중생의 경험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권신찬은 “당신이 거듭난 그 날짜를 잊어버린다 해도 그날은 꼭 있어야 할 것이다”(종교에서 해방, p.75)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그 날짜를 알아야 한다고 구원 간증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당신은 확신이 없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확신을 갖고 확신을 누려야 한다”(롬 7:1~8:4 강해, p.296).
구원파는 전도 대상자가 정통교회 교인인 경우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 다음 과거의 교회생활이 헛된 종교생활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그리고 여러 성구를 통해 강한 죄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 영원한 속죄(죄 사함)에 관계되는 성경구절을 읽게 해 죄 사함을 깨닫게 함으로 확신을 안겨 준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그대로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방법을 달리한다. 개인전도나 5~7일 동안 계속되는 ‘성경강연회’나 ‘성경세미나’를 통해서는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정세와 환경오염(공해), 인구 폭발, 기아 등 긴박한 시사문제를 거론하여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가는 시사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박옥수 씨는 시사문제를 다루지 않고 죄와 죄 사함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듣는 이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려 한다.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강연 제목은 그들이 대규모 수양회 집회 때마다 즐겨 쓰는 문구다. 그들은 세계종말을 시사하는 신문, 잡지 기사를 수록한 각종 ‘스크랩 북’을 동원하여 대환난과 예수 재림의 임박함을 강조해 전도대상자에게 공포의식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유도한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원 구절’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 양심의 평안과 자유함을 경험하게 한다. 이들은 ‘영원한 속죄’와 죄 사함에 대한 구절로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는 문제가 아니고 죄 사함을 수동적으로 깨닫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도대상자 중에는 강한 죄책감과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여러 해 고민하는 이도 있고, 임박한 대환난에 대한 거듭된 설교를 듣고도 확신이 서지 않아 ‘구원 노이로제’에 걸린 채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정통교회에서도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성령의 책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깨닫는 심각성의 정도가 다양함을 인정한다. 어린이와 어른의 감동이 다르고 기질에 따라 죄책감을 경험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죄책감의 정도가 심각해야만 소위 복음을 풀어 그들의 구원 공식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준다. 성령은 또한 구원파 교회에서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꼭 같은 구원 간증을 해도 그들의 교제권 안에서 깨달아야만 ‘구원받은 형제, 자매’로 인정함을 받는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 풀러(Fuller) 신학교의 종교심리학 교수 사무엘 써더드(Samuel Southar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 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된다”(<회심과 크리스챤의 인격>, p.11).
요한이나 빌립·안드레·루디아 같은 이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던 예로 생각할 수 있고, 바울이나 삭개오·빌립보 간수 같은 이는 문자 그대로 극적인 회심을 한 예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죄인이 응답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미 이루어 놓은 구원(=죄 사함)을 깨달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겠지만, 독자들을 위해 영국 피터 제프리(Peter Jeffrey) 목사의 설명을 인용한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당신은 성령께서 당신의 죄를 책망하셨을 때, 당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고(눅 15:17~19), 회개하고(행 2:38), 믿고(행 16:31),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요 1:12), 그리스도인이 된다. 우리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과정을 흔히 회심(回心: conversion)이라고 부른다.”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물건처럼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확신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 여부가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 한 일이 없다(히 6:1~2). 구원파의 구원이 참 구원이라면 왜 정통교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자매들과 교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구원파 소속 교인들은 한번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구원은 구원파 만의 전매특허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성령의 책망에 의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와 같이 거듭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온다. 본인이 번역한 <그리스도인의 첫걸음 내딛기>(두란도서원 간)에서 저자 피터 제프리(Peter Jeffrey)가 분석한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깊은 종교적 배경을 갖고 생활하다가 극적으로 갑자기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날짜에 구원함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빌립보 간수처럼, 전혀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고 극히 세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게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이가 있다. 즉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만나 주신 경우다.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 오랫동안 하나님을 찾고 있다가 아무런 극적인 변화가 없이 조용히 마음 문이 열려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디모데와 같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나 항상 성경을 알았기 때문에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나 주님과 풍성한 관계를 누리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일정한 공식을 따라 구원받아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는 영국 웨스트민스터교회(Westminster Chapel) 로이드 존스(Lloyd-Jones) 목사님은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고집하는 이단들의 주장에 이렇게 논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의 출생(거듭남)이 극적이고 흥분된 것이었느냐, 아니면 조용히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정확한 순간을 대고 사용된 성구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교자의 성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 단 한 가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에베소서 강해, <영적 연합>,p.88).
베드로와 안드레·삭개오·바울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난 날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는 분명히 어디서 어느 때에 주님을 만났는지 말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디모데처럼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이들 중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사모님이나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님처럼 그날과 장소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은 언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발을 들여 놓았는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p.222).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했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과 생활로 증거하고 있는 크리스천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정확한 시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든 못하든, 그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 뛴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 밤이 변해 낮이 되는지 정확한 시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낮이 되면 낮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p.225).
한국 교회는 왜 구원파의 세 계파를 모두 이단이라고 규정했는가?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경관, 신관, 인간관, 구원관, 기도와 예배관, 교회관과 종말관에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교회사와 조직신학, 성서해석학에 대해 무지한 구원파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적으로 억지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원파의 세 계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초월성은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성과 임재성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나 인성은 격하시키며, 죄 사함의 은혜는 강조하면서 율법의 교훈은 무시한다. 피동적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강조하지만 의지적인 회개와 인격적인 신뢰(믿음)를 배제한 구원은 기도와 찬양을 소홀히 취급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적인 믿음(faith)에는 신뢰(trust)와 확신(belief)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구원파의 믿음에는 지식과 이해와 깨달음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헌신이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임과 교제를 강조하여 자신이 속한 교회가 유일한 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자파 교회에 붙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들림을 받는다는 극단적 세대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유병언과 권신찬과 이요한(이복칠) 계열은 극단적 세대주의 사상에 입각해 시한부종말론에 가까운 종말위기위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풍유적 성경해석으로 (원)죄와 범죄, 회개와 자백을 구분하여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회개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박옥수는 구원지상주의자로서 종말에 대하여 거의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유병언 파에서는 ㈜세모, ㈜한우리유통, 녹색회 등 사업체를 하나님의 일이라 하여 교인들로 동참하게 하고 있으며, 이요한 계열에서는 교회 내에 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고, 박옥수 측에서는 ㈜운하의 이름으로 “또별”이라는 제품을 암이나 AIDS치료제인 것처럼 판매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바, 구원파는 종교를 빙자해 상습사기를 치고 있다는 공통점을 드러내고 있다.
구원파의 3분파는 그 신관이나 구원관에서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2). 따라서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한 결 같이 구원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칭의) 구원을 받고 있으며(성화), 구원을 받을 것이다(영화). 그러나 구원파의 구원에는 성화과정의 구원이 빠져 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이미 의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세 계파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기도와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경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병언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측은 아예 기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 이요한 박옥수 측에서는 간혹 기도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권신찬은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 역사상 신령한 생활을 한 분 중에 새벽기도를 해서 그렇게 된 분들의 예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 기도를 해라, 해라, 해서는 안 된다. 새벽기도는 필요 없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 없다.” 유병언은 “기도란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서, “진정한 기도는 성도의 교제로부터 시작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기도이며 예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박옥수, 이요한 측에서는 대표기도를 한다든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을 받게 하려고 전도대상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가 있으나 새벽기도, 철야기도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특징이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키 위해 기도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구원파에서 주기도나 축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하고 기도하면, 의인이 죄가 없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교리에 저촉되기 때문에 이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거나 중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사랑과 경배의 대상으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성향은 하나님을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역사를 운행하시는 이신론적인 영으로, 예수님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원자로 믿은 신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음성가나 찬송가 앞부분에 나오는 경배찬송을 거의 부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찬양이 아니다)은 죄사함과 구원, 그리고 교회를 주제로 한 찬송일 뿐 경배와 삼위일체를 주제로 한 찬송은 거의 부르지 않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라 할 것이다.
구원파는 표면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지만 우화적이고 풍유적인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강조하지만 사실상 교주가 강조되고, 정통교회의 바른 교훈보다 교주의 깨달음에 근거한 다른 복음을 강조한다.
박옥수 씨를 비롯한 구원파 지도자들은 모두 체계적 신학을 연구한 적이 없는 돌팔이 또는 사이비 목사들이다. 무식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멸망의 복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벧후 3:16). 그들은 자칭 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사상을 물려받아 정통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일단 죄 사함을 받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크게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는 정통침례교가 주장하는 구원, 거듭남, 죄 사함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순진한 성도들이 미혹되기가 쉽다. 순진한 양들은 이단에서 성경용어를 표리부동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파는 진리와 흡사한 거짓을 전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고 사특한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박옥수 씨(자칭 목사)가 주도하는 구원파 대한예수교침례회는 정통 침례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이비침례교이며, 회개를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이단이다. 그들이 발간하는 월간 잡지 제목 ‘구원의 복음과 은혜의 간증을 전하는 <기쁜 소식>’은 실제적으로 분석해 보면 성경적이지도 않고, 역사적인 기독교의 복음과 많은 면에서 상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이비 ‘복음’이며 사이비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은 잃어진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따라서 죄사함과 거듭남과 구원을 전한다면서 다른 예수, 다른 의미의 구원, 성화가 빠진 구원을 전하는 박옥수, 이요한, 유병언이 이끄는 세 집단은 가장 사특하고 위험한 이단이라 할 것이다.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경관, 신관, 인간관, 구원관, 기도와 예배관, 교회관과 종말관에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교회사와 조직신학, 성서해석학에 대해 무지한 구원파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적으로 영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원파의 세 계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성과 초월성은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성과 임재성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나 인성은 격하시키며 죄사함은 은혜는 강조하면서, 율법의 교훈은 무시한다. 피동적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강조하지만 의지적인 회개와 인격적인 신뢰(믿음)를 배제한 구원은 기도와 찬양을 소홀히 취급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모임과 교제를 강조하여 자신이 속한 교회가 유일한 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자파 교회에 붙어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들림을 받는다는 극단적 세대주의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유병언과 권신찬 계열은 극단적 세대주의사상에 입각해 시한부종말론에 가까운 종말위기위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풍유적 성경해석으로 (원)죄와 범죄, 회개와 자백을 구분하여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회개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박옥수는 구원지상주의자로서 종말에 대하여 거의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3분파는 그 신관이나 구원관에서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2).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씨는 “믿음의 한 가지 기능인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영지주의적 사고임에 틀림없으며, 구원의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또한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이단으로 사료된다”(예장 통합측 1992년 77회 총회).
결론적으로 구원파는 초대교회 시대에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던 영지주의(Gnosticism)가 현대판으로 재현된 것이고,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으니 회개할 필요 없이 은혜를 누리자는 율법폐기론(반율법주의: antinominianism)가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서적]
정동섭·이영애,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죠이선교회, 200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