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긱 구원파 계열마다 조금씩 교리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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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규 권사
<교회와신앙>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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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구원파는 구원론만이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다. 전번 글에서 필자는 구원파의 종말론에 대한 문제점을 올렸는데, 그러나 구원파는 구원론과 종말론에만 문제가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관점에서 기독교와 다르다(물론 구원파마다 각각 가르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구원파는 신론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며,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육체와 영으로 분리시키는 잘못된 기독론을 가르치며, 심지어는 박태선(전도관)의 혈통유전론까지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구원파는 인간론에서도 잘못된 주장을 가르침으로써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 영과 육의 대결구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며, 그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구성을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켜서 영에는 성령(예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이 거하여 싸운다고 하는 이상한 이원론적인 인간론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상한 삼분법은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에서 나타나는 이단성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파의 교리는 구원론과 종말론만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점에서 기독교의 용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정통신학과 다른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1. 영에는 성령(또는 예수)이 들어오고 육에는 죄가 들어온다는 이원론적인 주장.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고 생명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 말씀을 깨달을 때에 죄가 해결됩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릅니다……(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말씀을 받는 것이 신입니다. 즉 성령입니다. 영접식 구원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기 결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해도 소용없습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에 예수님이 마음에 영접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에 예수님이 마음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영접입니다. 많은 가짜 구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확실한 것을 잡아야 됩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276쪽)
요한복음 10장35절을 완전히 엉터리로 해석하여 “말씀을 받는 것이 신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요한 측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35절은 정반대의 뜻이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 10:35-36).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신이라는 뜻이 아니며, 본문은 구약 시편 82:6을 인용한 것으로 ‘재판장’이라는 단어가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재판장이나 지도자들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파송하셨으며 하나님께 위임을 받은 직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사람에 지나지 않으므로 모두 죽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말하다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사람의 직분조차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다”라는 의미로써 자신의 신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2:6-7).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로고스)은 성경말씀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며, 그 말씀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말씀으로 나타나십시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이요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생명의말씀선교회, 21쪽)
(1) 육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성요소에 따른 신학적인 견해에는 이분법과 삼분법이 있다. 물론 필자는 교단에 따라 다른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하여야만 하는 이원론이라는 주장은 이분법이든 삼분법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서 영(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견해를 뜻한다. 즉 살아있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람을 영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켜,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이 거한다고 가르치는 주장이다. 특히 삼분법을 이원론과 장소적으로 분리시키는 지방교회는 영에는 하나님이, 육에는 사탄이, 혼에는 사람의 인격이 거한다고 주장을 한다.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의 주장을 살펴보자
[ 지방교회의 주장 ]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73쪽)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 베뢰아의 주장 ]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졌기에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지만 육체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김기동, <마귀론 하>, 154쪽)
“귀신은 사람의 영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육체 안에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 (김기동, <마귀론 하>, 63쪽)
[ 구원파의 주장 ]
① 영혼의 구원 :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성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②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는 이유: 사단은 공중권세를 가진 자이며 인간육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③ 구원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의 유형 첫째는 부지 중에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에 아직 죄성 가운데 있기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는 죄입니다.
(이요한, <생명의말씀 선교회 홈페이지>, 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 다락방의 주장 ]
①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②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③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예 오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육이고, 우리의 마음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 (류광수, <현장복음>, 2과 – 새로운 생명, 성령의 내주란 무엇인가?)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영을 좇는 자’는 ‘성령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전인적인 인간 자체’를 말함으로써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이 곧 성령을 거스리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의 소욕(인간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하나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즉 본문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인간과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태어난 후에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좇는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반대되는 개념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여, 바울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표현한 ‘영에 있는 자’는 거듭난 사람을 뜻하며, ‘육신에 있는 자’는 성령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뜻한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즉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깃덩어리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반대되는 총체적인 인간의 소욕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것이며, 그는 곧 ‘육신에 있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함께 포함된다. 영과 육을 분리시켜서 우리의 영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 5:17).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썩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 되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대부분 영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을 말하거나 혹은 개념상으로 영과 대조되는 육체로서의 의미를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살아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우가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26절과 같이, ‘영혼 없는 몸은 사실상 죽은 시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악 간의 문제에서 육체와 영혼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육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영도 더러운 것이 되며, 전인적인 인간이 모두 더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육체에 사탄이 거하며, 육체에 죄가 있다고 하거나, 영은 죄가 없으며, 영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또한 성경은 육체에 사단이 거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도 죄를 짓는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마찬가지로 육체만이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시 63:1).
(2) 죄는 전인적인 영과 육의 기관으로서 마음에 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성경적인 표현을 보자면, 죄는 마음에 있다. 마음은 영을 표현하는 기관이며 마음 안에 영이 있으며, 또한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영혼의 전인적인 기관으로서 존재한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마음의 생각이 존재할 수 없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heart)을 주고 그 속에 새 신(spirit)을 주며, 그 몸(flesh)에서 굳은 마음(heart)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heart)을 주어서”(겔 11:19).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즉 성경에서 ‘육체의’ 라는 말은 ‘죄많은’ 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육체 자체에 죄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육신을 가진 인간 자체가 연약함으로 유혹의 목표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죄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 영향과 활동이 지정의에 미쳐 전인적으로 죄가 파급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8-30).
죄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른 눈과 오른 손이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에 음욕을 갖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실제로 오른 눈을 빼거나 오른 손을 자른다고 하여 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지음으로 지옥에 간다는 강조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2. 사탄배상설, 사탄과 하나님의 전쟁구도로 보는 이원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담에게 맡겼는데 사탄이 빼앗아 갔습니다. 아담이 사탄에게 세상을 팔아 먹었으니까 사탄에게 값을 주고 이 세상을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 찾는 과정이 인을 떼는 과정입니다. 바로 사탄과 사탄에게 속한 자를 벌줌으로써 이 세상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8)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세상에 나타나셨는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도로 찾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해야 이 세상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재림하시면 마귀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그래서 이 역사 속에서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과 뱀의 후손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두 세력의 전쟁 마당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마귀가 멸망을 받습니다. 잡혀서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승리로 끝나요. 이것을 마귀는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발표되어 마귀가 알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113쪽)
섭리(providence)를 뜻하는 용어는 ‘통치와 보존과 협력’의 세가지 요소를 갖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통치권과 주권을 위임하시고 지금은 세상 일을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대한 통치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며 보존하고 유지하시며 협력하신다.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창조주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세계에서 생성하는 모든 일에 적용하시며, 또한 만물을 그것들의 정해진 목적으로 지도하시는 신적세력의 지속된 수행”(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상권>, 410쪽)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이 세상을 다스리라는 대리적인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특히 통치권과 주권을 사탄에게 위임하신 적이 없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섭리적인 역사하심을 말씀하셨다. 심지어 자유의지를 갖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과 계획도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요 34:2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3. 영.혼.육의 구원을 분리시키는 지방교회와 같은 주장
“사람에게는 영, 혼, 육신이 있습니다. 제일 깊은 곳에 영이있고, 그 다음에 혼이, 육신은 제일 밖에 있습니다. 육신과 혼은 가깝습니다. 이 영은 양심의 활동을 합니다. 육신의 병을 고치려면 혼을 자극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면 됩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224쪽)
“롬 8:23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성령을 받았지만 썩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직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육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탄식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병이 들고, 약한 것을 느끼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성령의 처음 익은 멸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은 육신의 구원이란 뜻입니다. 우리 육신의 구원의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현재 구원 받는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지 육신의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 육신의 구원은 따로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어느 시점에 가면 한꺼번에 육신의 구원을 다 받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230-231쪽)
“아가 2:15 포도원을 허는 여우가 한 마리 있어요. 이 여우는 물론 마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을 타고 들어와서 포도원을 헙니까? 바로 우리의 육신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육신까지 마귀의 권세와 관계없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 육신의 기분이나 생각을 따라 움직일 때 하나님의 동산인 포도원을 헐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것은 항상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생각, 내 취미, 내 성격, 내 욕심, 나의 이기심등이 조화를 깨트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우는 틈만 있으면 우리의 육신을 타고 튀어 나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한 것입니다.”(권신찬, <믿음으로 믿음에>, 기독교복음침례회, 131쪽)
“그러나 혼, 즉 마음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구원을 받았더라도 세상의 쾌락, 돈 같은 것들을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중에 차츰 육적인 생각이 약화되어 가서 나중에는 순전히 육신의 생각을 가지던 마음이 영으로 기울어져 하나님께 대한 주님께 대한 생각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영의 구원을 받고 난 뒤 세상을 향하던 그는 마음이 차츰차츰 힘을 잃어가면서 마음이 주님께 가게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 갑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육신이 들림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직도 세상을 좋아하는 육신의 마음과 욕망이 있다면 아직 자기 혼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혼이 구원받는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굉장히 시달림을 받고나서 나중에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다시 한번 벗어지는 것이 있고서야 영의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권신찬, <믿음으로 믿음에>, 기독교 복음침례회, 23쪽)
권신찬은 구원을 영과 혼과 몸의 구원으로 분류하지만, 이요한은 영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으로 용어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른 점이 거의 없다.
4. 예수의 몸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기독론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 땅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저 높고 신령한 곳으로부터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은 사람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으므로 ‘바람아 고요하라, 바다야 잔잔해라’하면 바람과 바다도 순종했습니다.”(이요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생명의말씀선교회, 22쪽)
성육신은 오직 예수님에게 해당하는 유일한 사건이고, 성도들에게 성령이 내주하는 것은 성육신과 전혀 다르다. 성육신과 성도들의 성령내주를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관점은 성부, 성자, 성령을 인격적인 구별이 없는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양태론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고 그 안에는 주님이 사신다. 바닷가에 가보면 고동 같은 것이 마구 기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동이 그렇게 빨리 기어갈 수가 없고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게가 있다. 조그만 게가 고동껍질을 뒤짚어쓰고 다니는 것이다…. 구원받은 각 사람은 껍데기일 뿐이고 그 안에는 주님이 계셔서 자기 뜻대로 그 사람을 인도하시고 뜻대로 쓰신다.”(이요한, <구원의 삼단계>, 생명의말씀선교회, 36-37쪽)
이요한은 우리의 육체는 껍데기이고 우리의 영에 주님이 사신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역시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며,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연합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 아니다. 양태론적인 신관을 갖고 있는 자들은 성령과 주님을 구별하지 못한다.
“성육신 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4쪽)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위트니스 리,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 류광수, 현장복음 18과 – 예수께서는 왜 죽어야 하는가 ]
5. 신약의 성취적 의미:
(4)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그 영은 하나님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신약에 참으로 중대한 말이다. 여러분 중심에 정말 주님이 역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기독론에 대한 몇 가지 중대 오류, 즉 인성의 실재성을 부정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제 2세기의 그노시스파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순화한 육체, 혹은 천적인 육체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신적인 그리스도는 임시로 인간예수와 결합하였다’고 보았다. 제 4세기의 싸벨리우스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197-198쪽)
성육신에 대해서 상당히 잘 설명한 신학적인 자료가 있다.
“성육신(incarnatio)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다’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인카르티오’를 탁신(託身)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성육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도성인신(道成人身)의 본래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취하시고’, 혹은 ‘가지시고’(assume, take), 사람과 같이 되셔서(became)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의미한다.”(조석만, <조직신학 상>, 대한신대원 출판부, 439쪽)
5. 개인에게 거하는 성령과 사역하는 성령이 다르다는 주장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만물 위에 계시지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의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와 성령이 계시는 장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전인데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계십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 개인에게도 성령이 와서 계십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와서 계시는 성령은 생명의 성령이시고 일하는 성령은 아닙니다. 교회가 이루어지면 일하는 성령이 다시 한번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은, 자기 육신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을 순종치 못하게 되는데, 어느날 그 육신의 생각이 꺾여질 때에 자기 안에 계시는 생명의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와 개인의 경우의 차이점입니다.”(권신찬, <믿음으로 믿음에>, 기독교복음침례회, 20쪽)
6. 혈통유전설
사람의 죄가 피를 통하여 흐른다는 박태선(전도관)의 혈통유전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사람의 피를 수혈 받으면 그 사람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되는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 사람은 전부 남자의 후손입니다. 아버지의 피를 받아서 태어난 남자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이 남자의 피를 받아서 나면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이 남자의 피를 받아서 나면 죄인이 됩니다. 죄가 피 속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입니다. 화내는 것을 혈기 부린다고 하잖아요, 화내는 것은 혈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피를 통해서 죄가 유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 때부터 죄가 유전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도 마음에 안들면 ‘앙!’하고 악을 씁니다. 자기는 양심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남자의 피를 받아 태어나면 혈통을 좇아 난 것이므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94-95쪽)
“화 내는 것이 왜 죄입니까? 화는 혈기입니다. 사람의 피 속으로 죄가 흘러 들어가서 혈통을 좇아서 대대손손 내려 갑니다. 우리가 혈통을 이을 때 피를 받아서 태어나는데 이 흐르는 피 속에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혈기를 부려요. 노한다는 말은 혈기를 부리고 화 내는 것인데 피 속에 흐르는 죄성이 노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죄가 노하는 죄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 나면 노발대발합니다. 굉장히 많이 화내는 사람도 있고, 적게 화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고 적고 간에 마찬가지입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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