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의 임박한 종말론

  • 5월 14, 2015

                                                             구원파의 임박한 종말론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파라고 하면 구원관에서 문제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문제점은 종말론에서 더욱 문제가 있다. 그들의 종말론은 매우 임박한 종말론이며, 왜곡된 자의적인 성경해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변질된 세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변질된 세대주의 종말론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구원파, 하나님의 교회등은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것을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여 곧 종말이 온다고 주장을 한다. 그 마태복음 본문은 다음과 같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4:32-34)

 

무화과.jpg

(무화과)

성경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로 비유된 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특정한 단어를 한가지의 비유로만 해석한다면 신천지와 다름이 없는  비유풀이가 될 것이다

특히 마 24:32의 본문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상징한다는 어떤 근거나 그 타당성도 찾을 수 없으며,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를 모두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한다면 신천지와 같은 비유풀이가 될 것이며, 누가 보아도 이상한 해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더욱이 구원파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여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며, 선교단체들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비유하시며 말라 죽게한 무화과나무가 다시금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즉 겨울 동안 말라 죽은 것 같은 무화과나무도 여름이 가까이 오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오듯,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되면 다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1,900년이란 긴 환란의 겨울이 지나고 이제 회복될 때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1948 514일 이스라엘은 독립했으며, 1967 6 6일간의 제3차 중동전 때 예루살렘을 도로 찾았다. 그리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계속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다. 무화과나무는 이미 싹이 나왔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를 주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다”(하나님께로 가는 길, 이요한, 영생의 말씀사, 1997, 228-229)


이제 여러분 눈에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왜 지금 세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말썽이 많습니까? 그 나라는 1948년에 독립했습니다. UN에 가입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말이 많습니까?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선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사가 흘러가고 모든 일들이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복구,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된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이 끝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증거입니다.”(성경은 사실이다.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2007, 125)


24장의 무화과의 잎사귀는 이스라엘이 아니며, 본문은 종말을 뜻하는 내용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징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자연적이며 기후적인 현상으로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면 곧 여름이가까이 왔다는 뜻으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징조로서 알 수가 있다는 것이 본문의 뜻이며, 그러나 종말의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이 과연 주후 30년경에 살았던제자들에게 장차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부터 한세대를 계산하여 종말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기 위하여 그런 비유법을 사용하셨을까? 더욱이 본문은 재림의 날짜가 아니라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 직후에 예수님은 아무도 그 날을 알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야만 한다.

마태복음 본문만으로 본다면,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자연스러운 징조에 대해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는 것을 의미하며,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이러한 자연적인 징조로 볼 때에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는 것이다.

더욱이 누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말한다. 즉 누가복음으로 볼 때에는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할 근거가 없어진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21:29-32)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징조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인데, 성경본문을 보면 그 내용은 성전이 언제 무너지느냐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서 이 모든 것이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게 된다고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의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두가지 질문은 (1)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있으며, (2)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는가? 이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4:2-3)


누가복음의 두가지 질문은 (1) 성전이 어느 때에 무너지는 일이 있으며 (2) 그런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징조가 무엇인가? 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1:5-7)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공통되는 내용은 성전이 언제 무너지느냐는 질문이었으며, 예수님의 답변은 그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24:15-16)


AD 68, 로마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였다. 특히 당시에 산으로 도망하라는 예언을 기억하였던 유대인들은 펠라’(Pella)라고 하는 산악지역으로 도망함으로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는 견해를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마태복음은 다니엘서가 기록한 BC 168,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뜻하는 예표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이 성경구절을 읽는 유대인들은 다시 깨달으라는 뜻이며, BC 168년의 사건을 상기시키며, 장차 일어날 AD 68년의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다시 예언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복절이나 6.25 사건을 말하면 다 알듯이,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돼지피로 성전을 더럽혔던 사건에 대해서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즉 예수님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와 같은 사건이 앞으로 한세대 안에 다시 일어난다는 예언적인 의미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평행구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21:20)


즉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곧 멸망이라고 표현을 한다. 또한 누가복음은 이 백성들에게 진노가 있겠음을 말하며, “이 백성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것이며, 특히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사건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곧 닥칠 사건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이방인들에게 짓밟혔으며, 성전이 더럽혀지고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한 사건을 뜻한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1:23-24)


비록 외경이지만, 마카비() 1:54-64과 마카비() 6:1-5를 통하여 우리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당시의 상황을 참고할 수 있다.


백 사십 오년 기슬레우월 십 오일에 안티오쿠스왕은 번제 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다의 근방 여러 도시에 이교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 앞에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다.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왕명을 위반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매달 잡아 들여 모질게 학대하였다. 매달 이십 오일에는 옛 제단 위에 새로 세운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자기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법령에 따라서 사형에 처하고 그 젖먹이들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그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사람까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이에 꺾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크고 무서운 하느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마카비 상 1:54-64)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티오쿠스왕은 아테네의 원로 한 사람을 유다인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조상 때부터 내려 오는 율법을 버리고 하느님의 율법을 따르는 생활규범을 버리라고 강요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더럽히고 그 성전을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에게 봉헌하게 하고 그리짐산의 성소는 그 지방 사람의 소원대로 나그네의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봉헌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유다인들이 차마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은 날로 더해만 갔다. 이방인들은 이 성전 안에서 온갖 방종과 향락을 일삼았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경내에서 창녀들과 놀아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였다. 그뿐 아니라 법에 금지된 물건들을 성역 안으로 끌어 들였다. 제단에는 율법에 금지된 부정한 고기를 쌓아 놓았다. 안식일은 물론 조상 전래의 축제도 지킬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자기가 유다인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마카비 하 6:1-6)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에 따라 매일 드리는 제사까지도 금지시켰다. 안티오쿠스왕은 예루살렘 전 지역을 철저히 약탈한 후에 백성들 일부를 처형하고 일부 백성들은 그들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포로로 끌고 갔는데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의 수는 약 10,000명에 달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을 불태웠으며, 건물들을 파괴하고 하부 도시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전체를 볼 수 있었으며 높은 벽과 망루를 세우고 그 안에 마게도냐인들로 구성된 수비대를 주둔시켜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성채에는 불경건하고 질이 나쁜 사람들이 있어 예루살렘 시민들을 자주 괴롭히고 있었다. 안티오쿠스왕은 성전의 제단위에 이방인의 제단을 쌓아 돼지를 잡고,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전통적으로 드려오던 제사를 금지하고 이방신들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제사 지낼 곳을 마련하고 매일 돼지를 잡아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모든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만일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처벌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감독관을 임명하여 자신의 지시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왕의 지시를 따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처벌이 두려워 왕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덕망있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불복할 경우 자신들에게 가해질 처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유대인의 관습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들은 매일같이 수난을 당해야 했으며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온 몸이 불구가 되기도 하였으며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했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할례를 행한 자들의 처자식들은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자식들도 십자가에 매달린 부모들의 목에 끈으로 매달았다. 그리고 성경이나 율법책을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역시 비참하게 살해하였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 54)


신학자 조지래드는 성경에서 나타나는 예언적 생략법(Fore-shortening)이라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선지자들은 연대에는 관심이 없었고 미래는 언제나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섞어 한 캔버스에 그렸다. 성경의 예언들은 삼차원이 아니라 이차원이며 높이와 넓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먼 사건도 임박이라는 투명함을 통하여 보았다. 초대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산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을 기대하며 사는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 성경적 예언의 본질인 것도 사실이다.”


성경주석적인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라는 예언은 약 40년이 지난 후 거의 글자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성취되었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디도가 지휘하는 로마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겨 있다는 말을 듣고 돌을 하나씩 헐어내면서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 도시에 거주했던 100만이 넘는 우대인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한다”(신약주석 시리즈, 마태복음, 최세창. 608)


마태복음 24장에서 많은 독자가 종말의 표적을 찾느라 이 장을 열심히 살펴보지만 이 장의 많은 부분 특히 이 대목의 주제는 (그 어떤 의미에서든) 너무나 쉽게 종말이 임박했다고 결론 짓는 것은 위험하다” (Richard. T. France, IVP 성경주석, 1286)


우리는 성경본문에 있는 제자들의 두 번째 질문이었던 세상 종말의 날과 때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은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위 마 24:36의 본문이 결론이라면, 우리는 무화과나무 싹에 대한 비유를 1948년으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다고 보아야 하며,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이 더럽혀지는 사건, 즉 예루살렘의 종말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욱이 한세대 안에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이단적인 시한부종말론을 정당화하는 짜맞추기 식의 성경해석으로 만들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AD 30년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1948년에 있을 이스라엘 독립을 무화과 싹으로 비유하시고, 1948년부터 한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고 비유하여 말씀하셨을까? 과연 그 제자들이 그 무화과 잎사귀 싹을 장차 1948년에 나타날 이스라엘 독립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까?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상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자적인 세대주의는 인류역사를 구약 4000년과 신약 2000년으로 본다. 그러한 그들의 관점에서는 서기 2000년은 인류의 종말이 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세대주의 종말론은 1900년대 말에 수많은 시한부종말론에게 단서를 제공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성경해석을 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구원파였으며, 지금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또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은 1948년부터 한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여 1988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렇게 가르치는 선교단체들이 많이 있다. 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초대형교회의 J목사, K목사등도 이러한 주장을 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대형교회 J목사가 1948년으로부터 50년을 한세대로 해석하여 2000년쯤에 재림이 온다고 주장하였다가 시한부종말론으로 비난을 받고 이단성의 문제까지 가게되자 결국 사과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극단적세대주의자들은 적그리스도가 미국의 정치가라고 주장했고, 또는 이스라엘의 정치가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특정한 시대의 실명으로 적용시키는 이러한 주장은 어떤 근거도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도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일 4:3) 


구원파는 동방’( 16:12)을 중국 군대라고 주장했으며, ‘곡과 마곡’( 20:8)이 러시아라고 가르쳤고, ‘열뿔이 유럽연합(EC)이라고 주장하다가 지금 27개국이 되자 다시 10개국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였다. 은행카드와 컴퓨터와 바코드가 666이라고 주장하던 구원파 목사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은 과연 지금도 은행카드를 갖고 있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으며, 과연컴퓨터와 바코드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성경에는 짐승의 뿔이 열이라 했으니 열나라가 되어야 할텐데 현재 EU는 나라 수가 더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직은 환난 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환난 시대에는 틀림없이 열 개의 나라로 부활될 것이다. 어쨌든 결국 10개국이 뭉치는 것이며, 얼마후 그 중 세 지도자가 정복되고 결국 일곱의 지도 세력이 남을 것이다.(이요한, 하나님께로 가는 길, 영생의말씀사, 323)


과연 어느 성경에 열나라가 27개국이 되었다가 다시 10개국이 된다는 내용이 있는가? 다니엘서의 열뿔과 계시록의 열뿔은 시대적인 배경부터 다르다. 또한 이러한 자의적인 해석은 자신의 엉터리 주장을 끝까지 옳다고 우겨보기 위한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이단들의 근거없는 임박한 종말론은 많은 이단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모든 재산을 헌금으로 바치게 하고, 마지막 시간에 교인들의 헌신과 순종을 강요하는 아주 좋은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1948 514일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독립했고, 1967 67일 제3차 중동전쟁 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약 2,00년간의 긴 환란의 시대가 지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가 온 것이다”(하나님께 가는 길, 이요한, 1997, 213)


이요한씨는 권신찬씨에게 교리를 배워서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극동방송에서 팀선교회를 할 때에 권신찬씨가 첫 목사를 안수해 준 사람이 유병언이고 둘째 목사를 안수해 준 사람이 이요한이라고 알고 있다. 딕욕은 한국 구원파교회가 목사제도를 두는 것이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 지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면 그 안에 적그리스도란 자가 들어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 그것이 666의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노릇을 한다는 말이에요. 이러한 일들이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지금 추진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준비가 거의 갖추어져 가고 있어요. 컴퓨터만 하더라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만 그 컴퓨터의 이면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르면 온갖 비밀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컴퓨터로 정부 은행의 돈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 컴퓨터란 것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지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물건을 살 때도 현금을 쓰지 않고, 이마나 손에 표가 있으면 물건을 사고 컴퓨터 앞에 가서 그 표만 지나가게 하면 은행에서 컴퓨터로 그것을 계산하게 됩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것이 은행에 예치되고 물건을 사면 은행에 있는 돈이 그 표로 말미암아 저절로 지급되고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탈 때에도 다 그 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이제 우리 앞에 왔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사실이 아닌가요?” (성경은 사실이다.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182-183)


구원파들은 666이 은행카드라고 했다가 컴퓨터라고 했으며, 이마와 손에 바코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이제는 베리칩으로 슬그머니 바꾸고 말았다. 구원파 목사들은 현재도 은행카드를 사용하지 않는지 묻고 싶으며, 구원파 교회는 지금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가 묻고 싶다. 이요한씨 책(하나님께로 가는 길, 1997, 364)과 권신찬씨의 책(성경은 사실이다, 2007, 181)에 있던 바코드를 이마에 새긴 사람들이 666 이라고 하던 사진에 대해서는 취소하는 것인가? 십수년 전부터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였다고 주장하던 권신찬씨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되었는가?


은행카드, 바코드, 컴퓨터가 666이라고 했던 주장을 베리칩으로 슬쩍 바꾸어 놓으면 앞으로 십수년은 그런 일이 나타나지 않을테니 임박한 종말론을 계속 주장해도 들통이 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