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의 30개론에 대한 비판1 (입문)

  • 7월 15, 2015

                                           정명석 30 개론에 대한 비판(입문)

                                                                                                                                         평이협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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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30개론인데, 이것이 처음에는 40개론이었다가 후에 30개론으로 축소되었고, 최근에는 20개론으로 다시 축소되었다고 한다. 30개론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분류 되어지는데, 필자가 여러 루트를 통하여 확보한 정명석집단의 30개론에 대한 여러 책을 비교하여 보면, 책마다 그 제목과 순서가 다르다. 30개론이라는 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은 30개가 넘는 제목의 숫자로 설명되어 있고, 서로 비교하면 다른 책에는 없는 제목도 나타난다.

정명석집단의 교리를 비판하는 것에 목적이 있으므로 30개론이 넘어도 그 숫자와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자가 확보한 책들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비판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

즉 어떤 책에는 입문편에 베드로와 물고기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삭제한 경우도 있고, 삼분설을 초급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책도 있다. 또 어떤 책에는 입문에 삼위일체론이 삭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입문:

1 성경을 보는 관 2. 태양아 멈추어라 3. 엘리야와 까마귀밥 4. 베드로와 물고기 5. 7단계 법칙 6. 삼분설 7. 삼위일체론

초급에 공중휴거를 넣는 책도 있고, 제외하는 책도 있고 고급으로 포함시키는 책도 있다.

초급:

8. 비유론 9. 불의 개념 10. 말세론 11. 공중휴거 12. 무지의 상극세계 13. 이단의 개념 14. 예정론 15. 홍수심판

중급에서는 지상천국이라는 제목도 천년왕국이라는 제목을 사용한 책도 있고, 책에 따라서 같은 제목이지만 순서가 바뀐 제목도 있다.

중급:

16. 사탄론 17. 카인의 성격 18. 영계론 19. 계시론 20. 부활론 21. 지상천국 22. 중심인물 23. 메시야 강림의 목적

어느 책에는 고급편에서 죄론이라는 제목이 없고, 초급편의 공중휴거를 고급편으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 역사편을 고급 외에 다른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시켜서, 총설, 메시야섭리역사의 동시성, 중심인물을 통한 동시성적 섭리역사, 우리의 역사, 동시성으로 본 섭리역사, 종교개혁 역사 대조등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어떤 책은 역사 1과 역사 2로 분류하기도 한다

고급:

24. 예수님과 엘리야의 승천 재림 실상 비교 25.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 사명 26.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 27. 한 때, 두 때, 반 때 28. 창조목적 29. 타락론 30. 죄론 31. 구원론 32. 재림론 33. 역사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비교 34.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기원 35. 역사론

 

1. 입문

1) 성경을 보는 관 2) 태양아 멈추어라 3) 엘리야와 까마귀밥 4) 베드로와 물고기 5) 7단계 법칙 6) 삼분설 7) 삼위일체론

입문편 책의 서문에 강의 포인트라는 제목으로 여덟가지의 주의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한마디로 정명석집단에서 30개론을 가르치는 목적이라고 하여도 될 것 같다.

여섯째, 교리 말씀을 전할 때, 선생님 사명에 대한 얘기 빼야한다: 본인이 깨달았어도 피하고 말씀을 전할 때 교정하며 전해 주어야 된다. 선생님의 사명은 말씀을 들으면서 본인이 깨닫는 것이다. 30개론을 제대로 가르치면 선생님이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다 안다. 항상 간첩이 앞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고도를 낮추어서 전해야 한다. 고도를 높이면 상대가 죽어도 안받아 들인다.낮추어서 전하면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분위기가 좋아야 한다. 기존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할 것도 없다. 더 좋은 진리를 전하면 애들이 알아서 듣고 판단한다. 자기가 듣고 판단해야지 이것이다 저것이다 판단해서 주면 안된다. 베드로도 자기가 깨달으니 쫓아왔지 예수님이 메시야니까 따르라고 했었다면 시험이 들었을 때마다 확인했을 것이다.좋은 것이 있다고 기존의 것을 일부러 깨뜨릴 필요는 없다. 그랬다가는 잡음만 난다. 그냥 좋은 것을 주면 그것을 쓰게 된다.(입문편, 서문, 강의 포인트)

실제로 입문편에는 성경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2-5쪽까지 정명석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명석의 출생과 간증예화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정명석이 21년 동안 성경을 1000독 이상을 하였다는 내용과 수천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보화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30개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황당하고 저급한 수준의 내용에 지나지 않으며,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수준으로서 어느 부분에서는 용어를 조금 바꾸기도 하였고 몇가지 견해를 가감시키기도 하였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30개론은 정명석을 메시야로 만들기 위한 예비적인 교육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성경을 보는 관

30개론 입문편 2-3 쪽에서, 정명석에 대한 소개가 언급된다. 1945 23일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닭밝골(월명동)에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데, 21년 동안 성경을 1,000독 이상하고 성경속의 모든 진리의 인봉에 떼고, 단 한번도 영어, 한문 등 다른 공부를 한 적이 없으며 기도와 성경만 읽었다고 한다. 성경을 통해서 정치, 경제, 철학, 과학, 종교, 역사, 문학, 음악, 미술, 스포츠등 다방면에 걸쳐 그 도를 깨우쳐서 각 방면에서 초인의 경지를 드러내어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다고 주장하며 1978년 세계청년대학생 MS 연맹의 총재가 되었으며 23개국의 15만 청년대학생들의 스승과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복음선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공식약력은 1982년에 MS선교회를 창설하였다고 올려져 있다. (이 년도의 오차 이유에 대해서는 고급론 한때 두때 반때에서 밝혀진다)

입문론 5쪽에는 30개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수천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아무도 모르는 보화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30개론이라고 하는데, 이 원본을 배우고 깨닫는데 21년이 걸렸으며, 어떤 것은 답을 얻기 위하여 5,300번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30개론을 살펴보면 성경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황당한 성경해석과 오류, 무지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이단들의 교주와 같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많이 읽고, 수많은 기도를 하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거나, 유일하게 비밀을 깨달은 것으로 과장하고 조작한다. 그러나 30개론은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한 이단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정명석집단은 여느 이단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육적, 영적의 두가지 개념으로 나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타락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또 천국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 지는 것인가? 이와 같은 대답에 대해서 바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 구원의 문제가 좌우됨을 알아야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구원서이므로 먼저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즉 하늘의 관점에서 보야만 한다. 두 번째는 비유, 상징, 시대성과 차원성에 의해서 씌어졌음을 깨닫고 육의 관점이 아닌 영적차원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 하겠다(30개론 강의안, 2)

모든 이단들이 성경을 기록된대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며, 영적관점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표현한다.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문법적으로 반어법적인 표현도 있고 과장적인 표현도 있으며, 시적인 표현도 있을 것이며, 역사적인 서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들은 항상 성경에 기록된 내용대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며, 성경대로 해석하는 것을 육적이라고 말하고,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뜻으로 만드는 것을 영적인 해석이라고 말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단들은 성경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성경을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특히 봉인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단들의 공통수법이다.

30개론은 성경해석의 원리를 선생님의 성경해석관이라는 부제목을 달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시대성적(차원적) 성경해석원리 비유적 성경해석원리 성경중심의 성경해석원리 양면적 성경해석원리 주관적 성경해석원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인간 저자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성경은 인봉된 것이 아니며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다음 글은 정명석이 과연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즉 그의 성경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여준다.

신약성경이란 : 마태복음은 마음대로 썼고, 마가복음은 모든 사람의 말문을 막아버렸고, 누가복음은 누가 보나마다 썼고, 요한복음은 요렇게 저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매치시켰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사소한 도의 말씀이고, 로마서는 바울사도가 교회들에게 로맨스의 마음에서 쓴 그들이다. 갈라디아서는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발 디디고 설 곳을 잡으라고 말한 것이다. 에베소서는 주 하나님의 날들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빌립보서는 빌어먹는 신앙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 골로새서는 골찬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데살로니가 전서는 섭리사 데려다 놓으면 살찌라는 것이고, 후서는 섭리사 데려다 놓고 살찌라고 해서 후회하지 말도록 하나는 것이다. 디모데서는 못된 사람이 제대로 되는가 보라는 것이고, 디도서는 뒤 돌아서지 말라는 것, 빌레몬서는 빌어먹던 놈이 감방에서 서방님을 만났다. 히브리서는 히적부적한 믿음을 갖지 말고 행하는 믿음을 가져라. 야고보서는 야! 곱절이나 잘되려면 곱절이나 행하라. 베드로서는 베옷입고 다니면서 외치는 내 심정을 알라는 것이고, 요한서는 요지경 저지경 한 많은 세상에 일자라는 섭리 일자리 밖에 없으니 놀지 날고 열심히 하라는 것이고, 유다서는 유명한 사람 다 만났어도 서방님만은 못하다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계시는 흐지부지한 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1995. 3. 18. ) (입문, 성경을 보는 관, 12)

2) 태양아 멈추어라

정명석집단의 30개론 입문편은 태양아 멈추어라는 제목에서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출애굽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모방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12 지파의 지도자들을 뽑아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으로 40일 동안 정탐을 보냈는데 이들이 돌아와서 백성들 앞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들 악평했다. 그로 인하여 결국 가나안 복지땅에 못 들어가고서 신광야에서 1일을 1년으로 해서 40년 동안 탕감받고 유리하다가 끝나고 말았다. 그후 다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제 2세대를 이끌고 동시성으로 정탐을 마친 후, 2차로 요단강을 3일만에 건너고 그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문, 태양아 멈추어라, 16)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 14:34-38)

성경을 보면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일을 가중하여서 그 죄악을 사십년 동안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30개론은 이것을 탕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여 죄악을 담당하는 것은 가중이 되는 것이지 탕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용어는 정명석 집단이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잘못 모방하였기 때문이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탕감조건이 가중되어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30개론은 탕감받고로 잘못 베낀 결과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40일의 정탐기간을 뜻맞게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탕감조건이 가중되어, 그들은 날을 해로 계수한 40년을 광야에서 표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통일교 원리강론, 1995, 후편 서론 탕감복귀원리, 245)

정명석집단은 <가나안 복지 입성>이라는 제목에서 가나안 땅에서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역시 성경에 전혀 없는 오류가 나타난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지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우게 되었는가?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과거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지금은 자기 땅이 아닌 것 같지만 400년 전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래 가나안 땅은 그들의 조상들이 살던 곳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었다. 그런데 400년만에 돌아와 보니 자기 조상들이 살다가 내버려둔 땅에 낯선 원주민들이 들어와서 우상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유컨대 영창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 집과 땅에 남이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입장이다. 그 집과 땅이 자기 소유가 분명한데 아무리 따져도 무력으로 살면서 안내어 놓는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주인으로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려면 법에 호소하든지 해서 싸워서라도 다시 찾아야 하는 법이다”(입문, 태양아 멈추어라, 17)

정명석집단은 가나안 땅이 원래 400년 전 아브라함 때로 올라가면 이스라엘 조상들이 살던 땅이었는데, 낯선 원주민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가나안 족속들이 살던 곳으로 아브라함 당시에 이스라엘 조상이 살던 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5:13-17)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즉시 주시지 않고, 애굽에서 400년간 지내게 하신 뒤에 주신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당시 가나안 땅에서 살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에 대하여 그들도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며(15:16). (2) 이스라엘 자손들이 연단의 기간을 겪게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성숙된 신앙을 갖추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족속의 조상은 노아의 아들 함의 막내 아들이며, 함의 잘못으로 가나안이 그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노아의 저주를 받게 되는데(9:22-24), 그 예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하게 되므로서 그 후손들에 의하여 성취되어진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뿐 아니라 다른 때에도 가나안 땅에 살았던 적이 없다. 이러한 오류를 볼 때에, 과연 정명석이 21년 동안 진리를 깨닫고 30개론을 만들었는지 의문이고, 정명석이 성경을 1000번 읽었다는 것도 짐작을 할 수 있다.

그 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모리 족속과 싸우게 되는 사건이 그 배경이 되는데, 소위 태양이 멈추는 사건이 일어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0:12-14)

당시는 천동설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시대이므로, 여호수아 역시 당대의 인식관대로 태양이 멈추길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며, 성경을 쓴 사람도 그렇게 인식하며 쓴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 이래도 지동설이 대두되자 로마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땅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반박하였으나 결국 지동설이 승리하게 되었다. 도는 것은 태양이 아니고 지구였다. 그렇다면 멈추었다는 성경구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것은 태양이 멈춘 것처럼 효력을 발생했다면 거꾸로 지구가 멈춘 것일 것이다. 태양이 멈춘 것 처럼 보였다면 즉 태양이 멈춘 것 같은 효력을 발생했다면 거꾸로 지구가 멈출 것일 것이다. 성경은 시대성을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맞게 풀어야 한다”(30개론 강의안, 5)

우주 원리로 볼 때, 지구가 돌고 있지 태양은 1마일도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태양이 멈추었다는 것은 법칙에 안 맞고 이치에 안 맞다. 인식관으로 볼 때 오히려 지구가 멈추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입문편, 22)

우선 정명석집단에서 가르치는 입문편의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내용도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최근에 밝혀진 과학적인 사실에 의하면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하계의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스스로 자전도 하고 있다.

본문은 지동설이나 천동설과 관련이 없다. 예를 들자면 지동설을 알고 있는 현재 과학 교과서에서도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을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어느 문학작품을 보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보아도, “해가 뜬다 혹은 해가 진다고 표현을 하며, 그것을 지구가 내려간다 혹은 지구가 올라간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여호수아가 모세오경이 기록된 당시의 인식관대로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가정하자.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당연히 태양이 멈추기를 요청하였고, 여호와하나님께서는 그리 할지어다라고 그 요청을 들어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더욱이 성경은 태양만 멈춘 것이 아니라 달도 멈추었다고 하는데,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만약 정명석집단의 주장대로 지구만 멈춘 것이라면, 달은 왜 멈추었는가? 인간의 생각으로 해와 달이 멈추는 상황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멈추게 하신 것이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정명석집단의 이러한 말도 안되는 비판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에 잘못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성경의 표현을 다르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근거와 핑계를 만들기 위함이다.

심지어 30개론 고급편에서 정명석이 쓴 간증을 보면 자신도 아침 태양이 뜰 무렵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명석은 천동설을 믿었는가?

“1970 2월에 바로 사람의 타락의 근본세계를 깨닫게 되었다. 1970 2월 아직 얼음이 안풀렸던 날씨 가운데 아침 태양이 뜰 무렵, 다릿골 골짜기의 기도굴에서 기도하다가 에덴동산과 생명나무 및 선악과를 깨닫게 되었다. ”(고급, 타락론, 147)

3) 엘리야 까마귀 밥(열왕기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왕상 17:1-7)

정명석집단은 까마귀를 영적으로 죽은 자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입문편, 38). 그리고 까마귀를 날 까마귀, 사람 까마귀, 영 까마귀의 세가지로 비유하는데, 날 까마귀는 산 까마귀를 말하고, 사람 까마귀는 바알숭배자와 아세라숭배자와 같은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영 까마귀는 잡영, 귀신, 바알과 아세라 목상등의 우상이라고 주장한다(입문편, 엘리야 까마귀, 38).

결국 영 까마귀들을 위해서 사람 까마귀들이 차려놓은 것을 까마귀 밥이라 했다. 그래서 까마귀 밥은 현 기독교가 말하는 이적과 기적의 떡이 아니요, 기가 막힌 고생의 떡, 슬픔의 떡이다. 무조건 하나님과 함께 한 사실만을 강조, 선지자들의 뼈 아픈 노정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 과정을 무시하고 신비주의화 되는 것이다. 현 시대의 기적도 법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사 지낼 때는 떡과 고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당시 우상숭배자들은 주로 산의 신당에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냈는데, 아무리 신령한 엘리야 선지자라도 안먹고 못산다. 그래서 그들이 가져다 놓은 음식을 먹은 것이다.(30개론 강의안, 8)

정명석집단은 까마귀가 가져온 음식을 우상숭배자들이 가져다 놓은 음식이라고 해석하여 엘리야가 그것을 먹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성경을 전혀 다른 뜻으로 바꾸는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8-16)

사르밧 과부의 기적에 대해서도 정명석집단은 자의적, 임의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만들고 억지 해석을 하고 있다. 그 목적은 오직 성경을 그대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르밧 과부의 기적(왕상 17:14-16) :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정말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매일 생겨 날 수 있을까? 과연 이러한 역사가 있다면 왜 지금 배고파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돌보지 않으실까?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곧 가루와 기름은 솟아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부은 것이다. 엘리야가 과부의 집에 있을 동안 마을을 다니며 기도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씀 받은 사람들이 가루와 기름을 보내준 것이다.” (30개론 강의안, 8)

만약 이러한 인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이사는 모두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며, 성경자체가 믿지 못할 책이 되고 만다. 더욱이 자신의 임의적인 상상이나 추측으로 성경을 마치 소설과 같이 만들고 있다.

정명석집단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를 무조건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서 도피를 하는 엘리야에 대해서 까마귀가 음식을 가져가 주는 자체가 기적을 의미하며, 사르밧 과부 집에 있는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체가 기적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본문 이후에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은 기적 중에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정명석 집단은 단 한마디도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명석집단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은 성경을 기록된 내용으로 해석하지 말고 비유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근거와 핑계를 만들기 위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4) 베드로와 물고기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 17:24-27)

정명석집단은 다시 한번 성경에서 나타난 기적과 이사를 사실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가버나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가 문자 그대로 고기를 낚아 올린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그물로 사람을 낚아 올렸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사람을 고기를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음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그물을 가지고 다시 고기를 잡으라고 하겠는가? 여기서도 사람이 고기라는 것이다. 사람이 돈을 갖고 다니지 돈 갖고 다니는 고기가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도와주고 간다. 엘리야 때도 까마귀가 떡을 물어다 준 줄 알았더니 사람이 떡을 갖고 오지 않았던가? 고기가 돈 갖고 온 줄 알았더니 사람이 돈을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사람도 아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적어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면 오히려 무렴만 당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통하고 돈을 줄만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으므로 돈을 준 것이다.(입문, 51)

정명석집단은 본문에 대해서 복음의 그물로 잡은 사람을 뜻한다고 해석하였는데, 성경본문은 그물로 잡은 고기가 아니며 낚시로 잡은 고기이다. 헬라어 앙키스트론은 갈고리, 낚시(hook)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물고기의 입에 한 세겔의 동전이 있는 일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사건이 되며, 결코 보편적인 경우라고 해석할 수 없다. 즉 베드로가 바다에서 낚시를 던질 때에 그러한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출애굽기 30:13에는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20세 이상의 성인의 성전세는 반세겔이었다. 반세겔을 받는 자들은 스스로 성전이 되시는 예수께 성전세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 임금이 아들에게 세를 받는가를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게 성전세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경우와 같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성전세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될 것이다. 성경은 베드로가 그 물고기를 잡아 성전세를 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5) 7단계 법칙

어떤 책은 4단계를 지질계라고 하고, 7단계 영물계에 대해서 어떤 책에는 진리계라고 되어있다.

1단계 : 광물계(광물계는 광물을 생성케 하는 법칙 곧 광맥이 맞아야 존재할 수 있다. 광맥이 맞지 않으면 광물이 안나온다)

2단계 : 물질계(물질계는 자연과학적 물리법칙이 있어서 각종 물질이 존재한다. 물리가 안맞으면 순식간에 그 구조가 파괴되고 썩어 들어가게 된다)

3단계 : 생물계(생물계는 생리가 있어 생리가 맞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고 생리적인 것이 안맞으면 부패하기 시작한다)

4단계 : 지구계(지구계에는 지리가 있어 땅은 지리가 맞아야 존재할 수 있으며 지리가 안맞으면 지진등이 일어난다)

5단계 : 우주계(우주는 우주의 원리가 맞아야 존재할 수 있고 원리가 안맞으면 대우주에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6단계 : 인간계(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리가 있어서 누구든지 심리가 맞아야 존재할 수 있다. 심리가 안맞으면 제 아무리 팔방미인일지라도 서로 다투고 순식간에 돌아서게 된다)

7단계 : 영물계(하나님은 진리 안의 하나님이지 진리 밖의 존재자가 아니다. 7단계로 영물계인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진리의 법이 있어서 진리가 맞아야 살 수 있다. 만약 그 진리의 법이 안맞으면 죽어 버린다) (입문, 55-60)

모두 인본주의적인 추측과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어떤 이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정명석집단의 용어 그대로 사용하여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광물계의 광맥을, 지구계의 지리를, 우주계의 원리를 보존할 수 있거나 바꿀 수 있는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13:23)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6-28)

성경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존하신다고 말한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9:6)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29)

마치 정명석집단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리가 되는 것처럼 결론을 내리는 자체부터 잘못이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을 연결하여 마치 정명석집단에서 가르치는 것이 우주적인 법칙에 의한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6) 삼분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의 삼원 구조체이다. 영은 영인체, 영혼, 속사람이고, 혼은 마음, 정신이며, 육은 육인체, 육신, 겉사람이다.” (입문 69)

정명석집단은 앞에서는 삼원구조체라고 말했다가, 뒤에서는 영인체와 육인체 두가지로 분류하고, 육인체를 다시 혼과 육으로 분류한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영인체와 육신으로 분류한다. 30개론은 영인체를 영혼이라고 하였는데, 육인체에 혼이 있다고 함으로서 영혼과 혼을 구별하고 있으며, 아울러 혼과 마음, 정신을 같은 뜻으로 보는 등 용어 자체가 통일되지 않으므로 혼란스럽다. 혼과 마음은 다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용어에 대해서 체계적인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인체(, 영혼, 속사람, SPIRIT)

육인체(혼과 육) : (마음, 정신, SOUL), (육인체, 육신, 겉사람, BODY) (입문, 69-72)

즉 정명석집단은 입문편에서는 영인체와 육인체의 두가지로 분류를 하고, 육인체 안에 혼과 육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30개론 강의안은 또 그 설명이 다르다

30개론 강의안 13-14쪽에는 영과 혼과 육의 삼분법으로 분류하고, 또 한편으로는 혼은 영과 육을 이어주는 교량자라고 보기도 한다. 정명석집단은 영을 구약, 애굽으로 비유하고, 혼을 신약, 신광야로 비유하며, 영은 성약, 가나안으로 비유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구약 시대는 육신만 주장했고 영은 주장하지 않았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영혼과 육신의 이분설로 따지며, 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본 사람이 가나안 복지를 주장할 수 있듯이 장차 새로운 역사가 오므로 지금은 삼분설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영과 혼과 육을 이야기한다면 애굽나라 사람도 아니고 신광야 사람도 아니고 가나안 복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삼분설적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입문 68)

7) 삼위일체론

기독교 신학은 성부 성자 성신을 한 하나님으로 보고 3위의 관계를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신 고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게 동등하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로 이 땅 위에 내려와서 사명을 하고 계실 동안에 하늘나라 보좌는 비어 있었단 말인가? 또한 승천 하신 후 어찌 하나님 우편에 따로 앉아 계신다는 말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입문, 88)

정명석집단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며,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기껏하여 양태론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기독교의 정통삼위일체는 한 인격의 하나님이 세 양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한 분이시지만, 상대적으로는 서로 인격적으로 구별되고 상호교류가 가능한 관계를 뜻한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당연히 하늘보좌는 비어있지 않았으며,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땅의 가장을 보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의 구조가 있듯이 천주의 하늘 가정도 똑같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다. 성부는 가정의 아버지, 성자는 가정의 아들이라면 성신은 무엇인가? 성신은 모성신 곧 어머니 입장이다. 가정에 어머니가 있듯이 하늘아버지가 계시면 하늘어머니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 가정에서 어머니가 내적인 일을 하듯이 가정의 아버지같은 성부, 아들 같은 성자, 어머니같은 성신으로 하늘나라 가정 구조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각위 삼위일체이다. 형상과 마찬가지로 모양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자이시다. 그러나 사랑 일체, 심정 일체, 뜻 일체, 진리 일체, 선 일체, 행동 일체이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도 한분, 선자도 한분, 성령도 한분이라고 하신 것이다.”(입문, 삼위일체, 89)

정명석 집단의 삼위일체는 삼신론에 가까우며, 특히 성신을 어머니로 보는 통일교의 삼위일체와 유사한데, 그것은 정명석이 통일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통일교 원리강론으로서 성신을 어머니로 보는 내용이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주시기 위하여 그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이시다” (원리강론, 1995, 234)

30개론 입문론에서는 정명석의 간증예화가 적혀 있는데, 그 글을 읽으면 정명석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삼위일체론은 선생님이 직접 하늘나라에 가서 배웠다. 선생님이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는가? 하나님은 얼마나 클까? 등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하여 이틀 동안 5,000번씩 세세히 물어보셨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영계에 갔는데, 한번은 예수님 찾아왔다고 하니깐 예수님 집으로 안내 해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침 필리핀으로 심방을 가시고 없으셨다. 그때 흰옷입은 사람들이 밀려왔다. 그 사람들이 성령님이 나오셨다고 했다. 그 때 성령을 똑똑히 보았다. 처음으로 성령님을 보았는데 모나리자 형의 아름답고 예쁜 미인으로 젊게 생기신 어른이었다. 성령님이 오셔서 명석이가 왔구나 하시면 나를 (내 영인체를) 안아 주셨는데 성령을 보는 순간 백만분의 일도 어색함이 없이 엄마 엄마 하면서 무릎 위에서 놀았다. 그런데 성령님이 나에게 세상에 옷이 이게 뭐니, 내가 서울로 올라가면 애들 시켜서 옷 한 벌 사줄께러고 하셨다. 하늘에서는 깨끗하고 형형색색의 세마포 옷 같은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시골에서 입던 옷을 입고 그대로 갔다. 너무 초라해서 벗을 수도 없고 창피했었다. 그 후에 서울로 집회를 갔다. 그곳에서 개인면담을 하셨는데 양복점을 했던 아주머니로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그 때 그 아주머니가 체크 무늬 양복을 해 주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성령께서 해주신다는 옷을 누가 해줄런가?’ 생각해 보니까 이미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바로 그 옷이었다. 그 옷이 해어질 무렵에야 그 옷이 성령께서 해 주신 옷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양복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 영계를 갔는데 이렇게 한번 만나니 성령님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삼위일체를 정확히 가르쳐 주는 곳은 지구 상에 단 한군데이다.” (입문, 93-94)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논리적인 이해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일단 기록된 그대로 정리하여, 삼위일체라는 논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아래의 세가지 명제는 가장 성경적인 내용이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삼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며, 각 삼위는 상호관계적인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짐으로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지만,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유일한 한분이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신성을 공유하는 세 인격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 으로 설명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성부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진다는 것이다.

삼위를 하나의 인격의 세 양태로 주장하는 양태론은 비성경적이며, 삼위를 부정하고 오직 성부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단일신론도 비성경적이다. 또 분리된 세 본질과 세 인격의 세분 하나님은 삼신론이 되고만다.

이단들은 삼위일체가 성경에 없다고 비난하지만,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본질)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일하며,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1:3)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개역성경]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2:6)

[공동번역]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2:6)

정통신학은 항상 이단들이 먼저 나타났고, 그들을 반박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단들과 성경적인 근거로 토론을 했고, 토론에서 패한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도태되어 간 것이다. 현재에도 이단들이 조작을 하듯이 정통신학은 인위적으로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목숨을 걸고 이단에 대항하고 토론을 하여 정립된 것이었다.

삼위일체가 정립되어진 칼케톤신조는 예수의 본질을 신성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완전하시며(teleion),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Psyches logikes)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 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성경적인 내용에서 볼 때에 삼위의 인격은 동일하지 않으며 상호관계를 갖을 수 있었고 또 서로 구별되어야만 한다. 또한 삼위의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다. 또한 정통삼위일체에서 질서적인 종속까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는 성부도 하나님이며 예수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동일한 신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인격과 역할과 기능은 모두 다르며 삼위는 서로 상호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