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론 비판2 (초급)
이인규
2. 초급
1) 비유론 2) 불의 개념 3) 말세론 4) 공중휴거 5) 무지의 상극세계 6) 이단의 개념 7) 예정론 8) 홍수심판
1) 비유론
➀ 성경이 모두 비유와 상징인가?
“성경의 비유가 풀리지 않고서는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늘의 비밀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 또 나아가서는 인간 삶의 목적도 알 수 없다. 마태복음 13장 34-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비유로써 창세 이후 감추인 모든 것들을 밝히 드러내셨다고 했다. 요한복음 16장 12-13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신다고 했으며, 25절에서는 지금은 비사(비유)로 말하지만 때가 이르면 비사로 말하지 않고 하늘의 사항, 즉 아버지에 관한 비밀을 밝히 이른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의 수백 수천 가지의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은 소위 성경을 풀었다는 주석이나 각종 각색의 책들을 수천 권 읽거나 성경을 수백번 읽는다 할지라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비유의 근본을 풀어 알지 않고서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비밀은 비유로써 인봉되어 있다. 말세, 재림, 공중휴거, 선악과의 인간타락의 비밀,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다는 비밀 모두가 비유로써 인봉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씌어졌으며, 그 비유의 주인공은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대상이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될 필연적인 존재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경 속의 모든 비유는 인간을 두고 수백 수천가지의 만물을 들어 비유한 것이다.” (비유론, 정명석, 12쪽)
정명석집단은 성경이 모두 비유와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몇가지 성경을 인용하는데, 대부분 엉터리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겔 20:49)
“하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성경의 근본은 비유와 상징이다. 성경의 모든 비밀은 비유로 인봉되어 있다. 말세에 관하여, 재림과 공중휴거, 또한 선악과와 인간타락의 비밀,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다는 비밀, 모두가 비유로써 인봉되어 있는 것이다. 고로 비유와 상징을 깨닫고 근본을 풀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급, 비유론, 102쪽)
정명석집단은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다. 겔 20:49는 그러한 뜻이 아니며, 본문에서 ‘나’와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에스겔을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정도의 해석도 못하는 수준의 30개론을 정명석이 21년 만에 깨달은 것이라고 하니 참으로 한심할 지경이다.
[공동번역] 내가 “아! 주 야훼여,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은 저를 보고 비꼬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합니다.” 하고 외치니
[표준새번역] 내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그들은 저를 가리켜 말하기를 ‘모호한 비유나 들어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성경] 그때 내가 말하였다. “주 여호와여, 그들은 내가 늘 알아듣지 못하는 비유만 말한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아래 본문 역시 신천지를 포함한 많은 이단들이 성경이 봉하였다고 주장하는 구절인데, 그러한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사 29:11-12)
이사야 29장 본문은 성경이 봉하여졌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whole vision)를 주셨지만, 유대인들이 마치 밀봉된 책과 같이 간주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계시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마치 봉인된 책처럼 여기고 무관심했다는 뜻이다.
[공동번역(개정)]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쓰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 할 것이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다.
[표준새번역(개정)] 이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밀봉된 두루마리의 글처럼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유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고 내주면, 그는 “두루마리가 밀봉되어 있어서 못 읽겠소“ 하고 말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무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면, 그는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그러므로 모든 예언적인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해진 책과 같을 것이다.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어 읽어 보라고 해도 그것이 봉해졌으므로 그는 읽을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며 또 무식한 자에게 주어 읽어 보라고 하면 무식해서 읽을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정명석집단은 성경이 모두 비유와 상징이라는 것을 짜맞추기 위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기 위하여, 즉 성경을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모든 성경이 비유와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이단들이 성경은 비유라고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성경구절이 거의 동일하다. 이것은 이단들 끼리 그 방법을 서로 모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래 성경구절도 많은 이단들이 사용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위 본문은 예수님이 언제나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일곱가지가 나오는데, 이 일곱가지의 비유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13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비유를 풀어달라고 요청을 할 때에 그것을 직접 풀어주시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비유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한 것”은 시 78:2을 인용한 것인데 시 78:2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2-3)
즉 시 78:2을 통하여 성경이 비밀한 말을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시 78:2의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숨은 뜻을 밝혀준다”고 번역하고 있다. 즉 “비밀한 말을 발표한다”는 것은 비밀을 감추인 그대로 발표한다는 것이 아니라, 곧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밝히고 드러낸다는 뜻이다.
[공동번역] 내가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그 숨은 뜻을 밝혀 주리라.
[표준새번역] 내가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하며, 숨겨진 옛 비밀을 밝혀 주겠다.
[현대인의성경] 내가 비유를 들어 옛날부터 감추어진 것을 말하겠다.
[KJV] I will open my mouth in a parable: I will utter dark sayings of old:
[NIV] 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hidden things, things from of old
‘비유’라는 단어는 ‘파라볼레’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파라’는 ‘옆에’라는 뜻이며 ‘볼레’는 ‘발로’라는 단어의 파생어로서 ‘던지다, 놓다’라는 뜻으로 ‘옆에 던져놓다’는 의미이다. 즉 ‘파라볼레’라는 단어의 의미는 ‘평행, 병렬’(parable) 이라는 뜻으로, 그 원래의 개념은 “어떤 사물의 옆에 나란히 던져 놓음으로서 서로 비교하게 하여 그 의미를 깨닫게 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비유의 목적은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알게 하는 것에 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2-13)
많은 이단들이 위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을 진리의 영, 보혜사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 보혜사가 40명이 넘는다고 하니 과연 누가 보혜사인가? 진리의 영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요 16:25)
위 본문에서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성경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6장의 앞부분의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비유를 뜻한다.
성경은 물론 비유도 있을 것이고 문자적인 내용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강조법이나 과장법, 반어법등 여러 가지 문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두 비유로 되어 있다는 주장은 자신들의 비유풀이 짜맞추기를 정당화하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30개론은 성경의 객관성과 성경의 성취성을 부정하고 있다. 정명석 집단은 소위 ‘시대급으로 본 하나님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섭리 시대를 (1) 구약 (2) 신약 (3) 성약의 세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이 성약이라는 용어도 통일교의 용어로서 통일교에서는 원리강론을 뜻하지만, 정명석집단에서 성약은 곧 정명석의 가르침을 뜻한다.
“구약시대는 구약에 해당되는 구원을 받아야 되고 신약시대는 신약에 해당되는 구원을 바아야 되고 성약시대는 성약에 해당되는 구원을 받아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최고의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다.”(구원의 말씀1. 도서출판명, 2005년, 16쪽)
성경은 사도바울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바울의 서신이 곧 신약성경이 된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알기 어려운 것이 있어도 억지로 풀면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특히 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경고를 한다. 심지어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➁ 왕벌의 비유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 23:2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신 7:20)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수 24:12)
“본문은 여호수아 때 왕벌을 보내서 히위 족속, 헷 족속을 쫓아냈다는 말씀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왕벌을 보내서 히위 족속, 헷 족속 등을 쫓아냈겠는가? 즉 가나안 원주민을 멸한 것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진짜 생물 왕벌이 그랬겠는가? 어떻게 문자 그대로 왕벌이 엄청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 즉 왕벌은 문자 그대로 왕벌이 아니라 신광야 때 지도자 되는 모세를 비유한 것이고 가나안 입성 때 여호수아를 비유한 것이다”(초급, 비유론, 110쪽-111쪽)
출애굽기 23장과 신명기 7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왕벌이 모세를 비유한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라고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네 앞에 보내리니”와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라는 구절은 모세가 될 수 없다. 모세 앞에 미리 보낸 왕벌이 어떻게 모세를 비유할 수 있는가? 여호수아 24장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너희 앞에 보내어”는 여호수아가 될 수 없으며,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라는 구절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쫓아내게 하신 것을 뜻한다.
성경 주석을 살펴보자. 그 이유는 정명석집단이 기독교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으므로 기독교의 해석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 위함이다. 기독교에서는 왕벌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않는데 정명석집단은 기독교가 문자대로 해석한다고 비난한다.
“출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 여기서 ‘왕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왕벌을 개구리나 쥐, 악충과 같은 자연적 재해로 보며(Bochart) 또 다른 이들은 이스라엘 광야 체재시 가나안을 침략하였던 애굽의 라암세스 3세(Ramses)로 이해하기도 했다(Pulpit Commentary). 그 외에도 팔레스틴에 자생하던 독한 말벌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재해, 가나안인들의 마음속에 찾아든 극심한 공포 등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어느 한가지 견해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리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던 하나님의 모든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도움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함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평행 구절인 신 7:20을 참조하라. (호크마 주석)
“신7:20 왕벌을 보내어 – 이미 출 23:28에서 약속된 내용이다. 여기서 ‘왕벌‘에 해당하는 원어 ‘치르아‘는 ‘고통을 주다‘, ‘채찍질하다‘란 뜻의 어근 ‘차라‘에서 파생된 말인데, 주로 사해 주변의 사막을 포함한 팔레스틴 여러지역에서 발견되는 ‘말벌‘(hornet)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실제로 팔레스틴에 자생(自生)했던 독한 말벌을 가리킨다. (2) 자연적인 재해를 가리킨다. (3)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인한 초자연적 재해를 가리킨다. (4) 이스라엘의 광야 체재시 팔레스틴을 침공하여 가나안 족속을 약화시켰던 애굽 군대를 가리킨다. (5) 과거 출애굽 사건 및 최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정복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족속들에게 심겨진 심한 공포심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인지를 가려내기란 매우 힘들다.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왕벌‘을 혹은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던 ‘하나님의 모든 도움‘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호크마 주석)
➂ 일반 비유(짐승 비유, 돌 비유, 기타 비유)
성경에서 비유로 나타내는 몇몇 구절을 올려 놓고, 마치 성경전체가 비유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억지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일일이 반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➃ 오병이어
“본문은 지금도 떠들썩한 기독교 최고의 오병이어의 사건이 등장한다. 너무 신기해서 안 빋을 수도 없는 것이 신앙자의 입장이다. 흔히들 이 사건에 회의를 가지면 신앙은 논리적으로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한다. 과연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였겠는가? 문제도 성경 답도 성경에 있다고 했다. 오병이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려고 먹을 것을 물어 보았다고 했다. 여기서 예수님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 진짜 떡이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이 하늘의 만나인 생명의 말씀을 무리지어 앉혀놓고 전하신 것이다. 오천명이 먹었다는 오병이어는 결코 떡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한 것이다. 먼저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졌다는 것은 어느 한사람을 통해서 설교자료를 잡고 그것을 갖고 전체가 듣는 것을 말한다. 어린애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교자료를 얻었다는 것이다. 둘째, 열두 광주리와 남은 조각들은 무엇인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제자들이다. 남은 조각은 말씀의 부스러기같은 자기 간증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난 뒤, 말씀의 부스러기 곧 자기간증들이 많이 있을 것이 아닌가? 고로 12 광주리에 남은 조각이 남았다는 것은 12 제자들이 예수님이 전한 말씀을 듣고 또 들으니 말씀의 부스러기, 곧 자기 간증이 차고 넘쳤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메시야인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가면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또 전하고 했다는 것이다.” (초급, 비유론, 125-126쪽)
정명석 집단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떡이 실제 떡이 아니라 말씀이었다고 말한다. 떡이 설교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아래 제자들의 말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마 15:33)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막 8:4)
정명석집단은 아래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병이어가 떡에 관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초급, 비유론, 126쪽)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11)
그러나 본문은 오병이어에 대한 것이 떡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오해를 한 것을 뜻한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을 제자들은 ‘떡’에 관한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정명석집단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12)
기적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뜻한다. 무조건 기적과 이사가 나타난다면 다른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 정명석집단의 해석법이라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놀라우신 기적은 어떻게 해석을 하며, 성자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기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기적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➅ 말세에 대한 비유 (해달별에 대한 비유)
정명석집단의 30개론 초급과정의 비유론을 보면 많은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타나지만, 일일이 대응할 가치조차 없어 보인다. 다만 말세에 대한 비유에서 해달별에 대한 비유와 구름에 대한 비유를 살펴보자. 신천지도 해와 달과 별을 다르게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성경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환란 후에 우주적인 대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자칭 메시야들은 자신이 올 때에 어떤 우주적인 변동도 없었고, 구름을 타고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성경구절을 비유로 풀어 다른 뜻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주로 인용하는 구절이 다음과 같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창 37:9-10)
창세기 37장 본문에서 해달별은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을 뜻한다. 즉 성경에서 해달별이 비유로 상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황당하다. 성경에서 어느 특정한 단어는 반드시 동일한 비유로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실제로 하늘에 떠있는 해달별을 문자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비유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개론은 창37장 본문에서 해달별이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로 비유된 것을 다시 비유하여 ‘구세대’라고 해석한다. 신천지는 해를 목자, 달을 전도자, 별을 성도라고 비유풀이한다.
“말세가 오면 <해달별>이 빛을 잃고 떨어진다고 했다. <해달별>이 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 역사가 오면 기성의 구시대가 빛을 잃는다는 말이다. 주권이 바뀔 때 가치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해달별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과연 구약의 예언대로 신약시대 때 실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요셉의 꿈을 풀고 형제들이 미워했듯이 그 때 예수님은 성경을 풀었는데 시대 종교의 형제들이 미워했다. 그리고 중심자인 요셉을 통해서 역사가 바뀌듯이 예수님 앞에 구약의 해달별들이 무색함을 받았다. 즉 예수님 때 신약의 해달별 앞에 구약의 종교적 해달별들의 사명이 다하여 빛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가 이미 흘러 갔건만 문자 그대로 풀 때 도저히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므로 말세의 천체상의 모든 존재현상을 사람으로 풀어야 되겠고 성경의 근본이 본래부터 해달별이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만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못 깨달았을 뿐이다.”(초급, 비유론, 134쪽)
즉 정명석 집단의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가 빛을 잃고 역사가 바뀌게 된다는 결론으로 비유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재림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해석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세에 있어서의 성도들이 모두 실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의 강림을 열망해 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반대하다가 전부 떨어진 것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 그날에 실족하게 됨으로써 그와 같이 떨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원리강론, 1995, 130-131쪽)
➆ 재림에 대한 비유 (구름)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정명석집단을 포함하여 자신을 메시야나 재림예수로 비유하는 이단교주들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구절에 대해서 비유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적인 재림주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구름이란 첫째, 구약에서 예언된 구름이 하나님을 믿는 깨끗한 유대 종교인들을 두고 말씀한 것이며 둘째, 신약에서 예언된 구름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 곧 기독교인들이 구름이다. 신약의 예언도 지극히 과학적인 비유이다. 더러운 물이 태양에 의해 증발되어 창공에서 깨끗한 구름으로 전환되듯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구시대 종교인들이 메시야를 믿고 그 말씀을 행함으로, 예배를 통해 새 시대 종교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유대 종교인들이 과거 다니엘서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었듯이 현 기독교가 만일 구름으로 비유한 문장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유대종교와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름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초급, 비유론, 148쪽)
30개론의 구름에 대한 주장도 통일교 원리강론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과연 무엇을 비유하였을까? 구름은 지상에서 더러운 물이 증발(정화)되어 올라간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7장15절을 보면 물은 타락한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름은 타락한 인간이 중생하여 그 마음이 항상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독실한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구름은 성서나 고전에서 군중을 표시하는 말로 씌어졌다(히 12:1)” (원리강론, 성화출판사, 1995년, 543-544쪽)
정명석집단,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구름을 사람, 종교, 교회등으로 비유하는데 그 원조는 통일교이다. 이단들은 서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아래 다니엘서 7장13-14절 구약의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초림예수도 구름을 타고 오기로 예언되어 있었는데, 마굿간에서 태어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재림예수도 구름을 타고 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으며, 구름은 사람을 비유한다는 것이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니엘 7:13-14는 초림예수를 예언하는 구절이 아니라 재림예수를 예언하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미래적인 시제로서 다니엘서를 직접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즉 장래적인 시제로서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리라(will see)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➇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
“아담을 생명나무로 비유하였을 진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누구를 비유하며 가르킨 것인가?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아담 앞에 상대기준이 되는 하와를 두고 말한 것이 틀림없다. 남자를 생명나무라 칭하였고, 하와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칭하였던 것이다. (초급, 비유론, 156-157쪽)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하와로 비유하고, 그 과실을 따먹었다는 것을 사탄과 하와의 섹스로 보는 주장이 통일교의 원죄교리인데, 정명석이 이와 같은 주장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통일교 계열의 이단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 자기와 함께 한 아담에게도 그 과일을 주었으며, 그도 먹었다고 했다. 먹었다는 말은 취했다는 말이다. 과일은 입으로 먹지만 이것은 취하여 먹는다는 단어로 풀어야 이치에 맞다고 하겠다. 그들은 그 과일을 먹은 후 우선 자기들의 벗은 수치를 알게 되었다. 어느 과일이 따먹으니 옷의 벗음을 알게 될까? 그러면 과일을 안따먹으면 벗은 수치를 모른단 말인가? 여기도 모순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와의 행동을 볼진대 따먹고 치마로 가렸다고 했으니 치마 속에 감추인 사랑의 과일이라는 점에서 힌트를 얻고 깨달을 수 있다….. 또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고통이 오고 또 잉태케 되었다. 세상에 무슨 과일이 따먹으면 잉태한단 말인가?” (비유론, 80-81쪽)
성경은 과실을 먹고 잉태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저주를 받아서 장차 잉태하는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정명석은 통일교 출신으로서 원리강론의 선악과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서 전혀 성경에 근거를 둔 내용이 아니라 모순과 오류일 뿐이다.
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하와라면, 하와도 그 과실을 먹었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통일교 교리로 보면 하와가 하와를 간음하였다고 말하는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하와라고 주장하는데, 성경은 하와를 창조하기 이전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에덴동산에 먼저 있었다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남성 단수)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남성 단수)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남성 단수)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8)
➂ 통일교는 뱀이 하와와 간음을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뱀이 과실을 먹도록 유혹은 했지만, 뱀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말이 성경에 단 한마디도 없다.
➃ 하체를 가렸다고 하여 하체가 범죄했다는 주장은 웃을 수 없는 주장이다. 오래 전 목욕탕에 불이 났을 때에 사람들은 하체를 가리거나 얼굴을 가렸다. 그들은 얼굴이나 하체로 범죄하였는가? 통일교의 원리강론도 스스로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원리강론, 성화출판사, 1995년, 79쪽)
➄ 과연 하와와 천사가 간음을 하여 악의 혈통 가인을 낳았는가? 성경은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말하고 있으며,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였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
2) 불의 개념 (벧후 3:8-13)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8-13)
정명석 집단은 ‘불’을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불을 불로 보고 온 세상이 불심판 당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말세의 심판은 실제의 불이 아니라 말씀의 불로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17절에 ‘무식한 자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했다. 초림 때 유대 종교인들이 문자주의적 인식관 속에 불을 진짜 불로 풀고서 망했듯이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사사로이 풀고서 (벧후 1:20-21) 잘못된 인식관 속에서 스스로 망한다는 것이다. 고로, 불은 말씀으로 구름은 사람으로 보신 예수님과 같이 신약전체도 유대종교인들처럼 문자 그대로 믿고 망하지 말고 불은 말씀으로, 구름을 기다리는 종교인으로 믿는다면 실수함이 추호도 없을 것이다.” (초급, 불의 개념, 182-183쪽)
정명석집단의 불에 대한 주장도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모방한 것으로서 원리강론 126-127쪽에서 불을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불’은 여러 가지 의미를 뜻하는데, 문자 그대로 ‘불’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심판’을 말하기도 하는데, 종말적인 심판을 뜻하기도 하였지만 현세적인 심판을 뜻한 적도 있다. 또 구약에서 불은 ‘하나님의 현현’ 또는 ‘임재’를 나타내기도 하였고 또 불은 ‘성령’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성경은 벧후 3:8-13과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히 12:26-27)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계 20: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3) 말세론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29-31)
앞장에서 보았듯이 정명석집단은 해.달.별을 다른 의미로 비유풀이를 하며, 구름을 타고 온다는 구절에서 구름이 사람이라고 해석하는데, 구름에 대한 것도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모방한 것이고, 또 해달별에 대한 것조차도 통일교 원리강론을 모방한 것이며, 불에 대한 주장까지도 모방한 것이다
즉 그들의 말세관은 이러한 우주적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종말관에 대해서 기독교는 직선적이고 자신들은 순환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명석 집단은 말세의 개념을 (1) 역사의 전환 (2) 시대성의 전환 (3) 주관권의 전환이라고 본다. 쉽게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정명석집단의 시대로 바뀌는 것을 말세라고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역사의 전환에 대해서는 ‘구 역사와 신 역사의 전환’이라고 말하며, 섭리의 차원이 높아지고 이상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두 번째 시대성의 전환에 대해서는 구 시대의 끝과 새 시대가 시작되는 전환기라고 말한다. 또 세 번째 주관관의 전환에 대해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뀐 것처럼 신약에서 성약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하늘이 보는 말세란 어떤 것인가? 말세는 멸망의 때가 아니라 역사의 전환점으로 구 시대의 끝과 신 시대의 시작, 과거의 끝과 현재의 시작이 되는 점이다. 봄의 말세는 여름의 초, 여름의 말세는 가을의 시작, 가을의 말세는 겨울의 시작, 겨울의 말세는 봄의 시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말세가 있듯이 개인, 가정, 민족, 천주적 차원에서의 말세가 항상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세를 경험하며 살고 있는데, 인식관이 잘못되어 그것이 연속 지나가도 모른다”(초급 188-189쪽)
어느 누구도 봄의 말세가 여름이라고 하거나, 여름의 말세가 가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정명석 집단에서는 첫째 기독교의 신학적인 개념에 대해서 무지하며, 둘째 성경적인 지식이 전무하며 셋째 비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세의 정확한 개념은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상당히 넓은 의미의 기간을 뜻한다. “말세에”라는 헬라어 단어 “에스카토스”는 반드시 종말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사역하였던 당시에도 사용되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스카토스)에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이 말세(에스카토스)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0)
또한 구약에서도 ‘말일’이라는 단어는 종말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제 내가말일에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단 10:14)
“말일에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사 2:2)
정명석 집단은 구약에서 예언된 심판과 종말에 대한 구절이 초림 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구약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예언은 말세의 끝, 즉 초림예수 때가 아니라 재림예수 때를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말세의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정욕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 “주께서 강림한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자들이 곧 정명석집단이 아니겠는가?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3-7)
4) 공중휴거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사람들이 구름으로 끌어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공중으로부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신자들은 육신이 산 채로 공중으로 들림을 받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믿고서 모두 성경에 기록된 대로 ‘휴거’를 다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 상에는 인력이 있어서 모든 물체를 잡아 당기고 있는 것이 법칙이다. 어떻게 살아있는 육신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수 있겠는가? 문자 그대로 육신을 가진 존재가 과연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도 성서 속의 메시야 강림에 관한 다른 예언들 처럼 문자 그대로 풀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공중 휴거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에만 있는 줄 알지만 구약 때도 있었다”(초급, 공중휴거, 205-206쪽)
역시 정명석집단은 정통기독교의 신학 자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통 기독교에서 전천년주의를 지지하는 견해 중에는 대환란 이전설과 대환란 이후설의 두가지가 있는데, 대환란 이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대환란 이전에 세상에서 옮겨질 것, 즉 휴거를 주장하지만, 대환란 이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환란 기간 동안 세상에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정명석집단은 기독교인 모두가 휴거를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또 신자 개인들이 휴거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정통교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천년론을 지지하는데, 무천년론은 휴거를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단어는 마25:6에서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으며, 행28:15에서는 교인들이 바울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전쟁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장군들을 시민들이 맞이하는 그러한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정명석집단의 다음 주장을 보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결국 지상에 있는 인물도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초림 때 예수님이 과연 하늘에서 강림하여 내려왔는가? 유대종교인들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로 내려왔다고 하느냐?’(요 6:41-42)고 말한 것같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마리아의 태 보자기를 통해서 태어났다. 예수님은 말 마굿간에서 갓난 아기로 났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시는가?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났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이는 표현이 그랬을 뿐이다.” (초급, 공중휴거, 207쪽)
정명석 집단은 예수님도 땅에서 났는데 ‘하나님에게로 난 자’로 불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교도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것을 땅에서 영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사탄 주권을 물리치시고 지상천국을 복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주권의 세계에서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1995년, 129쪽)
30개론에서는 “기다렸던 자가 이미 와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유대 종교인들은 진리의 비유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기다렸던 자가 이미 와서 같이 생활하고 있어도 몰랐다”(초급, 공중휴거, 210쪽)
과연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난 자가 아닐까? 정명석 집단은 태초부터 선재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요 6:62)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
정명석은 예수님을 땅으로 끌어 내리고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려는 고의적인 목적을 위하여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정명석 집단에서 말하는 휴거는 무엇일까? 구약과 신약 시대가 지나가고 정명석의 성약시대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휴거이며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벧후 3:8,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월화수목금토일의 창조 7일이 나온다. 하루를 천년으로 환산하여 이 창조 7일을 확대시키면 7천년이 된다. 종교역사로 따져볼 때, 월화수목의 4일은 확대하면 구약 4,000년에 해당되고, 금토는 확대하면 신약 역사 2,000년에 해당된다. 구약 4,000년과 신약 2,000년을 더하면 6,000년이 된다. 마지막 일요일은 안식일로 확대하면 성약 1,000년으로 천년왕국 기간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안식일을 확대한 천년 왕국 기간은 휴거기간이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 것 같이 안식하게 해주는 기간이다. 그 안식일 곧 휴거가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초급, 공중휴거, 216쪽)
5) 무지 속의 상극세계(역대하 35:18-27)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대하 35:18-27)
역대하 35장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애굽왕 느고의 말을 남유다 왕 요시야가 듣지 않음으로서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시야가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 정명석 집단은 정명석을 느고로 비유하여, 요시야의 죽음을 기독교로 비유하고 무지 속의 상극 세계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무지 속의 상극 세계가 역사 속에서 많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정치, 종교, 사회적으로 나타나지만 항상 그 시대 사람은 기다렸던 자들과 무지 가운데 골육 상쟁을 일으켰다. 좀 더 새로운 역사가 자기를 위하여 오는데, 무지 속의 상극세계를 일으켰다”(초급, 무지 속에 상극세계, 237쪽)
정명석집단은 매 시대마다 하늘이 보낸 자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30개론은 그 매 시대를 에덴동산의 역사(이담과 하와), 출애굽 역사(모세), 가나안 복귀 역사(여호수아), 초림 주 강림 역사(예수님), 종교개혁의 역사(루터), 지동설(코페르니쿠스)로 예를 든다. 카톨릭이 루터를 알아보지 못하여 개신교가 나타났듯이, 정명석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시대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즉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하나님이 보내신 정명석을 몰라 보았다는 것이다.
“무지 속의 상극 세계는 이단과 정통 시비에 관한 새로운 차원의 역사적 조명이며, 과거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하고 구교와 신교에 대한 입장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매 시대마다 구교는 신교를 이단 취급해 왔다. 매 시대마다 하늘이 보낸 자를 몰라 봐서 무지 가운데 상극세계가 벌어졌고 이 시대 우리에게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30개론 강의안, 33쪽)
“매 시대마다 인간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찾지 못해서 무지 속의 상극세계가 벌어졌고 이 시대 기독교도 똑같은 길을 간다면 똑같은 결과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모든 교훈은 바로 우리의 입장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실지 모른다. ”(30개론 강의안, 35쪽)
정명석 집단의 주장과는 달리, 요시야왕의 죽음은 무지 속에서 상극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던 것이었다. 요사야 왕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고 종교개혁을 했던 왕이었으나, 므낫세 왕 때부터 도입했던 우상숭배 때문에 유다의 심판과 그의 죽음이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왕하 23:25-27). 하나님의 선지자인 훌다는 요시야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죽음을 예언하였다.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들은 말을 의논하건대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대하 34:26-28)
6) 이단의 개념
“종교 역사는 정통과 이단의 투쟁의 역사이다. 사실상 종교 역사에서 이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참된 것이 나타날지라도 이단으로 몰려 버리는데 있다. 더구나 어느 시대고 교회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자 곧 이긴자는 정통이 되고 진 자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를 둘러싸고 자기 해석과 다를 경우 2) 또 종파간에도 교리상 혹은 교권문제를 두고 의견을 달리할 때 그리고 3) 신앙노선이 자기의 뜻이 같으면 정통이나 자기 신앙에 안맞으면 이단시되어 배척당하는 것이 종교의 현실이다.” (초급, 이단의 개념, 244쪽)
정명석집단은 이단이라는 개념을 상대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었더라도 그 견해가 성경적이라는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30개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미 통일교와 다른 이단들이 항상 주장하던 것과 동일하다. 30개론은 선지자 시대, 유대교와 기독교 시대, 천주교와 개신교 시대를 예를 들며, 현재에 기독교와 정명석집단 자신들을 비교하려고 한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재림주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구약시대는 모세를 통해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모세의 틀만 믿으면 되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사인 구약도 믿고 예수님의 틀도 믿어야 했다. 만약 구약을 부인하면 뿌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성약 시대는 구 시대의 터전 위에 재림주의 틀까지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시대 역사의 주인공을 부인하면 누구든지 시대의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초림 때 하나님이 육신을 쓰고 나타났듯이 재림 때도 하나님께서 재림주를 통해서 다시 나타나신다” (초급, 이단의 개념, 252쪽)
“사 41:25 내가 한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북방은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침입했던 모든 침략자들에게 선지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적들이 있는 곳, 원수시 하는 곳, 멸시하던 곳을 말한다. 원수시 하던 곳에서 이스라엘을 도울 자,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적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주관자가 나타난다. 종교의 북방은 보다 적대시하는 곳, 보다 실권적인 곳의 상대적인 곳이었다. 종교의 원수는 이단이었다. 유대종교가 원수시 하던 예수님이 곧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마22:37-39)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초급, 이단의 개념, 256쪽)
7) 예정론
30개론은 하나님의 예정을 ‘절대예정’과 ‘상대예정’이라는 용어로 나누고 있는데 절대예정은 개혁주의의 칼비니즘을 말하고 상대예정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알미니안의 조건부 예정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른 이단들에게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정명석 집단은 예정론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이 초보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알미니안에 대한 신학적 지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작 정명석집단이 말하는 예정은 유치하고 저급한 것으로서 선하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고, 악하고 나쁜 것은 사람의 책임분담에 의한 실수와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선하고 좋은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악하고 나쁜 것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악하고 나쁜 것은 사람의 책임분담에 의한 실수와 타락으로 인한 것이다”(초급, 예정론, 266쪽)
개혁주의의 예정론은 선과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숙명론적인 예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섭리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알미니안의 자유의지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적인 행위구원론과 구별된다.
정명석집단은 30개론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양면성 예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개혁주의 예정론을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매도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행위와 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적인 행위구원론을 말하고 있다. 정명석집단은 그것을 책임분담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결국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는 사람의 책임분담이 있다. 아무리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잘 해주시고 또한 멋있는 역사를 허락했을지라도 사람이 사람 책임분담을 다할 때 비로소 예정이 이루어진다. 역사 가운데 죄악과 심판, 실패와 흉화, 사람이 겪는 각종의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이 결코 예정했거나 허락하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무지하여 잘못함으로서 일어난 것이다. 아담 하와의 타락도 예정 밖의 일로 사람의 무지로 타락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도 예정이 아니라 유대종교의 무지가 그리스도를 살해한 것이다.” (초급, 예정론, 269쪽)
30개론이 말하는 예정론도 통일교의 예정론을 상당부분 모방한 것이다. 특히 ‘책임분담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통일교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도이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 경미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 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죄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원리강론, 1995년, 217쪽)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모두 고통과 고난, 죽음을 당하였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무지하여 잘못함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정명석집단의 주장을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살해됨으로 실패한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예수를 보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8) 홍수심판
“홍수 심판은 엄연히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사54:9) 그렇다면 문제는 홍수의 범위와 심판의 대상이다. 과연 홍수가 지구 전역에 걸쳐 일어났는가? 아니면 노아가 살던 지역에만 일어났는가? 또한 당시 전세계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전체 심판이었는가? 아니면 일부 지역의 하나님과 관계되는 특정한 대상들을 향한 부분 심판이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홍수 심판은 전체 심판이 아니고 부분 심판이다. 전체 심판이라면 이해가 안가는 것이 너무나 많다(초급, 홍수심판, 297쪽)
정명석 집단은 노아의 홍수가 지구 전체적이 아니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부분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잘못 해석하여 전체적인 홍수로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역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것과 기독교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30개론은 홍수에 대한 의문점을 십수 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의문점은 마치 불신자들 또는 안티기독교인들의 비난성 질문과 동일하다. 그 의문점들은 아래와 같다.
먼저 노아의 홍수가 전체적이 아니었고 부분적이었다고 해석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이상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노아의 홍수는 부분적이 아니었고 전체적이었으며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성경학자들은 노아의 홍수가 전세계적이었음을 증거하는 내용이 성경 안에서 약 30개 넘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➀ 홍수가 전체적이라는 성경적인 증거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6-7)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1-13)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창 6:17)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 7:4)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19-23)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은 앞으로 있을 전체적인 심판을 노아의 홍수로 비유하고 있으므로, 지역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상해 진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➁ 구름의 비로 물이 에베레스트 산을 덮을 수 없다는 주장
창 7:11은 ‘큰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들’ 위에 존재했던 물이 터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창1:6-8)
윗구절에서 궁창이란 ‘펼쳐진 것’ 혹은 ‘넓은 것’을 의미하는데 히브리어로는 ‘라키아’라고 한다. 궁창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아마 하늘이 반구(半球)와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었다”는 것은 땅에 있는 물과 대기권의 물(구름, 수증기등)을 가르킨다. 그야말로 현대과학에서도 이론을 말할 수가 없는 정확한 논리인 것이다. 지구상의 물과 대기권 안에 있는 수분(수증기와 구름)만으로는 지구전체를 물로 덮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성경구절의 ‘궁창’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창1:14)
창 1:14에서의 궁창은 대기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궁창은 대기권을 벗어나 더 연장하여 태양과 달이 있는 우주까지를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 우주에 포함된 수분은 지구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우주에는 얼음상태의 수분도 매우 많이 존재한다.
또 에베레스트 산까지 물이 덮힐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여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6-9)
오늘날 지질학자는 현재의 산과 골짜기에 대해서 먼 옛날보다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조개껍데기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만일 지질학자들의 학설과 같이 옛날, 창조시의 태초의 산이 그다지 높지 않았고, 골짜기가 깊지 않았다면 우주의 물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물이 지구전체를 덮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주의 물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남극과 북극지방의 얼음이 녹는다면 지구의 대부분이 물에 덮힌다는 이론적으로 충분한 학설도 있다.
➂ 방주에 그 많은 종류의 생물을 어떻게 실을 수 있는가?
길이가 삼백규빗이며, 넓이가 오십규빗이며, 그 높이가 삼십규빗이라는 방주는, 전문가들이 제시한 체적능력중 가장 작은 체적으로 계산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 미국철도에서 사용하는 표준가축운반차량 522대의 체적과 같다고 한다.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규빗, 광이 오십규빗, 고가 삼십규빗이며“(창 6:15).
방주의 크기는 길이 135미터, 폭 24미터, 높이 14미터가 되며, 이것의 길이는 축구장보다 좀더 길고, 폭은 축구장의 절반 가량, 건물 3층높이가 되는 배수량 2만톤의 거대한 배인 셈이다. 이 면적이면 현재 생존하는 생물체(포유류, 조류 등) 17,600여종의 암수 한쌍씩, 즉 35,200마리의 동물을 실어도 약 3분지 1만 차지하는 큰 면적이다. 따라서 방주는 동물들과 노아의 가족을 싣고 항해하기에 충분한 크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위자들은 오늘날 약 일만팔천종 이상의 생물학적 종이 창세기의 종류(Kind)와 동일하다고 가정을 하여도, 방주의 용적이 그들을 수용할만한 충분한 체적을 가진다고 본다. 표준가축차량 한 대는 약 240마리의 양을 수송할 수 있다고 하는데, 150대의 차량으로는 양 정도의 크기의 짐승을 삼만육천마리를 수송할 수 있다고 하며, 이것은 방주 약 삼분지 일의 체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의 짐승들은 양보다 훨씬 큰 짐승들도 있었으나, 양보다 훨씬 작은 곤충이나 새들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표준 짐승의 크기를 양으로 계산하는 것은 솔직히 너무 크다고 한다. 또 생물학적인 종에 대한 구분이 태초에는 지금보다 적었음이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방주의 체적은 모든 짐승을 싣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➃ 세계의 홍수 설화와 홍수 지층
실제로 전세계에는 홍수에 관한 설화가 있으며, 물에 의한 광범위한 퇴적층의 지층이 존재한다. 특히 짧은 시간 안에 형성된 것으로 믿어지는 석탄층의 두께와 화석들은 일반적인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➄ 기타
만약 노아의 홍수가 지역적인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사람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을 계속 어긴 결과가 된다. 지역적인 홍수와 수해는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더욱이 지역적인 홍수를 일으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렇게 큰 방주를 120년간에 걸쳐서 만들라고 지시하신 것도 이상해지고, 모든 짐승을 방주에 실으라고 하신 것도 이상한 일이 된다. 특히 지역적인 홍수에 공중의 새까지 방주에 실은 이유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