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씨에 대한 신천지의 엉터리 주장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이인규
– 특히 이날 저녁 집회에는 이만희 총회장이 직접 강단에 서 ‘두 가지 씨(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와 추수’라는 주제로 성경의 예언(약속)과 성취를 전했다. 이 총회장은 먼저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눅8:11) 이다”는 전제를 두고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예레미야를 통해 두 가지 씨를 뿌리겠다고 예언한 내용(렘31:27)이 2000년 전 예수를 통해 성취됐다”며 “예수는 초림 때 좋은 씨(진리의 말씀)를 뿌렸고, 마귀는 같은 밭(예수교)에 가라지(마귀의 비진리)를 뿌렸다. 두 씨는 함께 자라며 계시록 때 추수된다”고 설명했다. –
위 글은 신천지의 광고문이며, 2013년 5월 현재 신천지는 소위 말씀대성회라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집회를 열고 그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혹시 위 글을 읽고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신천지 교인이 있는가? 위 광고문에는 비성경적인 심각한 오류가 있다. 바로 신천지의 엉터리 성경해석과 잘못된 교리가 여러 가지 나타나고 있다.
1) 예레미야 31:27은 두가지 씨를 뿌리겠다는 예언은 성경과 다르다
2) 마귀가 같은 밭(예수교)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내용이 성경과 다르다
3) 두 씨가 계시록 때 추수되지 않는다.
4) 씨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 예레미야 31:27의 두가지 씨를 뿌리겠다는 예언은 성경과 다르다
신천지는 구약의 예레미야 31장27절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의 두 종류의 씨가 뿌려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물론 신천지 자신은 ‘사람의 씨’(하나님의 씨)고 기독교는 ‘짐승의 씨’라고 이원론적인 해석을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 해석으로서 예레미야서의 본문은 두 종류의 씨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 아니다. 신천지는 성경을 본문의 뜻과 전혀 다르게 짜맞추는 엉터리 해석을 상습적으로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7-28)
얼핏 본문을 부분적으로 보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 두가지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에 뿌리겠다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천지는 그 두가지 씨를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한다. 알곡이 사람의 씨이고, 가라지는 짐승의 씨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신천지의 해석은 완전히 무지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번역] 앞으로 이런 날이 오리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이전에는 자나깨나 이 백성을 뽑고 부수고 허물고 멸하고 해치기만 하였으나, 그만큼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세우며 심어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현대인의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땅에 사람과 짐승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게 할 날이 올 것이다.내가 그들을 철저하게 뽑고 파괴하며 허물고 엎어 버리며 멸망시키고 재앙으로 쳤던 것처럼 앞으로는 철저하게 그들을 세우고 심을 것이다.
본문에서 ‘씨를 뿌리다’는 동사의 뜻은 ‘번성하게 하다, 퍼뜨리다’는 뜻이며,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구별하여 뿌린다는 이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엉터리 해석이 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의 귀환을 보여주시는 축복의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원래 농경업을 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들에게 ‘저주’란 사람과 짐승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표현이고, 그들에게 축복의 표현은 사람의 자손과 함께 육축이 번성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러한 표현이 상당히 많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슥 2:4)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36:11)
특히 예레미야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그동안 내려진 저주와 심판을 “사람과 짐승을 땅에서 없어지게 한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 왕이 정녕히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뇨 하도다” (렘 36:29)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케 하여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하여 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렘 50:3-4)
특히 예레미야 본문과 마태복음 13장을 ‘두가지의 씨’로 연결시키는 것은 소위 엉터리 짝풀이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두가지는 전혀 다르다.
첫째, 마 13장에서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자의 아들들’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예레미야 본문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라고 언급함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다.
둘째, 예레미야 본문은 마태복음 본문과 같이 예수님이 뿌린 씨와 원수가 뿌린 씨의 두 종류가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이 뿌린 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예레미야 본문의 뜻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의 두 종류가 서로 다른 씨로 구별되어 뿌려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을 둘 다 번성시켜준다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그 씨는 ‘후손, 자손’을 뜻하며,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에서 사람(자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짐승(육축)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모두 동일한 회복과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는 의미이다.
2) 마귀가 같은 밭(예수교)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내용은 성경과 다르다
마13장에 대한 본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해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풀어주셨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해석이 정답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마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에서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여 주셨다. 가라지는 교회뿐 아니라 세상에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가라지 역시 악한 자들의 아들들, 즉 불의한 자들을 뜻한다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여 주셨는데, 가라지의 씨도 교회 안에서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뿌려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교회를 위해서만 보내주신 것이 아니며, 성경은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가라지에 대해서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예레미야에서는 짐승의 씨와 사람의 씨 모두가 하나님이 뿌린 씨이지만 마태복음 13장에서 가라지의 씨는 사탄이 뿌린 것으로 전혀 다르다.
본문에서 ‘밭’은 ‘마음’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라 ‘세상’을 뜻한다고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여 주셨다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신천지는 마태복음 13장의 첫번째의 비유(네가지의 밭)와 동일하게 본문의 두 번째 비유에서도 ‘씨’를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이제는 ‘밭’을 ‘교회’라고 해석한다. 이상한 것은 첫 번째 비유에 대해서 밭은 ‘마음’이라고 하더니, 두 번째 비유에서는 ‘교회’로 바꾸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밭을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구절에서 ‘제 밭’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소유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이 ‘밭’은 ‘마음이나 교회’라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라 온 세상이 예수님의 소유이며, 또한 본문에서 ‘씨’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성도, 즉 천국의 아들들을 말하며, 씨는 추수 때까지 자라나서 비로소 곡식을 맺게 되는데, 그 씨는 처음부터 교회 안에서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적인 구도, 영과 육의 구도, 선과 악의 구도로 구별하는 것을 헬라적인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대립되는 구도로 사탄이 존재한 것이 아니며, 선과 악이 처음부터 이원론적으로 존재하며 대결구도로 양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처음부터 함께 존재한 것이 아니며, 사탄은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것이다. 악은 선과 함께 존재한 것이 아니며, 선의 부재(不在)이며 선의 결핍을 말한다.
본문에서 ‘잘 때’라고 하는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라는 의미일 것이다. 원수는 사탄을 뜻하는 것이 당연하며, 곡식이 뿌려져 있는 밭에 가라지의 씨를 덧뿌리고 간 것이다. ‘덧 뿌리고 갔다’는 것은 이미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두 개의 씨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고, 가라지의 씨는 원수에 의하여 몰래 덧뿌려진 것이다.
3) 두 씨가 계시록 때 추수되지 않는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며, 즉 하나님나라(천국)의 ‘선택과 유기성’을 뜻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같는다.
(1)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의인과 불의한 자에 대해서 공존하도록 허용하신다.
(2) 하나님은 종말적으로 의인을 구원하시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땅이 아니라 악과 불의가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가라지는 독보리의 일종으로서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비슷하여 실제로 이삭이 열리기 전까지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경은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지를 미리 뽑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곡이 함께 뽑힐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의미는 첫째, 늦게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잘못 뽑히게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둘째,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권한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으며 셋째, 심판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심판은 예수님의 주권이라는 뜻이며, 현세에서 직접적인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유기’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악인을 유기하거나 방치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Justice)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그대로 유기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제안한 것이며,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접 뽑겠다는 것을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이다. 성경은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말한다.
즉 추수는 마지막 날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 이 심판의 시간을 계시록의 어느 특정한 시간으로 해석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4) 씨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서 ‘씨’라는 단어는 문자적일 수도 있고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씨에 대한 경우를 생각나는대로 정리하여 보자면, 식물의 씨앗(창 1:11-12), 말씀(마 13:23), 생명(고전 15:36), 후손(요 7:42), 성령(요일 3:9), 하나님의 아들(마 13:38), 아주 작은 것(마 13:32)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비유를 어느 한가지 단어의 뜻만으로 비유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코메디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결론 : 신천지의 성경관은 거짓 해석이다.
신천지 교회가 기독교의 성경관과 다르게 가르치는 세가지 방법을 크게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어를 비유와 짝풀이로 해석하는 방법이며, 이러한 방법의 목적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성경을 조작하여 만들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대로 성경해석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오늘 학교에 갔다”라는 구절에서 ‘학교’가 ‘극장’을 뜻한다고 비유한다면 “나는 오늘 극장에 갔다”는 내용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1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에서 하늘은 목자, 땅은 성도를 비유한다고 적용시켜서 “하나님이 기독교를 만드셨다”고 해석하여, 창세기 1장을 기독교가 타락하고 범죄하여 혼돈과 공허, 흑암이 된 것으로 해석하고, 계시록의 새하늘과 새땅이 곧 이만희가 신천지 성도라고 적용하는 것이 실제 사용하는 신천지의 해석방법이다.
둘째, 신천지의 성경관은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구도, 성령과 악령의 대결구도, 선과 악의 대결구도, 영계와 육계의 구도, 빛과 어두움의 구도, 진리와 비진리의 구도, 참목자와 거짓목자의 구도로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해석이며, 이것을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면서 기독교의 타락과 목사들의 범죄를 부각시키면, 그것을 배우는 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증오와 반감이 생기게 되며, 그 이단교회가 참교회로 인식되어지는 결과를 얻게 된다. 그들은 씨가 두가지이고, 그릇이 두가지이며, 나무가 두가지, 저울이 두가지…. 이런 식으로 모든 비유를 두가지로 만들어서 해석을 한다.
셋째, 시대마다 적용되는 구원관과 구원자가 다르다고 구별하는 많은 이단들의 방법인데 역시 신천지도 동일한 수법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구원사역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신천지는 이러한 구원관을 배도 – 멸방 – 구원으로 설명한다. 또 이러한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교주를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성경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적용시킨다.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성경의 용어는 보혜사, 이긴자, 두 증인,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 참 목자, 참 빛 등이다. 이러한 구원관은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라는 이름 대신에 교주 이만희를 대입시킴으로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환상만을 기록한 인물로 간주하고, 이만희를 계시록의 실상을 계시받은 유일한 인물로 부각시키는 사이비종교집단의 전용수법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천지의 최종목적은 이만희 교주가 말씀으로 오신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신천지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