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6장의 네가지 말에 대해서
이인규
1. 계시록 6장 1-2절 백마에 대해서
계 6:1-2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대부분의 정통신학적인 주석은 계6장1-2절의 흰 말을 탄 자를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일부의 견해일 뿐입니다. 특히 신천지는 그 흰 말을 탄 자를 ‘예수’라고 보며, 구체적으로는 이만희라는 육체(백마)를 탄 예수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주장합니다, 결론은 이만희가 재림예수라는 것입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신천지의 해석은 네 말을 신천지의 초창기 인물이라고 가르치며, 그것이 신천지의 실상계시라고 주장합니다.
또 신천지는 정통신학적인 해석 자체를 잘 모릅니다. 그들은 정통신학이 ‘흰 말을 탄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견해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정통주석의 해석은 ‘적그리스도’라고 보지 않으며. 장차 환란의 시기에 나타날 “어떤 정복자”로 해석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흰 말을 탄자가 예수인가 혹은 아닌가 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통신학적인 견해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석을 할 때에 성경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흰 말을 탄 자가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1) 계시록 6장에서 예수는 인을 떼고 있었으며, 그 때에 요한이 말탄 자를 본 것이므로 말탄 자가 예수일 수가 없습니다. 인을 떼는 자와 말을 탄 자를 동시에 예수라고 보는 것은 이상합니다
(2) 예수에게 4 생물이 “오라”고 지시나 명령을 할 수가 없습니다.
(3) 예수는 계속 일곱개의 인을 차례대로 떼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각각 다른 색깔의 말을 탄 자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볼 때에 그 중에 하나를 예수라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4) 면류관을 썼다는 구절 때문에 예수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계6장의 면류관(스테파노스)과 계19장의 면류관(디아데마)은 원어자체가 다르며, 19장에서 예수는 많은 면류관(왕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언급합니다. 계 19:12-13에서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디아데마, 왕관, 복수명사)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라고 말합니다.(5) 예수가 면류관을 받아 쓰고 나간다는 표현도 이상합니다. 예수는 면류관을 받아 쓰시는 분이 아니라 면류관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6) 성경에서는 면류관(스테파노스)의 의미가 왕이 쓰는 왕관(디아데마)의 의미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들(갈4:29)과 천상의 장로들도 면류관을 쓴다고 언급하고 있으며(계4:4),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계4:10). 해를 입은 여자도 12 면류관을 쓰며(계12:1), 부정적인 의미의 면류관(고전9:25, 썩을 면류관, 황충이 쓰는 면류관)도 성경은 언급합니다. 체육 경기장에서 이길 때에 쓰는 것도 면류관(딤후2:5. 스테파노스)입니다, 다시 말하여 면류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라고 볼 하등의 근거가 없습니다.
(7) 계시록 6장에서 각각의 색깔의 말탄 자들은 각각 환란을 갖고 왔습니다. 예수는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지만, 예수가 환란과 재앙을 갖고 온다는 주장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8) 성경학자들은 계시록 6장의 색깔의 말이 스가랴 1장 8-10절과 6장 2-3절을 반영한 것으로 봅니다, 계시록은 스가랴와 예레미야, 다니엘서, 이사야서등의 구약의 구절이 많이 인용됩니다. 스가랴에서 말을 탄 자를 예수로 볼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슥 1:8-10에서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슥 1:8-10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슥 6:2-5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2. 성경주석적인 증거
다음은 거의 대표적이며 보편적인 성경주석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모두 환란시대에 나타날 ‘정복자’를 흰 말 탄자로 설명하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올리는 이유는 정통신학적인 견해가 무엇인지 말하기 위함입니다. 신천지는 정통신학적인 견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곡을 시키고 있습니다
(호크마주석)
계 6:1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 본절과 다음절은 첫째 인에 해당된다. ‘어린양이…그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테 에노잎센 토 아르니온’은 마지막 인을 뗄 때까지(8:1)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문구이다(3,5,7,9,12절). 이는 그 어떤 인간도 뗄 수 없는 (5:3) 종말의 비밀을 어린양 자신이 여심으로 어린양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주체이심을 나타낸다.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우뢰 소리같이’는 하늘의 소리를 가리킨다(4:5; 요12:29). 한편 ‘오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쿠’가 누구를 향한 명령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에게 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Plummer). 그러나 본서에서 요한이 자신을 향해 ‘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듀로'(*)를 사용하고 있어(17:1; 21:9) 받아들이기 어렵다. (2)혹자는 그리스도에게 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Alford, Swet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곱 인을 떼시는 주체가 어린양이므로 네 생물이 그리스도를 향해 ‘오라’고 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혹자는 말 탄 자에게 명한 것으로 본다(Weiss, Robertson, Morris, Ladd, Johnson, Mounce, Charl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네 생물의 ‘오라’는 초청에 말 탄 자가 등장하여 즉각 행동하기 때문이다.
계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 요한이 첫번째 인을 떼고 난 후에 본 환상은 흰 말의 모습이다. 이는 슥6:1을 반영한다. 그러나 스가랴서에서는 색깔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반면 본서에서는 말 탄 자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흰색은 승리와 정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땅에 심판을 위한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 본절에서 흰 말이 나오고 그 탄 자가 활을 가지며 승리를 상징하는 면류관(스테파노스)을 가진 것으로 보아 말 탄 자가 승리자요 정복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로마 제국이나 로마의 정복자로 해석한다(Spitta, Bengel, Ramsay). (2)혹자는 메시야로 해석한다(Lange, Clarke). (3)혹자는 복음과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1:14; 2:17; 3:4,5; 19:11-16; 20:11, Zahn, Alford, Greijdanus, Augustine, Ladd). (4)혹자는 적그리스도와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Bruce, Swete, Walvoord, Caird, Beckwith). (5)혹자는 장차 나타나게 될 어떤 정복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Mounce, Morris, Barclay). 이 견해들 중 처음의 두 견해는 과거적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3-8절, 16,17절).
(IVP 성경주석)
계 6:1-2 첫째 인 : ‘오라’는 명령은 인을 개봉할 때 등장한 기사를 향하고 있다(3, 5, 7절에도 똑같다). 많은 해석자가 정복하는 기사를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본문을 19:11-12의 재림하시는 주님에 대한 환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두 장면에서 공통적인 유일한 요소는 승리의 상징인 흰 말뿐이다. 다른 학자들은 그 말 탄 기사가 복음의 승리를 표상한다고 주장하면서 마가복음13장10절을 인용한다.(살후2:7 역시 이 방향에서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기사의 명백한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네 기사 모두 심판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이번 기사는 압도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약주석시리즈 최세창주석)
계 6:1 ‘오라’의 대상에 대해서 (1) 저자인 요한이라는 설 (2) 그리스도라는 설 (3) 말 탄 자라는 설등이 있다. 본서에서는 저자인 요한을 오라고 하는 경우에는 ‘듀로’가 사용된다는 점(17:1, 21:9)과 2절 초두에 “내가 이제 보니 흰 말이 있는데”를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2)설에 대해서 왈부드는 “그리스도는 대환란이 시작되는 때가 아니라 대환란의 끝에 정복자로서 지상에 오신다”라고 반대하였다. 또 (2)설은 나머지 세 인과 관련된 바 땅 위에 환란이나 고통을 초래하는 말 탄 자들의 역할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위의 반대 또는 비판 내용과 전후 문맥상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존슨은 “이것은 1세기의 원형투기장이나 서커스장에서 ‘오라’ 혹은 ‘나가라’라는 명령을 듣고 여러 병거를 탄 자들이 투기장으로 나가는 것을 비유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계 6:2네 인들과 관련된, 말 탄 자에 관한 이야기는 스가랴 1:8이하와 6:1 이하의 말과 그 탄 자들의 상징을 연상케 한다. “성서에서 말은 대체로 힘, 두려움, 전쟁, 정복등의 의미와 관련해서 말해진다. 계시록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와 관련지어져 이야기된다”(Handriksen).
여기의 흰 말을 탄 자에 대해서 (1) 로마제국이라는 설 (2) 로마의 정복자라는 설 (3) 로마를 위협한 팔티야라는 설 (4) 19:11에서 처럼 메시야라는 설 (5) 넓게 퍼져가는 평화라는 설 (6) 복음이라는 설 (7)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설 (8) 초대교회의 복음 선교의 승리자들이라는 설 (9) 적그리스도와 악의 세력이라는 설 (10) 미래에 나타날 어떤 정복자라는 설.등이 있다.
(1)설과 (2)설 (3)설은 과거적해석법이므로 배격되어야 한다. (4)설부터 (8)설까지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존슨은 “어린양은 인을 떼고 있으므로 그를 말 탄 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천사가 그리스도나 그들의 종들을 불러낸다는 것은 합당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드만은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셔서 책의 인봉을 떼시는 이요, 결코 그 인봉을 뗄 때마다 전개되는 무대에 배우로 나타나는 이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전쟁, 기근, 죽음등을 상징하는 기사들과 대응되는 입장에 섞여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왈부드는 “그리스도는 대환란이 시작되는 때가 아니라 대환란의 끝에 정복자로서 지상에 오신다”라고 반대하였다.
남은 (9)설과 (10)설 중에서 (10)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흰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로 뒷받침된다.
(NICNT 주석)
계 6장1절, 첫째 인을 떼시는 분은 바로 어린양 자신이다. 그분만이 인간사의 종말을 가져올 사건들을 작동시키기에 합당하시다. 생물 중 하나가 천둥과 같은 소리로 묵시록의 네 기수 중 첫 번째 기수에게 말을 타고 나오라고 부른다. “와서 보라”로 읽는 번역은 그 명령을 요한에 대한 초청으로 이해한 필사자들 때문에 생긴 것이다.1) 계 6장2절, 요한이 보니 흰 말이었다. 말에 탄 자는 활과 면류관을 가졌는데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 하고 있었다. “묵시록의 네 기수”는 요한계시록에서 보다 널리 인정된 상징이다. 그 상징은 스가랴 1:8-17과 6:1-8에 있는 여러 가지 색깔의 말들에 대한 스가랴의 환상에서 왔다. 늘 그렇듯이 요한은 그의 자료를 자유자재로 변경시킨다. 스가랴서에서 색깔(홍색, 자색, 백색, 흑색, 어롱진 색)등을 상징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땅을 감시하라고 보내지는 데 반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땅에 재앙을 가져오게 하기 위함이다.2) 비록 요한의 환상에서 스가랴와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그 주제는 공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과 일치한다. 누가는 전쟁과 혼란,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 대지진, 기근, 질병, 하늘에서 오는 큰 이적, 핍박 등을 기록한다(눅 21:9 이하; 참조, 막 13:7이하와 마 24:6 이하). 지진과 우주의 혼란을 연결시킴으로써 누가의 일곱 가지의 화는 요한계시록의 여섯 인에 포함된다(Charles, I, pp.158-60). 유대의 사상에서 “앞으로 올 시대”는 이전에 없었던 화가 일정 기간을 거친 후에 오게 되어 있다. “이는 재난의 시작이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막 13:7-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들에 의하여 묘사되는 장면들(9-11절의 다섯째 인은 제외함)은 지상에서 일어날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하늘의 어떤 것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흰말과 거기에 탄 자가 누구냐는 문제는 주석가들에 의하여 널리 논의되어 왔다. 흔히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가 그 해답으로 제시된다. 첫째, 흰 말을 타고 있는 분은 그리스도시며 흰 말은 복음의 승리의 행진이다. 19:11에서 우리는 다시 흰 말과 탄 자를 만난다. 이 기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13절과 그의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한 16절에서 분명해 진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묵시록은 그 상징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가? 그는 흰 말을 타고 이기려고 나아간다(5:5, “유대 지파의 사자가……이기었으니” 참조). 3) 마가복음 13:10에는 복음의 우주적 선포가 있은 뒤에 환난이 시작된다고 하였다-적어도 이것은 마지막 이전에 일어날 사건 중의 하나이다(마 24:14 참조). 그러므로 한 인의 모양으로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전혀 기대 밖의 일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세 경우와는 달이 그 흰말 뒤에는 아무런 재앙도 따르지 않는다.4) 그러나 흰 말의 기수가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는 주장도 위의 주장을 반격할 만큼의 충분한 힘이 있다. 6장과 19장을 비교해 보면 그 둘이 다 흰 말을 타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6:2에서의 그 기수는 승리자의 면류관을 쓰고 또 활을 가진다. 19:11이하에서의 그는 “많은 면류관”5)을 썼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로 무장을 한다. 6:2의 문맥은 정복인데 반하여 19:11 이하의 문맥은 의로운 심판이다. 두 번째 난점은 그 주인공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서 뒤따르는 일련의 황폐케 하는 재앙들(전쟁, 기근, 죽음)과 복음의 선포를 하나로 일괄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들을 떼시는 어린양이 동시에 첫째 인이 떼어졌을 때 말을 타고 나아오는 분이 되어야 하는 혼동을 지적한다. 캐어드는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반대”로서 반복해서 사용된 “받고”라는 표현을 제시하는데 원칙적으로 요한 계시록에서의 그 표현은 “악한 세력들-무저갱에서 나온 동물들(9:1,,3,5), 짐승(13:5,7), 거짓 선지자(13:14,15)-에게 그들의 극악한 일을 수행하도록 승인하는 하나님의 허락”을 가리킨다(p.81). 흰 말과 탄 자에 대한 또 다른 탁월한 해석은 그들의 정복과 군국주의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것이다.6) 구약에서의 활은 무력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꺽으리라”고 말씀하셨다(호 1:5). 바벨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꺽이도다”(렘 51:56).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이다. D.T나 나일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인간들이 전쟁을 할 때 그들은 언제나 의를 위하여 싸우는 것처럼 한다”(p.58. 7) 어떤 자들은 활이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선 너머에서부터 올 침략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리킨다고 한다. 파르티아 사람들은 고대에서 가장 유명한 궁수들이었으며 AD 62년에 볼로게세스 사람들이 로마 군대에 대하여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서방은 용기를 잃고 또한 전면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이차적인 해석일 수도 있으나 요한은 일반적으로 군사적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8)
3. 요한계시록 6장3절 – 8절에서 언급되는 네가지 말
신천지에서는 네가지 말을 실제적인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특히 백마는 이만희라는 것이며, 나머지 세 말은 이만희와 함께 신천지 초기에 사역하던 사람들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그들이 말하는 살상계시입니다. 즉 이만희는백미인데 예수님이 이만희라는 육체를 탄 것이라는 것이며, 예수의 영이 이만희라는 육체를 탄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엉터리 실상계시입니다
– 초림때 예수님은 말과 같은 육체였고 예수님께 임한 하나님은 탄 자였다. 이와 같이 사도요한에게 임하여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은 탄 자가 되고 사도요한은 말이 된다. 이것을 두고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영계)에서 이룬 것 같이 땅(육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다. 본문의 백마 탄 자가 각 신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백마 탄 자를 혹자는 마귀라 하고 혹자는 그리스도라고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마귀라고 한 자도 마귀요 마귀를 예수님이라고 한 자도 마귀 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들이 계시록 4장에서 말한 소, 사자, 독수리, 사람같은 생물들이다. 에스겔 1장과 시편 68편과 다니엘 7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생물(그룹: 조직)인 병거를 강림하사 책을 펼처 심판하심을 본 바 있다. 그러므로 백마를 네 생물 중 한 조직의 사명자(사31:3, 육체)요 탄 자는 어린 양이며(계 19:11-16) 손에 있는 활은 하나님의 손에서 취한 책이다(합 3:8-9) (이만희, 천국비밀계시, 115-116쪽)
더욱이 초림예수님은 육체였고 그 예수님을 탄 자가 하나님이었다는 이단적인 기독론을 주장하며, 사도요한이 육체이고 예수가 사도요한에게 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므로 성령과 예수를 구별조차 못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말을 네 생물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이만희가 네 생물이라는 주장이며, 계시록을 보면 생물이 “오라”라고 말할 때에 말을 탄 자들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예수께서 인을 떼실 때에, 생물이 “오라”라고 명령을 내리고, 이만희가 얼른 뛰어 가서 말탄 자(예수)를 태우고 나타났다는 것입니까?
계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계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말”의 붉은 색은(퓌르로스)는 피의 색깔로서 학살, 살육, 분노등을 뜻합니다.
–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
본문은 말탄 자의 사명을 나타내며, 그 환란은 ‘붉은 말’이 상징하는 전쟁이나 살륙의 의미라고 보여집니다. “허락을 받아”라는 의미는 이 환난과 재앙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이용되었거나 전용되었음을 뜻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의 사명은 전쟁이나 살륙을 통해서 이 땅에서 화평이 사라지게 하는 환난을 만들게 됩니다.
–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
큰 칼(메가스 마카이라)은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도구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으며(Plummer), 왕들의 위엄을 상징하는 칼로서 어떤 정치적인 권력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Walvoord). 또한 많은 사람을 죽게하는 매우 큰 전쟁을 의미하거나, 혹은 많은 살육이 가능한 무기를 뜻한다고 봅니다.(Johnson, Erdman) 서로 죽이게 한다는 것은 전쟁을 뜻한다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전쟁에 대한 견해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1) 종교적인 핍박이라는 주장(Hendriksen, Johnson).
(2) 적그리스도에 대항한 전쟁이라는 주장(Bede, Grotius).
(3) 파르티아군의 침입에 대한 로마의 대항이라는 주장(Holtzmann)
(4) 혹자는 전쟁을 통한 복음의 전파로 해석한다(Greijdanus).
(5) 혹자는 로마의 내란으로 해석하는 주장(Ellocott).
(6) 미래의 전쟁이라는 주장(Alford)
(1)번이나 (3)번 같은 주장도 있지만, 과거적인 해석이라는 것이 단점이며, 이 환란이 예수의 재림 전에 나타날 종말적인 사건이라는 장래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는 미래의 큰 전쟁을 뜻한다고 보여집니다.
계 6: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계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검은색”은 슬픔, 불길, 기근, 공포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셋째 인의 재앙은 “기근”을 상징합니다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는 본문도 양곡이 모자랄 때에, 식량을 저울에 달아 배급하는 절박한 기근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흉년의 기근이라기 보다는 계6:3-4의 큰 전쟁의 결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겔4:9).
–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
이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린양의 음성이라는 주장(Bousset).
(2)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주장(Morris).
(3) 생물들의 음성이라는 주장(Alford, Swete).
어린양은 인을 떼고 있으며, 생물은 오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다만 상징적인 뜻이지만, 구체적인 계시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1)번 혹은 (2)번으로 보는 것이 옳은 듯 합니다.
–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혹은 로마군인들의 하루 급료를 말합니다.
또 “한 되”는 약1.8 리터에 해당되는 하루의 식량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량의 곡식의 가격은 평상시의 8배-16배의 가격으로서, 전쟁 후의 심각한 기근의 상태를 뜻합니다.
또 이 성경구절로 신천지에서 실상계시를 주장하는데, 밀 한되가 이만희이며, 보리 석되가 신천지 초기에 이만희와 사역하던 세사람이라고 마치 코메디와 같은 해석을 주장합니다.
–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말라 하더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도미티안(Domitian)황제 때에 내린 포도원 폐쇄 명령이라는 주장(Charles).
(2) 감람유와 포도주를 사치품으로 보고, 가난한 자는 굶주림의 고난을 당하나 부자들은 여전히 사치를 즐긴다는 해석하는 주장(Hendriksen).
(3) ‘감람유’와 ‘포도주’를 성찬식으로 해석하여, 믿는 자들은 기근의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주장(Lilje).
(4)혹자는 감람유와 포도주를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으로 보고 본문은 기근의 한계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주장(Wesley, Mounce, Ladd, Johnson, Erdman, Morris).
첫 번째 견해에 대한 포도원 폐쇄명령은 곧 취소되었으며, 과거사적인 기록이므로 인정되기 어렵고, 포도주와 감람유는 사치품이 아니므로 두 번째 견해도 적합하지 않으며, 세 번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감람유가 성찬식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보여집니다.
즉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며, 기근의 정도를 완화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으며, 세 번째 견해를 추가시켜, 그리스도인은 심각한 기근에서도 보호를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므로 가뭄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기근의 피해가 심각하게 증대되고 있긴 하나 본격적인 재앙은 아님을 말합니다.
계 6: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생물은 넷만 있으므로 생물의 음성은 넷째 인까지만 나오게 됩니다.
또한 넷째 인까지는 공통적으로 색깔이 있는 말을 탄 자들이 나와서 어떤 상징적인 환란을 행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청황색은 “클로로스”로서 “퇴색한 녹색”으로 “창백”이라는 의미도 있으며, 공포, 질병, 사망을 상징합니다. 어떤 견해는 시체의 색이라고도 말합니다.
–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
그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는 표현은 의인화된 표현으로서, 그 상징적인 개념이 “죽음”을 뜻합니다. 음부가 뒤를 따른다는 표현도 재앙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특히 “사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나토스”는 70인역에서 “테베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였고 그 뜻은 “온역”을 의미하였습니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이라는 구절은 에스겔서14:21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겔 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
“땅 사분 일”에 대한 견해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1) 땅의 네 모퉁이의 환란이라는 주장(Jerome)
(2) 처음 인과 세인에서 사분의 삼은 멸망하고 남은 사분의 일이라는 주장(Alford).
(3) 땅의 사분의 일에 해당되는 지역이 심판을 받는다는 주장(Hengstenberg).
(4) 땅에 사는 사분의 일에 해당되는 피조물과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주장(Hughes, Barclay, Mounce, Ladd, Ellicott)
마지막 견해가 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실제로 요세푸스의 문헌을 보면 그 당시에 로마에서 온역이 발생하여 하루에 10만명 이상이 죽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넷째 인으로 인한 환난은 앞에서 언급된 세 인에 의해 실행된 환난보다 강한 것임을 상징하여 줍니다.
땅의 짐승에 대해서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 죽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뜻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특정한 과거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재림 때의 종말적인 환란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4. 말은 육체다?
사 31:2-3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 구절을 보고 성경에 나온 애굽은 사람이며 말이 육체라는 주장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과연 신천지 다운 비유풀이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이면 마음이라는 단어는 모두 호수가 됩니까?
애굽이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이 애굽에 대해서 사대주의적인 애굽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은 신(god)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애굽병사들이 탄 말도 영(spirit)이 아니라 죽을 수 있는 한갖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결국 애굽도 멸망당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천지와 같은 그런 웃지 못할 해석을 한다면, 성경에서 나오는 애굽은 모두 사람으로 해석을 하여야 하며, 말은 모두 육체라고 해석하여야 합니까?
사 19:1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이사야서 19장은 전반부는 애굽에 임하는 심판을 말하며, 후반부는 앗수르와 구르에 내려진 심판으로서, 그 심판은 실제로 BC663년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사야서 19장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에게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본문에서 “애굽”이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이상하며, 애굽은 실제 지명을 뜻합니다. 애굽이 지명이 아니라면 실제 이루어진 예언적 성취는 무엇이라고 해석하여야 하는지요? 애굽왕조 시대의 멸망은 실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BC663년에 앗술바니팔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BC720년경으로 봅니다
신 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신명기 32:2은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는 부분으로서 시적인 표현을 한 것입니다. 31장30절은 “이 노래의 말씀”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신명기 본문이 노래로 표현되었다고 하여, 모든 성경의 구름이 영적재림이라고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특정한 단어는 항상 같은 뜻으로 비유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이단들의 짜맞추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말 탄 자는 모두 재림예수의 영을 받은 자이겠군요. 그렇다면 아래 성경은 그 말과 말 탄자를 바다에 던지겠다는 것은 이만희를 바다에 던지겠다는 뜻이 되는지요?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5. 구름에 대한 이단들의 해석
성경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구절은 생각보다 많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11)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그래서 정통신학은 이러한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의 재림이 우주적이며, 가시적이고, 영광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자칭 재림예수가 40명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은 자칭 재림예수의 영을 받았다는 신천지 이만희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등이 있으며, 통일교와 정명석의 교리가 모두 유사합니다. 이 구름교리도 모두 유사합니다.
1) 초림예수도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 구름을 사람 혹은 육체라고 주장합니다. 즉 재림예수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곧 성도들을 비유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초림예수도 구름을 타고 온다고 기록되었는데, 실제로 초림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 뿐이며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다고 반박을 합니다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인자 같은 이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예언되어 있지만, 실제로 초림예수는 구름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초림예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재림예수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다니엘서를 자신에게 직접 인용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in the future)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will see the Son of Man)
막 13:26 그 때에(at that time)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will see the Son of Man)
즉 다니엘서 7장13절은 초림예수가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재림예수에 대한 내용인 것입니다.
2) 신천지 이만희의 주장:
그런데 신천지 이만희는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을 영으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단들의 주장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데, 재림예수가 육체를 타고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면 구름이 육체가 되어야할 것이 아닙니까?
–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고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전도하신다고 한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영이시다. 사실 재림 예수님의 모습은 초림 때 이미 제자들에게 공개된 적이 있다(마17장). 구름 속에서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성령체였으며 육체가 아니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마다 동반된 구름은 성령의 강림하심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출애굽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출19:9) 구름 속에서 초림 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마17:5). 한편, 구름에 가린 채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행1:9). 이로 보건대 주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영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 영이신 하나님께서 초림 예수님과 함께 하셨듯이 영으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권세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목자를 찌르는 것은 재림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된다. (요한계시록의 실상, 31-32쪽)
신천지 이만희가 구름을 영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고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결국 그 부활하신 재림예수의 영이 이만희 자기에게 왔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만희는 결국 자기가 재림예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천지의 주장과 같이, 이만희라는 육체에 예수가 영으로 오신 것이라면 구름은 육체로 비유되어야만 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단들 중에서 가장 엉성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3)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의 주장
하나님의 교회는 안상홍을 재림예수라고 하는데, 안상홍이 구름을 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는 우주적으로 온 것도 아니고, 가시적으로 온 것도 아니며, 영광적으로 온 적도 없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안식교 교인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해괴망칙한 주장을 하다가 안식교에서도 제명당한 이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름을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안상홍이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안상홍이 태어날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 자체도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구름이 성도를 가르킨다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은 히 12:1에서 구름이 사람을 비유한 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위 본문이 구름이 사람을 비유할까요? 위 본문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 즉 구름과 같이 “많다”는 것을 비유하는 것뿐입니다. 구름은 허다하다는 비유로서 증인들을 표현하는 비유법으로 사용된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벌떼같이 많다고 할 때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람 = 벌떼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 될 것입니다.
4) 본 그대로 오시리라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번역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번역] 이렇게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현대인의성경] “갈릴리 사람들아, 왜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이 예수님은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KJV] Which also said, Ye men of Galilee, why stand ye gazing up into heaven? this same Jesus, which is taken up from you into heaven, shall so come in like manner as ye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NIV]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do you stand here looking into the sky? This same Jesus, who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will come back in the same way you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즉 성경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그 방식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하늘로 올라가셨는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행1:9-10)
성경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서,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적으로, 가시적으로, 영광적으로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도 여러곳에서 말하고 있으며, 구약의 다니엘서에도 예언하고 있는 바 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의 구름을 영적이라고 해석하든지,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 본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할 것입니다.
5) 부활이 영적인가?
정명석 집단과 통일교도 구름을 사람, 즉 종교, 교회로 해석하며, 부활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예수가 영적으로 오셨다고 하든지 어느 사람을 통하여 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자기들의 교주를 재림예수라고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어느 사람의 육체로 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예수가 어느 사람에게 영으로 온다는 성경구절의 근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재림과 부활을 동일한 사건으로 주장하며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9-40)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즉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수많은 재림예수가 왔다고 하였지만, 부활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 더군다나 재림예수라는 자가 죽어 묘지 속에 파묻혀 썩고 있다면 말할 필요가 더욱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15:17-21)
그렇다면 우리의 부활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여호와의 증인,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 그리고 자신들의 교주를 재림예수이며 교주가 성령으로 왔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집단들은 모두 부활이 “영의 부활”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하나님이 직접 예수로 오시고, 예수가 직접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성령이 곧 예수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이어야만 합니다.
즉 양태론자들은 예수가 오순절에 성령으로 이미 오셨다고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종말적인 예수의 재림을 부정할 수 밖에 없게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그 몸은 신령한 몸(고전15:44)이요, 썩지 않는 몸이며(15:53), 영광스러운 몸(15:43)일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활체가 어떤 형태가 될지, 또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의 모습이 어떨지, 영광의 몸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임의로 상상하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는 우리는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고,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15:42-49)
우리의 궁극적인 부활체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성경으로 보면, 우리의 부활은 새로운 형상의 몸을 입는 신체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 육체는 신령하고 영광된 육체이므로 썩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체는 영적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신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먹으셨으며, 또한 예수님은 잠겨있는 공간에 나타나시기도 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부활체가 신체적이지만, 살아있을 당시의 육체가 아니라, 새로운 몸이라는 것은 암시하여 줍니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 시에 우리가 갖게 되는 영생의 몸은 하늘에 속한 몸이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이며, 영광의 몸이 되어질 것입니다. 즉 다시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다시 죽거나 늙어가고, 또 병이 든다면 그들은 거짓부활이며 거짓 재림예수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우리의 부활체는 썩지 않을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게 되며, 강한 것으로 살게 되며, 또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예수 재림 시에 이루어집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