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예루살렘성이 장길자인가?
평이협 이인규
(1)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교회가 주장하기를, 천사가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라고 하였는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이 어린 양의 아내”라고 주장합니다. 즉 예루살렘성이 장길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말도 안되는 엉터리 주장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학생들을 보여주겠다고 하면, 학교로 데리고 가서 보여줄 것이며, 그렇다면 학교가 학생입니까?
즉 학교에 가야만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학교를 데리고 간 것이지, 학교라는 장소를 학생이라고 한다면 매우 이상한 주장이 될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성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으로서 성도들이 장차 거하게 될 천국의 거처를 말하며, 천상의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 성을 보여준 것은 그 성 안에 성도들이 거하게 될 것이며, 그 성도들이 어린양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교회를 뜻하지만, 예루살렘성 자체는 우리가 종말적으로 거하게 될 장소적인 개념, 천상의 교회를 가르킵니다.
그 예루살렘성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장차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천상적인 교회가 곧 예루살렘 도성이며 그 구성원인 성도들이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집니다.
아래 성경에서 “그리로”와 “거기는”은 예루살렘 성의 장소를 가르킵니다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2) 하나님의 교회는 그 예루살렘성이 신부라고 주장하며 그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러나 성경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성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그 모양이 단장을 한 신부와 같다고 표현한 것이며, 예루살렘이 신부라는 뜻이 아닙니다.
“…..와 같다”는 단어는 of comparison, as 로서 비유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새 예루살렘 도성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이며, 지상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11절부터는 그 예루살렘성의 모양과 크기, 재료등이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예루살렘과는 그 재료와 그 크기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 도성은 지상에 있는 성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계 21: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계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계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계 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위 성경본문의 예루살렘성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하며, 또는 장길자라고 해석합니까? 어린양의 신부가 우리나라보다 몇배 큰 괴물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어떤 장소적인 큰 성과 혼인을 하셨습니까? 위 설명을 읽고도 그 성이 장길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으며, 애통과 고통도 없는 장소적인 천국이며, 주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천상의 교회입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3) 하나님의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성이 장길자라고 주장하는 성경이 있다고 합니다.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런 성경구절들을 앞뒤로 짜맞추기 위하여 성경에 짝이 있다는 이사야34:16의 “짝”을 부정한 짐승의 짝이 아니라 여호와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과연 하늘의 예루살렘이 장길자를 말할까요? 성경에서 어머니는 모두 장길자입니까?
안상홍의 서울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던 여자로서, 다른 남편과 자녀가 있던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어머니가 되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해석이 되는지요?
본문에서 어머니는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라고 불렸으므로, 사라를 어머니로 비유한 것입니다.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비유”로 번역된 단어는 “알레고레오”로서 비유, 풍유라는 뜻입니다.
장길자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여자인 하갈과 사라를 율법과 복음으로 비유하는 것이며, 즉 율법을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가 비유하는 율법과 복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 비유는 예루살렘이 장길자라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율법과 복음을 알기 쉽게 비유하기 위하여 구약의 하갈과 사라를 그 예로 들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아서 할례를 지켜야 하며, 유대인들의 절기와 명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의 중요한 멧세지는 율법과 복음을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하갈과 사라를 풍유적으로 인용하여 비유시킨 것으로서, 장길자가 하나님어머니라는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하 갈 |
사 라 |
|
단어의 뜻 |
방황하는, 도피하는 |
왕비, 고상한 여인 |
언약의 비유 |
율법 |
복음 |
어머니의 비유 |
종의 어머니 |
자유자의 어머니 |
출생의 비유 |
육체를 따라 난 자 |
성령을 따라 난 자 |
성도와의 관계 비유 |
계집 종의 자녀 |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
예루살렘의 비유 |
땅의 예루살렘 |
하늘의 예루살렘 |
유업의 비유 |
유업을 얻지 못함 |
유업을 얻음 |
결론적인 비유 |
구원을 받지 못하는 율법의 언약에 묶여 있는 자녀 |
구원을 받는 복음의 약속을 받은 자녀 |
(4) 예루살렘성은 엄청난 크기의 도성으로서 장차 구원받을 성도들이 거하게 될 처소를 말합니다.
1 스타디온은 약 170-190m라고 합니다. 계산하기 쉽게 200m로 계산하면, 12,000 스타디온은 2,400,000m 이고 2,40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이 500Km 라고 한다면 서울과 부산의 약 5배의 길이의 가로와 세로와 높이를 가진 엄청나게 큰 성이 예루살렘 성의 크기가 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믿음을 지킨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거하게 될 처소임을 상징합니다
이 성의 열두문에 12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고, 성곽의 주춧돌에는 12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거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곽이 144 규빗이라는 것은 그 숫자는 12 X 12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5) 그렇다면 왜 사도요한에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성을 보여 주었을까요?
구약 에스겔40장부터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전을 보여주는 것을 사도요한이 동일한 방법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겔 40:1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겔 40: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겔 40: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겔 40: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이 천사로 하여금 성전의이상과 환상을 본 것과 동일하게, 사도요한은 천사로 하여금 지상의 성전이 아닌 하늘의 성전을 본 것입니다.
에스겔40-48장은 성전에 대해서 언급됩니다. 즉 사도요한이 본 하늘의 예루살렘은 구약성경의 성취를 반영한 것입니다.
(6) 과연 어린양의 신부가 누구일까요?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해석학의 가장 기초는 비유와 상징을 해석할 때에는 다른 성경에도 그와 같은 용례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구원받은 성도” 혹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 아내가 성도 혹은 교회로 비유된 적이 있는지 살펴 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자”로 교회를 “아내”로 비유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
또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도들을 처녀로, 남편을 그리스도라고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또한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남편,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54: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또 계시록에서도 어린양과 혼인잔치를 하는 성도들이 신부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to her)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7-8)
어린양의 아내가 입은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어린양의 아내에게 세마포를 입도록 허락하였다는 내용은 아내가 곧 성도들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또 어린양의 신부는 반드시 성도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들의 구원 자체를 혼인으로 비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신부로 비유되었던 것입니다.
즉 종말적인 구원을 신랑되시는 예수와 그 신부가 되는 성도의 혼인잔치로 비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교나 변절을 성경은 간음과 음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