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의 십자가에 대한 비판
이인규
최근에 원문성경에 십자가가 없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러나 십자가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스타로우스”로서, 원문은 “기둥, 말뚝”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단어의 유래일 뿐이며, 성경으로나 문헌적인 고증에서는 십자가가 맞다. “스타로우스”는 영어성경이 cross로 번역하였고, 라틴어는 crux로 번역했다.
인터텟에서 어느 한 사람이 계속 십자가에 대해 “십자가는 우상이다.”이라고 비난을 해왔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해 왔으며 어떤 일부 몇몇 사람들이 그 주장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주장은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안상홍의 증인, 통일교와 같은 이단들의 주장이다. 그들로서는 십자가를 부정하고 반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십자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십자가를 신앙적 대상으로 섬긴다면 그에게 십자가는 우상이 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기독교에서는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없다.
이번 기회에 십자가에 대해 자세히 공부해 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자.
십자가는 역사적인 고증에서도 나타나듯이 사람을 처형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그 역사적인 기록은 헤로도투스의 역사서에서 발견되어지며,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그러한 처형법이 있었음이 다른 문헌에서도 많이 기술되어지고 있다.
알렉산더대왕 때도 그러한 처형법이 있었으며, 카르타고와 로마까지 전래되었음을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일단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적이 있으며 (참고. 마카비 1서 1:44-50) 하스모니아 家의 알렉산드 얀내우스는 베톰마을의 반란자 800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세푸스 BJ i 4.6: Ant 14.2-3)
십자가가 무시무시한 사형도구였던 것은 분명하다.
십자가는 오랫동안 죽을 때까지 고통을 주는 잔인한 처형기구이며, 남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살인기구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를 “저주”라고 표현하였다.(갈3:13)
초대 교인들에게 십자가는 말만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이었으므로, 십자가를 심미적으로 미화시킬 위험성은 전혀 없다. 이러한 잔혹한 십자가는 저주를 상징하는 사형도구를 말하며,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십자가 복음”이라는 제자 훈련의 핵심적인 단어로 존재라고 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구원이 성취되었고, 대적하는 세력들이 영원히 패망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승리와 부활의 의미가 되었던 것이다.(벧 2:24; 3:18) 다시 말하여 십자가를 욕하고 비난하는 자들은 그들이 곧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사형틀인 십자가는 다양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물론 T 자형의 십자가도 사용된 적이 있으며 그것은 별도로 “성안토니의 십자가“라고 불린다. 또 윗부분이 긴 + 형태의 십자가도 있었고 이것은 “라틴 십자가”라고 불린다.
또한 곱하기 ×형태의 십자가도 있었으며 이는 “성 안드레 십자가”라고 불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부가 조금 돌출된 †십자가는 “로마식 십자가”라고 불리는데, 십자가는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가 아니었다고 몇몇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 사실 십자가는 그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이 그 본질이 되어진다. 필자는 십자가의 외형적인 형태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십자가의 외형적 형태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자.
예루살렘의 한 묘지에서 올리브 나무의 십자가와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지금의 십자가 형태이었으며, 다만 가랑이 부분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돌출부분이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특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십자가는 여러 형태이며 다양하다.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각종 모형과 예술적인 표현을 한 것도 있고, 리얼한 느낌을 주기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조각하고 표현한 십자가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형태의 아무 형상이 첨가되지 않은 나무 십자가를 사용한다.
우연하게도 십자가를 비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주로 통일교, 안상홍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등 사이비집단이라고 불리는 교회들이다.
특히 안상홍의 증인(하나님의 교회)은 예레미야 10장5절의 “갈린 기둥”이 십자가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렘10:5)
그들은 “갈린 기둥”이 “서로 엇갈려 있는 기둥”이며, 오늘날 기독교가 사용하는 십자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웃을 수도 없는 무지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갈린 기둥에서 “갈린”이란 단어는 “엇갈리다”는 뜻이 아니라 “연마하다, 둥글게 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히브리어: 미크솨) 또 기둥(히:토메르)이란 단어는 종려나무를 말하며, 갈린 기둥이란 둥글게 다듬은 종려나무라는 뜻으로, 공동번역성경은 “참외밭의 허수아비”(NIV 영어성경: a scarecrow in a melon patch)로 번역하였다.
안상홍의 증인들은 그 단어를 엇갈린 기둥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본문은 문자적인 기둥이나 손으로 갈아서 만든 기둥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 “말도 못하며 걷지도 못하는 손으로 만든 기둥”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비난하는 이단들의 첫째 비난은 원래 십자가는 †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언가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매우 과장을 하고 있는데,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십자가의 종류는 다양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 모양이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십자가 자체나 그 모양이나 형태를 신앙적인 대상이나 본질로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십자가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 뿐이다.
십자가란 고통을 수반하는 형틀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목걸이에 한다는 것이나 교회 앞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와 상징을 뜻한다. 아무도 그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십자가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드라큘라 영화에서 각색한 것뿐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의미하는 개념과 상징하는 의미를 중요시할 따름이다.
먼저 십자가가 T 자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 흑백논리를 한번 가려보자는 의도는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려 드린다.
다만 T 자형만이 실제 십자가이고, 나머지는 가짜(?)라는 기막힌 주장에 대해 단지 반박하려는 의도일 뿐이며, 본인은 앞서 말하였듯이 형태나 모양에 대해서 무엇이 옳느냐 그르냐를 따져보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누가복음 24장39절을 보면 손과 발에 못자국을 제자에게 보여주었던 기록이 나오며, 그것은 곧 십자가이었음을 증거하며 요한복음19:19을 보면 예수의 머리 위에 명패를 붙혔음을 알 수가 있으며 그것은 곧 T 자형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참고. 마27:37)
T 자형은 위에 명패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좀 주의깊게 성경을 보면 알게 된다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on the cross)에 붙히니….”
마27:37 “그 머리 위에(over his head)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란 쓴 죄패를 붙혔더라.”
마27:37은 그 머리 위에(over his head)라고 기록되었으며, 요19:19는 on the cross 이다.
또 눅 24:39을 보면 손에 못자국이 있음이 언급된다. 즉 양팔을 벌리시고 양 손에 못을 박히셨으며 그 십자가의 위, 예수님의 머리 위에 패가 붙을 수 있는 형태인 것이다.
T 자의 모양에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자의 십자가에서 가능하다.
이제 본론적으로 들어가서 십자가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십자가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서로 교차한 나무“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을 상징하며, 또한 사만의 권세로부터 승리한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가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처럼 국기에 대한 경례도 거부하면 되며, 학교의 뱃지나 단체의 상징도 거부하면 되며, 인형과 조각같은 예술작품, 악세사리도 거부하면 될 것이다.
먼저 기독교인 중에는 십자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즉 이단과 사이비들의 주장처럼 십자가 우상운운….하는 주장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황당한 것이다. 더욱이 태양신 운운 하는 자들이 있는데 태양신은 애굽의 신이었으며, 십자가를 상징으로 한 적이 없었다.
1) 왜 십자가가 I 자형이 아닌가?
만일 I 자형에 손을 차렷자세로 고정시키고 손에 못을 박으면 앞으로 넘어지게 된다.
또한 옛문헌과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여서도 이미 “십자가“이며 며칠 전 설명하였듯이, T 자형(성안토니형 십자가), X자형(성안드레형 십자가), +자형(라틴형 십자가) †자형(로마식 십자가)가 문헌및 역사적으로 발견되어진다고 설명까지 이미 다 자세히 하였지만, I자 십자가는 비상식적이다.
2) 왜 T 자형이 아닌가?
마태복음 27장 37절에는 예수의 “머리 위“에 명패를 달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T 자형이 될 수 없다. 또한 누가복음 23장 38절에도 “그의 위에“ 패를 달았다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 15장26절, 요한복음 19장 19절은 “십자가 위“라고 되어 있으며 T자는 실제상으로 패를 달수 있는 장소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필자는 십자가가 어떤 형태이든지 나의 지금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십자가의 형태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가 의미하는 뜻과 개념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단지 십자가의 모양이 어떠한 것인지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로 인한 추측을 하여 보자는 것뿐이다.
3) 지금의 십자가는 만들기에 복잡하다?
이 십자가는 가구처럼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십자가는 형틀일 뿐이다.
두개의 나무의 교차부분을 서로 약 1/2 정도 깍아내면 교차 후에 거의 수평이 유지된다.
그 후에 그 교차부분을 대각선으로 끈으로 묶거나 못으로 박으면 된다.
4) 무게가 매우 무거운가?
그것을 수치로 계산하여 계산하는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골고다 현장에 가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성경은 요한복음 19장20절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카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열번을 쓰러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단 추측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성경적인 기록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들고 가다가 힘이 들어 쓰러졌고,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들고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마27:32) 그것은 십자가가 상당히 무겁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만일 십자가가 매우 가볍다면 그것이 고난의 상징이 되지 못하니 설명할 필요도 없다.
5) 십자가가 태양신의 상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태양신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라 수레바퀴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십자가라고 불리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태양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태양신을 믿는 종교인 적이 없었으며, 성경에서도 태양신을 숭배하라는 기록은 전혀 없고, 태양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콘스탄틴 황제는 물비안 전쟁을 앞두고 X자와 P자를 보았다고 전해지는데, 콘스탄틴 황제는 초창기에는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졌던 것은 맞다.
그리고 “이 표시에 의하여 너는 정복할 것이다“라는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투구와 방패에 이 십자가 표시를 하며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 후에 그는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지만, 그는 그 당시에는 적어도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동전 앞면에는 태양신, 동전 뒤에는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자녀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었고,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377년 그가 죽을 때에 세례를 받았고 그 황제의 옷을 벗고 흰 세례복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를 믿으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태양신과 십자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독교인 전체와 콘스탄틴 황제 개인을 구분하기를 바란다. 콘스탄틴 황제가 어떤 신앙형태를 갖고 있었든지, 그는 기독교인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황제임이 분명하지만, 전체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콘스탄틴 황제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하셨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바울이 태양신을 믿었단 말인가? 초기기독교인들이 태양신을 믿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카타콤베(지하무덤)에서 휴대용십자가가 발견되어진 적이 있는데, 그 십자가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십자가가 생명이지만, 오 원수여(마귀여), 너에게는 죽음이다.”
즉 십자가는 콘스탄틴황제 시절부터가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부터 사용되었다는 엄연한 증거가 된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고전2:2)
6)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믿는가?
어느 기독교인에게 물어보아도 십자가를 믿는다는 사람은 없다.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도 자꾸 우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고의적인 매도를 하든지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같은 이단과 사이비들의 주장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을 의미한다.
우상이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신뢰하는 것“이며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없다. “십자가에 흘린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가 목걸이에 매다는 십자가는 목걸이일 뿐이며, 교회 위에 불을 밝히는 십자가는 네온사인일 뿐이다. 나는 목걸이를 믿지 않으며, 네온사인을 나의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십자가는 믿는 우리들의 내면적인 마음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며,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더욱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야만 한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십자가의 복음적 상징은 “둘이 만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로 화목함을 상징한다. 사람과 사람은 수평적이며, 하나님과 사람은 수직적이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것이 십자가이다.
구약의 장막이 “A tent for meeting”이듯이, 십자가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구약의 제사와 같이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으며 그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4)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웠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로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려졌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 화목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십자가는 화평이다.(골1:20) 십자가는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인 개념이며 시간적인 개념이며 영적인 의미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박히는 곳이며, 이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박은 곳이다.
2000년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실 때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그곳을 오르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혔을 때에 우리 옛사람도 그 때에 못박히고 있었던 것이다.(롬6:6. 갈5:2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6-7)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그 분의 피만이 우리의 주홍같은 죄를 깨끗히 하실 수가 있다.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었다.(요1:29)
또한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다. 주께서 죄와 사망에서 승리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즉 부활의 상징이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그 시간과 공간이 바로 십자가였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의미하며 모양과 형태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형태였다고 하여 기독교의 구원관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한다고 말하였지 “십자가의 형태”를 전한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마16:24)는 그 십자가가 “예수님이 진 것과 같은 똑같은 형태의 십자가”인 줄로만 알면 성경을 헛읽은 것이다.
예수님이 지은 그 십자가와 바울이 전하려고 한 그 십자가를 우상인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 십자가가 X 자인가 T 자인가를 따지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우상이라면 성경책도 우상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성경책 자체를 신앙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책의 모양과 형태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용과 의미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