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비판(24/7 예배와 다윗의 장막)

  • 5월 22, 2015

                                  신사도운동의 비판 (24/7 예배와 다윗의 장막)

                                                                                                이인규

              

미국의 마이크 비클이 대표로 있는 IHOP(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24/7 예배를 슬로건으로 사용한다. 24시간/1주일/365일을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IHOP-Korea, KHOP(Korea), AHOP(Asia), GHOP(Global), JHOP(Justice)등의 유사 명칭을 모방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단체외에도 교회와 심지어 기도원들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24/7 예배를 표방하는 곳이 상당히 많다. 물론 24시간, 7, 365일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고 하여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용어와 사상에 담겨져 있는 개념이 비성경적이며, 그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라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부흥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방하는 이상한 풍조가 있다.

신사도운동의 원조가 되는 윌리엄 브랜넘의 늦은비 운동이 와해된 후에, 마이크 비클은 밥 존스, 폴 케인들과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KCF)을 시작하였는데, 7년 동안 동역자였던 어니그루엔이 KCF가 거짓예언과 조작을 하였음을 폭로하므로서 와해되어 모두 떠나고 문을 닫게 된다. 그 후에 마이크 비클은 존 윔버를 만나서 빈야드운동의 포도원교회로 바꾸게 되는데, 빈야드가 다시 쇠퇴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기도의 집을 시작하라는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바꾼 곳이 지금 IHOP의 유래이다. 지금도 IHOP 안에는 예언자학교가 있다.


 

1. 24/7 예배의 문제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24시간 찬양과 기도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의 말하는 주장은 잘못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이들 단체들은 감성적으로 예민한 청년들을 전자악기의 찬양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미혹하여, 24/7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주장하며,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문제점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자.

(1) 하프와 보울(Harp &Bowl)


이들이 주장하는 하프와 보울’(Harp &Bowl)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어떤 상태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즉 하프(거문고)는 찬양을 상징하고, 보울(대접)은 기도를 상징한다는 것인데 이들은 그 근거로 계 5:8을 인용한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8)

그들은 계 5:8 거문고가 하프(Harp)이고 금대접’(Bowl)은 기도를 뜻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기도는 대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접에 담겨져 있는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접(Bowl)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도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계 16장의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대접도 동일한 ‘Bowl’ 이기 때문이다. IHOP에서 Bowl 이라는 단어를 어떤 특별한 임재상태의 개념, 즉 기름부음의 상태로 본다면 계16장의 진노의 대접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전혀 관계가 없는 성경구절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위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다시 마라면 계5:8 24/7 기도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계시록 본문에서 하프와 보울이라는 단어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과 함께, 예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뜻하는 내용이다.

(2) 예배의 방법과 시간이 중요한 것인가?

이들은 다윗도 24시간/7일 동안 찬양과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을 하면서 우리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교회가 24/7 예배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24시간/7/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으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에 시간적, 공간적인 제한이 있다는 뜻인가? 과연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방법과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직접 찾으신다고 말한다.( 4:23)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기도 외에 또다른 조건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기도를 받아 주시는가? 예배를 끊임없이 드려야만 하고, 일렉트릭 사운드의 기타와 드럼으로 찬양을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그 기도를 받아주는가? 고사리와 같은 손으로 드리는 어린아이의 기도와 찬양을 잘못 하시는 연로하신 할머니 권사님의 기도는 하나님이 외면하시는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24/7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가? 전자악기로 24시간 연주하는 예배만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가? 24/7 예배를 다른 예배와 차별하고 구별하는가?

(3) 24/7 예배가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것인가?

IHOP이 주장하는 것은 소위 다윗의 장막의 회복인데 이러한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예수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과 반대가 되는 주장이다.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 그들이 특별히 인용하는 아모스 9:11-12를 살펴보고, 그 구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15:16-17을 살펴보자.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항상 전체적인 내용이 아닌 부분적인 내용뿐이며,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부분적인 해석일 뿐이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15:16-17)

과연 본문이 종말적으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실제로 회복된다는 뜻인지, 혹은 24/7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뜻인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15장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몇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그들은 기독교인이면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오늘날과 같이 믿음 외에도 율법적 행함이 필요하다고 하는 혼합적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 15:1-2)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질문을 하기로 하여 보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예루살렘공의회는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15:10-11)

그리고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정리를 한 것이 바로 성경본문이 아래 구절이 된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 15:15-21)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야고보는 아모스 구약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다윗의 장막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것이다. 즉 유대인들만이 구원이 있다는 율법적인 구원관을 야고보는 이방인에게도 적용시키면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라고 적용한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며 더 이상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킨다는 뜻이 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라는 최소한 율법적인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하는 이유는 바로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그 글(율법)을 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4가지의 규정만을 지키라고 전달하는 이유는 두가지인 것이다.
(1)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자를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2)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유대인들이 있기 때문에

즉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 4가지를 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본문은 암 9:11-12를 인용한 것이며,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9:11-12)

이 후에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하셨으니” ( 15:16-17)

아모스의 그 날’(In that day)을 야고보는 이후에’(After this)라고 본문을 바꾸었으며, 또 아모스의 옛적과 같이 세우고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will build again)로 바꾼 것이다. 즉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이 사도행전에서 이미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로 얻는 구원은 예수를 믿는 은혜로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한편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하여, 유대 율법주의의 배타적 구원관이 믿음과 은혜의 복음적인 구원관으로 전환되어짐을 다시 짓는다”(rebuild)고 표현한 것이다. 즉 예수로부터 시작한 기독교는 이미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어 회복시킨 것이다

도대체 다윗의 장막의 회복과 24/7 예배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즉 신사도운동에서 다윗의 장막을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다시 종말론적으로 소위 대추수, 대부흥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만약에 구약적인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본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복음의 은혜에서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자는 이상한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4) 지금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어야 하는가?

신약성경은 장막이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 구약의 장막의 시작은 성막으로서 Tent for meeting God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이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심으로서 신약에서 장막은 곧 성도의 몸을 뜻한다. 그 곳이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

구약에서 회막(장막)은 성전이 되었고, 신약에서는 성전의 실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나아가서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 된다. 예수께서 손으로 짓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되신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은 신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 9:11-12)

그리고 계시록에서 하늘에 있는 장막이 언급되는데, 하나님의 장막은 구약에서 언급되는 다윗의 장막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개념이 되어진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21:3-4)

아직도 구약의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의 장막은 더 크고 온전하신 예수라는 장막이 오신 이후에 이미 다시 회복되었고, 그 장막은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다시 세워졌으며, 장차 하나님의 장막이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예배와 찬양이 다시 회복되어야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복음과 전혀 반대가 되는 의미이다.

(5) 예배의 본질을 외면하는 24/7 예배

구약에서의 예배는 장막, 성전과 같은 장소적인 예배였으며 제사장에 의한 대리적인 예배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배는 구약의 예배와 전혀 달라지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찾으신다는 것이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

사마리아사람들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으로 알았으므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누가 옳은지를 질문한 것이다. 즉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답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324)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그러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예배의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또한 예배의 시간이나 찬양의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연 IHOP과 신사도운동의 단체들이 현란한 일렉트릭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는가? 24/7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그 기도를 받으시는가? 또 그러한 집회에서 기름부음이 임재하시는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6) 다윗이 24/7 예배를 드렸는가?

24/7 찬양과 기도를 주장하는 신사도운동 단체들은 다윗도 장막에서 24/7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레위지파 성가대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24시간 주야로 찬송만 하였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대상 9:33)

위 성경구절은 24시간을 계속 찬송했다는 뜻이 아니다. 맡은 일에 전담하기 위해 항상 다른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다른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공동번역] 이상이 레위 지파 각 가문의 어른들 가운데 합창하는 임무를 띤 사람이다. 그들은 주야로 자기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당번이 아닐 때에도 언제나 별관에 있었다.
[현대인의성경] 그리고 성가대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레위 집안의 족장들로서 예루살렘의 성전 구내에 살면서 밤낮 자기들의 직분에만 몰두하고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 연주자들이 24시간 연주를 했다고 주장한다.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대상 16:4-6)

과연 16:6에서 항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24시간 쉬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나팔을 불렀다는 뜻일까? 그러나 공동번역은 정해진 때마다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정규적으로라고 번역하였다.

[공동번역] 다윗은 레위인 가운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감사 찬양을 드리며 예식을 집행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다. 책임자 아삽, 그 밑에 즈가리야, 우찌엘, 스미라못, 여히엘, 마띠디야, 엘리압, 브나야, 오베데돔, 여이엘. 아삽이 바라를 치면, 이들은 수금을 타며 소구를 쳤다. 그리고 정해진 때마다 하느님의 계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사람은 사제 브나야와 야하지엘이었다.

[현대인의성경] 다윗은 일부 레위 사람들을 뽑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하며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도록 하였다. 이 직무를 맡은 책임자는 제금을 치는 아삽이었으며 그를 돕는 자들은 스가랴, 여이엘, 스미라못, 여히엘, 맛디디아, 엘리압, 브나야, 오벧에돔, 그리고 또 다른 여이엘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비파와 수금을 타는 자들이었다. 또 브나야와 야하시엘 두 제사장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정규적으로 나팔을 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반열대로 라는 말을 인용하여 24반열에 대해서 24시간을 교대로 찬송하였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무지한 주장이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대상 6:31-32)

본문은 성가대가 회막 앞에서 24시간을 정해 놓고 순서대로 찬송을 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반열대로라는 것은 24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 동안에 24 순서로 서로 교대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절 역시 공동번역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로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로 번역하였다.

[공동번역] 그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야훼의 성전을 지을 때까지 만남의 장막 곧 성막앞에서 성가대원으로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현대인의성경] 그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거기서 일정한 규정에 따라 그 일을 계속하였다.

24반열이라는 것은 제사장과 성가대가 일주일씩 교대로 사역을 담당하였던 제도이며, 일년에 2번씩 돌아오는 순서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성가대를 24 팀으로 정하여 일년에 두 번씩 차례가 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성경 주석을 보면 제사장과 성가대와 파수꾼들은 모두 24 반열의 순서를 정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대상 24:19] “이와 같은 반차로 수종들었더라” : 24반열로 조직된 제사장들은 각기 순번을 좇아한 주일씩 돌아가며 봉사하였다(왕하 11:9). 한편 이러한 제사장의 24반차 제도는 신약 시대에까지 지속되었는데( 1:8)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끝나고 말았다. (호크마주석)

[대상 23:1-26:32] 다윗은 임종을 앞두고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사람들의 책임을 체계적으로 분담시킴으로서 성전 제사 제도를 더욱 탄탄하게 정비하였다. 원래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자들로서 성막 봉사등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러한 체계적 직무 분담은 성전 업무의 능률화는 물론 효과적 인원관리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24반차 제도를 통해 대부분의 레위인들은 일년에 두 주씩 봉사하게 되었으며 남는 기간 동안에는 율법 연구나 기타 여러 직무에 두루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상 25:1-31] 성가대의 조직 :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할 제사장들과 그들을 돕는 레위인들의 순서를 조직해 놓고 나서, 이제 성전에서 여호와를 찬양할 성가대를 24 반열로 조직한다. (톰슨주석성경)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자손에서 선출된 성가대는 24시간을 찬송한 것이 아니라, 하루 중에 새벽과 저녁에 두 번 찬송을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대상 23:27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대상 23:28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에게 수종들어 여호와의 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일과
대상 23:29 또 진설병과 고운 가루의 소제물 곧 무교전병이나 남비에 지지는 것이나 반죽하는 것이나 또 모든 저울과 자를 맡고
대상 23:30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
대상 23:31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 명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대상 23:32 또 회막의 직무와 성소의 직무와 그 형제 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모두 문자적이거나 부분적이며,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짜맞추기 위한 인용일 뿐이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2:36-37)

주야에 금식하며라는 단어가 24시간 쉬지 않고 금식을 계속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안나라는 선지자는 84년을 계속 금식하였는가? ‘주야로, 밤낮으로라는 단어는 하나의 관용구로서 전념하였다는 강조적인 의미이다. 혹시 쉬지 않고 기도하라”(살전5:17)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24시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밥도 먹지 말고. 계속 기도만 하라고 해석을 하는지 묻고 싶다.

(7) 24/7 예배는 예언을 정당화한다

아이합은 대상 25:1-3을 인용하여 신령한 노래 예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단어의 어원이 같다는 것뿐이며, 예언이라고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은 다윗의 장막에서 불려진 성가대의 신령한 노래는 시편이었다고 한다.

[대상 25:1-3]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 여기서 신령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니베임 예언하다‘, ‘대변하다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본래 나바라는 동사의 의미는 부글부글 넘치다‘, ‘끓어 오르다라는 뜻으로 선지자나 시인, 또는 악사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감동된 말씀을 쏟아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성가 대원들이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함은 그들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크신 감동을 받아 감동된 노래, 감동된 시구(詩句)를 쏟아내었음을 의미한다. (호크마 주석)

아이합에서 예언자 센터를 운영하는 마이크 비클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맞지도 않는 거짓 예언을 도대체 왜 하는가?

예언도 마찬가지다. 때때로 맞지만 대부분 경우 아니다. 전부 맞다, 안맞다가 아니다. 조금은 맞지만 대부분 맞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마이크 비클,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24/7 예배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합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24/7 예배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미국의 거짓 영성단체인 아이합을 그대로 모방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임재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예배가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주장마저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성경은 24/7 예배를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다윗이 장막에서 24/7 찬송을 드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신령한 노래가 예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속적인 개인의 예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자신들의 교리를 위하여 성경을 짜맞추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은 공동체에 보내는 하나님의 멧세지였으며 개인의 장래사를 점치는 일은 성경에서 금지되었던 일이다. 더욱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하시던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과는 다르게,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성경말씀이 완전하고 특별한 객관적 계시로 성취되었음을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