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비판 (사도와 선지자)

  • 6월 17, 2016

신사도운동의 비판 (사도와 선지자)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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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운동의 특징적인 교리 중에 하나는 오늘날도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엡 4:11을 통하여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가 지금도 계승된다면 왜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계승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4:11-12)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도 지금 존재하므로 사도와 선지자도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본문은 그가(예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직분을 주셨다는 것이며, 그 직분이 계속적으로 계승된다는 뜻은 아니다. 더군다나 엡4:11-12에는 집사나 감독과 같은 직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직분을 언급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는데, 사도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성경은 온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며 성경이 지금도 기록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와 사사, 혹은 천사를 보내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이 곧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6-37).


사도의 편지가 곧 신약성경이었으며, 사도가 전하지 않은 복음은 선지자나 신령한 자 또는 하늘의 천사가 전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 간주되었다. (1:6-9)

사도 베드로도 바울의 편지를 주님에게 받은 지혜대로 쓴 것이라고 말하며, 다른 성경과 같이 동등하게 인정하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사도 시대 이후,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들은 속사도, 혹은 교부라고 불렸으며, 그들은 결코 사도라고 불리우지 못하였다. 성경이 정경화가 되는 과정에서, 속사도들과 교부들의 문헌이 그 내용이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사도가 아니었다는 사도성의 문제때문이었다. 사도의 가르침이 곧 성경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에도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며, 자신의 주장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사도란 단어는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는 자라는 일반명사이다.

그 단어가 예수의 사도라는 초대교회의 직분적 명사의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더이상 계승되어진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느 성경도 그러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즉 초대교회의 특별한 직분적인 개념의 사도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신 직분이며, 예수님이 직접 보내신 직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의 의심을 받았을 때에 사도성을 증거하려는 내용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 사도성의 증거가 사도바울이 그 직분을 예수에게 직접 임명받았으며, 예수를 직접 목격하였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었다.

  

(1) 성경이 말하는 사도

과연 성경에서 사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차적으로 사도란 용어는 초대교회의 직분들 중 첫 번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직분을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사도가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이 성경구절은 사도라는 직분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지만, 앞으로 계속하여 사도라는 직분이 인정된다는 어떤 근거도 될 수 없다.

사도’(아포스톨로스)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열두 제자와 바울, 특별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사용된다. 그리고 아무나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님이 직접 보냄을 주신 중요한 직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6:13)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1:26)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사도란 거의 12명의 예수님의 제자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워진 바울에게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단지 예외적으로, 신약 원어 성경에서 사도행전 14:4, 14등에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다(두 사도).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인 야고보(고전15:7. 1:19)도 사도라고 불리워졌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직분이 바나바와 야고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도와 함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공식적인 사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사도라고 언급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도와 함께 있을 때에 사도들이라고 불리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바나바와 야고보도 충분히 사도의 자격이 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소리질러”(14:14)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19)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사도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직접 보내신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2) 사도의 자격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자격과 특징은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자로서 예수님께서 직접 임명한 직분이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3-14)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1;1)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5)

둘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의 부활을 직접 본(목격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가롯 유다가 죽은 후에 열두사도를 임명할 때에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요한의 세례부터 승천까지 함께 다니며 목격했던 사람이어야만 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1l:21-22)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주를 직접 보았다는 확증을 말하고 있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직접 임명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7-9)

   

결론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살펴본 바로는, 사도라는 명칭은 극히 제한적이며, 신약에서도 열 두 사도와 바울이 사도라고 불려진 외에는 구체적인 호칭이 없어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 교회사를 통하여 역사상 대단히 중요했던 교회의 지도자들도 결코 사도라고 불려진 적은 없었다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몰몬교의 지도자들이 사도라고 불리워졌으며, 카톨릭의 교황이 사도권을 가졌다고 가르쳤으며, 주로 이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도라는 직분을 오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가 계승되는가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계승된다는 성경적인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만 있던 직분이라는 성경적인 증거는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와 선지자라는 직분은 지속적인 역할이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적인 터를 제공한 것이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 2:20)

[공동번역]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그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KJV] And are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Jesus Christ himself being the chief corner [stone];

[NIV]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신사도운동에서 사도와 선지자가 지금도 있는 직분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이미 건축이 끝난 건물 위에 다시 기초를 세울 수 있는지를 답변하여야만 할 것이다. 더불어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모퉁이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건물에 기초(foundation)가 두 번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미 세워진 건물에 다시 기초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


4) 거짓 사도와 자칭 사도

특히 우리는 항상 어떤 이단이라고 불리는 종교적인 교주나 지도자들이 사도, 선지자로 불리우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계시록 22절은 거짓 사도가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는 자칭 사도라고 불리웠으며, 거짓 사도들도 있었다. 누구든지 사도가 될 수 있다면 왜 거짓 사도와 자칭 사도라는 것이 분별되어져야만 할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2)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3)

즉 성경적으로 볼 때에 거짓 사도와 자칭 사도의 공통점과 기준은 주님이 임명하지 않으셨으며, 주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신사도운동연맹의 사도는 피터 와그너의 사도일 뿐이며, 우리나라에도 수십명의 사도가 있다는 CI의 사도는 빌 해몬이 보낸 사도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신사도운동의 유사단체마다 사도들이 있다.


5) 사도의 역할

신사도운동은 왜 자신을 사도와 선지자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을까? 과연 그들이 말하는 사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위 사도라고 하는 신사도운동의 인사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책을 읽어보면 그들은 마치 자신의 예언과 능력이 뛰어남을 증거하기 위하여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책은 예수를 증거하며 삼위일체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초능력을 자랑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 자신들이 입신을 하여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하거나, 천사를 만난 사건, 그리고 자신의 예언이 얼마나 잘 맞추었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을 뿐, 예수의 영광을 위하여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신사도운동 목사는 자신이 기도를 했더니 여름에 눈이 내려서 미국의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하며, 피터와그너는 자신이 독일에서 광우병을 중단하는 선포기도를 한 이후로 광우병이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을 사도라고 하는 이유가 스스로 자신을 신령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사도의 역활은 무엇인가?

그들은 사도가 영적 권위를 갖고 목사를 지도하며, 개인적인 관계로서 목사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큰믿음교회 변승우목사가 밥존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며, 자신들이 교회보다 높은 위치에서 교회를 관할하겠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교회를 관할하는 사도적 리더쉽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 러더쉽은 교회적 직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관계에 의해서 세움받거나 폐해진다. 사도적 네트워크가 교단을 대신한다. 각 지역 교회들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사들은 각 회중의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광역 사도의 영적보호(spiritual covering) 아래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단하여 선택한다. 이것은 사도와의 인격적 동의에 따라 성립되는 관계이다. 이 관계 안에서 사도는 영적권위를 가지고 목사를 지도하며 그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역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며 영적아버지로서 목사를 격려하는 것이다.(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피터와그너, 41-42)


사도는 개인적인 관계로 영적인 권위를 갖고 목사의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신사도운동의 주장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기존 교단을 탈퇴하고 신사도운동으로 들어와서 사도들의 지도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며 새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러나 지역교회를 넘어서는 사역에서 우리는 옛 가죽부대의 목사적 사고방식으로부터 새 가죽부대의 사도적 사고방식에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43)


교단을 떠나고 종교의 영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갱신운동 지도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내부의 개혁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사도개혁의 새로운 가죽 부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60)


그들이 의도하는 주장의 결론은 기존 기독교의 목사들이 모두 교단을 떠나고 갱신하여 신사도운동의 사도들 아래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자칭 사도라고 부르는 그들은 하나님께 계시와 예언을 받기 때문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과 그 유사단체의 인사들이 추구하는 신학적인 성향이 무엇이며,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들은 이단교리를 모두 개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정통신학에 대해서는 비난과 부정을 한다. 또 그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탄의 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6) 신사도운동의 개방신학(Open Theology)

예수님과 사도들이 있었던 당시에는 신학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주장이 곧 신학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 이단들이 출현하면서 교회는 정통신학을 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특히 초대교회사를 살펴보면 신론, 기독론등의 이단들이 나타남으로서 그들과 토론과 반박을 가치면서 정통신학이 정립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즉 정통신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단교리의 출현과 함께 그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정립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정동섭교수는 이단은 정통의 시어머니라고 말한다.

정통신학은 교회의 표준과 신앙적인 기준을 제공하여 주며, 신사도운동은 이러한 표준과 기준에 벗어나 있다. 신사도운동이 자신들을 사도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계시와 예언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며, 나아가서는 정통신학 자체를 부정함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의 앞장에서 나는 와그너 리더쉽연구소에서 필수과목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나는 조직신학을 과목에 포함시킨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현재 사역을 하고 있는 사도적인 성향의 학생들에게 이 과목은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이 전통적인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생각도 하기 어려운 일임을 나는 안다. 학문적인 신학훈련을 받지도 않은 학생에게 어떻게 졸업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옛 가죽부대의 신학교에서는 조직신학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졸업을 위한 필수과목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76-177)


이단들의 교리를 포함하여 개방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섭리까지 부정한다.


열린신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 신학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창조물과의 관계를 설정하실 때, 인간의 삶을 미리 정하거나 미리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정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우될 수 있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행하는 많은 일들은 역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서의 변화, 188)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의 삶 밖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서 수행되고 있지 않습니다.(기도의 기술, 케네스 헤긴, 12)


피터 와그너는 노골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해서 조정을 하여야 하며, 단일신론자를 인정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풀러신학교 교수 심사에서 만약 우리의 전문적인 조직신학자들이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의 표현을 좀 조정한다면 지상위임 명령을 앞당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하여 일차면접에서 탈락되었는데, 이차면접에서는 삼위일체를 언급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여 통과되었다는 글을 쓰고 있다. (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서의 변화, 197)


나는 1998년에 WLI를 세울 때까지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작성할 일이 없었다. 그 때에 이르러 나는 신사도개혁운동의 특징이 무거운 교리적 짐에서 가벼운 짐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단일신론자들을 제외시키고 싶지 않았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서의 변화, 198)


초대형교회의 J목사가 자신의 친구라고 극찬하며 소개하는 소위 쓰러트림의 대가라고 하는 베니 힌의 신론에 대한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신격의 각 하나님이 각각 영과 혼과 영적인 육체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신격의 각 하나님이 각각 삼위를 갖고 있어, 모두 합하면 “9의 신격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죽어 사단의 본성과 같이 되었다가 지옥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작은 메시야들이고 작은 신들이라고 한다. (박영호, 빈야드운동 평가, 59)


베니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라는 카셋트테이프 시리즈물에서 자신이 예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곧 그리스도이다. 내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주장까지 한다. (박영호, 빈야드운동 평가, 61)


즉 그들이 말하는 개방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적인 섭리를 부정하며, 모든 이단교리까지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새로운 신앙의 기준이 자칭 사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터와그너를 비롯한 신사도운동은 기독교를 사탄이며 종교의 영이라고 부른다. 신사도운동의 신학적 성향은 말로는 개방신학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단교리만 인정하고 수용할 뿐 정통신학에 대해서 개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통신학 체제 자체를 종교의 영이라고 비방하며, 그들의 목적은 기독교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종교의 영에 대한 나의 가정이 옳다면 종교의 영은 분명히 신학교육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해진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56)


우리는 제2의 사도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 포도주가 옛 포도주보다 더 좋은 것임을 믿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새로운 가죽 부대들을 연이어 만들어 오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가죽부대로 들어왔다. 이것을 나는 제2의 사도사대라고 부른다.(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쉐키나, 피터와그너, 18)


신사도운동이 자신을 새 포도주라고 하며, 기독교를 옛 포도주라고 말함에 있어서, 신사도운동으로 바꾸지 않기 위하여 종교의 영을 보내는 사탄의 나라는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제 사도들이 제자리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사탄의 나라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현 상태를 우지하기 위하여 종교의 영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떤 믿는 자들에게는 사탄의 나라를 묵인하고 지나가도록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2의 사도시대에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아니다. (같은책, 144)


종교의 영을 간략히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의 영은 종교적 수단을 사용하여 변화를 막고 현상을 유지하는 일을 맡은 사탄의 사자이다(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21)


결과적으로 그들은 종교의 영이며 사탄의 사자인 기독교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체제와 신학과 모든 것을 뒤짚어 엎고 신사도운동으로 바꾸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적인 예수의 자리에 사도가 앉겠다는 것이고, 기독교의 목사 위에 사도가 영적인 아버지로 군림하며, 2000년간 이단들과 싸우면서 정립된 정통신학을 모두 부정하겠다는 것이며, 기록된 성경 대신에 소위 사도와 선지자들의 계시와 예언으로 지상천국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것이다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유치하고 난잡스러운 쓰러짐과 짐승소리와 웃음의 무질서로 바꾸자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신사도운동 목사들 중에서 적지 않은 유명인사들이 성범죄와 알코올, 마약중독과 재정적인 횡령과 비리 문제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하여 주고 있다. 성경은 종교를 빌미로 이익의 재료로 악용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