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 (대부흥과 대추수)
이인규
신사도운동은 요엘서를 인용하여 종말적으로 성령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대추수’ 혹은 ‘대부흥‘이라고 한다. 그들은 욜 2:28의 성령강림이 오순절에 부분적으로만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며, 욜 2:23의 이른비와 늦은비에 대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장래 종말을 앞두고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대추수와 대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성경해석은 이단들이 성경을 인용하는 것과 똑같이 알레고리(풍유)적이며, 부분적이며, 억지 짜맞추기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1. 요엘의 오순절 성취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욜 2:28-32)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 요엘서를 인용하여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6~21).
(1) 성경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행 2:16에 대한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요엘선지자를 시켜서 말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번역하고 있다.
[개역성경]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공동번역]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KJV] But this is that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
[NIV] No, this is what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
즉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경의 표현 그대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요엘의 성취가 오순절에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성경에도 그러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아이합(IHOP)의 마이크 비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엘이 예언한 성령 부으심에 대한 약속은 베드로의 때에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요엘서 2장과 사도행전2장의 확연한 차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엘이 예언한 것의 충만한 분량은 베드로의 때에 일부분만이 성취되었을 뿐,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마이크 비클, 요엘서, 149쪽)
(2) 자녀, 젊은이, 늙은이, 남종, 여종: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신사도운동은 “자녀들이 예언을 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지 않았으므로 아직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구약 요엘서의 성경구절을 인용한 것이 잘못이라는 뜻인가?
성경본문에서 말하는 ‘자녀, 젊은이, 늙은이, 남종, 여종’은 어느 특정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 즉 모든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적인 표현 방법이다. 만약 그런 해석을 한다면 과연 늙은이만 꿈을 꾸게 되며 젊은이들만 환상을 보는가? 과연 남종과 여종들만이 성령을 받게 되는가?
이와 같은 히브리적 강조 표현이 나타난 성경적인 근거는 출애굽기 4계명이다. 4계명은 아들과 딸, 남종이나 여종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만인이 모두 안식일을 지키라는 표현으로서, 육축과 객(손님)까지 언급한 것이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10)
(3) 말세에 :
신사도운동은 성경 본문에 ‘말세에’ 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이 요엘의 예언은 종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오순절 사건이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으며, 교회사 중간이 아니라 종말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무지에서 오는 주장이다.
이 ‘말세에’라는 단어는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단어는 ‘끝, 마지막’이라는 뜻도 있지만, 현재 시간을 기준으로 ‘나중, 뒤’라는 의미도 있다. 아래 성경의 구절은, ‘에스카토스’라는 단어가 ‘나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성경적인 증거이다. 첫째로 ‘나중’이라는 단어적인 의미는 시간적인 ‘뒤’를 뜻한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에스카토스)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에스카토스)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또한 ‘에스카토스’는 마지막 종말적인 말세가 아니라, 신약 전체의 시대, 즉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넓은 기간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경우의 예는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스카토스)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스카토스)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20).
위 성경구절의 ‘말세’는 종말이 아니라 예수의 초림 시간을 말한다.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성경해석을 부분적으로만 하거나 문자적으로 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참고로 주석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호크마 주석)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욜 3:1)이는 ‘이후“(아하 레이 켄)로, 70인역(LXX; 욜 3:1)에는 ‘이(일)후‘(메타 타우타)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2:2, 미4:1).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톰슨주석)
말세에: 문자적으로 단순히 ‘이후에’라는 뜻인데, 구약선지자들은 ‘메시야 시대’를 가르켜 이 말을 사용하였다(미1:2). 기독교 사회에서 이 말은 보다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전 기간”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였다(딤후3:1, 히1:2)
성경에서는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을 종종 ‘말세’로 표현하는데, 성경은 상당한 간격의 시간을 성경은 하나의 사건으로 섞어 함께 설명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심판, 재림을 한 신약시대로 표현하였으며 요엘 2:28에서는 ‘그 후에’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지만, 구약에서도 ‘말일’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종말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사 2:2).
(4)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
마이크 비클은 요엘서에 기록된 피와 불과 연기기둥에 대한 내용을 문제삼으며 ‘크고 두려운 날’이므로 마지막 때라고 말한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0-31)
그러나 그러한 단어로 요엘서의 성취가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비논리적이다. 만약 사도행전에서 요엘서가 성취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요엘서의 본문을 인용하지 않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19-20)
앞에서 설명한 ‘말일’과 같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도 반드시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성경적인 증거로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5)
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보낸다는 엘리야의 예언이 과연 언제 이루어졌는가? 말라기서의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세레요한이 엘리야로서 온 것은 예수님의 초림보다 더 앞 시간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12-13)
말라기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는 예수의 초림 이전을 뜻한다. 말라기에서 엘리야에 대한 예언은 예수의 초림 직전 세례요한이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일, 마지막 때’는 모두 초림과 재림을 하나로 연결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특이한 점은 요엘서에는 ‘말세에’라는 단어가 없으며, ‘그 후에’와 ‘그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오히려 사도행전에서는 ‘말세에’라고 기록한 것이다. 즉 이것은 사도행전2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세의 성취로 말한 것이다.
“그 후에(afterwards)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in those days)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28-2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in the last days)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이 ‘마지막, 말세’라는 단어에 대해서 신학자 조지래드는 예언적 생략법(Fore-shortening)이라는 견해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지자들은 연대에는 관심이 없었고 미래는 언제나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섞어 한 캔버스에 그렸다. 성경의 예언들은 삼차원이 아니라 이차원이며 높이와 넓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먼 사건도 임박이라는 투명함을 통하여 보았다. 초대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산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을 기대하며 사는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 성경적 예언의 본질인 것도 사실이다.”
(5) 만민 :
또 마이크 비클은 요엘서에서 ‘만민’에게 부어준다고 했는데 오순절에는 120명의 유대인과 그 날 구원받은 3,000명에게 지역적으로 부어졌을 뿐이기 때문에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큰믿음교회 변승우목사도 동일하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전해졌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만인에게 성령이 임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신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베드로가 이 날 그 사건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3:19)고 설교를 한 것을 보아도, 오순절에만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결국 신사도운동 목사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있다는 것을 짜맞추기 위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성경에 예언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2. 늦은 비와 이른 비
아이합과 신사도운동 단체에서는 요엘서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성령강림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른 비’가 오순절의 성령 사건이었고, ‘늦은 비’는 종말적으로 다시 오는 자신들을 통한 대부흥과 대추수이며, 아직 오지 않은 예언된 종말적인 성령강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40년대의 이단집단이었던 ‘늦은비운동’의 주장이었으며, 현재도 신사도운동과 아이합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엉터리 해석이다.
이러한 ‘늦은 비’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성령으로 비유한 주장이 안식교 엘렌화잇의 주장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즉 늦은비에 대한 주장이 바로 이단들로부터 승계되었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엘렌 화잇도, 스웨덴 보그도, 토마스 주남도, 밥 존스도 천국을 자주 들락거렸다는 주장을 하였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므로 살아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면 자신을 신령한 존재로 신격화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천국 지옥을 갖다왔다고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체험한 천국 지옥은 모두 다르며, 성경과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즉 늦은비와 이른비를 성령부음으로 해석한 주장은 늦은비 운동의 핵심적인 견해이었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 강림을 늦은비나 이른비로 비유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최근에도 아이합과 신사도운동들이 주장하는 용어는 “종말적 대추수와 대부흥”이다. 요엘서의 성경본문을 살펴보면, 본문을 성령강림으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요엘서 본문은 오히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전과 동일하다는 뜻으로서, 본문은 ‘계절에 따라 적절하게 내려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내용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성경본문에서 ‘이른 비’를 오순절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없으며, ‘늦은 비’를 종말적인 성령강림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요엘 본문은 신 11:4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신 11:14)
웃지 못할 일이 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오히려 ‘늦은 비’가 봄에 내리는 비이며, ‘이른 비’가 겨울에 내리는 비라는 사실을 신사도운동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성경해석은 자신들의 주장을 짜맞추기 위한 인위적인 해석을 하였지만, 다른 번역 성경은 오히려 이른 비를 가을비로, 늦은 비를 봄비로 해석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사전을 참고하면 ‘늦은 비’를 뜻하는 ‘말코쉬’라는 히브리어는 오히려 3~4월에 내리는 ‘봄비’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성경으로 볼 때에는 유대 지역에서는 오히려 ‘늦은 비’가 오순절 즈음에 내리는 봄비를 뜻한다.
히브리어 사전과 호크마주석을 살펴보자.
(디럭스 바이블: 히브리어 사전)
말코쉬 : 봄 비, 상징적으로 ‘유창함‘, 늦은비 – 늦은 비, 봄비, 팔레스타인의 곡물을 성장시키는 3-4월의 비
(호크마주석성경)
‘이른 비‘인 ‘모레‘는 ‘가을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10, 11월에 걸쳐 내리는데, 땅을 부드럽게 하여 경작하기 좋고 싹을 돋우기에 좋다. 또한, ‘늦은 비‘인 ‘말코쉬‘는 ‘봄비‘로 3, 4월에 걸쳐 내린다. 이 비는 추수를 앞두고 내리므로 알곡을 알차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런 비가 적당한 때에 내리지 않으면, 이스라엘 농부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신 11:13-17). 한편, 이런 비는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하곤 하였다(렘 5:2)
요엘 2:23의 말씀을 여러 번역본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늦은 비’를 ‘봄비’로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 시온의 자녀들아, 야훼 너희 하느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 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시리니
[표준새번역]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로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주셨다.
[NIV] Be glad, O people of Zion, rejoice in the LORD your God, for he has given you the autumn rains in righteousness. He sends you abundant showers, both autumn and spring rains, as before.
3. 신부운동
신사도운동은 유난히 ‘신부’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어느 단체가 ‘신부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신사도운동이라고 생각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신부라는 용어가 기독교의 용어와 같을까? 신부운동을 주장하는 단체에서 사용하는 ‘신부운동’은 두가지의 위험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임박한 시한부종말론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둘째는 대추수와 동일한 뜻이며 배타적인 견해로서 신사도운동을 하는 자신들만이 신부가 된다는 주장이다. 간혹 신비적인 신인합일적인 연합의 개념으로 주장하는 곳도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부라는 용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드러난다. 열처녀 모두가 그리스도인인데 그 중의 다섯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 소위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성령체험을 지지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령체험을 한 신사도운동의 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기름을 상징적으로, 쓰러지고 넘어지며 입신을 하고 진동을 체험하며, 금가루와 금이빨이 나타나는 신사도운동의 성령운동으로 비유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들의 성경해석은 이단들과 비슷하다.
성경의 열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들러리를 말한다. 그들은 신부가 아니라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들러리 처녀인 것이다. 만약 기름을 성령체험 소위 기름부음이라고 직접 해석한다면 다섯처녀는 기름장사에게 성령체험을 구입하기 위하여 갔을까?
우리가 본문에서 잊으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 혼인잔치에 참여한 다섯처녀는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다섯처녀도 분명히 기름은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랑이 늦게 왔기 때문에(더디 올새) 그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기름을 성령체험이나 기름부음으로 단정한다면, 다섯처녀도 성령체험과 기름부음에 참여하였으나 재림이 늦어짐으로 인하여 부족한 것이 되어버리므로 성경해석에서 이상한 오류가 된다.
본문의 초점은 열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무엇인가 혹은 신부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간과하면 안되는 점은 열처녀들이 신부도 아니었으며 들러리 처녀로서, 본문에서 혼인잔치는 구원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이 본문의 교훈은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교훈이 그 본질적인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열처녀는 모두 졸았기 때문이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신랑이 늦게 온 것에 기인한다. 즉 본문은 예수의 재림이 늦게 오더라도 항상 준비를 하라는 교훈이 가장 중요한 멧세지가 된다.
성경에서 자주 비유되는 ‘어린양의 신부’는 무엇을 의미할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자’로 교회를 ‘아내’로 비유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 즉 에클레시아(교회)가 곧 신부로 표현된 것이며, 그래서 성경은 변절자나 배교자를 간음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단들의 성경해석적인 특징은 항상 성경의 보편적인 단어를 자신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시고, 또한 신랑이 되신다. 이러한 표현은 교회와 예수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비유적인 상징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도들을 처녀로, 남편을 그리스도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이것이 과연 신약에서만 표현된 내용일까?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남편,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54: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
성경적인 ‘신부’의 의미는 ‘믿음의 성도’를 뜻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신부운동의 개념은 오순절의 대추수와 같이 그들만이 선택된다는 배타적인 견해에서 비롯된다. 이단들은 항상 종말적으로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여 왔기 때문이다. 대추수, 늦은비등의 용어는 그들이 성경을 짜맞추기로 조작한 것일 뿐이다.
과연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신부운동이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유래가 무엇일까? 신사도운동의 유래가 되는 늦은비운동의 윌리엄 브랜넘은 통일교와 같이 하와가 사탄과 섹스를 하여 가인의 후예가 나타났다고 가르쳤다.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 백과사전’은 브랜넘의 새로운 계시를 이렇게 요약한다. 통일교와 같은 성적타락 모티브 사상인데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소위 신부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브는 뱀과 성적관계를 맺는 죄악도 저질렀다. 어떤 사람은 뱀의 씨앗에서 출생하여 지옥에 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 운명이 영원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씨앗, 즉 브랜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행크해너그라프, 257-258쪽)
결론적으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대추수와 신부운동이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종말이 가까워졌는데, 자신들의 신사도운동의 교회에 와야만 성경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어지며, 오직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